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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옛 담, 그리다 / 윤승원

부흐고비 2021. 11. 1. 09:16

옛 담은 풍경을 안고 풍경은 옛 담을 안는다. 운곡서원 담장 위에 팔랑팔랑 내려앉는 은행잎은 노랑나비 군무 같다. 저렇게 많은 나비들의 춤사위라니. 기왓장 위의 이끼는 세월을 덧입었다. 은행나무가 담장을 넘보듯 나도 안쪽을 바라본다. 넓은 마당에 연이은 강당에선 앳된 도령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가을은 운곡서원에서 더 깊어진다.

담장이라면 대릉원 담장을 빼놓을 수 없다. 봉긋이 솟은 여인의 가슴을 닮은 곡선의 우아함은 보면 볼수록 푸근하다. 덕수궁 돌담이 살아있는 궁궐을 안고 있다면 대릉원 돌담은 사후 세계를 껴안고 있어 서로 대비된다. 대릉원 돌담길은 벚꽃 흐드러지게 핀 봄에 가장 아름답고 덕수궁 돌담길은 은행나무 단풍이 고운 가을을 최고로 친다. 이렇듯 담은 주변풍경과 어울려 계절에 따라 그 정취를 달리한다.

돌담길은 왜 연인들의 길이라고들 할까? 돌담이 있는 길을 걸으면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연애시절 누군들 사랑하는 사람과 걸어보지 않았을까. 휘어지는 담장과 그 담장 아래 보도블록과 꽃잎과 낙엽과, 눈이 내리면 서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아흔아홉 칸 만석꾼인 송소고택의 담장은 좀 특별하다.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정갈한 꽃담 처마아래 수키와 두 장을 맞댄 동그랗고 검은 구멍이 세 쌍이다. 사랑채에서 볼 때는 구멍이 여섯 개이지만 안채에선 두 개의 구멍이 하나로 모아져 세 개로 보인다. 사랑채에 손님이 들면 담장에 난 그것을 통해 손님을 확인하고 상을 차려냈다고 한다. 그걸 구멍담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안채 여인들의 모습이 함부로 사랑채에서 보이지 않게 배려한 헛담도 있다. 담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이지만 또한 안과 밖을 끊임없이 소통케 하는 기능도 한다는 것을 송소고택에서 알게 되었다.

구례 산수유마을의 돌담은 노다지담이다. 꽃이 피는 봄이면 돌담사이 금가루 같은 꽃잎이 떨어져 쌓인다. 사람들은 황금꽃잎 같은 그걸 바라보며 마음이 풍요로워 진다. 어느 시인은 황금연못을 노래했지만 나는 황금담을 노래하고 싶다. 돌담 옆을 끼고 흐르는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산수유꽃잎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노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한 폭의 수채화를 바라보면 세상의 고단함 같은 건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옛 집은 담이 있지만 외부와 소통이 되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주고받는 것이 많았다. 팥죽이나 호박전을 건네기도 하고, 누구네 아들 장가간다는 소식도 담을 통해 들었다. 처녀 총각의 연애편지도 담장의 기와 아래에 숨겨두고 오갔다. 그러고 보면 옛 담은 단절을 위한 경계이기 보다는 소통을 위한 경계이다.

낙산사 담장은 안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아졌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쌓으면서 위 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해 넣었다. 흙 담에 박힌 화강석이 밤하늘에 뜬 별 같다. 스님은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한다면서 담장이 아니라 원장이라고 했다. 안쪽에서는 낮아 보이는 담이 밖에서 볼 때는 엄청 높다. 그건 아마도 속세의 것들이 담장을 넘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수도자들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절 안에서 보는 담장은 낮아서 그 위로 바다가 출렁이고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담장 자체만으로 하나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낙산사 담장만의 특징이리라. 나는 그걸 별담이라고 지칭해본다.

제주도 돌담은 투박하지만 그 소박함 때문에 더욱 정감이 간다. 얼기설기 얽혀 있어 엉성해 보이지만 어떤 강풍에도 끄떡없다. 돌과 돌 사이로 난 구멍이 완충작용을 하여 아무리 거센 바람이라 해도 버텨내는 것이다. 돌담은 집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목장과 무덤도 지켜준다. 목장의 돌담은 말을 방목하는 경계의 역할을 하고 무덤의 돌담은 뭇 짐승들의 폐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무덤을 둘러싼 돌담은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추상화 같아 태고의 어떤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나이가 들면 전원주택에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시사철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햇살이 비치는 툇마루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독대며 담벼락에 피어나는 야생화와 마당에 소복이 쌓이는 흰 눈까지. 새소리며 바람소리,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울까. 그것들은 콘크리트로 사방이 막혀버린 아파트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지 그 삶을 실천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주택에 살게 되면 남천으로 담을 만들고 싶다. 단풍이 들고 빨간 열매가 열리는 담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사이사이에는 쥐똥나무를 심어 꽃향기에 취하고 새소리에 귀를 즐기고 싶다. 초록 이끼가 낀 돌담에다 마삭줄을 올리면 또 어떨까? 어릴 적 나는 새들이 재잘대고 꽃향기가 온 동네를 취하게 하던 탱자나무 담을 좋아했다. 익은 탱자를 따기 위해 나무 아래서 돌을 던지던 기억이 새롭다. 후두둑 떨어지는 그것들을 줍다가 주인에게 자주 들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많던 탱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래도 나는 초가로 덮어씌운 낮고 소박한 우리 집 담장이 좋았다. 거기엔 흙담에 박힌 돌처럼 기억 속 깊이 각인 된 추억들이 있다. 저녁이면 할머니가 담장너머로 선머슴아처럼 뛰노는 나를 불렀다. 마당 귀퉁이엔 수십 년 된 감나무가 있어 감이 익을 땐 담장 위로 올라갔다 엄마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담장을 덮은 이엉에 눈이 내리면 사발에다 퍼 담아 사카린을 조금 타서 빙설이라고 먹기도 했다. 지금처럼 대기가 오염된 상황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담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담은 차가운 콘크리트 벽 속에 꼭꼭 숨어버렸고 담보다 더 높은 담이 우리를 가두어버린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바람과 구름과 햇살이 서로 소통하던 담이 그립다. 담벼락을 따라 채송화며 봉숭아, 해바라기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옛 담 하나 마음의 뜨락에 두르고 싶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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