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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맏이 / 김도현

부흐고비 2021. 11. 12. 08:50

여든여덟 해 동안 묵묵히 그 힘든 자리를 지키신 아버지를 위해 꽃상여를 태워 드렸다. 상여꾼과 문상객이 하나같이 명당 중의 명당에 모셨다고 한다. 그 소리에 부모 잃은 슬픈 마음이 조금은 위안된다. 그래도 상여 나갈 때와 달구질할 때 앞소리꾼의 청승궂은 소리는 흡사 아버지의 생전 한인 듯하여 가슴 한구석이 휑하다. 달구질의 한 켜가 오를 때마다 앞소리꾼이 이 아들 저 딸을 부른다. 장례식장에서도 교대로 한 사람씩 빈소를 지키라 했거늘, 문상객 술자리에만 머물든 동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아버지 새집에 켜가 바뀌는지 모른다. 몇 번을 부르고 찾아서 아버지 곁으로 보낸다. 봉분 가운데 꽂힌 막대기에 이어진 새끼줄에 봉투가 늘어난 재미에 앞소리꾼이 또다시 백관을 찾는다. 작은아버지 둘이 손사래 치며 거절한다. 조카를 찾는다. 모른 체하고 꽁무니를 뺀다. 노잣돈봉투를 만들어 손에 드렸더니 그제야 마지못해 봉분으로 올라간다.

아버지는 몇 마지기 안 되는 땅뙈기에 농사를 지으며 말없이 맏이의 자리를 지켰다. 환갑에 중풍을 얻은 할아버지를 위해 다섯 해 동안 아무도 모르게 대소변 받아가며 아들로서 갖은 병수발을 견디셨다. 병원도 멀고, 약도 귀하던 시절이라 순전히 집에서 간병을 했지만, 아래 형제들은 그 고충을 몰랐다.

형은 대처로 나간 아우들의 출세를 위해서는 본인의 한 몸 부서지는 줄 모르고 밤을 낮 삼았다. 동생이 장만한 첩첩산중 지리산 자락 황무지에 움막을 치고 들어가 해가 바뀌는 줄도 모르고 개간을 했다. 물 한 모금으로 새참을 때워가며 풀 한 포기, 돌멩이 한 개 없는 옥토로 만들었다. 열 손톱은 문드러졌고, 지문은 사라졌으며, 손가락 마디마디는 갈라지고 비틀어졌다. 그래도 아우의 퇴직 후 보금자리라는 일념에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걸 몰랐다. 과수목을 심어 과일이 열릴 즈음 기뻐하는 동생을 보고 형은 숨어서 눈시울을 적셨다.

문중의 대소사에는 언제나 동생 몫까지 책임지는 맏이의 역할을 다 해 왔지만, 동생들 반응은 별로 시큰둥했다. 조상 산소에 설단을 하고, 재실을 짓고 문중 대동보를 만들 때도 그랬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형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형은 가문을 대표하는 장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제삿날 고향 집을 다녀갈 때도 그랬다. 형은 모처럼 형제끼리 만나 이런저런 살아온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저녁 늦게 도착한 아우는 어린 시절 친구 만나러 나갔다가 자시(子時)가 다 되어 들어와서 절만 두어 번 하고 가방을 챙겼다.

맏이를 남들은 하늘이 내어준 자리라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뿔뿔이 흩어진 자식들이 고향의 부모를 찾을 때만 해도 많은 차이가 있다. 맏이는 도착과 동시,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해야 할 일을 찾는다. 낡은 전기 및 냉난방시설을 확인한다. 허리 꼬부라진 부모 동선의 불편함 해소를 위해 눈에 쌍안경을 쓰고 구석구석 살핀다. 쥐구멍도 찾아 막아야 하고, 구석구석 거미줄도 걷어내야 한다. 마루 밑 묵은 낙엽도 쓸어내고 제비똥도 닦아야 한다. 냉장고 안도 살피고, 장독에도 가봐야 한다. 동생들과는 사뭇 다르다. 동생들은 가져온 먹거리와 선물 보따리를 먼저 펼친다. 술판이 벌어지고 웃음소리와 무용담이 담을 넘는다.

맏이의 자리는 무거운 자리다. 지차(之次)들의 대화를 듣기는 해도 섣불리 말을 할 수 없는 무거운 자리다. 함부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거나 결론을 내렸다간 뒤에 큰 화를 입을 수 있는 무한 책임의 자리다. 어느 하나가 잘못을 해도 나무랄 수 없는 자리다. 동생의 자리는 다녀가는 자리이지만 맏이의 자리는 지키는 자리다.

책임의 몫은 모두 가져도 권리 행사의 기회는 언제나 같아야 하는 불공평한 자리다. 일의 시작에서는 항상 맨 앞에 서지만 마무리 때는 한쪽 모서리에서 눈치만 봐야 하는 그런 자리다. 아버지는 맏이로서 그런 자리를 지키고 살다가 가셨다.

난데없는 돌개바람이 일어 봉분을 휘감더니 옆에 둔 빈 꽃상여를 멀리 날려 보낸다. 이어 하늘에 먹구름이 모인다. 또 한차례 바람이 일어 용오름을 만들어 낸다. 서쪽 하늘 방긋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더니 먹구름이 서서히 오색구름으로 변하고 상여꾼과 문상객들이 일시에 환호를 보낸다. 희한한 하늘의 조화 앞에 모두가 난리다.

둘레석 위에 발 디딜 자리가 없어질 때야 달구질이 마무리되고, 잔디가 입혀진다. 화강암 둘레석 위에 푸른 잔디가 덮어져서 조화를 잘 이룬다.

상석 위에 제물이 오르고 돗자리가 깔린다. 흩어졌던 상제와 백관이 모인다. 상주가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다. 이어 상제와 백관들이 돌아가며 잔을 올린다. 그런데 있어야 할 몇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갈 길이 멀고 바쁘더라도 평토제까지는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김도현 프로필 : 2007년 『한비문학 신인상 에세이문학』 겨울호 추천 완료. 한국문인협회(수필분과 의성지부 부회장), 한국문화선양위원, 수필문예회, 에세이문학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대구지부장, 토벽 회원, 전통예절 전도사. 2007년 금오대상, 2007년 한비문학상, 2009년 한비작가대상, 2009년 문경오미자체험수기 대상, 2019년 한국 효행상. 저서 《나도 이제 휠체어를 밀고 싶다》 《잠시 뒤돌아보며》(공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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