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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백당과 향나무 / 심점련

by 부흐고비 2021. 11. 21.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골짜기에 기댄 반촌이다. 하늘과 맞닿은 듯 풀벌레 소리만 이따금씩 들릴 뿐 인적 하나 없다. 숨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뜰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마당에는 비단풀이 발갛게 피었다.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중요민속자료 제23호)을 찾았다. 송첨종택은 양민공 손소가 세조 5년(1459년)에 지은 월성 손 씨의 종가이며 우제 손중돈 선생의 생가이다. 동방오현 중의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 선생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숨결이 넉넉하게 다가온다. 고택의 힘이 이런 것인가. 인걸은 가고 없어도 인적의 숨결은 살아있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으로 눈길이 간다. ‘書百堂’ 여기서 무슨 글을 백 번이나 쓰라는 것일까. 서백당을 입속으로 궁굴리며 고즈넉한 분위기의 종가마루 축담에 앉았다. 참을 인(忍)자를 써본다. 마음 심(心)에 칼날 도(刃)자가 합쳐진 글자, 마음이 휘청하더니 정신이 번쩍 든다. 서백당에만 해당되는 글일까. 거기도 저기도 아닌 내 마음 가운데 칼이 있는 형상이다. 칼을 가슴 위에 두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서백당 한편에는 내외담이 얌전하게 쳐져있다. 내외담 안에도 감당해야 할 일들은 여간치 않았으리라. 끊임없는 손 접대이며 거느려야 하는 식솔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예전에는 육촌이 한 정지를 밟는 것은 허다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안방마님은 일찌감치 참을 인(忍)을 신고 뚜벅뚜벅 걸었을 것이며 식솔들은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었을 것이다. 정지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참을 인이 숨죽이고 있을까. 그 이유에서인지 예전 정지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었지만 늘 찹찹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늦은 밤,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 내외담 안으로 몸을 숨기고 바깥을 내다본다. 바깥양반은 망건도 벗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조아리며 서백당 마당을 자근자근 밟는다. 또 무슨 걱정이 생긴 것일까. 종손은 너른 종가일로 밤이 늦도록 잠 못 이루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중얼거린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대소사 집안일로 밤은 깊어만 간다.

뜰에 있는 향나무에게 다가간다. “땅을 기는 호박꽃에도 향기가 있거늘 하물며 니는 왜 냄새가 없노.” 향나무가 이제야 입을 연다. 향나무가 되어 향기가 없는 것은 수태하지 못하는 여인의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이라도 하듯 이파리를 사르르 흔든다. 꽃에도 잎에도 향기가 없는 향나무를 왜 여기에다 심었을까. 서백당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화목한 가문을 위하여 이곳에 향나무를 심고 먼 길을 가셨다는 생각이 들자 복잡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백당의 참을 인(忍)과 향나무는 이제 마음으로 만났다. 먼지로 폭신폭신하던 서백당 마당은 참을 인(忍)과 향나무가 친구로 익어가면서 촉촉하게 잦아들었다.

어렸을 적 집집마다 벽에 걸린 액자가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벽장식으로 여겼던 ‘가화만사성’이라는 글자이다. 그 많은 식구에 불평이 먼지같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우리 부모님들은 그런 가정을 꿈꾸며 액자를 걸었다. 가화만사성 하기를 바란다면 참을 인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하리라. 화목한 가정에는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꼭 있더라는 것을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인다.

참을 인(忍)을 다시 본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나쁜 마음을 칼로 잘라야 하는데 자르기도 전에 못된 생각이 먼저 자리 잡고 있다. 나보다 친구가 잘하면 축하하는 마음보다 먼저 나오는 심통, 이것을 풍자해서 나온 말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본심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결국 나를 나타내는 포장기술이 좋았을 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왜 명언인지 어렴풋 알 것 같다.

고택에 고목은 사람과 약속보다 더 실한 약속을 감당하는 것 같다. 지킬 수 없을 때를 생각하며 나무에게 맡기고 시간 속에 사라져간 선진들, 나는 오늘 그 말을 찾는다. 나무 한 그루도 심겨진 이유가 있고 사연이 깃든다는 생각에 이르자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유와 목적이 있으리라 사료된다. 향나무가 처음부터 향기를 발산하는 나무로 태어났다면 이곳에 심겨졌을까. 참을 인과 친구가 되었을까. 살아가노라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

먼저 찢겨져 나간 향나무에 불을 붙인다. 바싹 마른 향나무는 이제야 진한 향기를 토한다. 죽은 나무가 토하는 향기로 죽은 사람의 육신에서 나오는 마지막 악취를 감당하는 나무,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집안의 허물을 덮어주는 향기가 되었다. 인내의 메아리가 아픔의 향기 되어 온 집안에 퍼진다.

향나무 그늘에는 오늘도 비단풀이 나풀거린다.

수상소감

송편을 빚던 중 작은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고 시절 가방 속에 담고 다녔던 빛바랜 시작 노트를 만난 것 같습니다. 대양노트 속에 숨어있던 윤동주 서시며 구르몽의 낙엽 밟는 소리가 되살아납니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동산 나무 그늘에 앉아 시작 노트를 펼쳤던 그 여학생이 회갑을 훌쩍 넘어 수필이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지도해 주신 교수님과 동리반 문우님들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잘 봐주신 대구일보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지지하며 도와준 남편과 두 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하늘을 원고지 삼아 쓰고 또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북 청도 출생 △동리목월문학대상 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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