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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장인수 시인

부흐고비 2021. 11. 25. 09:03

장인수 시인
1968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하였다.
2003년도 시 전문지 《시인세계》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유리창>, <온순한 뿔>, <교실 소리 질러>, <적멸에 앉다>,

<천방지축 똥꼬발랄> 등이 있고 교양서로 <창의적 질문법>이 있다.

서울 중산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꽃 / 장인수
꽃은/ 조폭보다 더 조폭답다/ 전폭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예쁘다/ 불법 폐기물장에도/ 도로 건설 현장에도/ 여지없이 뿌리를 내리고 꽃은 핀다/ 꽃향기는/ 지독하게 살아남아/ 뿌리를 내린다/ 식물의 화려한 생식기인 꽃은/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고 용감하게/ 벌렁,/ 활짝/ 꽃잎을 한껏 벌린다/ 조폭보다 더 조폭 같다/ 포기마다/ 꽃폭이다/ 모든 서식지를 개척하며/ 모험심으로/ 미친 듯이/ 번식에 힘쓰며/ 살고, 살아내고, 살아간다/ 지독하고 징그럽다/ 꽃이 있는 곳에서는/ 곤충들의 교미/ 새와 동물들의 짝짓기/ 산천초목 가득 광란의 현장/ 영성(靈性)의 산천/ 신성불가침의 자연 섭리/ 천부적인 권리/ 폭 안겨서/ 폭 패여서/ 사랑하라, 절규하라, 피어나라, 기도하라/ 꽃은 전폭적으로 아름답다//

되새김질 / 장인수
햇살 좋은 날 강물을 본다/ 무언가를 조용히 꼭꼭 씹고 있다/ 물결의 저 질기고 부드러운 되새김질// 지그시 눈감고 턱과 이빨을 움직이는 강물/ 제 몸으로 들어온 것을 자근자근 씹어서/ 조용히 자기 몸의 내부로 흘리는 혀// ( ( ( ( ((( 波(파)紋(문) ))) ) ) ) )// 조용하지만 수많은 파문꽃이 피어난다/ 저 강물이라는 짐승의 눈부신 하얀 치아/ 질긴 세월도 잘근잘근 씹어서 꿀떡 삼키는 저 짐승//

물갈퀴 / 장인수
새떼들은 수백 번씩 물 속으로 잠수했다/ 잠수하는 새떼 중에는 총각도 있었을 것이다/ 골지고 비릿한 저수지의 자궁을 만졌던가/ 아직 불길 한 번 일지 않았을 자궁을 만졌던가/ 저수지의 내부에는 얼마나 많은 물갈퀴 자국이/ 몸부림치며 찍혔다가 소멸했을 것인가/ 둑길을 길게 걸어나온 물갈퀴는 그의 것이었을까/ 혼자서 하늘로 날아올라가 울음을 우는 물갈퀴/ 저 혼자 저렇게 뜨거워진 울음을 이 지상에서/ 나는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울음 농사 / 장인수
개구리가 울음 농사를 짓고 있다/ 무논 속의 하늘과 구름에게 울음모를 심고 있다/ 무논의 물소리를 마시며 크는 울음모를 심고 있다/ 논바닥은 울음교실, 울음하늘, 울음노래방/ 논바닥은 온통 울음곳간/ 개구리비가 쏟아진다. 판초를 입어야 할 것이다/ 개구리울음속에는혈압을 안정시키고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는/ 음이온의 전자가 쏟아지고 있다/ 나는 어렸을 적 저 울음의 원천이 궁금하여/ 개구리를 돌로 찧고 면도칼로 배를 갈라/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꺼내본 적이 많았다/ 개굴경(經)의 깨알같은 글자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어둠이 함께 울고, 논두렁이 울고, 허공이 울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울음 농사법의 기초도 모르고 있다/ 아내의 저녁 짓는 소리는 어떤 개구리 울음인가/ 동해안의 파도는 어떤 개구리 울음인가/ 열정이란, 울창함이란, 달빛이란 어떤 개구리 울음인가/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울음인가//

울음 곳간 / 장인수
딱따구리는 애벌레를 만나기 위해/ 나무를 쪼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녀석은 순전히 숲의 가장 안쪽 심장부인/ 나무의 자궁에 울음 곳간을 만드는 것이다/ 나이테라는 시간의 둥근 지층에/ 울음 곳간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여름 천둥 번개가/ 계곡에 쏟아 부었던 구름의 울음/ 심지어 양지에 모여 참새처럼 오글거리던 어린 명아주까지/ 이 산 저 산 침묵을 물어다가 저장하기 위해/ 울음 곳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집에도 딱따구리가 살고 있다/ 따다다다다다 따발총을 쏘는 아내의 수다도/ 입 닥치라는 아내의 수다도/ 사실은 제 몸에 울음 곳간이 있기 때문이다//

붕어 / 장인수
저수지 가장자리에/ 두 자에 가까운 대물 붕어가 죽어있다/ 사라진 눈깔엔 검은 구멍이 뚫려있다/ 내장도 사라지고 파닥임도 사라지고 아가미도 사라지고/ 배지느러미 아래 쪽 항문으로 모든 것 다 떠나보내고/ 시체 청소부인 구데기도 모두 떠나보내고/ 비늘 외투만 걸치고 있다/ 살았을 적에는 저수지에서 가장 멋진 옷차림으로 돌아다녔을/ 각각의 비늘속에는 동심원이 선명하다/ 그것은 붕어의 나이테/ 세어보니 붕어는 열 살이었구나/ 물의 진동과 온도를 감지하는 옆줄도 선명하다/ 달 뜬 밤의 능선처럼 아름답게 밑줄이 그어진 측선(側線)/ 붕어가 끝내 비늘외투를 벗지 않는 것은/ 옆줄이라는 마이크로필름만은 결코 버릴 수 없는/ 붕어의 작가정신?//

폭설 / 장인수
하늘의 언어들이 쏟아진다/ 백 리 넘어 도시에 살고 있는 애인에게/ 핸드폰을 쳤다/ 핸드폰에서 파드닥 튀어나간 음파/ 여기는 들판 한가운데야/ 하늘의 언어들이 들판으로 쏟아져 들어 와/ 무차별적이야/ 어떤 차별도 없이 쏟아져/ 하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말// 무색(無色)하구나// 저돌적으로 퍼붓는 하늘의 언어 앞에서/ 사랑한다는 우리의 속삭임은/ 무의미하다 들판을 다 덮어버리고/ 그칠 기미 없이/ 쌓이고 또 퍼붓는 하늘의 적설량 앞에서/ 지상의 모든 언어들은/ 무색(無色)하다//

 

복숭아꽃 / 장인수
복숭아꽃이 송아지를 낳는다/ 양수가 터져 흘러나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꽃잎이 활짝 벌어지면서/ 송아지의 머리가 나왔다/ 연분홍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쿵 송아지가 땅에 떨어졌다/ 저 복숭이 복덩어리 저 복숭이/ 아버지는 송아지를 복숭이라 했다/ 송아지의 주둥이가 천도복숭아를 닮았다/ 눈망울을 꿈뻑 귀를 쫑긋/ 용을 쓰며 비틀거리기를 수십 번/ 드디어 네 발로 벌떡 일어났다/ 만개한 복숭아꽃을 찾더니/ 쭉쭉 젖을 빨기 시작했다/ 젖을 빨아먹은 송아지는/ 우렁차게 영각을 켜더니/ 들판을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렁찬 울음이 흩날리었다/ 어떤 꽃잎은 능선을 넘었다//

온순한 뿔 / 장인수
시골집에는/ 짐승이 뛰놀던 터가 있다/ 평상(平床)에 누워 있으면// 살살 발가락을 핥아대던 짐승/ 초등학교 때 염소를 쳤다/ 다섯 마리가 불어서/ 삼십 마리가 넘은 적이 있다/ 등교할 때 냇둑에 풀어놓았다/ 느닷없이 소나기가 퍼부은 날/ 우루루 학교로 몰려와// 긴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비 그치고 내가 앞장을 서니까/ 염소들이 새까맣게 하교를 했다/ 염소는 수염이 멋있었다/ 암컷도 살짝 수염이 나 있었다/ 사실 염소는 새까맣고/ 주둥이는 툭 튀어나왔고/ 울음은 경운기처럼 털털거리고/ 아무거나 먹어치우고/ 두엄에도 잘 올라가는 천방지축이었다/ 얼룩을 좋아하고/ 뿔도 삐뚤어졌고/ 농작물도 닥치는 대로 뜯어먹고/ 신발 끝도 씹어 먹으며/ 나쁜 짓을 골라서 하는 골목 대장이었다/ 하지만 먼 곳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높은 바위를 잘 타며/ 구름 속 비 냄새를 맡을 줄도 알고/ 꽃도 열심히 따 먹고/ 가시 달린 찔레순도 찔리지 않고 잘 씹어 먹었다/ 무엇보다도 눈썹이 길어/ 눈가에 하늘거리는 멋진 그늘을 가졌고/ 뿔은 온순한 고집이었다/ 염소도 식구였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아버지의 집 / 장인수
우리 집의 대문 앞에서/ 멀뚱멀뚱 대문 안을 들여다본다/ 아버지는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고/ 엄마도 간호를 위해 병원에 있다/ 기척도 없는 빈집에/ 비가 쏟아져서/ 댓돌의 신발에 가득 빗물이 넘치고 있다/ 댓돌의 신발에 가득 넘치도록/ 주룩주룩/ 세로로 된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있다/ 텅 빈 외양간을 토종닭들이 돌아다니며/ 따끈한 달걀을 놓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수탉이 벼슬을 세우고/ 한바탕 긴 울음을 운다//

아버지의 냄새 / 장인수
1941년 신사년 뱀띠 4월 초파일에 태어나신 아버지는 매일 새벽 두 시간 넘게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닌다/ 아침을 먹을 때 고라니, 두더지, 벼 이삭, 콩꽃, 깨꽃, 잠자리 얘기를 하신다./ 12간지와 띠와 24절기와 천문과 만세력을 달달 외우시는데도 하루에도 수백 번 사람, 곡식, 가축, 동식물, 하늘과 대화를 나누고 기력을 살피곤 한다./ 아버지는 24절기와 관련되는 속담을 대부분 다 아는데 '망종芒種 때는 별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온다, 대서大暑 더위에는 염소 뿔도 녹는다, 입추立秋 때는 벼 자라나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등등 이런 속담들을 입에 달고 사신다./ 아버지는 늘 바보처럼 웃는다./ 아버지의 몸은 온통 풀 냄새와 소똥 냄새로 가득했지만 그 비릿한 냄새 사이로 수천 가지의 향긋한 향내 분자를 풍긴다.//

할머니, 귀엽다 / 장인수
일요일 아침 7시 40분/ 녀석들은 벌써 강아지처럼 엉겨 붙었다/ 눈만 뜨면 싸우는 녀석들/ 아내는 참다 참다 드디어 회초리/ 큰 녀석은 여덟 대, 작은 녀석은 다섯 대/ 나잇값 하라며 나이로 눌러버린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장봉도라는 섬이 나오고/ 97살의 김간난 할머니가/ 호미로 육질 좋은 바지락을 캐고 있다/ “내일이 영감님 생신인데/ 바지락으로 밥도 하고 국도 끓이려고.”/ 앞니 몽땅 빠진 잇몸 사이로/ 뒤의 뻘이 들여다보이고/ 왁자한 썰물이 입술 주름 사이로 쭈글쭈글 지나간다/ 누런 콧물 훌쩍이며 벌서고 있는 다섯 살 녀석이/ 앞니 네 개 빠진 입술로 대뜸/ “와! 할무니, 귀엽다.”/ 그 말을 잘못 들은 부엌의 아내가/ 식칼을 든 채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어머, 정말 가엽네.”//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 장인수
아들아/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설령 한두 해에 돌아오기 힘들지라도/ 아들아/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일몰의 긴 그림자를 발갛게 지펴/ 고등어를 굽는 에미가 기다리고 있으마/ 대적광전이/ 너무 쓸쓸해서/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비로자나불처럼/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가는 귀로 들으며/ 새벽 찬 길을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마/ 무소 같은 아들아/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불호령 / 장인수
한 달 만에 집에 갔다./ 빈손으로 갔다./ “한달 만에 집에 오면서 빈손으로 오는 아들놈이 어딨어?”/ 엄마는 천원을 주면서 불호령을 내렸다./ 십리 길 걸어서/ 슈퍼에 가서 약주 세 병 샀다.// 그제서야 엄마는 큰절을 받았다./ 다음 날/ 삼만 원 한 달 용돈과 학비를 받고/ 집을 떠났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 장인수
아침에 꽃을 심고 점심에 독경을 하는 늙은 비구니의 목소리가 비단결 같았다// “독경 소리 끝내주네. 맨날 하는 일이 독경이고 꽃 가꾸는 일일 거야. 남편이 있어 밥을 차려주나, 애들이 있어 쌈닭처럼 다투기라도 하나, 늙은 부모 봉양할 필요도 없고, 워킹맘들처럼 회사에서 치일 일도 없고. 그저 아침저녁 꽃 심고 불경만 줄줄 외우면 되니까 얼마나 편안해.”// 동행했던 팔십 노모가 시샘이 난 듯 투정을 피운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는데,// 그때 똥지게를 짊어진 늙은 비구니가 다가와서 허리를 굽혀 합장을 했다 투덜대던 노모가 비구니보다 더 허리를 굽히며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정말로 웃을 뻔했다//

 

반야심경처럼 빛나는 별 / 장인수
지상에 온 별은/ 반야심경처럼 반짝인다/ 그러다가 개구리로 변해서/ 무논에서 미친 듯 운다/ 사랑의 열(熱)이 달아오르면/ 수천억 송이 연꽃을 피운다/ 버스 안에서/ 근엄한 스님께서 꾸벅꾸벅 조신다/ 핸드폰이 울린다/ 반야심경 벨이 울린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스님이 벌떡 눈을 뜨더니/ 핸드폰을 받는다/ “엄마!”/ 오십은 되어 보이는 스님께서/ 갑자기 애기 목소리로 엄마 전화를 받는다/ 오늘은 어버이날이구나/ “지금 가고 있어요.”/ 오늘 밤/ 지상에 반야심경이 와서/ 죽을 힘으로 반짝이려나//

아버지, 제 손맛 어때요? / 장인수
민수 녀석이/ 볼따귀가 벌개서 등교했다.// “아버지가 또 때렸냐?”/ “손맛이 맵냐?”/ 녀석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김치찌개 끓여라.”/ 녀석에게 만 원을 건넨다./ 한사코 받지 않는다.// “나중에 이자 쳐서 갚아라./ 김치찌개 끓여서 아버지 술 한 잔 따라드려라./ 아버지, 제 손맛 어때요?”/ 라고 꼭 여쭤봐라.//

어느 짐승의 시간 / 장인수
와인을 사 들고 불쑥/ 형 집에 갔더니/ 일곱 마리의 강아지들이 졸래졸래 뛰어나와/ 손가락을 핥고, 빨고, 야단이었다/ 엎어진 개밥그릇 위에 걸터앉은 나는/ 일곱 마리 혀의 애정 행각에 맡겨져/ 짐승의 어린 시간을 섞고 있었다/ 오늘은 형의 생일/ 어둠이 가장 사소한 영역에/ 소리 없이 스며들며/ 노을을 흩뿌릴 때까지/ 형은 소식이 없고/ 일곱 마리 애정은/ 신발끈을 고기처럼 물어뜯는데/ 노을의 붉은 혀는/ 조용히 마당의 테두리를 핥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뚫는다 / 장인수
수십 킬로미터 초원을 가르며 달려 온 누 떼/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망설인다 망설이다가 서성거리다가 입김을 품다가/ 발가락에 힘을 준다 강기슭의 모래진흙을 뭉개며/ 달린다 득실거리는 악어 떼의 아가리로 달린다/ 몇 마리 누의 몸이 찢기며 수만 송이 붉은 꽃잎이 핀다/ 두두두두 다투어 강물을 건너며 꽃이 되는 누 떼/ 붉은 꽃을 밟고, 악어를 밟고, 물보라를 밟고/ 물의 살과 뼈를 밟고 두두두두두 수면을 달린다/ 몇 마리 물 아래로 잠긴 녀석의 최후를 밟고/ 집단의 힘으로 앞탄력이 뒤탄력을 이끌며/ 물살의 멱살이 되고, 물보라가 되어 달린다//

보석 / 장인수
2009년 충북 진천/ 용대 마을의 장충남씨 댁 툇마루/ 햇살 고운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의 성기를 정성스럽게 핥고 있다/ 두 다리를 좌우로 쩍 벌리고 척추를 둥글게 오므리고/ 혓바닥이 마르고 닳도록 자신의 음부를 핥고 있다/ 대청소를 하듯 점점 선명해지며 반짝이는 음부/ 제 몸의 정전기를 없애기 위해 핥는다는 얘기도 있지만/ 눈동자보다 더 깊이 반짝이는 음부/ 보석 같은 음부/ 72살의 장충남씨는/ 씨감자를 텃밭에 심느라 여염이 없다//

정곡 / 장인수
저수지에 돌을 던진다/ 풍덩/ 파르르 열리며/ 수면에 동그란 과녁이 생긴다/ 과녁의 정곡(正鵠)에 깊이 박히는 돌/ 신기하다/ 무언가를 던지면/ 순간 순식간/ 자신에게 닿는 무언가의 존재에게/ 저수지는 중심(中心)을 내어준다// 명중/ 잠시 후 흔적 없이/ 과녁을 소멸시키는 저수지// 저수지는/ 자신의 중심을 뚫고 들어온 존재들을/ 고요와 격랑의 아득한 틈으로/ 밑바닥에 흐르는 끈적한 시간 속으로/ 질을 지나 자궁 속으로/ 착(着) 착착/ 들어 앉힌다//

하늘 밭 / 장인수
아버지는 하늘도 밭이라고 한다/ 수십만 마리 새 떼가 날아올라/ 날개가 새를 끌어올려 파닥이며/ 솟구치고 내리꽂히며 서로를 통과하면서/ 하늘 밭을 간다./ 밭갈이하는 새 떼를 한참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하늘 밭에 수많은 발자국을 쿡쿡 심었는데/ 분명 파종을 했는데/ 왜 새 발자국 싹이 안 트지?/ 어디에 심었지?"/ 하늘 밭을 몽땅 갈아엎을 듯이/ 뚫어져라 바라보시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묘유(妙有)하구나.”//

저수지 / 장인수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 생리를 안 해/ 아내는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나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서/ 봄가뭄이 자심하다고 넌지시 농담을 붙이지만/ 속으로는 자못 피가 마르며 목이 탄다// 저번에는 철철 피가 쏟아져서/ 하루에 열 번 생리대를 갈았다고 하길래/ 내가 몇 리터 헌혈해야 하는 것이냐고 또 농담을 붙였는데/ 이제는 피가 멎는다는 것의 두려움/ 도대체 아내의 몸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 많은 강물과 노을의 수위// 피를 토하며 내게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환하게 불을 켜고 들여다볼 수도 없는/ 아내의 몸 속 어두운 저수지/ 모든 게 남편인 내 잘못인 것만 같아서/ 그저 병원에 가야되는 것 아니냐며/ 은근히 다그쳐보기도 하면서/ 같이 가 줄까 크게 선심 쓰듯 대꾸나 해 보지만// 아내의 거기 수문에 살며시 손을 대 보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제발 아프지 마/ 이불 속 어둠을 향해 속삭일 뿐//

슬픔이라는 술 / 장인수
슬픔이 살짝만 나를 건드려도/ 나는 자빠지고 고꾸라진다/ 술 한 잔을 한다// 친구를 만나 한 잔 한다/ 아내를 불러 한 잔 한다/ 어떨 때는 나 혼자 슬픔을 한 잔 한다// 삼겹살집은/ 슬픔을 어떻게 노릇노릇 잘 굽는지 의아해/ 슬픔이 이렇게 고소한 것인가 의심이 들어// 인생의 절반은 슬픔인게 분명해/ 퇴근도, 어깨도, 젖은 속옷도 슬픔/ 슬픔으로 가족을 근근이 꾸리며 살아가는 족속아//

못질 / 장인수
새로 이사 온 집엔/ 이미 온통 못질 투성이다/ 이쪽저쪽 묵은 못을 빼 보니/ 강건한 못의 등이 굽어 있었고/ 녹슨 쇳가루가 와르르 쏟아졌다/ 내 손금도 저와 같이 부식되어 있을까/ 못이 되어 살아온 내 등뼈가 보이는 듯 했다/ 새 못을 박는다/ 틈을 넘어 온 집안의 벽면이 쩌렁쩌렁 울린다/ 남편의 벽이 되어 살아온 아내여/ 아내가 있어도 삶은 근원적으로 외롭다며/ 내가 방랑끼로 허물어질 때마다/ 벽이 되어 바람을 막아주던 아내여/ 댕겅! 망치의 헛손질/ 손뼈가 저려오는 뜨거운 손맛/ 나는 아내의 젖무덤 속에 내 손을 집어넣고 싶어졌다/ 벽에 가족사진 액자를 건다/ 사진의 뒷면에 서리는 어둠이 액자를 뜨겁게 붙든다/ 아내는 어둠과 얼마나 내통했던 것일까/ 아내의 웃는 목젖은 알전구가 되어/ 입가로 잔잔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아내는 상처 많은 집이었구나/ 송곳덧니 환한 아내여//

나들목 / 장인수
나들목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샛길로 빠지고 싶은 유혹은 너무 크다/ 대전행을 잊고 그만 일죽 나들목으로 휭! 빨려들어가/ 홀린 듯 칠장사로 가고 있었다/ 칠장사 거의 다 가서 길 오른편/ 단지 빨간 함석 지붕으로 오르는 능소화 넝쿨 때문에/ 남의 집을 훔쳐보았다/ 주인도 없이 외양간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목에 걸린 종소리 땡그랑 울리며/ 암소의 엉덩이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콧등에는 왕방울 땀송이가 소복!/ 소복/ 잠시 후 쿵!/ 송아지가 지상에 첫도장을 찍었다//
* 2003년 《시인세계》 신인상 당선작

공범 / 장인수
순찰차가 아파트를 순회하고 있다/ 응급차가 조용히 머물다가/ 시신을 거두어 갔다/ 주민들은 동요하지도 않았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수사관은/ 주민 몇 명 경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민등록증이 여섯 조각 나 있었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수사해야죠/ 세상 모든 곳이 범죄 현장입니다/ 흉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낙엽 떨어지듯 그렇게 추락한 걸까요/ 아닙니다 누군가 밀었습니다/ 주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기자 왔나요? 보도 안 되죠?/ 반장 아줌마는 냉정하게 물었다/ 모두들 소문을 막기로 했다.//
* 2003년 《시인세계》 신인상 당선작

포도를 임신한 여자 / 장인수
가게에서 아내가 포도를 산다/ 포도를 집어드는 순간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너무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포도알은 아내의 손가락에 매달리고/ 어느새 넝쿨손을 뻗어/ 아내의 몸을 덮는다/ 아내의 봉긋한 가슴은 시큼한 포도가 된다/ 자궁 속에는 아직 덜 익은/ 청포도가 자라고 있다//
* 2003년 《시인세계》 신인상 당선작

천원 / 장인수
콩나물을 담아주던/ 까만 비닐봉지를 머리에 푹 뒤집어 쓴 할머니/ 절뚝거리며/ 식당으로 쑥 들어오더니/ 온장고에서 공기밥을 꺼내/ 난로의 펄펄 끓는 주전자 물을 말아먹는다/ 빗물이 묻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슬쩍/ 봄똥 잎새 두 개, 청양고추 두 개를 꺼내/ 오물오물 섞어 먹는다/ 식당 건너편 모서리/ 좌판도 없는 노상에서/ 야채를 파시는 할머니/ 찬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천 원짜리 저녁을 먹는다/ -참말로 밥이 따스하니 맛있스라잉/ 어둠 한 공기를 재게 먹고/ 할머니는 꼬깃꼬깃 천원을 내밀며/ 공짜 커피를 뽑는다/ 후루루 뜨거움을 단숨에 목구멍에 붓는다/ 뜨거움을 저렇게 잘 드시다니!/ 그 옆 테이블에서/ 선지해장국에 빨간 참이슬을 마시고 있던 나는/ 놀랍고, 눈동자가 뜨거웠다/ 차디 찬 겨울비가 점점 굵게 후려친다//

산책자의 몽상 / 장인수
산책은 길을 따라가며 길을 지우는 일이다// 사람을 지우고 발자국을 지우고/ 지워진 길에 허방을 내는 일이다/ 헛걸음으로 허방을 짚으며/ 이쪽 시간에서 저쪽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을 건너보는 것이다// 산책은 지워진 길 끝에서 마침내 나를 지우는 것이다//



유리창 / 장인수
학교는 유리창이 참 많은 건물/ 종종 뒷산의 산새들이/ 학교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다/ 유리창에 숨어 사는 뒷산 때문이라고도 하고/ 발효한 산열매를 쪼아먹고 음주비행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새가 되고 싶은 유리창의 음모라는 풍문이 설득력이 있다/ 유리창에는 새의 충격이 스며 있다/ 유리창은 종종 깊은 울음을 운다/ 비가 올 때는 열 길 스무 길 눈물의 계곡이 생긴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 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

학교는 창문이 많다 / 장인수
민준은/ 멍 때리는 고딩이다./ 수업 시간마다/ 창밖 하늘을 뚫어져라 본다./ 어느 새/ 녀석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 젖소도 날고/ 고래와 코끼리도 함께 날아다닌다./ 뇌가 광활하게 논다./ 하늘은 녀석의 놀이터다./ 가끔 혼자서도 웃는다./ 하늘에는 압박과 설움이 없는 것일까./ 푸르딩딩/ 마음이 멍든 사람들은/ 하늘을 우두커니 볼 일이다./ 창문 너머로./ 학교는 창문이 가장 많은 건물./ 하늘이 잘 보인다.//

걸레질 / 장인수
교실 바닥에서/ 걸레끼리 부딪친다/ 교사도 걸레질/ 교탁과 칠판의 50%가 학생의 몫인 것처럼/ 걸레의 50%도 교사의 몫/ 교실 바닥에 눌어붙은 껌도, 침도, 녹아 끈적한/ 사탕도/ 우리 모두의 것/ 교실 바닥에는/ 우울, 졸음, 짜증, 자학, 무기력, 얼룩도 널려있다/ 자폐와 분노조절장애의 욕설과 핏물도 묻어 있다/ 종이비행기가 된 교과서도 있다/ 코피를 닦아낸 빨간 휴지도 있다/ 교실의 쓰레기통에는/ 두통약, 복통약, 독감약, 알레르기 비염약, 결막염약,/ 신경안정제가/ 뱀 허물처럼 널려 있다/ 걸레도 교육이다/ 닦는 것도 교육이다//

 

비바람 모질게 불어도 / 장인수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도/ 학생들은/ 미친 듯이 웃고, 떠든다./ 백석의 시를 읽고/ 바흐의 칸타타를 듣고/ 걸그룹의 흔들려를 듣는다./ 종북, 친일, 극우, 핵무기, 관피아/ 아무리 세상의 언어가 험악해도/ 고등학교 교실은/ 청정 지역/ 비무장 지대/ 즐거웠던 기억이나 좋았던 감정을 많이 나눠야겠다./ 해학의 언어를 많이 사용해야겠다./ 칭찬을 더 많이 해야겠다./ 어른들보다 더 명랑하고 활기찬 사람으로 자라서/ 더 멋지고 위대한 나라의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더라도/ 환란의 비바람 모질게 불어도/ 더 밝은 표정으로 학생들을 대해야겠다.//

발작, 창밖으로는 벚꽃 / 장인수
긴 복도 끝에서/ 행복대걸레를 밀고 온다./ 흡연으로 교내 봉사활동 징계를 받고 있다./ 창밖으로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다./ 능선을 혼돈混沌으로 몰아가듯이/ 흰꽃이 흩날리고 있다./ 아, 씨발/ 담배 연기를 날리고 싶다./ 꽃 지르며, 발작을 하고 싶다./ 꽃들아,/ 조용히 핀다고 사기 치지 마라./ 이럴 때는/ 하얀 연기의 꽃 향기가/ 콧구멍에서 솟구친다./ 행복대걸레에 물을 잔뜩 묻혀서/ 긴 복도를 내달린다./ 사랑빗자루로 계단을 쓴다./ 지랄, 짜증 폭발이다.//

엉덩이 배후 / 장인수
소의 엉덩이가 소똥을 너덜너덜 붙이고 다닌다 씰룩씰룩 초원을 활보하는 뻔뻔한 엉덩이/ 소는 자기가 배설한 똥 위에 앉아 곤한 잠을 자기도 하고 되새김질을 하기도 한다/ 으깨진 소똥은 소의 방석 혹시 똥마법? 소는 제 똥더미 위에 오줌 폭포를 내갈긴다/ 그리고는 제 발로 질겅질겅 밟는다 소의 탁족! 지저분한 자기애 범벅!/ 저렇게 지저분한 소에게 천사와 같은 눈망울이 있다 밤하늘 별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바람 소리를 핥는다/ 소의 엉덩이에 참새가 다녀가곤 한다 소는 제 엉덩이를 자신의 꼬리채로 힘껏 후려친다//

눈물이 주루룩 눈물을 쏟으려 한다 / 장인수
눈물이 저 혼자 주루룩 울려고 한다/ 물고처럼 터지는 것은 눈물샘// 콸콸콸 눈동자를 범람하는 울음의 고독/ 눈물샘에 익사하고 싶은 나날들// 무논의 들판은 온통 개구리울음이 된다/ 모가 내러 가고, 마음이 내러 가고, 삶이 내러 가는 봄날의 울음// 이팝꽃, 철쭉꽃, 아카시아꽃이 동시에 흐드러지게 피어나서/ 살아갈 날들에게 수의(囚衣)를 입히는 것 같다// 나는 한때는 세상의 고통을 다 짊어진 투사였으며/ 끓어오르는 사랑을 주체 못 하여 도덕을 잠시 버리기도 했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 수인(囚人)이었으며/ 이 세상에 나의 주소가 없는 것처럼 떠돌며 살았다// 흰 꽃 앞에서 넋이 나갔던 범람한 감정의 탕아였다/ 넋은 종종 육신을 이탈하여 유탄처럼 퍼붓는 울음을 살았다// 철쭉, 이팝꽃, 아카시아꽃들이 수의(壽衣)를 입고/ 나를 조문(弔問)하는 것만 같다/ 아니,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미친 듯 웃는 것만 같다// 도랑 물꼬가 터지듯 눈물샘이 역류하며/ 펑펑 웃고 싶다./ 살아가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날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흘리고 싶다//

침실이라는 우주여행 / 장인수
아내와/ 침실에 누워있으면/ 어느 날은/ 몸도 영혼도 아닌/ 우주의 다른 에너지가/ 둘 사이에 흐른다/ 아내의 몸에는/ 문도 없고/ 출렁임도 없는/ 암흑물질/ 부부로 만나서/ 몇 시간 전/ 닭도리탕을 함께 먹고/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고독의 혀를 적시고/ 영혼의 입술에 닿았던 사이/ 입술을 연다/ 부부가 아닌 생명체로 만나고/ 어느 때는/ 모래알로 서로를 부비거나/ 지구와 달의 관계처럼/ 인력이 존재하고/ 끌어당기지만/ 운행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사이/ 어느 때는/ 손길로/ 꿈결로/ 서로의 내부를 들여다보지만/ 밤은 쓸쓸히 깊어만 가다가/ 서로의 가슴을 찾는다/ 한 몸처럼 가깝다가/ 어느 날은/ 남남처럼 멀다/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몸의 고유 영역은/ 먼 우주를 향한 이끌림/ 밤의 탐닉/ 불끈 솟아오른/ 성기는/ 긴 꼬리의 혜성/ 우주여행을 떠나는/ 너와 나//

삼거리 / 장인수
갈림길이/ 잠시 만나/ 길과 길이/ 인사하는/ 삼거리 선술집/ 넘는 고갯길/ 뻗어가는 들판길/ 사람을 만나는 길/ 산으로 와서/ 산으로 가는 길/ 길고 긴 여정/ 술 한 잔/ 목 축일 때/ 삼거리는 선술집/ 선술집은/ 천 갈래의 길/ 삼거리는/ 삼만 갈래의 길//

소주 반 병 / 장인수
할망구 둘이 소주를 마신다./ 두부 부침 4천원/ 참이슬 3천원/ 소주 한 병을 2시간 동안 마신다./ 돈도 읎는디, 술 사줘서 고맙지라, 고맙지라/ 했던 말 수십 번 반복하면서/ 오래 사셔잉, 그랴, 그럽시다잉./ 주거니 받거니/ 2 시간을 마신다./ 우정 변치 말자고/ 쭈그렁 손이 쭈그렁 손을 꼭 잡고/ 팔순끼리/ 두분 합 169년끼리/ 소주 반 병을 채 비우지 못한다.//

황혼黃昏의 빛 / 장인수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슬픈 시선 구름산 넘으면/ 아스라한 추억들이 다가온다// 모래알 같은 청춘/ 영원할 것 같아/ 멋모르고 바닷가에 던져버린 세월/ 조급함 못 이겨/ 타인을 밟고 달려온 지름길// 무엇이 바빠 그렇게 그렇게.../ 간혹 행운이 따라 왔지만/ 가슴으로 살지 못한 때늦은 후회에/ 가난한 얼굴 부끄러워라// 언젠가 하던 그 날/ 다가올 것 같지 않은/ 생각조차 멀었던 날들/ 청춘의 옷 벗어버린 자리에/ 황혼의 빛 어느새 물들어온다.//

저 깊은 하늘에 새의 생애가 얼룩져 있다 / 장인수
가을 허공이 날개를 파닥이게 한다/ 날개가 새를 파닥이게 한다/ 날개가 새를 점점 끌어올린다/ 날개가 또 다른 새를 당긴다/ 날개가 허공을 탄력있게 한다/ 저 깊은 하늘이 새의 몸속에 잠복해 있다/ 저 깊은 하늘에 새의 생애가 얼룩져 있다/ 새의 이동거리에 하늘의 속력이 따르고 있다/ 하늘의 터널이 새의 생애에 뚫려 있다/ 새떼들은 한몸이 되었다가 각자의 몸이 되었다가/ 허공에 깊은 터널을 숭숭 뚫는다/ 어떤 새는 울음이 너무 깊어서/ 허공 깊이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다/ 울음이 새떼보다도 더 깊은 곳에서 운다//

 

허공은 오리의 혈관이다 / 장인수
허공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많은 섬모가 출렁이고 있는/ 오리의 혈관이며 깃털이다/ 허공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리의 후각이 있고, 나침반이 있고, 지형지물이 있다/ 오리는 하루를 수억 만 번 쪼개어 쪼개진 시간의 틈으로 제 울음을 풀어놓으며 태어난 곳으로 날아간다/ 텅 빈 눈구멍으로 지상을 빤히 쳐다보는 별이라는, 바람이라는 감각 기관이 있어서/ 실명을 했더라도 자신의 날개 밑 행로들의 모든 굴곡을 기억하고는/ 태어난 곳에 도착한다/ 망망대해와 산맥을 지나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 오리는 구름의 허파로 숨 쉬고/ 바람의 항법으로 날아온다/ 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허공 곳곳에 보관한다//

갈매기 / 장인수
자월도에 간 적이 있었다. 뭍에서 섬까지 끝까지 배달부처럼 동행을 했다. 바다의 길을 쟁기질을 하면서 배는 출항을 했다. 출렁이는 파도의 길을 써레질하면서 갔다. 갈매기가 미친 듯 춤을 추었다. 사람의 꽁무니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오던가. 과장된 몸짓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약간의 전우애가 느껴졌다. 안녕, 새우깡을 허공에서 건넸다. “섬에서 뭍으로 나갈 때 다시 동행할게.” 의리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멀리 아내에게 “건너올래?”라고 문자를 보냈다. 아내는 갓난아이를 혼자서 돌보고 있었다. 아내를 남겨두고 떠난 섬 여행. 어떤 갈매기가 “끼룩끼룩 그러면 안 돼.” 라고 외치는 듯 했다.//

구름의 승차권 / 장인수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로 구름이 진입했다./ 젖음, 내림, 흐름, 스밈, 떠돎, 쏟아짐, 운행……/ 구름이 정차하는 곳의 집중호우/ 구름에서 하차한 수많은 물방울의 속삭임과 아우성/ 아버지는 일기예보를 믿었다/ 구름을 믿었고 지구를 믿었다/ 하늘을 향한 믿음이 강했다/ 감각의 방향으로 비는 내리지/ 구름의 승차권/ 강물은 불어서 빨리 흘러가지/ 기차보다 빠른 속도일까/ 올 여름,/ “구름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구름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비에 젖은 구두와 모자와 가방/ 지구라는 간이역을 출발합니다!//

눈이 오는 날은 눈 밖의 소리가 다 보인다 / 장인수
하얗게 함박눈이 내리는 마당은/ 잠실(蠶室), 누에방이다/ 누에방에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비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누에가 뽕잎을 먹을 때 내는 소리는/ 콩밭에 가랑비 내리는 소리/ 굵은 빗방울이 연잎에 듣는 소리/ 포목점에서 비단 찢는 소리/ 녹두알만한 누에똥이 후두기는 소리는/ 댓잎파리에 싸락눈 뿌리는 소리/ 섶에 올라 제 입의 명주실을 뽑아/ 하얀 고치의 적멸보궁을 짓는 소리는/ 끝없는 정적으로 들어가는 소리/ 눈이 오는 날은 눈 밖의 소리가 다 보인다//

칠백 리 길 끝에 닿을 수 있을까 / 장인수
남한강 칠백 리를 따라/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물살의 조각보/ 물살의 이음줄// 여울 휘돌아/ 가물가물 길의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 솜실을 뽑는 물레질처럼/ 돌고 돌아/ 길의 꼬리는 어느 낯선 장소에 닿으려 한다// 강물은 흘러가는 삶을 위해/ 곁에다가 절을 세우고/ 고구마밭을 한없이 펼쳐 놓았다네/ 석탑이 밭고랑 곁에 서 있고/ 붉은 흙내음이 절 안으로 흐른다네// 강둑길을 걷다 보니/ 몸에도 여울이 생기고/ 손바닥에는 물주름이 출렁거린다네// 명주실 잣듯/ 애환의 물굽이 어디쯤/ 발끝에 채이는 돌부리도/ 수억 년의 등고선을 흘러서/ 거기 박혀 있는 것이리// 물집이 여기저기 잡힌다네/ 발바닥에 깃드는 쓰리고 아린 물집은/ 절뚝거리는/ 몸의 암자/ 몸의 요사채// 양말을 벗는데/ 고구마 껍질을 벗기듯/ 삶의 껍질을 벗긴다는 생각이 드네/ 높은 강둑 길에 주저앉아서// 피안彼岸을 건너다본다네/ 굽이굽이 이승의 물살은/ 피안의 노을로 번져간다네//

강물의 내재성 / 장인수
시간은 물처럼 흐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은 잃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고기처럼 시간은 놓쳐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벌써 떠나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장소로 갔다가 다른 장소로 돌아오는 속도 안에 시간이 내재되어 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부는 젖는다./ 어제로부터 오늘로 흘러가는 것들/ 아른거리는 도시의 불빛과 가로등/ 덧칠하고 지우고 또 덧칠하는 얼룩./ 강물의 속도는 노동처럼 근육을 움직인다./ 먼 훗날, 강물은 계속 흐르리라.//

 

어떤 풍경에 발목을 헛디딘 아침 / 장인수
“이봐, 젊은이. 이 나무 뻥 차주면 고맙겠구먼.”/ 돌아보니 처음 보는 할머니였다./ 느닷없는 부탁에/ 경로사상이 투철한 나는/ 발길질을 했다./ 나무가 휘청거리며 쏟아내는/ 유쾌 발랄 까르르르르 황금빛/ 놀라운 음표들의 불시착!/ “젊은이, 세 번만 더 차 주면 고맙겠구먼.”/ 나는 또 찼다./ 마술에 걸렸다./ 짜릿한 경로사상이여!/ 아, 늙은이, 할망구!/ “더 세게. 더 세게! 젖 먹던 힘까지!”/ 굽은 허리의 할머니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은행털이범!/ 젖 먹던 힘으로/ 아침 7시 10분 등교길, 헉!/ 나는 얼마나 느닷없이/ 풍덩! 어떤 풍경에 발목을 헛딛는 것일까!//

파도의 몸짓 / 장인수
문화 체험활동을 와서/ 묵호 등대를 본다./ 태허太虛 앞에 섰다./ 구해九垓를 향해 함성을 지르는 학생들아,/ 수평선이라는 담장을 훨훨 넘어가는 너희들의 목소리./ 바다 밖의 영역/ 탈경계로/ 무극으로/ 떠나는 수컷의 힘찬 목소리./ 바다는 늘 갓 태어난 간난아이처럼 온몸이 주름투성이./ 뒤파도가 앞파도를 가르며 써레질한다./ 경계 너머의 탈영토,/ 시원始原의 몸짓으로/ 파도는 60억년을 쉬지 않고 출렁이고 있다./ 지구의 생성과 함께 했다./ 그리하여 시간은 파도처럼 흐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지금도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오고 있다./ 파도의 몸살보다 더 아픈 몸짓이 어디 있으랴./ 제자들아, 저것이 너희들의 몸짓이겠지?//

도토리는 숲을 흔든다 / 장인수
허공이 바스락 구겨졌다./ 흔들리는 나무의 중심을 다람쥐들이 잡아주었다./ 대모산 숲의 허리가 접혔다가 펴졌다.// “참나무에서 나오는 소리를 받아오자.”// 나무들의 큰 흔들림을 붙들고 있는 잔잔한 흔들림이 있다./ 그것을 도토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실이 그렇다.//

단풍, 번쩍! / 장인수
고딩 때의 선생들을 만나면/ 한 대 후려치고 싶어지는 가을이다./ 귀싸대기 날리고 싶은 가을이다./ 특히, 2학년 때 담임은 최악이다./ 혈청까지/ 벌겋게/ 얼얼하게/ 번쩍! 정신이 들도록/ 단풍이 드는 가을이다./ 코피가 터지도록/ 노을 속 붉게/ 보복을 하고 싶은 계절이다.//

울음의 우드스탁 / 장인수
제자들의 겨드랑이에는/ 홉스굴 호수의 출렁임이 있다./ 기러기 떼가 있다./ 목덜미가 푸른 청둥오리 떼가 있다./ ‘초록’의 자유를/ (始原)을 따라/ 거친 하늘, 호수, 바다, 산맥, 사막의 만유인력을/ 넘어가는/ 철새 떼,/ 제자들의 겨드랑이에는 구름 냄새와 새 떼가 산다./ 책가방에도/ 신비를 향해/ 삼림한계선을 넘어가는 울음 혈청/ 끼룩끼룩/ 하늘 북을 울린다, 울부짖는다/ 자신의 울음을 다 각혈하며/ 창공을 노을처럼 물들이는/ 울음의 우드스탁.//

안개의 체액 / 장인수
밤이 되면 등고선도 나이테도 물질의 내부로부터 흘러나와 어둠의 숨결이 된다. 지상의 냄새들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안개의 혈액 속을 돌아다닌다. 안개는 하늘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내리고, 땅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저수지의 수면에서 흘러나온 안개는 생리를 하는지 여자의 통증 냄새가 난다.// 밤이 되면 경계가 지워지고 짐승의 배고픈 눈빛도 등고선에서 흘러 나온다. 안개는 피의 냄새를 추적한다. 10중 충돌사고, 고속도로의 점막을 찢으며 끈적한 파혈의 비린내! 도심지와 공장과 도로마다 엔진오일의 냄새가 밑바닥에 껌처럼 늘어붙어 있다.// 안개는 지울 수 없는 것들까지 지우고 꼭꼭 숨어들던 은밀한 무늬들을 들춘다. 아프고 축축한 영토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독한 일상의 무늬. 안개는 골목의 온갖 형상 짓고 허물며 더욱 질척한 이질감異質感의 시간으로 흐른다.//

심장으로 스며들다 / 장인수
모닥불이 참나무 장작 속으로 스며든다. 모닥불이 주전자로 들어가 몸을 달구고, 커피 잔으로 스며들어 커피를 끓이고, 입술과 혀와 목젖으로 흘러든다. 모래사장에 동그랗게 스며든 모닥불이 사람과 동석을 하고, 동석한 사람의 심장으로 스며들고 있다. 모닥불이 사람을 꽃처럼 피워놓고 심장을 비추고 있다. 끝없이 연결된 미로처럼 달빛은 지구의 구름을 지나 해변으로 스며들어 파도의 성분이 되고 있다. 연속체의 곡률을 이루며 철썩이는 비릿한 해조음이 목덜미를 휘감고 뼛속까지 녹아들고 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앉아서 서로의 눈빛으로 스며들고 있다.//

벽을 뛰어넘다 / 장인수
사는 것이 즐겁다/ 벽을 점핑하고/ 건물을 타고/ 훌렁 고양이처럼 넘을 수 있어서 좋다/ 아무도 나의 벽타기를 막을 수 없지/ 수직은 수평보다 재미있는 놀이터/ 학교가 꽉 막혔어도/ 아빠라는 높은 벽이 있을지라도/ 나는 벽 따위는 훌훌 뛰어넘지/ 나는 야마카시가 좋아/ 낙법과 착지는 재밌어/ 벽은 문이 없는 확 트인 길/ 벽은 마술/ 아무리 높아도/ 훌쩍 넘을 수 있지//

조까씁니다 / 장인수
고구마 썩은 방구/ 지독한 방구를 뻥뻥 꾼다고 해서/ ‘독가스’라는 별명을 지닌 초딩 친구가/ 커서 가스 배달 업체 사장님이 되었다/ 매일 트럭을 몰면서 가스통을 신나게 배달한다/ 방태산 산골짝 마을이나 양양읍내, 하조대 주변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가스통을 데굴데굴 굴린다/ 하조대에 살고 있어서/ 가게 상호가 ‘하조대까스'/ 줄여서 ‘조까스’라고 부르는 녀석/ 전화가 오면 무조건/ ‘조깝습니다’라고 전화를 받는데/ 지역 주민들은 모두 알아듣는다는 말씀/ 전혀 욕으로 느끼지 않고/ 친절하게 신속 배달하는/ 성실한 가스 배달 사장님으로 불린다는 녀석/ 도시가스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들어오기 전까지는/ LPG가스통을 굴리며 배달하겠다는 녀석은/ 핸드폰을 받을 때마다 예의바르고 활기차게/ ‘조깝습니다’라고 한다//

멸치 칼국수 / 장인수
관절도 없고/ 아가미도 없는 저것/ 홍두깨에 밀어서/ 다다다닥닥 칼질의 간격을 넘어온 저것/ 뼈마디도 없는 저것/ 말랑말랑한 세상으로 왕림하신 저것// 여러 가락 뜨겁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저것/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 뜨개질 하다가 끓여먹는 저것의 국물에는/ 바다의 거친 은빛 물살에서 파닥이던 저것/ 죽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저것/ 수중 발레를 하며 매혹적인 춤을 추던 저것/ 그물에 걸렸어도 은빛 점프를 하던 저것/ 척추동물의 날렵한 몸동작인 저것/ 깨달음에서 우려낸 저것/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우려낸 저것/ 뼛속까지 망명한 저것//

청파리 / 장인수
청파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가장 먼저 눈치챈다./ 사람이 죽은 지/ 5분만 지나면 청파리가 날아온다./ 기독교, 불교를 막론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을 막론하고/ 생명체가 죽은 지 5분만 지나면 청파리가 도착한다./ 쉬를 슬고/ 구더기를 풀어/ 부패를 도와주기 위해/ 5분만 지나면 영락없이 파리떼가 도착한다./ 리비아 전쟁터에/ 이라크 폭탄테러 현장에/ 가장 흔한 벌레/ 가장 바쁜 벌레/ 충북 진천 시골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구형 스포티지 안에는/ 언제나 서너 마리 파리가 들어와 있었다./ 영락없다./ 자가용 창문을 열어도/ 쉽사리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귀신들./ 특수 임무를 수행중인지/ 어떤 파리는/ 한 달 넘게/ 스포티지 안에서 거뜬히 살아간다.//

낙지볶음밥 / 장인수
식당 창문 밖은 한창/ 휘날리며 쏟아지는 낙지알같은 꽃비늘/ 저것이 번성기의 몸부림인가?/ 꽃몸살인가?/ 수억 만 송이 꽃비늘이 되고, 꽃혈통이 되고, 꽃섬광이 되고, 꽃탄생석이 되고.......// 산낙지볶음을 먹었다/ 낙지보다 더 뜨겁게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입술/ 인동 장씨 종가의 맏며느리/ 두 시간 넘게/ 그녀는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양가 친척은 대가족/ 백여 명에 가까운 자손을 봤는데/ 끊임없이 치다꺼리하면서 살아왔노라고/ 낙지볶음이 맵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조만간 또 곡비(哭婢)가 되어야 할 것 같다면서/ 시원하게 콩나물국을 들이켠다/ 후루룩! 후루룩!// 그녀의 몸과 영혼에 수많은 낙지 구멍들 ......./ 식당 창문 밖/ 만개한 벚꽃은 벚나무의 구멍자리가 아닐까/ 흐드러진.......꽃구멍/ 꽃구멍......여자보다 깊은........어질어질......깊고 깊은 향기의 세계/ 꽃의 몸부림/ 꽃더듬이가 되고, 꽃우화(羽化)가 되고, 꽃초신성이 되고....../ 지구가 몸부림치며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돼지머리 / 장인수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다/ 가마솥이 마당에서 끓고/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이놈 삶은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아버지는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고 있다/ 소주 한 잔 벌컥 들이켜며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캬! 죽을 때는 요런 표정으로 죽을 수 있을까/ 접시마다 귀도 웃고 코도 웃고 눈도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낄낄낄 돼지 웃음을 먹고 있다//

혓바닥 / 장인수
어릴 적/ 누렁이를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다/ 수십 개의 논두렁을 건너/ 냇둑 움푹 꺼진 아늑한 곳을 찾아/ 엉덩이를 깠다// 옥수수 잎새처럼/ 꼬리를 피워올린 누렁이가/ 접시꽃 같은 혓바닥으로/ 키득키득 고구마빛 똥을 빨았다!// 혀끝을 꾹꾹 눌러/ 잡초에 묻은 몇 방울 똥물까지/ 깨끗하게/ 빨아먹는 녀석의/ 콧구멍과 날카로운 이빨이/ 반쯤은 녹아내렸다// 그 한 뼘 접시꽃이/ 순식간에 껑충 뛰어올라/ 직방으로/ 나의 볼과 목덜미를 핥았다/ 어라! 그런데 희한하게도/ 녀석의 혓바닥에서는/ 똥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것다!// 오히려/ 달큰한 조청 냄새가 나는 것이었으니/ 오라!/ 간질간질 치렁치렁/ 아지랑이를 뚫고/ 들판을 쏘다닌 녀석의/ 목젖에서는 얼마나 칼칼하고 텁텁한 단내가/ 품어져 나왔던 것이었을 꺼나!//

혀 / 장인수
어릴 적/ 살곰살곰/ 송아지 곁으로 다가간 적 있다/ 엄마소가 다가와/ 마치 송아지를 핥듯/ 긴 혓바닥을 쭉 빼서/ 내 까만 얼굴을 핥아주었다/ 송아지도 덩달아/ 내 손등을 핥았다/ 나는 가만히 혓바닥에게 내 몸을 맡겼다/ 선생님이 칠판을 닦듯/ 엄마가 빨래를 하듯/ 아버지가 마당을 쓸 듯/ 해의 긴 혀가 서산을 핥듯/ 분홍색이구나/ 말캉하구나/ 분홍빛 혀의 숨소리가 거칠구나/ 입 속의 피부/ 어깨도 핥는구나/ 혀를 놀리며 장난하느냐/ 나를 애무하는 이유가 뭐냐/ 내 몸에서/ 맛있는 풀 냄새가 나느냐//

 

망망대혀 / 장인수
갯벌의 조개들은/ 밀물의 설첨(舌尖)보다 더 거칠게 일렁이고 싶다/ 벌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는 수평선의 설근(舌根)/ 해안선을 끊임없이 핥으며 열람하는/ 망망대혀!//

나는 아주 나쁘다 / 장인수
나는 남자라서 나쁘다/ 충청도 종자라서 나쁘다/ 나는 기독교인이어서 나쁘다// 우리 사회에 이런 말씀도 통한다/ 정말 나는 상태가 나쁘다/ 사회는 온갖 담금질을 한다// 풀벌레 많은 시골은 상태가 나쁘다/ 모기 많은 밤거리는 기분 나쁘다/ 풀벌레 우는 밤은 예술처럼 청승맞다// 나는 고등학교 선생이라서 나쁜 놈이다/ 이 나라 교육열이 높아서 나쁘다/ 점수 잘 올리는 수업을 꽤 잘 한다// 인간 종족이 싫어질 때가 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미안할 때가 있다/ 한 잔 술맛은 좋고 꽃이 필 때다// 나는 아주 나쁘다/ 시를 쓰기 때문에 나쁘다/ 시인은 낭만이 너무 가혹해서 나쁘다// 눈치없이 세상을 까고 싶다/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욕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평생 불빛을 향해 울부짖고 싶다//

골목과 노인 / 장인수
큰길에서 쑥 들어가 동네나 마을 사이로 이리저리 나 있는 좁은 길을 골목이라고 부른다. 구불구불, 이리저리, 굽어지고, 꺾이고, 파인 길이다. 자꾸 깊어지고 있는 길이다.// 어떤 골목은 오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천 년을 지나고 있는 골목도 있다. 최근에 생겨난 골목도 있다./ 골목은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먹자골목, 책방골목, 문화골목, 인쇄골목, 시장골목, 참기름골목, 닭갈갈비골목 등등.......// 골목은 얼마나 많은 아픔을 품었을까? 골목은 얼마나 많은 가난을 품었을까? 골목은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노인을 품었을까? 고양이와 쥐와 빈병과 새우깡을 품었을까? 골목은 구멍가게와 언덕과 리어카와 구인광고 전단지를 품었을까? 골목은 얼마나 많은 계약직 노동자와 실직자와 늙은 대학생과 군인을 품었을까?// 골목은 어딘가로 향한다. 큰길로 향하는 골목도 있다. 어떤 막다른 골목은 깊은 곳으로 향한다. 막다른 골목에 가서 빈 박스와 못쓰는 고물을 싣고 나오는 할아버지의 리어카는 골목을 파서 실어나른다. 퍼낸 골목은 점점 깊어진다.// 골목 속에 사는 일 중에는 싸우고, 잠을 자고, 막걸리를 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다. 지구의 절반을 휘감고 도는 어둠과 밝음의 접점에는 골목이 있다. 골목은 작은 창문과 가로등이 토해내는 빛의 혈청으로부터 온기를 받는다. 빛의 체온이 어루만져주고 있는 골목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잠을 자고, 섹스를 하고, 술을 먹고, 밤길을 헤매고, 아파서 운다.// 골목 가로등의 작은 불빛은 참 착하고, 선하다. 흐릿한 불빛으로 골목의 굽은 등을 어루만진다. 곱슬곱슬 컵라면 면발 같은 골목도 있다. ‘골목을 빠져나온다’는 것은 후련하고, 기쁘고, 힘이 나는 일이지만, ‘골목으로 숨는다’는 것은 아프고, 힘겹다.// 골목에는 고등어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라일락의 관능적인 향기도 진동한다. 아픈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골목도 있다. 골목에는 노인이 많이 살아간다. 노인들은 골목을 안식처로 삼는다. 노인의 몸속으로 골목이 나 있다. 깊은 골목이 노인의 몸속으로 들어가 더욱 더 깊어진다.//

뚜벅뚜벅 / 장인수
한 마리 짐승처럼 살고 있다/ 나귀의 걸음/ 목마름과 풀맛과 울음/ 마구간에 비치는/ 선한 태양의 옷깃을 핥으며/ 우매한 짐승의 눈빛으로/ 교실로 집으로 25년을 살았다/ 짐 진 자 되어/ 들길을 걸었다/ 비가 오면/ 바위 밑이나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짐을 잔뜩 신고/ 나귀 새끼를 낳았다/ 아침에는 나귀 걸음으로 출근을 해서/ 저녁에는 시인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고달픈 누군가를 태웠다//

몸철학 / 장인수
나이가 들면 몸이 정신을 압도해/ 인생이 휘도는 곳, 여울이 센 곳을 몸이 느껴/ 거센 물살을 어떻게 뚫고 살아왔는지 참 대견해/ 앞으로 물살을 몇 번만 더 꺾고 휘돌면/ 저승 가는 마지막 징검다리가 보일 거야/ 정신적으로 힘들고 아렵고/ 파김치가 되면/ 몸을 무작정 놀려야 해/ 몸으로부터 의지와 정신력과 일을 버려야 해/ 몸을 몸에게 맡겨야 해/ 춤을 추든지/ 뻗어 잠을 자든지/ 룰루랄라 산에 가든지/ 정신없이 미친 듯 터벅터벅 걷든지/ 몸에서 정신이 없도록 몸을 풀어야 해/ 정신이 빠져나가버린/ 텅 빈 몸이도록 해야 해/ 고환이 몸에 달렸는지도 잊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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