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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전다형 시인

부흐고비 2021. 11. 23. 08:32

전다형 시인
1958년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박사 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수선집 근처>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수선집 근처』, 『사과상자의 이설』.

제12회 부산작가상 수상. 부산작가회의 부회장, 이사 역임. 한국시인협회 회원.

 

 



수선집 근처 / 전다형
구서1동 산 18 번지/ 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 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 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떼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칼,가위 쓰다 남은 실,지퍼,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용비어천가 제Ⅱ장 -뿌리 / 전다형
저 질긴 뿌리는 우물 한 모금 물고 잠이 들었으리/ 첨벙, 차르락 두레박 내리는 소리,/ 먼 변방까지 삐걱이는 물지게 소리,/ 세상을 져 나른 뿌리의 가파른 심장 뛰는 소리,/ 작은 소리의 물결이 꿈결을 짚어오리/ 우물은 바닥의 바닥까지 젖꼭지를 물린 채,/ 나무뿌리로부터 우듬지까지 이어 달리리/ 물방울이 종을 울리는 나무가 품은 집 한 채,/ 범종소리 아득한 산방에서 우물은 오래오래 소용돌이 치리/ 더 깊고 맑아져야 만나는 뿌리의 경전,/ 출렁, 햇살이 양동이 내려놓을 때/ 한 발 더 깊게 흙 속으로 내려서리//

청어를 굽다 1 / 전다형

청어살을 발라먹으며 용서를 생각한다/ 살보다 가시가 많은 청어/ 가시 속에 숨은 푸른 속살을 더듬어 나가면/ 내 혀끝에 풀리는 바다/ 어제 그대의 말에 가시가 많았다/ 오늘 하루 종일 가시가 걸려 목이 아팠다/ 그러나 저녁젖가락으로 집어내는 청어의 가시/ 가시 속에 감추어진/ 부드러운 속살을 찾아가다 만나는 바다의 선물/ 어쩌면 가시 속에 숨은/ 그대 말의 속살을 듣지 못했는지 몰라/ 가시 속에 숨은 사랑을 발라내지 못했는지 몰라/ 오늘 밤 이불 속에서 그대에게/ 화해의 따뜻한 긴 편지를 써야겠다/ 가시 속에서 빛나는 청어 한 마리/ 어느새 마음의 지느러미 달고 바다로 달아난다//

청어를 굽다 2 / 전다형
저녁 식탁 위에서/ 마음의 지느러미 달고/ 바다로 돌아간 청어 한 마리처럼/ 어제 띄운 화해의 긴 편지/ 그대가 사는 번지를 잘 찾아갔는지/ 어쩌면 나에게/ 말의 가시가 더 많았는지/ 가시를 감추어둔 나의 말이/ 그대 목구멍에 상처를 남겼는지/ 다시 청어를 굽으며/ 서툴게 발음해 보는 용서와 화해/ 내 말 속에 가시를 걷어내고/ 그대 가시 속에 숨은 말을 찾아/ 싱싱한 소금을 뿌린다//

청어를 굽다 3 / 전다형
한 통의 편지가 헤엄쳐 왔다/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 속에 잠긴/ 그대 깊고 넓은 마음의 바다/ 그리고 청어 한 마리/ 어쩌면 세상 살아가는 일은/ 상처투성이/ 때로는 상처도 무늬로 남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다시 청어를 굽는다/ 아픈 상처들이 따뜻하게 익는다//

달팽이​ / 전다형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기수였다 평생을 독방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외출을 했다 그의 따뜻한 집이 슬픈/ 감옥이었다 절벽 앞에는 겹겹의 어둠이 보초를섰다 온몸으로 푸른 감옥을 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집이 있어 짐이 되었다// 창문도 없는 감방에서 제 살을 파먹으며 젖은 슬픔을 말렸다// 비가 감옥의 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귀를 열고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온몸으로 바닥을 읽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마// 른 길에게 부드러운 속살 다 파 먹히고 겨울 무논에 빈 껍질로 둥둥 떠 있었다 네 어미의 어미가 그랬다 살아서 감옥이던 집 네 어미의/ 자궁을 열고 네가 태어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집 슬픈 감옥을 죽어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괄호에 대하여​ / 전다형
책을 읽다 행간에 빠진다 붉은 사인펜으로 ( )를 친다 끼리끼리 묶고 이도 저도 아니면 기타 등등으로 묶는다 ( )에 대해서 골똘해진다 괄호 밖은 괄호 안을 꿈꾼다 든든한 방이 되기도 하고 튼튼한 감옥이 되기도 하는 괄호, 서로를 묶고 묶어야 흘러간다// 괄호가 나를 요리한다 몽타주 기법으로 질근질근 씹기도 하고 팔다리 목 가슴 엉덩이 부위별로 찢어발기기도 한다 심지어 분쇄기에 털어 넣고 부드러운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괄호의 부드러운 입이 된다 세 치의 혀를 마비시켜버리는 독을 마신다 한통속이 되어 찧고 까분다//

시詩, 벼락! / 전다형
보내준 첫 시집, 답례로 온 메일 한 통*이 詩다/ "*참! 시도 수선 되나요?"* 추신 한 행,/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시벼락!/ "詩 빼고는 다 수선 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구서동 산18번지 제 단골 '수선집' 이미 문 닫았다/ 옆구리 터진 생이 목 터져라 수선을 외쳤다/ 영업을 남발했다/ 흠집투성이 수선집 근처 마구 내 돌리고 가엾은 생이 받은,//
* 문인수 시인. **조지 버나드 쇼의 말.

그늘을 팔다 / 전다형
아버지를 팔고 어머니를 팔고 언니를 팔고 오빠를 팔고 성을 팔고 족보를 팔고 인맥을 팔고 동창을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았다// 팔 수 없는 것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졸업장 자격증 학맥 고향 선산무덤// 소를 팔고 돼지를 팔고 친구를 팔고 이웃을 팔고 딸을 팔고 아들을 팔고 평생을 송두리째 탈탈 털어 다 팔아먹었다// 가방 사고 옷 사고 집 사고 논 사고 밭 사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여행가고 그늘을 껴입었다// 평생을 팔아도 남은 질긴 그늘, 아름다운 유산//

끈 타령 / 전다형
끈 놀이에 빠졌다 탯줄을 끊는 순간 맨 처음 해본 놀이다 새끼 끈 노끈 지끈 고무줄 두레박 허리끈 치마끈 가방끈 끈이란 끈 다 끊어봤던 끈이 달려왔다.// 내 배꼽에 매달린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 평생을 끈에 매달려 살았다 이 세상 사람들 어머니 치마끈 풀면서 태어났고 아버지 허리끈 풀면서 아내 치마끈 벗어날 수 없었다// 목숨 줄 놓는 날이 끈 놓는 날이다 끈 숭배자들이 나날이 태어났다 끈의 자식들이 줄줄이 끈에 매달렸다 날로 끈이 번창했다 끈끈한 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매고 끊고 잇고 끈에 목매달고 끈덕지게 살았다 질기고 튼튼한 노끈에 줄줄이 허리춤에 꿰찼다 세세만만 년 줄줄이 끈을 살렸다 학연 인연 줄줄이 살아났다 아침저녁 넥타이로 일생을 묶는 끈 놀이 끈 타령// 배꼽이 맨 먼저 부른 노래다//

채송화 우체국 / 전다형
봉투의 주둥이를 입으로 훅 불었다 추신으로 눈이 새까만 채송화 꽃씨를 함께 넣었다 만삭의 봉투가 뒤뚱, 봄 벚꽃길 열고 네거리 우체국 갔다 나냐너녀 노뇨누뉴 왕벚꽃 말문 트는 돌담을 따라 시옷이응 지지배배 초등학교 담장을 지나 두근두근 사랑의 능선을 돌아 붉은 우체통 기다리는 소박한 우체국으로 들어섰다// 앉은뱅이저울이 벌떡 일어나 눈이 까만 채송화 꽃씨를 안아 올렸다 그립다 사랑한다 씨알 굵은 고백은 아껴두고 사랑의 변죽만 울렸던가 꽃대궁에 올라앉은 잠자리가 부드러운 날개를 사뿐 접었다 날아가듯 저울 눈금이 요동쳤다 꽃씨가 꽃대의 거리를 재는지 발가락이 허공을 툭툭 찼다 발뼘을 쟀다 봉함엽서 봉투의 솔기가 자꾸 터졌다// 휘파람새 한 마리 푸드덕 붉은 마음을 물고 날아간 그곳, 추신으로 넣은 채송화 꽃씨가 속닥속닥 꽃말을 터뜨렸다 하얀 치아를 활짝 드러내고 깔깔 쏟아놓을 비단길, 중년의 아낙이 연초록 설레임을 펼쳐 읽었을까? 그곳에는 활짝! 만개한 주름들도 눈부시게 펼쳐낼까?//

 

우체국 가는 길 / 전다형
봉투의 주둥이를 입으로 훅 분다 추신으로 눈이 새까만 채송화 꽃씨를 함께 넣는다 만삭의 봉투가 뒤뚱, 봄 벚꽃길 열고 네거리 우체국 간다 나냐너녀 노뇨누뉴 왕벚꽃 말문 트는 돌담을 따라 시옷이응 지지배배 초등학교 담장을 지나 두근두근 사랑의 능선을 돌아 붉은 우체통 기다리는 소박한 우체국으로 들어선다 앉은뱅이저울이 벌떡 일어나 눈이 까만 채송화 꽃씨를 안아 올린다 그립다 사랑한다 씨알 굵은 고백은 아껴두고 사랑의 변죽만 울렸던가 꽃대궁에 올라앉은 잠자리가 부드러운 날개를 사뿐 접는다 날아가듯 저울 눈금이 요동친다 꽃씨가 꽃대의 거리를 재는지 발가락이 허공을 툭툭 찬다 발뼘을 잰다 봉함엽서 봉투의 솔기가 자꾸 터진다 휘파람새 한 마리 푸드덕 붉은 마음을 물고 날아간 그곳, 추신으로 넣은 채송화 꽃씨가 속닥속닥 꽃말을 터뜨린다 하얀 치아를 활짝 드러내고 깔깔 쏟아놓을 비단길, 중년의 아낙이 연초록 설레임을 펼쳐 읽는다 그곳에는 활짝! 만개한 주름들도 다 핀다//

88부동산 / 전다형
미분양된 여름 하늘을 특별분양합니다/ 덤으로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는 옵션입니다/ 한 번 받은 분양은 해약할 수 없습니다/ 선착순 무상입니다/ 지금 서둘러 신청하십시오// 그녀는 운 좋게 여름 하늘을 분양받았다 덤으로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까지 품고 집으로 돌아와 잠 속에서 이전 등기를 마쳤다 잠배가 불러와 잠을 깼다 잔챙이 별들이 소리없이 따라와 이불에 총총 떴다 지고 얼마후 여름 우기는 선택사항에서 빠뜨린 게 우환이었다 정동진 해돋이와 서해 해넘이까지 덤으로 얹어줄 때까지는 마냥 억만장자 안 부럽다 우쭐거렸다 노을의 혓바닥이 바다 가장자리를 어루고 달래고 놀다 돌아갔다// 하늘이 깜깜할 무렵 제 정신이 잠시 들어왔을 때는 이미 먹구름이 몰려왔다 우루루 쾅쾅 천둥번개가 안방 건넌방을 맨발로 휘젓는 순간이었다 출렁이는 억만장자의 꿈은 한방에 날아가고 잠을 덮은 이부자리가 흠뻑 젖었다 북상하는 구름이라도 잡아타고 오르고 싶은 하늘귀퉁이에서 자투리잠에 매달렸다 한가닥 휘오리바람을 잡아당겼으나 툭 걷어차였다 길거리에 헛바람 잔뜩 들여마신 비닐봉지가 바람을 따라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나무가 쓰러지고 축대가 무너지고 집이 매몰되었다// 폭풍이 불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물난리가 나고 재방이 터지고 이재민이 늘어나자 속수무책이었다 후릴 방책을 따라 88부동산에 매물이 쏟아졌다 무상분양 무상임대 즉시 입주 가능합니다 양도소득세 등기이전비 완전 면제 땅,땅,땅 큰 소리 치고 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잔여분 특별 분양이라는 방을 붙였다//

사과상자의 이설 / 전다형
어떤 사과를 담았던 것일까/ 골목에는 각들이 없다/ 홀가분하게 속을 비워낸 상자가 각에 대해 각설/ 어제를 치고 오늘을 박다 뽑은 못/ 구멍 숭숭한 사과상자 눈에 밟혔는데/ 사과가 사회로 읽혔다/ 반쯤 아귀가 비틀린 자세로 골목을 물고 늘어졌다/ 상자가 불량한 자세로 한껏 감정을 부풀렸다/ 생채기에서 흐른 사과 진물이 그 진통을 기록해 놓았다/ 아프면서 큰다는 말, 싸우면서 정든다는 이설/ 옹이에 옷을 걸고 햇살 쪽으로 기운 나이테를 읽자/ 빈 사과상자 부등켜안고 끙끙거린 내 안의 사과가 쏟아졌다/ 사과밭 모퉁이를 갉아먹던 사과벌레가 내 늑골 아래 우글,/ 다 파먹을 요량이다/ 사과가 알량한 고집을 잡고 늘어졌다/ 사과를 비운 상자는 성자다/ 꺾인 전방 마주 선 내 볼록 눈거울이 맵다//

글썽이는 행간들 / 전다형
수덕사 수국이 턱을 괴고 먼 데를 본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이밥 한 그릇/ 머리를 장식한 고슬 고봉 이밥 한 송이/ 장식보다 잠식이란 말이 먹힐 때가 있다/ 잎사귀 산사 넓혀가는 밤이 있었다는 말/ 무성한 것들 속에는 벌도 몇 마리쯤/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올망졸망 또래끼리 흙밥 떠놓고 배웠지/ 소꿉놀이 한창 무르익고 뜸이 들면/ 즐거운 탐구생활 아이처럼 명랑하다/ 눈웃음이 짓는 소꿉 밥/ 간 맞추지 않고 볼우물 깊어진다/ 산마루에 앉아 수국과의 거리를 보면/ 울컥, 밥솥 물 넘쳐 발그레진다/ 목탁소리가 물소리 따라 마을로 내려가고/ 산사의 놀이는 그런 것, 죽네 사네 하는 것/ 수국과 수긍 사이/ 침묵과 묵언의 범람 그 언저리에서/ 글썽한 오늘이 평생 수국으로 살겠지/ 잘 사니?/ 불어오는 안부 창문에 붙여놓고 설렌다/ 안녕! 안녕? 묻는다는 것은/ 그대와 나 조촐한 겸상 받아놓고/ 밥숟가락 달그락거리고 싶다는 것/ 함께 잠들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 꿈속에서도 살이 내린다는 것/ 밤낮 불어오던 오랜 안부처럼/ 삼삼한 계절이 행간을 몰아올 때/ 무조건적으로 수국이 핀다//

동해남부선* / 전다형
고장 난 지퍼/ 이道 저道 불발/ 이빨 나간 바디/ 재갈과 자갈 문/ 침묵과 침목 사이 징검다리/ 칙칙폭폭/ 일거수일투족 혀 차다/ 전전반측 길길 뛰어道/ 오道 가道 못한 제자리/ 폐선, 주저앉은 사다리//
* 동해남부선: 구덕포, 미포, 청사포 4.8킬로미터 폐 선로. 한때 부산과 울산을 잇는 철도.

도마와 왼손의 자세 / 전다형
박달나무 도마 위에 하현달이 떴다/ 칠흑 어둠이 고인 도마의 움푹 파진 등은/ 한바탕 난타 극을 올리기 좋은 무대/ 수많은 칼끝 받아낸 절창의 흔적이다/ 양 어깨 수많은 바퀴를 받아낸 진창길이다/ 무른 도마 순한 결도 숨겨둔 한 수는 있는 법/ 어진 결을 움켜진 옹이가 여문 칼 이빨을 뺀다// 오른손이 칼집에서 잘 벼린 칼을 꺼내들었을 때/ 칼끝 앞에 왼손은 오른손을 향해 다소곳해진다/ 단단한 무가 깍둑깍둑 썰어지는 것도/ 재깍재깍 일정한 거리의 유지도/ 한 발 먼저 나서준 왼손의 배려다/ 입은 비틀어져도 장구는 바로 쳐라// 잘근잘근 혀로 써는 착착 채 이구동성도/ 나무 그늘 아래 늙수그레한 사람들 몇도/ 점심내기 바둑판 열기가 대국 저리 가라다/ 한 집과 반집을 주고받는 돌들의 팽팽한/ 접전도 한 판 승 세상 크고 작은 놀이판/ 온통 힘 자랑 판이다/ 판짜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헤게모니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도마 위 날카로운 칼끝 앞에서/ 칼끝의 보폭을 잡아준 왼손의 몫/ 수저를 들 때도 다림질을 할 때도/ 악수를 건넬 때 손매 끝을 잡아줄 때도/ 가위질 톱질 바느질 올곧은 방향을 잡아줄 때도/ 다정한 왼손은 언제나 묵묵한 그늘의 자세/ 오른손이 세운 탑신의 높낮이는/ 왼손 기단석에 달렸다/ 개미구멍에 둑 무너진다/ 무딘 칼이 피를 부른다/ 지금은 뜸의 시간 무딘 정신을 벼릴 때,//

 

연필에 대하여 / 전다형
연필을 깎는다 연필깎이 입구에 깊숙이 들이밀고 빙빙 돌린다 어디에 뿌리를 남겨둔 나무였을까 흩어지는 살들의 성채 안에 굳은 심이 보인다 검게 빛나는 질감이 마치 역사歷史 같다 뼈와 살을 여미지 않고 세상을 건넌 사람들은 모른다 깊고 곧은 마음을 품을 수 없다// 적당히 눈 감고 살아온 생을 연필깎이에 넣어 빙빙 돌린다 톱날을 신이 난다 죄의 비늘을 쳐낸다 물관부의 투명으로 눈뜨고 싶다 뾰족하게 깎은 영혼으로 생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 연필이 깎인다 뾰족한 심이 일어나 세상의 허를 찌르는 광휘를 엿본다//


무릎경전 -사람책 / 전다형
그는 한 마리 자벌레다/ 무릎 걸레로 반성문 쓴다/ 케렌시아*에 웅크린 주다반탁가**/ 자기가 자기에게 드는 겸손한 백기/ 얼룩에게 머리를 조아린 고백/ 풀풀, 괄호 밖 핑계거리가 수북하다/ 흔적은 결점의 다른 말/ 위장을 풀었다 펴는 자벌레/ 눈금 밖을 벗어난 자벌레의 배밀이/ 갖은 시행착오와 잘잘못을 물걸레로 훔치자/ 부끄러움이 환하게 돋았다/ 샅샅 무릎으로 ∽ 결 · 점을 지우려다/ 마루판 선명하게 남은 결이 숨은 때를 짚었다/ 물걸레질은 자신을 벼리는 행위/ 제 안의 옹이를 지우는 일/ 촉슬, 더 깊이 꿇어야겠다/ 물걸레로 읽은 주다반탁가 무릎경전!//
* 케렌시아(Querencia): 스페인어로 ‘나만의 안전한 장소’를 뜻한다. 내가 애착을 갖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애정, 애착, 귀소본능의 장소를 가리킨다.
** 주다반탁가(Cudapanthaka): 부처의 제자로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 또는 주리반타가(周利槃陀伽)로도 음역된다. 산스크리트로 주다판타카(Cudapanthaka) 또는 주디판타카(Suddhipanthaka)라고도 한다.

감꽃나무*의 전언 -사람책 / 전다형
백곡리 537번지에 가면 반쯤 주저앉은 사랑채가 있다 대나무가 에워싸고 동네방네 무성한 소문을 부풀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아버지 갑자년 심장마비로 세상 뜨자 독립자금으로 일평생 모은 문서 사랑채에 딸린 헛간 어디쯤 꼭꼭 묻었을 것이라는 소문만 떠돌았다 전문 도굴꾼이 다녀갔다는 억측만 난무했다 사랑채 머리채를 잡은 불신이 우후죽순으로 돋아났다 실밥 터진 우애는 근심으로 우거졌다 끼리끼리 편을 가른 피붙이들끼리 멱살을 잡았다 오른쪽 왼쪽 뺨을 주고받기도 했다 뜬구름이 생사람을 잡았다// 발굴의 목록은 맹자공자 사상 농자천하지대본에나 나오는 호미 낫 삽 쟁기, 이 구간은 구름의 문양을 닮았다 으흠, 으흠 사랑 놀음에 빠진 헛기침이 후렴구로 남았다 안채를 향해 뻗은 담쟁이 넝쿨손이 바깥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걸어 잠갔다 사람을 품지 못한 빈집은 저 홀로 폭삭 늙었다 눈 어둡고 가는 귀 먼 일가친척들이 마을 어귀에 이 빠진 그릇으로 띄엄띄엄 나앉아 그해 겨울 아버지가 쓰다만 자서전을 줄줄 읽어줬다 그 때 마침 6.25 동란 때 생매장터였던 애장골에서 풀국새가 청승스럽게 울었다// 절골 삼박골을 벗어나는 게 소원이었던 큰오빠 대처로 떠돌다 아버지 나이 겨우 넘기고 감꽃나무 아래로 한 줌 재로 지나쳤다 팔순 줄 가무실 오라버니 열 천 번도 더 시래기 같은 가문을 줄줄 주워섬겼다 출세했다 추켜세우는 입치레에 배추이파리 몇 장 술값으로 내고 작은오빠는 은근슬쩍 마을을 빠져나갔다 남은 가족들 대소사가 둘러앉은 자리 마음 깊숙이 묻어둔 숫돌을 꺼냈다 할머니는 만세를 부르다 끌려가 돌아오지 않은 삼촌을 끌어안고 눈사람으로 서서 절대로 녹지 않은 자식이라 하셨다 이 빠진 가문을 개발새발 엮어 난전에 팔았다 시시껄렁한 바람마저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펄펄 슬픔이 살아 날뛰는 날이었다//
* 천연기념물 492호,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576-1번지 소재.

물집 한 채 -사람책 / 전다형
수삼 네 채를 단숨에 썰었다/ 소매보다 더 비싸게 구매한 직송거래/ 눈 뜨고 코 베인 씁쓸한 뒷맛,/ 어금니 꽉 깨물고 뒷다마도 깍뚝/ 깍뚝 칼을 쥔 검지가 잡은 물집 한 채/ 올해 받은 가을 제일 큰 선물,/ 투명한 대답에 오래 머물다 얻은 햇살이/ 햇살 좋은 베렌다에 토막 낸 삼을 널면서/ 싸고 싱싱하다 입에 발린 입술도 널었다/ 수삼이 건삼이 되는 동안 그와 나 사이/ 그늘진 물기도 꾸들꾸들 말라갔다/ 그녀 제 그늘 내 그늘에 떠넘기고/ 돌아 세운 마음인들 오죽했을까/ 때린 놈은 서서 자고/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 했다/ 뒤가 마려운 건 그쪽이겠지/ 이런 저런 마음을 햇볕 쪽으로 돌아 누이다/ 올 가을 남는 장사다 알고도 속이 털린 셈법/ 곡간 가득 투명한 대답이 넘쳐났다/ 수삼 네 채로 산 물집 한 채/ 투명한 물 가족이 사는 어리숙한 집에/ 막막한 어둠도 조금씩 묽어졌다/ 굳은 표정도 시간을 살살 굴리자/ 차츰 말랑해졌다/ 구김살 없는 햇살이 서먹한 두 사이를/ 구석구석까지 공평하게 펴 바르자/ 그늘이 바짝 줄어들었다//

검문소 -사람책 / 전다형
참, 나를 증명하란다// 이 구간은 투명인간의 세계/ 일방통행, 청맹과니들의 관할 구역/ 시퍼렇게 날 선 거수경례가 목덜미 바짝 조였다/ 이 순간 울컥, 오장육부 속 뒤집어 내용물 게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겨다짐으로 먹은 마음 지퍼 내릴 수도 없는/ 이 난감 이 속수무책을 건너뛸 방책은 더더욱 없었다공명정대한 법치의 손아귀가 볼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였다/ 미투리 발싸개보다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린/ 지금 여기에 기투企投, 호모 사케르가 되어/ 거듭 차연과 거듭 리좀과 거듭 미끄러짐으로/ 한없이 연기되는 생, 생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과 학생생과 출입증// 플라스틱 마그네틱에만 존재하는 가엾은 나,/ 증들의 지배하에 기호로만 통용, 거래 되는 세상/ 철커덕 검문소 차단기 오르고 통과된 육체/ 지금地今止禁 여기 있는 나는 증證에 먹히고/ 그 밖 어디에도 없다//

종지기 -사람책 / 전다형
우리 모두는 종種鐘鍾從終이다 범종에밀레종성당종학교종알람, 순종잡종희귀종, 조계종천태종태고종, 종의 차이만 있을 뿐 차별은 없어야 한다 종종, 종적縱的을 둘러싼 고래 등 싸움에 죄 없는 새우 등 터진다 약한 자에 한없이 약해지고 강자에게 한없이 강해지는 자, 가장 낮아서 가장 높이 오른 종지기는 십자가에 못까지 박혔다// 산골 성당 푸른 종소리가 줄줄 기도문을 외웠다 학교 종이 땡땡 치면 지각생 사타구니 불알은 요령 소리가 났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만장 앞세우고 저승길 앞장서는 요령소리는 종種의 기원, 종이 오래 울었다 자신을 더 세게 때려 더 멀리 보낸 울음이 있다 나비 한 마리 날개 접었다 폈을 뿐인데 토네이도가 일고 일가를 앗아갔다 누군가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에 지나가는 개구리 돌 맞아 죽는다 순환선, 삽자루에 오종종 매달린 종들,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날 길 없다 넥타이에 목을 매기도 하는 그날이 그날인 우리는 다 같은 종種鐘鍾從終자, 우리는 태생부터 을이다//

은행을 털다 -사람책 / 전다형
언감생심/ 은행나무 근처 얼씬거리지 마시라/ 행실 구리다 오해받을 수 있다/ 이 은행 저 은행 딱 한 번 털고, 손 씻자!/ 구린내 한 자루 차 트렁크에 실은 후/ 몇 년을 시달렸다/ 초범이 재범되기는 식은 죽 먹기/ 전과 딱지 손 턴다는 말 쉽지 않다/ 문턱 높은 우리국민신한하나/ 은행은 올해 풍년이다/ 구린내 나는 전(錢)의 인기는 천년만년 우거지리라/ 어제 간 술집에서/ 내가 턴 은행이 안주로 나왔다//

문신 / 전다형
연두, 저 여린 새싹이 온 세상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연초록 힘줄이/ 툭 툭 불거진 숲, 허공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우듬지 끝에 맨발로/ 나앉은 햇살이 오동통하다 바람이 연초록 우듬지에 초록 양말을 신겨놓았다 버들강아지 아랫배가 한 뼘 부풀어 올랐다 몸피 터진 수양버들 가지 그늘을 털어냈다 물살끼리 멱살 잡던 겨울 강 물목을 풀었다 두근두근 숲이 뛰었다 덩달아 세계 바깥으로 뻗은 길이 자랐다 숲의 뿌리가 더 깊이 내렸다 울림통 큰 소의 물소리 깊어졌다 몸은 숲을 들인 흔적으로 그득했다//

택배 / 전다형
불룩한 가을 맨발로 맞다/ 잘 익은 햇사리(舍利師利事理) 도착했다/ 착불이다/ 겨울이 먼저 후끈 달아올랐다//

간증 / 전다형
자라 등속에 목을 쑥 집어넣었다 길게 목을 늘이면 마시기 좋은 호리병, 용도변경이 자유로운 병, 허리춤에 차고 다니다 적을 만났을 때 목을 달랑 뽑아버리면 안전한 방패가 된다 시시때때로 위장술에 능한 병마개로 사용, 목 하나쯤은 뽑았다 붙였다 식은 죽 먹기다 천 년을 단 한 번도 나발을 불지 않은 입술이다 病인지 柄인지 나만 아는 병, 목을 쭉 빼고 물 밖 세상을 둘러본다 뭍에 오른 자라 세상 만나는 일, 목 내놓고 죄를 넘보는 일//

리좀 / 전다형
바람(風)이 이삿짐 싼다/ 우주를 모시는 게르 한 채/ 전 재산 탈탈 털고 뼈로 쓴 혈서/ 영토를 넓히는 민들레 홀씨의 방식/ 앉은 자리가 다 꽃방석/ 부웅 바람(希望)이 시동을 건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장자와 나비 / 전다형
새벽하늘 북두칠성같이/ 나침반 하나를 몸에 새기고 수미산 꼭대기에 매달려/ 세상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므두셀라처럼/ 첫 꽃을 피우려고 백 년이 걸린다는 선인장같이/ 나미브 사막에 사는 거저리가/ 모래언덕 위에 물구나무로 서서 몸에 맺힌 물방을 받아먹듯/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사는 2500년 된 웰위치아처럼/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몇만 킬로 사막을 넘는 낙타같이/ 수천수만 주름을 펼쳤다 접어야 하는 애벌레처럼/ 하루에도 칠십만 번 자기를 갈아엎는 파도같이/ 제 몸 구석구석 후벼 파고 울어야 한다/ 자신 가장 낮고 보잘것없고 가난이 온몸을 친친 감을 때/ 시인詩人 사람人, 장자의 나비가 되는 것이다//

한정판 / 전다형
뼈대도 심장도 없는 구름이 낳은 얼고 녹는 눈먼 사람 피가 그늘진 사랑// 시한부, 한 철만 살다간 제 속 끓인 사랑과 정들지 말자 너무 쎄게 껴안진 말자 피 말릴 사람 눈 속 굴리면 자꾸 자라는 사람 반기와 금기, 마구 나를 굴리고 논 사람 눈멀게 한 사람이 사라지고 눈뜬장님 사라지고 냉가슴 오래 앓아야 했다 눈 둑 넘어진 사랑이 가슴 밖에서 녹은 사람이 눈밖에서 질척거렸다 빙점을 앓는 한데 사람 치명에 놀아난 눈사람// 너는 봄에 녹고 나는 네 안을 평생 살 사람//

석양을 읽는 매뉴얼 / 전다형
하루를 던져 넣은 대장간/ 황홀한 우주 한 채 빚는 쇳물/ 해 굴리고 온 굴렁쇠가 멈춰선 몰운대/ 모루 위 올려놓고 망치 내리치는 대장장이/ 글썽이는 윤슬 내안의 열락 그리고 환/ 해거름이 지은 독박/ 주관적 진술만 늘어난 바다/ 먼먼 별이 하나 둘 7부 능선에 들 때/ 눈시울이 붉은 서녘 눈 둑에 올라앉은 수평선/ 혓바늘 벌겋게 돋은 혀/ 김 메고 잡풀 뽑다 온 괭이 호미 낫 이빨 빠진 연장/ 한 입에 꿀꺽 통째로 삼키는 서녘바다/ 머리채 잡힌 담금질, 무두질한 제 이력/ 제 손등 제가 치고받은 정면 승부/ 흥건하게 번지는 피눈물 훌쩍이는 파도소리// 가는 곳마다 쥐어박힌 피멍 자국/ 마른 해 놓은 빈 용광로에 양수 채워지고/ 내일을 달굴 불쏘시개는 어둠만한 게 없다//

미궁 / 전다형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타래를 풀었다 별 별 우거진 실패를 감는 밤, 풀리지 않는 매듭 실마리 물고 사막을 횡단하던 단봉낙타, 곳곳이 덫이다 제 등에 무거운 짐 지워놓고 네 다리 버등거리는 가엾은 생, 산 무덤 하나 생각이 지은 봉분, 썰물이 털어갔다 밀물로 차오르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뒤를 들키지 않으려고 앞을 숨겼다.// 내 안을 횡단하는 단봉낙타 사막이 숨긴 오아시스는 어디 있나? 실어증 앓는 사막이 바다에 대고 바람의 방향은 믿을 것이 못된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변덕 심한 바람에게 바람까지 맞았다 미로 곳곳, 먹이 사슬에 말레볼제를 매복시켜두고 위장술 강한 바람이 텀블링을 했다 사막은 제 능선을 이리저리 옮겨놓으며 낙타를 기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당달봉사, 동굴 탐사를 시작했다 엉금엉금 암장을 타는 공상, 무궁무진에 닿을까? 천리만리 달리는 레일을 타고 오만 생각이 오르내렸다 종횡무진 슬픔을 데리고 놀았다 눈물꼭지 노즐이 헛돌았다 조절 능력 잃은 만수위 울컥, 모래무덤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수 세기 전 수장된 사막이 떠오르기까지 펴를 깎아 절벽을 세운 파도, 흰 뼈를 드러내고 철썩인 내 안의 바다, 잔별 총총 속눈썹에 매단 낙타가 쓰러지자 미궁이 나가떨어졌다//

자경문 1 / 전다형
겨울 보리밭에 서리꽃이 피었다// 보리는 밟혀야 살 수 있다 서리꽃이 한창 필 때, 들뜬 뿌리를 가만 주저/ 앉혀야 한다 이쁜 자식 매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새싹에게 흙을 입에/ 물려야 한다 매를 아낀 어미에게 돌아온 까칠한 보리이삭 누렇게 익어도/ 그 버릇 못 고친다// 모질게 밟혀본 것들은 단단하다 겉이 단단한 것은 무른 속을 지키려는/ 위장술, 반구저기, 구만 리를 거슬러 투명한 얼음기둥에 닿는다 밟자, 모질/ 게 밟자, 보리밟기는 농부에게는 소출이고 시인에게는 수작이다// 귀한 것은 더디게 얻어진다 행과 연에 숨겨진 은유 그 너머의 대해 모진/ 말매 들지 않았다 자경문에 습작시를 비춰보는 수업시간 수염 까칠한/ 보리가 슬하에 저를 꿇어앉히고 ‘많이 밟혀본 새싹이 뿌리가 실하다’ 시위를/ 당긴 한 말씀,// 인이불발이라//

첫 꽃을 피우려고 1 / 전다형
가난이 온몸을 친친 감을 때// 수미산 꼭대기에 매달려/ 북두칠성 하나 몸에 새기고/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므두셀라// 모래언덕 위에 물구나무로 서서/ 몸에 맺힌 물방울 받아먹는/ 나미브 사막의 거저리//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사는/ 이천오백 년 된 웰위치아//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몇 만 킬로 사막을 넘는 낙타// 수천수만 주름을/ 접었다 펼치는 애벌레// 하루에도 칠십만 번/ 자기를 갈아엎는 파도// 제 몸 구석구석 후벼 파고 울어야 한다//

협죽도夾竹桃 -서시 / 전다형
그대 푸른 피가 잉크다/ 네 맹독(猛毒)을 찍어 치명적 시를 쓰리라/ 가혹한 짝사랑,/ 절절(折節) 구구(久久) 사랑을 잠근,/ 한 줄 맹독성의 문장,/ 일촉즉발(一觸卽發)의 독화살촉,/ 네 붉은 심장이 과녁이다//

본 / 전다형
백곡리 537번지에 가면 반쯤 주저앉은 사랑채 있다 망하고 나갔다더라 소문은 동네방네 밑불로 번졌다 아버지 모월 모일 심장마비로 세상 뜨자 독립자금으로 일평생 모은 문서 사랑채 서까래에 끼웠을 거라는 발 없는 말이 달렸다 전문 도굴꾼이 다녀갔다는 억측만 난무했다 사랑채 머리채를 잡은 불신이 우후죽순 돋아났다// #레// 실밥 터진 우애는 근심으로 우거졌다 끼리끼리 편을 가른 피붙이끼리 멱살을 잡았다 오른쪽 왼쪽 뺨을 주고받았다 뜬구름이 생사람을 잡았다 발굴의 목록은 맹자공자사상농자천하지대본에 나오는 호미낫삽쟁기 문양은 뜬구름을 닮았다// #미// 왁자지껄 노름판 열기만 후렴구로 남은 사랑채, 담쟁이 덩굴손이 바깥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걸어 잠갔다 사람 빠져나간 빈집은 저 홀로 폭삭 늙었다 눈 어둡고 가는 귀 먼 일가친척이 마을 어귀에 이 빠진 그릇으로 띄엄띄엄 나앉아 그해 겨울 아버지가 쓰다만 자서전을 줄줄 읽어줬다 슬퍼슬퍼 때마침 동란 때 생매장터였던 애장골에서 풀국새 울음이 가슴을 후벼 팠다// #파// 절골 삼박골 벗어나는 게 소원이었던 큰오빠 대처로 떠돌다 아버지 나이 겨우 넘기고 감꽃나무 아래 한 줌 재로 지나치자 팔순 줄 가무실 오라버니 열천 번 더 시래기 같은 가문을 줄줄 주워섬겼다 출세했다 추켜세우는 입치레에 배추이파리 몇 장 술값으로 내놓고 작은오빠는 은근슬쩍 마을을 빠져나갔다// #솔// 남은 가족 둘러앉은 자리, 깊숙이 묻어둔 슬픔을 꺼냈다 독립만세 부르다 끌려간 삼촌을 기다리다 돌아가신 할머니, 이 빠진 가문을 개발새발 구전설화로 엮어 난전에 팔았다 시시껄렁한 바람까지 거들떠보지 않았다 슬픔이 펄펄 살아 날뛰는 날이었다//

거푸집 / 전다형
귀농한 친구와 함안장 갔다// 대장간 삼천육백도 용광로에서 팔월이 끓어 넘쳤다 이 구간에 빠지면/ 이념도 욕망도 뼈도 없이 녹는다 4대째 이백 년이 넘었다는 허름한 대장간/ 양 벽에 호미 낫 삽이 제 무료를 걸어놓았다 검버섯이 만발한 주인이 앞니/ 빠진 입을 손으로 자꾸 가렸다// 이제나 저제나 문 닫아야 하나 공치는 날 많아지고 이마저 뽑고 잇몸으로/ 견디는 시간, 푸념이 길었다 천수답 농사철 잘나가던 시절, 허리 한 번 펴지/ 못한 그 때가 그리운 대장장이는 마을 집집마다 제 손 거치지 않은 사람 없다/ 입술에 침을 발랐다// 탈곡기 모 이양기 트랙터 자동 농기구에 밀리고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연장, 자고 나면 수북 돋아나는 풀밭, 소매 둘둘 걷어부치고 세상 악습 사정없이/ 자르겠다는 언약이 허언증을 낳고, 헝클어진 행과 연, 무딘 문장 펄펄 끓는 쇳물/ 에 담금질 한나절, 고투 잡힌 목쉰 울음, 무두질로 다스린 오일장 파장 무렵, 뚝딱!/ 시 북 돋울 호미 하나 장만하고// 잘 벼린 연장 앞에서 쩔쩔맸다//

수박, 꼭지의 자세 / 전다형
꼭지를 두고 T자 모형 줄기를 잘랐다/ 안전핀을 입에 물렸다/ 마주 보고 깔깔 초록은 동색으로 출발/ 마흔네 밤낮을 부풀리고 궁글린 햇살과 바람과 천둥과 풀벌레 울음까지/ 줄무늬 주름 폭이 깊어 갈 때 구심점은 조금씩 묽어졌으리라/ 하나의 의혹이 진심을 잃을 때 불온한 생각이 나날이 부풀 듯/ 세로줄을 날을 세운 굳어진 수박의 표정/ 큰 줄기를 놓치자/ 훅 당기면 뿌리까지 와르르 달려올 관계망들/ 검푸른 세로줄 테이블보 위에 시한폭탄을 두고/ 잘린 줄기에 대해/ 바닥을 기는 포복의 자세로 한 계절을 났다/ 플라시보 효과 사라진 약발이 부른 노시보 효과가 판을 쳤다/ 얼기설기 엉킨 일상의 낟 갈이가 필요하듯/ 서로 마디마디 간격이 필요하기도 하지/ 입방아를 찧고 까불어 붉은 오해를 가둔 폭발성은/ 부풀어 올라 안전핀도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지/ 뿌리로부터 출발했으나 도착지점은 달라/ 정조준이 필요한 한 뼘 거리를 두고/ 마디마디마다 잎맥을 숨겨두고 푸르게 웃지만/ T자 안전핀을 둘러싼 폭발음은 서로에게 경계의 자세로 남지/ 뽑으면 끝장날 관계처럼 줄기를 쥐고 있는 관계라는 광맥/ 하나의 뿌리부터 뻗어 나왔으나 한곳으로 수렴되지는 않아/ 천만 풍경으로 익어가는 붉은 물음들, 푸른 울음들/ 둥글게 자기를 굴리고 있는 생각들/ 말의 분화구에서 치솟은 소낙비와 건들바람과 오해/ 한 개의 뿌리로부터 터져 나온 갈래 길들이 네게로/ 건너가는 습한 생각들 설익은 표정들/ 비등점으로 치닫는 감정선/ 속이 상하기 전 생각을 엎질러버려야지/ 안전핀을 뽑자 바닥까지 칼끝 받아 낸/ 슬픔이란 내부/ 너 나 반으로 쩍 가르자/ 농익은 한 통 울음이 쏟아졌다//

 

하객들 / 전다형
눈도장부터 찍었다/ 방명록에 한 줄 덕담 덤으로 얹었다/ 귓바퀴를 맴도는 주례사 귀 똥으로 앉고/ 입저울 위 신랑 신부 얹어놓고/ 이쪽이 처지나 저쪽이 기우나,/ 눈저울 눈금 어림잡아보는 사람들/ 내세울만한 안면들/ 대내적으로 다 내세우고 나서/ 반반한 인사치레 번지러하게 바른 후/ 우러러 인산인해를 이루는 식당행렬/ 금기와 굴레여 튼튼하시라, 금가락지여/ 한 쌍, 나란히 웃고 섰던 자리/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던 그 자리/ 달콤한 사랑丸, 幻, 빚는 결혼식장/ 한 쌍, 여린 혀끝으로 간 볼 현실의 맛!//

중환자실은 울울창창 슐만의 숲* / 전다형
4.767년 된 므두셀라** 브리슬콘소나무***가 꿈쩍도 않고 두 달째 침엽수림의 자세로 누웠다. 완강한 은회색 철재 침대가 가사(假死)를 제공했다. 철침을 꽂은 긴장이 직사각형 침대머리 이름표로 몰렸다. 간간 요양보호사가 가자미로 누운 환자에게 모로 뉘이다 바로 뉘이다 자세를 바꾸는 것만으로 삶이 늘어났다. 나는 중환자실 바깥에서 임사(臨死) 체험에 들어갔다. 욕창(褥瘡), 내 욕(欲辱慾)의 창(瘡窓愴刱憃)을 내자 내 몸에서 썩은 시체냄새가 났다. 면회를 오는 사람이 킁킁 코를 막았다. 먹은 마음이 중얼중얼 기도문을 완성했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 울음줄기가 복도를 뻗어갔다. 가만 가늠해본 불효,// 효도의 형식을 빌미로 띄엄띄엄, 간헐적 회개의 시간은 일방적 산사람의 편의,// 석삼년 치매 영감 수발 손 털은 지 삼년 만에 덜컥 자기가 쓰러졌다. 캥거루족 자식 수발만 들다 온 그녀가 남의 손에 몸을 맡긴 것도 처음이다. 일용할 양식도 평생 동동거린 마음도 내팽개쳤다. 육신의 감방, 암갈색 번데기로 누운 그녀. 몇 달 째 핏발 선 고무호스가 사람과 사물 사이를 간신히 잇고 있다. 해발 3.048~3.054까지 오르내리기는 숨길이 생의 환호취락을 축조하나, 딸깍딸깍, 아래 윗잇몸 엇나간 틀니가 저승 문을 깨무나,// 면회 온 손자와 손녀는 빈소의 분위기는 영정 사진 빨이라며 행복한 표정을 찾아 열을 올리나,// 그레이트 베신 네바다 고산지대를 출발한 그녀. 록키의 동쪽을 헤매시는가? 하이트마운틴 인요국유림을 헤매시는가? 몰아쉬는 숨이 가파르다. 내 의식은 무의식이 숨긴 크레바스에 빠졌다. 첩첩산중, 슬픔의 고립무언이 억겁을 돌아 브리슬콘 자세로 임했다.// 의치에 물린 잇몸 찾아드리자. “아~ 아~ 입 크게” 귀 바퀴를 굴린 울음보.// 이물질을 범벅, 넘길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품 안에 넣고 키우던 캥거루 두 마리. 풀려나 병실 바깥을 어슬렁거렸다. 이 없이 잇몸으로 견딘 과반의 생. 말년이 가감없이 드러났다. 4.767년 된 므두셀라 브리슬콘소나무가 슐만의 숲을 버렸다.// 므두셀라 쓰러지고 첫 날 현옹수 넘기지 못한 시큼한 전복죽 버렸다. 뒷간 섟 가래에 시래기로 묶을 가족사, 아픈 생손가락 둘 (예순다섯 사별, 오십 중반 생이별) 뒷수발 들다 온 새가슴, 가만 덮은 가로줄무늬 병실이불이 훌쩍거렸다. 나는 주변 밝은 햇살 다 끌어다 그녀 저체온을 껴안았다. 창밖 계곡 물소리는 동결을 풀고 봄을 따라나섰으나 따뜻한 중환자실은 살얼음판, 은회색 철재 침대 다리 아래 쩍쩍 빗금 긋는 소리, 먼 곳을 응시하던 그녀 눈동자가 풀렸다. 봄, 들숨을 퍼 나르는 링거액이 맥을 놓았다. 위험수위 맥박 수도 차차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4.767년 된 므두셀라 브리슬콘소나무가 눈을 꾸-욱 감자 슐만 숲이 사라졌다.//
* 애리조나 대학의 애드먼드 슐만이라는 학자가 1939년 1955년까지 이곳에 사는 나무들 나이를 연구했는데 래드우드 국립공원의 가장 키가 큰 나무, 해발 3.000년 이상의 고지대에서 자생하고 있는 브리슬콘 소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약 4.800여 년간 살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슐만 박사는 발표직전에 심장마비로 작고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숲의 이름을 ‘슐만의 숲 Schulman Grove’이라 명명하였다. **슐만 박사는 가장 오래된 나무 이름을 므두셀라라 이름 지었다.
*** 중환자실의 시간은 더디게 갔다. 시간 멈춰있는 착각에 빠졌다. 고통의 시간은 길고 아파 회복을 기다리는 보호자의 심정은 천년만년 길게 느껴졌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의 나이 85 년이 4.767년 된 므두셀라 브리슬콘소나무와 맞먹는 시간이라 느껴졌다.

사과의 토대 / 전다형
얼음골 사과가 도착했다// 남명산 95-2번지* 곡률 에돌려 깎았다 왼손 엄지와 장지 활 삼아 어림잡은 후지부사홍로 아오리! 배꼽과 엉덩이 지축 삼은 정수리 툭 내리쳤다 사과의 핵심이 칼끝을 물고 늘어졌다 찔리고 찌른 입심을 푹 도려 냈다 움푹 파인 심중이 얼비치는 살얼음 한 입 와삭 베어 물자 착! 혀끝을 휘감는 한(寒恨閒) 통(痛)이 솔비톨 이었다.// 짧은 혀로 표정을 핥았다 달 가리키는 손끝만 본 그와 나 사이 프랙탈을 형성한 감정선이 풍혈을 앓았다. 우거진 오해가 산성화를 부추겼다 라쇼몽 현상이 출몰하는 사각지대에서 먹구름이 사과나무를 에워싸고 방언을 쏟아내었다 골 깊은 주름이 아코디언을 연주하자 불화음이 쏟아졌다 야들한 사과 꽃 고막이 천만 갈래로 찢어졌다.// 이러저러한 이명에 시달린 여러 해와 달, 사과나무를 짓밟아 놓고 간 음 이탈을 부추긴 힘센 한파에 내밀지 못한 악수? 동의보감, 내경외경잡병침구편을 이룩한 얼음골 사과앓이 앓음앓음 얼음이 꿀을 낳은 사과의 이변! 햇살은 춘화 현상을 모르고 빙점을 치고 오른 발아를 모르고 사과는 사과를 몰랐다// 냉가슴 오래 앓은 것은 달았다.//

*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밀양 천황산 중턱 위치, 명의, 허준에게 스승 유의태가 제 산몸을 생체실험용으로 내놓았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내상 1 / 전다형
서출지가 바닥을 보였다 연못에 힘껏 던진 돌이 뾰족한 산을 내밀었다 뿌리박힌 내상이 생겼다 뽑으면 움푹 파일 외상, 돌은 호수 전부를 앓았다 후다닥 봄비 거느린 그가 떠나고 남산의 부처마저 불국으로 떠났다// ​착한 백성의 기도에 귀를 연 연잎마냥 하늘에 청진기 하나 짚자 무심한 물에도 흉터가 생겼다 당신 떠나고 부풀어 오른 환부 담담해질 때까지 물거울 오래 들여다보았다 호수에 던진 돌 무게가 파장을 결정했다// 사랑니 빠진 자리 혀 오래 들락거렸다 시간이 고약을 발라주었다 홈 패인 상처, 고인 피 비린 맛, 황홀한 꼴림, 서서히 좁혀지는 상처의 반경, 물목에 멍에를 걸고 당신을 재었다 말뚝에 고삐를 매고 제자리 빙빙 돌았다 물목이 가늘어지고 목뼈가 드러났다 먼 곳에서부터 눈부신 당신이 왔다//

내상 2 / 전다형
가위를 든 정원수가 나타났다 대열을 이탈한 자 싹수가 노란 자 목을 댕강 날렸다 허공에서 푸른 피가 울컥거렸다 전지된 가지는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 것도 쥘 수가 없었다 입학금 등록금 납부금 거세의 명목이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철사가 분재나무 방향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버림과 바람 사이 크레바스가 생겨난 사북, 사북을 서성거렸다// 어린 것은 다 반짝거렸다 저다워 세상은 빛이 났다 자연은 치장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늘 아래 학(學)이 생기고부터 눈에 티가 생겼다 가위에 잘리는 어린 순에게 겨냥한 은총과 눈총 뒤에 파란 하늘이 있다// 고비 사막 넘은 모래바람이 시력을 떨어뜨렸다 유리창 너머 투명과 불투명 사이 때가 앉았다 시야는 좁아졌고 왜곡되었다 떨어진 시력이 풍경을 흔들 때 사전을 뒤졌다 아이는 자라 어른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른이 규정한 잣대는 엄격했고 규율이 목숨을 흥정했다 중요한 것은 쉬이 까먹거나 배워지지 않았다 내 눈의 대들보에 짓눌려 자주 무릎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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