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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혼(魂) / 손경찬

부흐고비 2021. 11. 25. 09:10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한 그림 앞에 섰다. 백발을 흩날리며 눈을 부릅뜬 늙은 여인의 그림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여자의 일생’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슴과 얼굴은 그녀의 살아온 자국처럼 온통 검버섯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그 무엇이 목줄을 타고 위로 올라오지만 입은 꽉 다물고 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그것은 다시 코로 올라가고 눈으로 갔다. 피눈물이 맺힌 눈과 흐르는 피를 막지 못하는 코가 대신 말을 한다. 그림은 여인의 자글자글한 주름의 세월만큼 참아 온 한을 담고 있다. 그녀의 표정을 빌어 작가는 세상의 아픔을 얘기한다.

그 그림을 그린 김성룡. 나는 그를 미친놈이라 부른다. 십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반 미친 것처럼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그림을 우연히 보고 반년에 걸쳐 작가를 찾아다녔는데, 정작 만났을 때는 그는 섬뜩하리만큼 냉담했다. 사람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을뿐더러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도 믿으려 들지도 않았다. 미친 듯이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세상을 등진 채, 신이 내린 듯이 그림만 그렸다. 그의 마음을 열고 내가 들어가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는 그림을 특이하게 그린다. 몇 자루의 유성 펜을 손바닥에 대고 고무줄로 챙챙 동여맨다. 피가 통하지 않아 파랗게 질린 손가락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무당이 잡은 대나무가 흔들리듯이 그는 무의식 속에서 손을 흔든다. 펜 끝에 일정한 힘을 가하여 살짝 살짝 쳐 나가면 선이 면이 되고, 면이 형상이 되고 분위기가 되어 느낌을 만든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혼을 도화지에 내 뿜는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기법이다. 그의 몸속에 또 다른 그가 들어가 있다. 마치 굿판에 선 듯이 춤추던 그의 혼이 화폭에 내려앉는다.

그림으로 말을 하는 그는 입을 다문다. 말이 없는 그는 몸 어느 구석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몰라야 하는 자신의 이기주의와 야비함까지 들여다본다. 그래서 힘이 든다. 남들처럼 모른 체, 아닌 척 살지 못하는 그는 매사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보지 않아야 편하고 듣지 않아야 자유롭다. 조금 덜 보고 덜 듣는다면 어쩌면 지금의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망각이라는 단어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이 한 번 들어 온 생각을 내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보지 말아야 할 만물의 아픔까지 보고, 듣지 말아야 할 영혼의 소리마저 듣고는 그것으로 가슴 속을 휘돌려 오장육부를 뒤흔들어 놓는다. 아플 만큼 아픈 혼이 손을 흔들어 내가 얼마만큼 아픈지를 그림으로 내보인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들은 그의 상처 자국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묘사한다.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어야 마땅할 폭력성을 공공연하게 불러오는 그 그림은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거부할 만큼 강렬하다. 더 집중하여 볼수록 다양한 선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분노와 좌절, 고통과 절망이 시각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환상적인 초현실주의 그림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 마치 내 속을 다 들여다보듯이 내 속에 잠재된 모든 것들을 깡그리 내보이는 그가 두렵다. 두려우면서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붙잡힌 손은 힘주어 내 손을 잡는다.

그의 광기어린 눈은 더 많은 그림을 그릴 것이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고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작가지만, 실제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내놓아야 할 것이 많은 그의 혼은 아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놓지 않으면 아프다. 아프지 않으려 내놓는 그림이어서일까. 보는 내내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의 작품이 좋아 나는 욕심을 낸다. 좋은 작품을 내놓는 그가 편안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도 내 마음 한쪽에서는 지금처럼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내놓기를 희망한다. 그의 가슴이 얼마나 아플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 이기주의는 그를 광기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내 마음속에 커다란 창고를 짓는다. 나는 그를 가두고 자물통을 채우고는 미친 듯이 그림을 낳는 그를 조그마한 구멍으로 들여다본다.

아프다고 지금 미치도록 아프다고 보내오는 그의 문자에 나도 아프다. 그 아픔은 내가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의 혼이 이제 더 내놓을 게 없을 만큼 평안해지는 날이면 나도 더 이상 그에게 더 좋은 작품을 요구하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평화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떠 올리다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든다. 너는 아직 더 아파야 한다. 더 많은 세상의 아픔이 너의 혼을 빌어 작품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세상의 아픔 속에 담긴 내 아픔을 어루만지는 그를 나는 사랑한다. 그 아픔이 다 한 날, 나는 그를 포근히 안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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