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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햇귀 / 박필우

부흐고비 2021. 11. 26. 08:52

누구나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찬 언덕에 지푸라기 깔고 누워 하늘을 양껏 봅니다. 저 홀로 하늘을 향해 우뚝 버티고 선 미루나무가 고독합니다.

십여 년 넘게 다닌 직장을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배낭 하나, 오랫동안 비워둔 내 마음의 빚 스케치북까지 챙겨 가는 뒷길에 정류장까지 딸아이 손잡고 슬픈 눈으로 따라나서는 집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알 듯 모를 듯 웃어 준다는 게 그만 슬픈 여운만 남기고 맙니다. 어디 갈 거냐고 묻는 아내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습니다. 문득 고향 마을이 떠올랐지만, 부모님은 물론 홀로 남은 형수마저 떠나버린 고향은 아득한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터미널서 한참을 망설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해가 궁금합니다. 그래! 서해로 가자. 일몰이 있는 그곳, 내 서해를 그려 오리라. 황토빛 한이 서려 있다는 그 전라도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처투성이의 마음은 어딘들 마다할까. 마치 바람을 따르듯 산으로 절로 계곡으로 돌고 돌았습니다. 고개를 드니 문득 서쪽 바다를 입에 문 항구에 와있습니다. 낯선 곳의 설렘보다 긴장이 온몸을 감쌉니다. 어둠에 갇힌 이방인은 넓은 바다를 건너서 막 뭍으로 올라선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바람은 항구가 몸부림치며 뱉어낸 비릿한 냄새와 섞여 생경한 이방인에게 서슬 퍼런 흉기로 변합니다.

어둠 속에서 온갖 번뇌에 뒤척이다 밤을 그렇게 났습니다. 어딜 가나 우리네 변함없는 군상. -안개 땜시 뱃질이 연착이랑께~.- 생소한 남도 사투리 속에 섞였지만, 아침의 기운을 빌어서 더 이상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안개는 조금 옅어졌지만 여전합니다. 항구도 나처럼 용기를 냅니다. 다행히 물결은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조심스럽게 달리며 가끔 뱃고동을 울립니다. 세상에 갇혀 나란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생면부지 섬 자은도에 도착했습니다. 소나무 빽빽이 우거진 섬, 밀물과 썰물이 어김없이 지는 곳, 곱디고운 모래는 인고의 세월 동안 바닷물에 힘주어 걸어도 굳은 가슴인 양 발자국이 생기지 않습니다. 침묵에 침전된 그리운 바다가 눈앞에 펼쳐있습니다. 군데군데 떠 있는 섬. 엷게 깔린 물안개.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랩니다. 찰랑대는 물소리는 노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화음을 이루고 사라집니다. 인적도 발자국도 없는 모래사장,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은 바다는 침묵으로 짓누릅니다. 시나브로 안개가 걷히자 붉게 타들어 가는 황혼의 노을이 서럽습니다.

자발적 유배객이 되어 작은 섬, 외딴집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마법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잘 빗질 된 마당이 가슴을 쓸어줍니다. 마당 가운데 짧은 다리의 살평상은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으라며 배를 펴 권합니다. 담장을 대신한 국화가 햇살을 머금어 바람을 받아 인사하고, 만고풍상을 견뎌낸 용트림의 소나무는 가지를 늘어트려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나는 어린 시절 고향 집 품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바라보는 젖은 눈길이 내 어머니를 똑 닮았습니다. 등을 토닥이는 감촉에서 내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앞니 두 개가 없어도 할아버지의 생소한 사투리가 정겹기만 합니다. 할머니가 거친 손으로 주물럭대며 만들어 주신 반찬은 여린 기억 속 어머니가 해주던 딱 그 맛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들었다 싶으면 살며시 문을 열고 잠든 나를 확인하던 어머니도, 아침을 먹고 바다를 찾을 때 멀리서 지켜보는 걱정 어린 아버지의 시선도 어쩜 그리 똑같을까요. 문득 내 가슴에 얽혀있는 절망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삼 일째, 뒤숭숭한 꿈자리 끝에 맞이한 스산한 어둑새벽. 찬바람머리 나그네는 단잠을 깨울까 조용조용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동안 받은 사랑을 팍팍한 도시의 잣대로 환산해야 한다는 것에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사례는 해야 했습니다. 준비한 봉투를 이불 아래 끼워놓는 것으로 마음을 숨겼습니다. 세상 여느 어머니처럼 타향으로 떠나는 아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 놓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힘들어도 참고 살아야제 잉~.”

부모의 마음이 되면 아무리 깊이 감춰둔 상처라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밥상 앞에서 들려준 아버지 말씀이었습니다. 잘 도착했노라 전화부터 하라는 늙은 아버지의 간곡함이 젊음을 부끄럽게 합니다. 할아버지 손에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목적을 잃은 봉투가 들려 있습니다. 꼬깃꼬깃 접힌 지폐 두 장을 함께 밀어 넣어줍니다. 얼굴은 화로에 덴 것 같이 화끈거립니다. 주름진 얼굴, 그 가운데 피어나는 잔잔한 미소는 석양의 낙조를 바라보는 것처럼 황홀했습니다. 배낭을 멘 채 마당에 넙죽 엎드려 큰절로 인사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론 처음입니다.

기이한 인연으로 불쑥 나타나 번잡하게 만들다 문득 공허한 외로움만 가득 안겨 준 꼴이었습니다. 무던했던 삶에 파문만 일으킨 것은 아닐까? 돌아서는 발길, 등 뒤에서 무엇이 툭 칩니다. 해가 떠오르기 전 노을 같은 햇귀였습니다. 기지개를 켜며 피워내는 붉은 기운이 집안에 넘쳤습니다. 기왓골 사이, 방문 사이로, 굴뚝 덮게 위로도 아름답게 퍼져 있었습니다. 아들을 거친 세상으로 보내는 노부부의 흰 머리와 주름진 얼굴 골골에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낯선 땅, 낯선 사람에게서 까마득한 부모님 사랑을 받았습니다. 노부부는 내 상처를 어루만져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게 한 훌륭한 연주자였답니다. 차고 쓴 세상을 견디게 하는 연민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주었으며, 그분들의 따뜻한 접촉은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깜박하고 두고 온 스케치북이 나를 대신하고 있을 거라 위로합니다.

내 앞에 짙게 깔린 운무가 거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이제, 내 삶은 그 의미를 되찾았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마저도 내 몸에 보약처럼 스며듭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청명淸明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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