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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유화 한 점 / 손숙희

부흐고비 2021. 11. 28. 13:03

보물인 양 아끼던 유화의 작가를 덕수궁미술관에서 그림으로 해후한다. 생존이 궁금해서 가끔 검색 사이트를 살피다가 3년 전쯤에 마음을 접었는데, 바라보는 그림 앞에 우뚝 서 계신 듯 환영이 느껴진다. 반세기 전 은사님이자 이웃사촌이셨던 화가 선생님이다.

마침 <광장-미술과 사회> 주제로 국보급 작품들의 전시를 하고 있다. 1900년부터 1950년 사이, 국내외에서 활동한 우리 미술계 작가들과 작품들, 그리고 문학 예술계의 거목으로 활동했던 작가들과 대표작들이 다채롭게 전시되고 있다. 한 시대의 사회상을 펼쳐놓은 광장이다.

최인훈의 소설 표제 <광장>이 주제에 초대되어 시대적 이미지를 아우르며 예술과 소통하고 있다. 20세기 초기의 문예지, 소설, 독립선언문, 영화 포스터, 최승희 무용발표회 포스터, 사진 등 암울했던 시대의 표현 예술을 광범위하게 선보인다.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선현들의 묵시록이다.

이응노, 박수근,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고희동, 이쾌대….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전설이 된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가다가 그림 옆에 붙은 한 명패 앞에서 내 눈을 의심한다. 분명 그분이다. ‘<피난민> 제목의 캔버스 유채, 1942, 작가 안승각,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라는 문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6.25 전쟁 후 반백년이 지나가도록 친정집 방에 걸려 있었던 유화의 작가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그것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는 작품으로 대접받으며 귀한 자리에 걸려 있으니 꿈만 같다.

6.25 전쟁으로 우리 가족은 청주에서 피란길을 떠났다. 엄마는 동생을 업은 채 보따리를 들었고 아버지는 등짐 속에 가산을 압축했다. 그 속에는 백일 된 남동생의 상반신 유화 한 장이 등을 기대며 세워져 있었다. 고샅길 마주하고 살던 화가 선생이 그려준 그림이다. 그 분은 일본의 미술학교를 졸업하시고, 선전(일제 시 국전)에 여러 번 입선 경력을 가진, 당시 사범학교의 미술 선생이었다. 전쟁 상황이 위급해지자 아버지는 그림부터 챙기셨고, 두 가족은 각기 다른 길로 황망하게 헤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적의 공습을 피해 험한 산길을 택했고, 인가 드문 촌락의 행랑채에서 밤을 지새웠다. 폭격이 시작되면 아궁이에 머리를 들이밀며 고비를 넘겼고, 날이 밝으면 다시 숨죽이며 걸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다섯 살 나의 걸음은 이틀에 칠십 리를 더 걷지 못했다. 지친 다리를 끌면서도 아버지의 등짐 위에 업히기를 거부하고 오뉴월 뙤약볕 강행을 고집했으니 부모 속이 얼마나 탔을까.

속리산 영역을 빠져나와 상주를 지나고 김천, 영천, 포항, 그리고 영덕까지의 머나먼 길을 걸으며 때로는 하늘 끝자락에 할아버지 계신 고향집을 신기루처럼 보았을 것이다. 생사가 오가던 길, 그 사경을 뚫고 고향집에 당도한 그림은 가족을 지킨 전사의 화신으로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틈틈이 그림을 바라보며 옛이야기를 했고, 헤어진 그 가족을 반추했다.

백일 즈음의 아기는 사랑스럽다. 예술가에게 미감을 자극한 매체는 이미지 표현의 모델이 된다. 동생은 한동안 화가의 집을 드나들며 모델이 되었다. 하얀 턱받이 위로 포동포동한 피부와 뽀얀 젖 냄새, 그리고 천성이 순해서 울지도 않았다는 아기의 성정까지 담은 유화 그림은 세월이 가도 그 느낌에 변함이 없었다. 동생은 평생을 부모님의 보람으로 살았고 좋은 추억만 남기고 먼저 떠났지만, 그림은 백 년을 못 견디고 소멸하는 육체를 모나리자처럼 오래 살게 한다.

황해도 연백 출신의 선생은 일본의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시고, 청주에 정착하여 사범학교, 교육대학에서 정년까지 후학을 가르치셨다. 청주와 충북미술협회장으로 충북문화예술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시며 초대회장, 최고위원으로 지역 문화예술의 초석을 닦으셨다. 미술학도 발굴과 제자 양성에 성심을 다하시고 존경받으신 교육자이셨으며, 자택에서도 항상 물감 스친 작업복에 화구 들고 캔버스 앞에서 살아오신 소박한 화가였다.

우리가 다시 청주로 올라가 진학할 무렵, 어머니와 함께 그 댁을 찾았다.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었다. 나와 동갑내기 아들은 소꿉동무 후에 처음으로 만났지만 낯설지 않았다. 인근 중앙극장에서 들려오던 ‘남십자성’을 따라 부르며 재롱떨던 꼬맹이들이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만났으니 격세지감에 어른들은 연신 감탄하셨다.

다시 검색창을 열어보니 선생은 은퇴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95년에 작고하셨다고 올라 있다. 연대를 미루어 생존이 어렵다는 예측은 했었지만 ‘작고’라는 글자에 가슴이 먹먹하다. 재미 서양화가로 크게 활동 중인 장남의 현대갤러리 초대전 안내문에 선생의 프로필이 함께 있다.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이라는 말씀처럼 자식이 성공하면 부모가 조명을 받는다. 20대의 나이에 주한미대사의 주선으로 뉴욕 초대전이 열렸었고, 천재화가의 명성을 얻어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드님의 후광이 선생의 업적을 밝게 비춰 준다.

검색을 포기했던 시점에 현대갤러리 초대전이 서울에서 있었다니 만남의 기회를 스쳐지나버린 듯 안타깝다. 어긋나는 일이야 인생에서 다반사지만 살아 있으면 훗날이 있고, 기다리는 세월만큼 마음은 더 깊어지리라.

내 어머니 생전에 선생 가족의 소식을 보내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



손숙희 : 1990년 《농민문학》 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대구수필가협회 회장 역임 자문위원, 한국문협, 대구문협, 대구여성문협. 수필집 『그 날 이후』. 대구수필 문학상. 모범공무원 표창, 황조근정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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