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물선, 마주보기 / 김애경

부흐고비 2021. 11. 29. 09:06

스크린의 느린 화면에서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에 떨어진다. 문득, 포물선 상의 한 점을 지나고 있는 느린 걸음의 내가 보인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화살촉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 패턴의 반복이라고도 한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한 지점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나이 들어가며 선택할 때 걸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좋게 보면 심사숙고를 하는 것이지만, 대범했던 성격이 소심해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인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작은 것에도 자주 망설인다.

남편과 건강검진을 받고 나와, 벌써 한 시간째 식당을 결정 못 하고 있다. 그도 딱히 결정하지 못하고 내 결정에 따를 심산인 듯, "글쎄 어디가 좋을까."만 반복하며 나란히 걷고 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분식은 위가 좋지 못해서, 중국집은 싫증이 나서, 패스트푸드는 모처럼 둘만의 식사인데, 파스타는 한쪽이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아서, 스테이크는 점심으로 부담돼서, 한식은 매일 먹는 것이니 등, 우리의 삶처럼 이런저런 이유에서다.

밖에 나오면 서로의 기호를 적당히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눈앞에 커다란 간판인 한방 삼계탕집으로 들어갔다. 나름 그 결정에 서로 만족한 듯 밝은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나란히 앉는 편이다. 마주 보자 남편이 많이 늙어 보였다. 불현듯 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마주 보고 앉으면 단점만 보여서 싸우게 된단다. 이런 내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메뉴판을 보고도 결정 없이 내 판단에 맡기고 있는 사람이 야속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히 앉았을 때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먹을 때 입가에 묻히고 먹는다. 먹는 속도가 빨라서 나는 반도 못 먹었는데 벌써 이를 쑤신다. 심지어 내가 먹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다 온다며 일어섰다.

​ 부부는 큰 인연으로 연을 맺은 후 함께 포물선 모양으로 걸어가는 영원한 함수 관계라고 한다. 포물선이라는 함수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좌선과 점으로 곡선을 그리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건강과 관련지어 함수관계를 연구한 결과가 흥미롭다. 배우자가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스트레스가 심하다 해도, 상대 배우자의 지지와 격려만 확고하다면 높았던 혈압이 안정권에 든다는 것이다. 사이가 원만하면 건강하다는 말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연인, 집안의 반대, 사랑의 도피와 같이 드라마틱하고 운명적인 사랑도 포물선의 내리막을 탄다. 하물며 우연하고 화려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현실적 사랑에 갈등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포물선의 정점처럼 뜨겁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처지도 많이 변했다. 이제 정겹다는 말, 눈빛만 보아도 심정을 안다는 말은 차츰 구태의연한 말로 포물선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마주보기보다 나란히 보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화장실에서 나온 한 남자가 뒤돌아서서 웃고 있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는 사인을 보낸다. 내가 잘 아는 남자 같다. 알고 지낸 지 30년이 넘었다. 신발 크기와 바지 치수도 알고 있다. 한때 한 눈의 시력이 바늘귀를 뚫었다는데 이제 그 눈엔 인공 수정체가 빛난다. 어쩌면 우리는 겨우 요만큼씩 아는 것에 서로 저당 잡혀 사는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자식, 남편과 아내라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준선과 좌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부라고 해도 서로 다른 인생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초점과 준선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운명의 두 축인 X축과 Y축을 넘나들며 고단하지만, 부단히 삶의 좌표를 그려가고 있다. 대칭축을 기준으로 큰 사발 같은 포물선을 반으로 나누면 반절은 행복, 기쁨 등 달콤한 맛이요, 반절은 아픔, 슬픔 등 씁쓸한 맛이 아닐까 싶다.

​ 심사가 상한 밍근한 하루의 여장을 풀고 등 맞대고 이불 속에 나란히 들었다. 오래된 먼지 냄새나는 사진첩 한 장이 풀썩 또 넘어가며 평범한 하루가 사위어간다. 그래도 부부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라지 않는가. '부부'라는 한글 문자를 보라. 돌아누워 남편의 눈을 마주 보니 그가 의아한 듯 매우 겸연쩍어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오늘은 같은 포물선을 그린 날로 기록될 것 같다.

뜨거운 사랑도 빛바랜 사랑도 사랑의 한 형태로 포물선 상에 있다. 사랑이든 연민이든 서로를 꼭 안아 보면, 어깨 위에서 엇갈린 두 얼굴은 하트 모양이 되고 두 몸은 맞닿아 포물선 모양이 된다. 못 믿겠거든 당장 오늘 큰 거울 앞에서 포옹해 보라. 매료되고 실망하고 다시 용서하고 그것이 포물선이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천계곡 단풍터널 / 이융재  (0) 2021.11.30
법화경(法華經), 연밭에서 읽다 / 이선옥  (0) 2021.11.29
조새 / 김희숙  (0) 2021.11.29
아호를 건네다 / 손숙희  (0) 2021.11.28
유화 한 점 / 손숙희  (0) 2021.11.2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