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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호를 건네다 / 손숙희

부흐고비 2021. 11. 28. 13:06

오랜만에 연결된 고향친구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이가 이쯤 되니 이름 부르기가 편치 않다고. ‘선생’으로 부를 처지도 아니니 호號나 아호雅號를 알려 달란다. 과거 선비들이 주고받던 대화를 마주한 느낌이다. 친구 사이에도 예를 지켰던 선인들의 흔적이 가까이 있음에 놀란다. 호나 아호처럼 본디의 이름을 대신해서 불러 주는 이름이 있어서 여유와 멋은 있지만 한편으로 번거롭다 여겼는데, 나에게도 호나 아호에 대한 생각을 해 보라는 벗이 있어 풍아한 이름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호의 유래는 주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우리의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예를 중시한 동양 풍속에 바탕을 둔 지식층의 문화였다. 연세 높은 분께 호를 사용하면 예와 격을 갖추어 드리는 느낌이 든다. 존경받는 지식인의 신분 대변이 되기도 하고, 예술인의 멋과 힘을 공감하게 한다. 뜻이 깊은 문자를 세우기 때문에 동양화 같은 운치와 사람의 독특한 향기에 젖을 수도 있다.

호나 아호, 자字는 본디의 이름자를 귀하게 여기던 시대에 누구나 편하게 부르기 위해 만든 별칭으로 내려왔으나 지금은 풍속이 바뀌었다. 학령기에 들면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호적에 오른 이름 하나가 줄곧 그 사람을 대신한다. 옛날에는 부모나 임금만이 부를 수 있었던 그 귀한 본명을.

문인, 학자, 예술가들은 흔히 작품에 아호나 호, 또는 필명을 붙인다. 스승이나 친지가 지어 주기도 했으며 자가 작명도 있다. 부모가 어린 시절에 불러주던 아명은 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에게 ‘집의 이름’과 ‘학교에서의 이름’을 설명해 줘야 할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가문의 항렬에 따라 지은 본디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에서 성장하면서 높은 신분이 아니면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관례 후 친구의 반열이면 자를 불러 주었고, 무난하게는 호와 아호를 불러주었다. 이처럼 성장 후에 그 사람의 향취와 독특한 개성을 담아서 불러주는 이름은 정겹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의술이 빈약했던 시대에는 성장하기도 전에 사망하는 생명이 많았다. 그래서 귀한 자식에게는 천한 이름을 따로 지어 兒名으로 불러주었다. 이처럼 몇 개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시대와 사회상에 따른 관습이었지만 옛 사람들의 정신적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일면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에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름에 동반된 여러 개의 호가 번거롭다 생각했다. 이름 앞에서 문향 어린 이미지를 추가하는 호가 멋스럽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만, 텍스트를 복잡하게 하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미숙했던 시절이다. 인생을 통찰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하나둘인가.

친구가 자신의 아호를 풀이와 함께 소개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자 말고는 다른 이름이 없다. 전자우편의 닉네임을 쓰기도 가볍다는 생각이 들어 이름에 대한 기억을 촘촘히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리고 어렵사리 그 한 사람을 기억해 낸다. 시공을 초월한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오랜 세월 잊혔다가 다시 떠오르는 사람이다. 『제니의 초상화』 속 몽환적 분위기가 상정되는 액자속의 인연이다.

푸르름 짙어가는 계절이었다. 고딕의 붉은 벽돌집 성당 주변을 서성거리던 나그네는 허기가 역력했다. 성채를 이탈한 수도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지팡이 짚은 차림은 누추했으나 지적인 풍모는 광채를 두르듯 압도했다. 책을 사려고 간직했던 책값을 밥값으로 드렸고, 근처의 나무그늘에서 심오한 철학의 설법을 이틀이나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발신인 주소 없는 편지를 받았는데, 명필 명문의 글은 설법만큼이나 황홀했다. 그 속에는 작명한 나의 아호가 선물인 양 새겨져 있었다.

-나奈, 원媛- 어찌할 나, 아름다울 원.

참으로 고운 이름이었지만 분에 넘치는 찬미라 민망했다. 그 후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푸른 시절에 받은 파스텔 그림 한 장인 듯 내 인생의 화첩에 끼어 오래 숨죽이고 있었나보다.

학창 때는 고아한 이름을 갖고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권의 공식적인 일들이 기존의 이름으로 줄줄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나를 대신하는 고유의 기호라는 데 의미를 두고 욕심을 접었다. 그런데, 호를 불러야겠다는 친구의 제안은 나이에 초점이 있다. 코흘리개 고향 동무에서 칠순의 나이까지 살아온 벗들에 대한 감사와 배려이며, 친할수록 예의를 소홀히 하지 말자는 약속을 청하는 말이다. 이제 호를 새로 짓기도 마뜩지 않고, 어디 부탁하기도 쑥스러운 일이라 학창 시절 꿈속처럼 받은 그 이름을 아호에 붙인다.

생각하니 글자에 담긴 뜻을 바라면서 평생 힘쓰고 살아야 할 이름이다. 우아한 이상이 담긴 글자가 아닌가. 귀한 아호雅號를 주신 분께 때늦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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