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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혁명과 빈 둥지 / 이형수

부흐고비 2021. 12. 3. 09:00

길을 세 번이나 헤맸을까. 드디어 창수면 신기리 병풍바위에 닿았다, 둘러싸인 암벽들 아래는 경사가 심하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였을 터가 보였다. 터를 따라 난 2021년 ‘영해동학혁명기념회’가 복원해 놓은 탐방로를 따라 영해 접주였던 박하선의 옛 집터에 왔다. 병풍바위 양쪽으로 수피(樹皮)가 거칠고 마구 자란 나무들이 서로 엉켜 있었다. 영해 읍성이었던 영해면 사무소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병풍바위가 지킨다. 그 틈바구에 1미터가량 자란 한 그루 상수리나무 우듬지에는 빈 둥지가 있다. 새가 떠난 빈 둥지를 보자 ‘새들에 울음소리는 하느님에 울음 소리라’고 하던 해월 신사의 법설(法說)이 생각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천지 기운인 생명력으로 살고 있다는 생명 사상을 깨우치려 한 말이 아닐까. 혁명의 시원지에서 만난 어린 새를 키우고 떠난 낡고 오랜 보금자리는 아팠던 생명의 흔적이었다.

복효근 시인은 ‘다친 새를 위하여’라는 시에서 상처받은 자만이 고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밤새 새는 / 부서진 길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 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 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혁명이란 상처받은 자들의 고운 노래가 숲을 흔드는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한 듯하다. 150년 전 동학도들은 조선 왕조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핏빛 혁명으로 세상을 엎어야 할 때라고 여겼다. 500여 동학도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혁명의 전초기였던 병풍바위 곁의 숲은 빈 둥지처럼 외롭고 적막했다.

1863년은 36세의 최시형이 수운으로부터 ‘해월’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동학의 2대 교주가 되는 해였다. 아울러 대원군과 고종 부자가 집권한 해이기도 하다. 집권 이전을 전 근대사와 이후를 현 근대사로 나누어 보자. 대원군이 집권하자마자 집행된 사건이 있다. 바로 1864년 3월 10일 오후 2시경 수운 최제우(1824~1864)를 대구 남문 개울가에 있는 관덕정 뜰에서 참형시킨 사건이다. 41세 나이로 大明律(대명률) 祭祀編(제사편)에 있는 禁止師巫邪述條(금지사무사술조) ‘잘못된 도에 호응하여 정도를 어지럽히고 또는 도상을 숨기며 향을 태우고 사람을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해산하면서 겉으로는 선한 일을 수행하나 인민을 선동해서 우두머리가 된 자(者)’ 즉 左道亂正(좌도난정)율에 의해 참형시켰다. 좌도난정은 서학 천주교 처벌 판례인데 그 판례로 동학을 처벌한 것이다.

최제우 교조는 유불선 삼교를 섭렵했다. 천주교 전도에 자극을 받아 한국 사상으로 집대성했다. 이 사상이 바로 동학이다. 동학의 경전인《용담유사》는 한글 가사로 썼고《동경대전》은 한글 생각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동학의 핵심사상인 인 ‘天心卽人心’ 하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 그러니 민심이 천심이라는 평등사상이 집권자들에겐 서학 동학을 가리지 않고 처단한 동기이며 사형시킨 죄명이다.

해월 최시형(1827~1898) 2대 교주는 1865년 10월 28일 마북리 검등골에서 한 첫 법설이 차별 철폐였다. 양반과 상놈을 차별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이유요,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는 것은 집안을 망치는 일이라며, 차별 없는 세상을 동학도들에게 가르쳤다. 그 당시 동해 변방인 포항과 영덕, 영해 지방에는 삼정으로 난리였다. 그 공포스러움이야 말로 다 못했을 것이다. 흉년으로 곤궁한 민초들이 해월의 평등사상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교세 확장이 되어 초기 16개 접소(接所) 중 영해 접소는 대 접소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어두운 시기에 태어났지만, 모화사상에 젖은 지배층을 향해 중화의 본래 주인은 단군이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실패한 이필제(1825~1871)가 있었다. 그는 영해 창수면 신기리 병풍바위 아래 박사헌 집에 머물면서 혁명을 준비하였다. 해월에게 만나달라기를 다섯 번이나 요청했다고 한다. 드디어 1871년 1월 해월은 강수와 함께 박사헌 집에서 만났다. 해월은 가을로 미루려 하였으나 구향에 대항하는 신향의 동학도들이 대부분 혁명에 동조하여 어쩔 수 없이 승낙하였다. 영해 동학혁명을 일으키기 6년 전부터 영양 위대치 마을에서 수운 순도 후 동학 교단의 재건에만 몰두하였지만, 혁명 후 험난한 미래를 감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운의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 척결을 위해 수운 교조 7주기인 1871년 3월 10일 봉기를 계획하고 사발통문을 하여 동학의 조직동원과 자금 지원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병풍바위 아래서 천제를 지낸 뒤 전국 16개 접소의 동학도, 농민, 어민, 보부상, 유생 등이 모였다. 500여 명은 두건을 쓰고 푸른색 도포를 입고 영해 부 관아를 야습하여 부사 이정을 문죄 처단하고, 곡간을 열어 어려운 백성들에게 식량과 돈을 나누어 주었다. 격론 끝에 후일을 도모하자며 자진 해산하였다.

영해 동학혁명은 민족 최초로 시민 혁명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백성들의 곤궁함을 모르는 대원군의 집권욕으로 114명이 희생되고 많은 사람이 옥고를 치루었다. 결국, 동해안 지역의 동학은 사라졌다. 해월은 끝없는 35년(1864~1898) 잠행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곤궁함을 겪은 해월은 구한말의 피폐해진 백성들을 보니 함께 하고 싶었다.

(유무상자(有無相資) -가진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돕고, 개벽운수(開闢運數)-새한울.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다. 라는 세상을 꿈꾸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잠행했던 200여 곳이 모든 이웃의 벗이 되려던 구도의 흔적이기도 하다.

팬데믹으로 삶은 더욱 각박해졌다. 갈수록 빈부 격차는 심하다. 가진 자들마저 타인의 아픔을 보듬는 것이 아니라 외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살기가 점점 어렵다. 사회는 정신적인 피폐로 중독증과 우울증이 만연하고 있다. 시대가 낳은 상처를 치유하려면 자신의 참된 생명의 모습을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타인들 마음과 회심하여 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리라. 사람과 사람이 위로하는 세상, 만물이 공존하며 우주 만물이 화목하게 사는 세상. 율려와 대동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이 시대의 마지막 등불일 것이다.

병풍바위 산허리 숲에 어둠이 내린다. 육추의 아픔을 삭이고 떠난 새들의 우듬지에도 어둠이 깃든다.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혁명도 숲으로 스며드는 어둠처럼 오늘따라 고독하고 적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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