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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실키의 어느 하루 / 장호병

부흐고비 2021. 12. 11. 11:38

생은 짧고, 수컷의 하루는 길다.

몇 번이나 들어보았음직한 이 한 마디에는 생명체들의 세상 진리가 다 들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실키. 그가 나의 산장에 온 지 꼬박 아홉 달을 채우고 있다. 양력 정월 열이틀, 살을 에는 밤 팔공산을 넘어 이곳 보현산 자락까지 흘러왔다. 민들레 홀씨가 양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바위틈에 자리 잡든 비옥한 땅을 차지하든 그것은 민들레의 의지가 아니라 바람의 소관이듯 실키의 운명 또한 그가 관여할 수 있는 바는 아니었다.

그의 본명은 실크 팔리쉬. 깃털은 흰 비단실처럼 가늘고 눈이 부시다. 그는 팔공산 수태골 어느 팬션에서 야생으로 방목되던 관상용 수탉이다.

내가 정작 관심을 두었던 것은 몸집이 작고 꼬리가 아름다운 태국산 싸움닭이었다. 야생 닭을 사로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갈 때마다 허탕을 쳤다. 섣달그믐을 하루 앞두고 주인은 생후 두 달 된 관상용 흰 암평아리 한 마리를 간신히 붙잡아 주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라 집에서 사나흘을 보내고, 산장에 닭장을 지어 옮겼다.

아무리 미물이라 하나, 수은주가 영하 십수 도에 머무는 이 산중에 저 혼자 두고 나만 따뜻한 방에서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조바심 속에서 한 주일을 보냈다. 그 팬션 주인이 천신만고 끝에 다시 붙잡아 준 것 중 하나가 실키다. 다리는 검푸르고 발에는 흰털이 나 있다. 그 날 암탉 두 마리가 함께 따라 왔는데, 흰 자보와 오골계의 일종인 블렉코친이다. 이들의 나이는 대략 다섯 달 정도 되었다.

꽁지깃의 크기나 윤기를 남성다움의 잣대로 여긴 나의 짧은 소견 탓에 실키는 나의 관심에서 조금은 멀어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 불만은 실키의 몸값이 나의 속물근성을 잠재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그의 귀공자다운 자태는 나의 방문객들에게 여전히 자랑거리였다.

미성년으로 나에게 왔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실키는 끓어오르는 남성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룸메이트들에게 성은을 베풀기 시작했다. 얌전한 자보의 등에 가뿐히 올라서서 사랑한다 속삭이고, 조금은 사나워 보이는 블렉코친에게도 사랑을 나눠주곤 했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그게 사랑한다는 표현인지조차 모르는 막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때마다 블렉코친이 그 앞을 막아섰다.

암컷이 둥지에 알을 낳고 나오면서 꼬꼬댁 소리를 지르면 그는 멀리 있다가도 희색이 만면하여 쫓아온다. 왼쪽다리를 축으로 하여서는 오른쪽 날개를 퍼덕이며 시계반대방향으로 두어 바퀴 돌기도 하고, 때로는 알을 낳은 암탉 주위를 몇 바퀴 빙그르 돌면서 위로와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나 보다.

세 마리 암컷들이 함께 알을 품기 시작했을 때 그는 스스로 보초를 섰고, 암컷들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을 때 그 또한 먹는 일에 흥미가 없었다. 마침내 햇병아리 열네 마리가 태어났다. 어느 때보다 그는 생기를 찾았다. 그가 병아리들이 먹기 좋게 모이를 골라내거나 잡은 벌레를 물고 있으면 어린것들이 달려들어서는 빼앗아 갔다.

내가 뒷산에서 긁어온 부엽토를 넣어주면, 그는 흙을 죄다 파헤쳐 굼벵이나 지렁이를 잡는다. 잔디밭에 나오면 방아깨비나 메뚜기를 잘도 잡는다. 하지만 이 맛있는 먹이들을 제 목구멍으로 넘기는 법이 없다. 구구 소리를 내어 암컷이나 새끼를 부르면, 그들은 실키의 부리에 걸린 것을 넙죽 받아먹어버린다. 반면에 암컷이나 새끼들은 지렁이라도 한 마리 물게 되면 혼자 먹기 위해 구석자리를 찾아 도망치고,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다른 암컷이나 새끼들의 추격전이 벌어져서 참으로 볼 만한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병아리들도 대여섯 달이 지나니 암수가 구별이 되고 어버이보다 더 큰 녀석도 있다. 어미나 아비 또한 순종이 아니었기에 수컷 중에는 태국산 싸움닭의 잡종도 있다. 어미닭들에게 조심스레 수작을 걸기라도 할라치면 이를 눈치 챈 실키가 어디고 따라가서는 혼을 내주곤 한다.

그 골칫덩이 수컷들을 포함하여 새끼들을 다른 사람에게 분양하려고 떼어놓았을 때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가족을 건사하려는 가장의 책무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늘은 이웃집 진도견 수미가 마당에 풀어놓은 그들을 덮쳤다. 실키는 수미를 용케 유인하여 가족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곤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 제 한 몸 편히 호사를 부릴 수 있음에도 그는 암컷과 새끼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며 지난한 수컷의 임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불꽃같은 삶을 산 실키에게 오늘 하루는 가장 긴 날이었다. 그리고 행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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