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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칼과 도마 / 심선경

부흐고비 2021. 12. 10. 08:43

악연이다. 너와 나 사이엔 오로지 끊임없는 전쟁만이 계속 될 뿐이다. 그 뻔뻔한 낯짝이 이제 막 물오른 듯한 싱싱한 야채를 만나 어떻게 요리해볼까 깐죽대는 꼴이란 차마 두 눈 뜨고는 못 볼 만큼 아니꼽다. 너는 유달리 고깃덩이를 선호했다. 정육점에서 뭉텅이로 잘라 온 아직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홍두깨살을 보는 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네 몸 위에 던져진 제물을 향해 너는 사악한 뱀처럼 혀를 내밀어 그 뜨거운 피를 빨아들인다.

너의 몸과 더불어 뒹굴던 다른 매운 몸들이 질투로 활활 타오른 내 손에 의해 으깨어지고 짓이겨진다. 선창가의 비릿한 심장들이 파닥이며 너의 가슴팍에 안겨들 때 네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가 부아를 치밀게 한다.

너는 근본을 속일 수 없는 원초적 카사노바!

인간 세상에서는 이렇게 앙숙인 우리를 왜 인연 패로 짝 지워줬는지 원망 아닌 원망을 해보곤 하지만 쉽게 팔자를 고칠 수도, 운명을 바꿀 수도 없는 터이라 스스로 속을 달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냥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내가 아니다.

주인을 꼬드겨 몸을 숫돌로 단련시키고 시퍼런 날을 세워 네 등짝을 난도질한다. 그럴 때마다 형광등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쾌락의 순간은 짧으나 고통의 시간은 길다는 말이 실감났을 게다. 너의 배 위에서 뒹굴다가 내 손에 처단되는 어쭙잖은 속물들과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네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머뭇거림도 거절도 없이 너는 누구에게나 네 몸뚱어리를 쉽게 내준다. 원하는 자라면 맘껏 너를 탐닉한다. 언제나 지극히 관대한 너의 태도가 내 눈에는 가시였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너를 철저히 응징하고 처단하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었지만 아무리 혹독하게 단죄해 본들 너의 타고난 바람기를 잡기 힘들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끊임없는 공격에 두 손 들 법도 하건만 너는 단 한번의 신음도 없이 용케도 그 순간들을 잘 참아낸다. 반격도 저항도 없다. 어쩌면 내가 독이 올라 날뛰는 모습을 너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한바탕 칼바람을 일으키고 나면 인간세계의 절대자가 나타나 측은지심에서인지 피투성이가 된 서로의 몸에 찬물을 확 끼얹는다. 그리고는 바깥출입이 용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가끔은 일광욕을 시키기도 한다.

어느 해맑은 날, 나는 보았다. 비스듬히 가스통에 기댄 벗은 몸을, 길게 혀를 빼문 햇살이 다가와 핥아줄 때 움찔움찔 놀라는 듯한 너의 어깨를. 네 몸 깊디깊은 곳까지 파고든 무수한 상처의 냄새들을 지척에서 맡았다. 등짝에는 그 동안 내가 무수히 내려찍은 상처로 이제는 어떤 것으로든 메워질 수 없을 만큼 견고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내 안에 도사린 너에 대한 미움의 벽이 사정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무엇에 굶주린 듯 깊게 파인 너의 상흔. 토막난 죽은 몸들의 피거품을 물던 너는 죽지 않을 만큼의 상처를 보듬으며 그 암울한 시간들을 나와 겉돌았던가. 네가 지켜온 시간, 핍박의 순간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힘은 너의 품에 느껴졌던 다른 몸의 맨 처음 감촉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너의 상처가 깊을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잘게 다져지고 쉽게 토막나던 제물들이 예전처럼 단번에 절단되지 않는다. 움푹 파인 네 몸의 상처로 날이 부러지는 아픔까지 맛보아야 했다. 가끔은 그것에 화가 치밀어 서슬퍼런 얼굴로 너의 심장을 겨누지만 깊은 상처는 견고한 성벽처럼 도리어 나를 튕겨내곤 했다.

무수한 난도질로 어느 한곳 성한 데가 없던 네 몸은 세월의 때에 전 손금처럼 좌우로 무질서한 잔가지를 내다가 이제는 그 상처들이 모여 완벽한 하나의 조직을 이루어 놓았다.

고통의 절정에서 느끼는 야릇한 카타르시스처럼 나른하고 편안한 잠을 청하는 너.

이런 악연인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은 여전히 우리 사이를 떼어놓지 않는다. 달콤한 환상의 세계를 맛보기도 전에 질투의 화신인 내 손에 무차별 공격을 당하는 너는, 이미 오래 전 낡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꾸깃꾸깃해진 연민의 정이 담긴 쪽지를 꺼내 펼쳐보도록 만든다.

문득 우리의 이런 엽기적인 행각이 인간세계의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극한 아픔의 순간을 아무 소리 없이 참아내고 상대방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그걸 지켜보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들이라며 혹자는 우리 커플을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우리의 완벽한 궁합이 이뤄지지 않았던들 인간들에게 차려지는 진수성찬을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수 있었으랴. 남들이 뭐라 하든지 나는 우리 커플의 악연이 계속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신전에 제물이 오르면 짐짓 엄숙해진다. 숫돌에 갈아 시퍼렇게 날을 세운 내 몸이 이제 후끈 달아오른다.

내 앞에 있는 도마에게 묻는다.

“너, 지금 떨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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