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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정 시인

부흐고비 2022. 1. 14. 23:33

강정 시인
1971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지만 이사를 자주 다녔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91년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항구〉외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침소밴드 리드보컬, THE ASK 멤버로 활동했다. 2015년 제4회 시로여는세상 작품상, 제16회 현대시작품상, 2017년 제3회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시집으로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커다란 하양으로』 등이 있다.

 


 

아침의 시작 / 강정
어젯밤엔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그림자가 죽었다/ 문지방 앞에서 흘러내린 어둠엔 꽃냄새가 가득했다/ 달의 뒤편으로 추락하던 지구가 새로운 별을 임신했다/ 한가에 남아 있던 냉기가 시간의 한 틈을 조개었다/ 문득 별이 터지니 죽은 내얼굴이 해바라기처럼 웃었다/ ​십년 전의 벗꽃들이 폭약처럼 터졌다/ 이제 나는 슬프지 않을 거야,​ 노래 부르며/ 한 아이가 문 밖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낡고 메마른 굴렁쇠가 수평선 바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 강정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이야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어/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내 체온이 닿았던 것들은 나 이후로/ 사망의 시간 속에 스며들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로/ 내 체온이 발원하는 지점 깊숙이 파고든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 한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 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 짐승과도 같다는 것/ 들려주려니 말이 자꾸 새끼를 치지만,/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 일이듯/ 붓끝에서 뭉치거나 흩어진 물감들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저 나름의 궤도로 일렁이면서 시간의 어느 정점을 물들이면/ 나는 곧 나로부터 이탈되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 들려주려니 땅이라 이름 붙였지만,/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

키스 / 강정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 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 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 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 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노래 / 강정
숨을 뱉다 말고 오래 쉬다 보면 몸 안의 푸른 공기가 보여요/ 가끔씩 죽음이 물컹하게 씹힐 때도 있어요/ 술 담배를 끊으려고 마세요/ 오염투성이 삶을 그대로 뱉으면 전깃줄과 대화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뜯어 먹은 책들이 통째로 나무로 변해/ 한 호흡에 하늘까지 뻗어나갈지도 몰라요/ 아, 사랑에 빠지셨다구요?/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고 하지 마세요/ 숨이 턱턱 막히고 괄약근이 딴딴해지는 건/ 당신의 사랑이 몸 안에서 늙은 기생충들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저 깃발처럼./ 바람 없이도 저 혼자 춤추는 무국적의 백기처럼, 그럼요 그저 쉬세요. 즐거워 죽을 수 있도록//

​ 활 / 강정
시간이 이 세상 밖으로 구부러졌다/ 시여, 등을 굽혀라// 고양이 새끼가 운다/ 어미 고양이를 삼키고 사람이 되려고 운다// 급류를 삼킨 노을이/ 노을이 아빠가 되려고 운다// 떠돌다 지친 다리가/ 다른 인간의 눈이 되려고/ 멀고 먼 샅으로 기어올라온다// 빛이 어디 있는가/ 뒤집어진 어둠의 골상을 판독하려/ 한나절의 시름이 그다지 깊었다// 못 나눈 정을 전염시키려/ 낮 동안 오줌보는 그토록 뾰로통했다// 혈관에 흐르는 오래된 문자들을/ 고양이의 꿈이 딛고 지나는 이마 위에 처발라라// 팔다리는 공기가 멈춘 나무/ 낭심 아래엔 죽은 별 무더기// 구부러진 어깨를 펴라/ 갈빗대에 힘줄을 얹어/ 마지막 숨을 길게 당겨라// 발끝으로 세계의 끝을 밀어내고/ 이승 바깥에서 돌아 나오는/ 흰 새벽의 눈알을 찔러라// 터져 나오는 세계의 명치에 구름을 띄워/ 이면이 없는 幻을 쳐라, 고요히 실명하라// 실명하라//

총 / 강정
가지고 싶은 것들은 모두 꿈속의 사물/ 적멸 다음의 단호한 증기/ 총!/ 소리 내 불러 본다/ 잠의 바깥은 온통 시체들/ 누가 나를 카메라에 담는다/ 망막에 얹어 빙글빙글/ 병신춤을 추게 한다/ 나는/ 밤의 거대한 액정 속에서/ 죽은 자들의 미련한 대화를 흉내 낸다/ 마주치면,/ 입귀를 바르르 떨면,/ 눈에는 뼈/ 혀에는 창자/ 밤이슬엔 오욕/ 죽음엔 웃음으로 대거리한다// 총!/ 이 소린/ 이승의 뼈 사이로 스민 백 년 전의 통증 같고/ 총!/ 이 소린/ 평생토록 저주가 된 고백의 종지부 같다/ 그렇게 다들/ 총!/ 소리를 낸다/ 과녁은 멀고, 보이지 않는데/ 소리가 닿는 곳마다/ 푸릇푸릇한 연기가 오른다/ 땅은 습하고/ 불꽃은 짱짱하게 울다가/ 공기의 다른 형태를 부추겨/ 예술이라는 망집을 낳는다/ 새와 나무/ 집과 사람/ 꿈과 비명/ 똥과 환락의/ 무늬들이/ 총!/ 소리와 함께/ 탄탄한 근육으로 부푼다/ 나는 저것들을/ 시든 화분 속에/ 먹다 남긴 밥그릇 속에/ 오르지 못한 사다리 위에/ 하나 하나 옮겨/ 가늠자 중앙에 놓는다// 꿈속 사물들이/ 꿈 바깥의 눈들을 향해/ 총!총!/ 쏴 대는 소리의 점막들/ 거대한 밤의 액정,/ 그 차가운 밀림의/ 증폭된 강선을 꿰뚫고/ 액정 바깥 사물들의/ 눈을 찌른다/ 깨질수록 단단해지는/ 유리막 속,/ 소용돌이치는 꿈의 막간/ 거미줄처럼 금이 간/ 시간의 가느다란 힘줄들/ 갈지자 선율로 찢어지는/ 적막 뒤,/ 부드러운 단말마의 기도/ 깨지는 유리, 유리로 응결된 탄환,/ 탄환들!!//

누드 / 강정
옷을 벗고 서 있으려니/ 더 단단한 껍질을 껴입은 듯싶네// 문득, 달의 심정을 헤아려보네// 누구를 대신해 빛을 발하거나/ 누구의 시혜를 입어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거나 하는 일/ 사람도 매번 그렇게 다른 것의 그림자라는 것// 이미 발가벗고 있지만/ 더 벗고 싶은 게 있다는 듯/ 나는 내 몸이 스스로에게 하는 소리를 듣네// 매우 고요하네// 신음과 비명이 같은 입이고/ 향기와 구역이 또 같은 코의 일이라/ 심장은 오랫동안 저 자신의 줄기를 찾느라/ 또 그토록 부산하였네 보네// 진흙 버무려/ 벗고 있는 나를 자네가 빚는 동안/ 자네가 발가벗긴 나를 자네 눈으로 보네//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이 또 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니/ 자네가 살려낼 그 사람의 알몸을/ 내가 다시 입을 순 없을 것 같네// 거기 다만 입 맞추겠네/ 내 입을 본뜬 그 입술이 뱉는 말// 온전히 나와 닮지 않는 부분들만 詩로 굳었더라네//

아픔 / 강정
계절을 잊은 눈비가/ 땀구멍마다 들어찬다/ 몸 안에 잠자던 운석이 눈을 뜬다/ 목탁 구멍 같은 뼈마디 사이로/ 이승이 밀려 나간다/ 구름들의 뒤 통로에/ 짓다 만 집 한 채 스스로 불탄다/ 마지막 입술이 한참동안 떨린다/ 나부끼는 재(災)/ 누군가 텅 빈 문을 열고/ 타다 남은 햇살을 주워 담는다/ 뜻 없이 불러본 이름들이 마음보다 길게 늘어서/ 지나온 이승에서 즐겁게 눈물겹다/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된다/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새 이름을 얻는다/ 계절이 빠르게 바뀐다/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다 닿았다//

백치의 산수 / 강정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 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본다/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 물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거나// 이 집엔 많은 신발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 있구나//

유리의 눈 / 강정
병이 깨지자/ 자잘한 유리들이 발톱을 세웠다// 둥글고 매끄럽던 세계가 뾰족한 가시의 숲으로,/ 투명하게 이지러진 팔차원의 흉기로 변한다// 따끔거리는,/ 사물의 모든 흉곽이 뒤집어진,/ 어둠이 밝음으로./ 구체가 수직으로 곤두선,/ 태양 반사광이 시린 실명의 빛으로 거듭나는,/ 세계의 숨은 그림// 병의 더 깊은 형태는 자디잔 유리알들의 난반사다/ 지워진 너는 그곳에서 더 빛났다// 하나에서 천 마디 만 마디로 분절된,/ 유리의 눈으로//

자멸의 사랑 / 강정
조용히 내 말에서 귀를 거두시오/ 내 말이 불현듯 낙뢰를 타고 창가에 부서질 때,/ 그 부서지는 시간의 피톨들이/ 정녕 당신이 들어야 할 소리인지도 모르오// 내 말을 믿지 마시오/ 차라리 내가 사레들려 헛기침을 하거나/ 당신이 애써 감추려는 피부의 작은 돌기를 도적마냥 쳐다볼 때면/ 그제서야 당신은 손톱만큼만 나를 믿어도 괜찮소/ 나는 거짓을 그리는 우매한 소경이라오// 내가 본 것들을 믿지 마시고 내가 그린 것은 더욱 믿지 마시오/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만 겹의 얼굴 뒤에/ 불온한 얼룩으로 묻은 시간의 고름일 뿐이오/ 나를 믿느니 속옷에 묻은 당신의 부끄러운 땀 냄새나 오래 바라보시오// 내 얼굴이 문득, 꿈에 본 당신의 속마음으로 읽힌다면/ 만 권의 책을 덮고 오래 켜둔 불빛을 잠그시오/ 어둠 속에서 만개하는 그림들이 지평선을 바꾸는 순간,/ 당신은 어디에도 없는 나의 유일한 그림자라오//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사실, 사랑은… / 강정
사실 로봇이 사라므이 춤을 따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나는 내 웃음이 가식적이란 걸 안다/ 입아귀가 찢어질 때마다/ 마음엔 홍해처럼 쩍쩍 가라진/ 나와 나의 그림자가 밤바다의 수평선처럼 닮은 듯/ 제각각 흉흉하다/ 啓示는 종종 어조가 다른 두 번 이상의 동어반복으로/ 사람 마음에서 엇갈린다/ 나는 나의 거짓말을 따라하며 진심을 뱉는다/ 웃고 살자며 바지춤 붙들며 울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사실 나의 사실은 거울 안쪽의 어둠을 흉내 내는 일이므로/ 꽃을 들고 즐거운 척할 때마다 느꼈던/ 세상이 곧 망할 것 같다는 불길한 징조는/ 사실 흔치 않은 길조였다/ 아직도 배우를 꿈꾸며 석 달에 한 번/ 닐 영이나 톰 웨이츠 등을 틀어놓고/ 혼자만의 긴 울음을 적작하는 일도/ 자주 하면 정말로 슬프다/ 전쟁만큼 흥미로운 픽션도 없지만/ 사실을 옮기는 뉴스가 너무 사시림 직하지 않아서/ 그 사실에 대한 논평 따위가 어이없게 시적으로 들리 때나/ 이십 년 이력의 거짓 웃음 울음이 바꾸어놓은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세상의 모든 배후는 맨얼굴의 창녀처럼/ 슬프게 역력하다/ 나는 그 모든 미완결의 위선들이 갓 만난 연인들의 키스처럼/ 달콤하다는 걸 안다/ 나는 입을 열어 칼을 들이밀지만/ 당신의 눈빛은 촉촉하게 먼 길을 떠나며 내 텅 빈 칼집 속에/ 독을 섞는다/ 새로운 연애의 그 치밀한 연기술에 감복하여/ 나는 또 과거에 폐기된 페이지를 찟듯 입아귀를 찢고/ 마음의 빈 터에 당신이라는 안테나를 세운다/ 삐걱거리며 작동하는 이 로봇은 알에이치 플러스/ 비형의 인간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전시키며/ 당신이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당신이라는 거울 안쪽에서 나라는 허구가 부화한다/ 나는 또 그를 연기할 것이지만 그가 도대체 누굴 연기할지는/ 이 세계가 감춘 유일한 비밀이다//

문득 돌아본 하루 / 강정
나무 하나 없는 곳에서도/ 나무가 보인다/ 죽은 자들이 대낮 창천 아래에서/ 민낯으로 속삭이고 있는 거다// 채 다 얘기하지 못한 잎사귀들이 벌렁벌렁 바람의 윤곽선을 본딴다/ 허공 한가운데 커다란 창이 떠 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창 밖 너머 그들의 얼굴 보려 하지만/ 자꾸 내 얼굴만 얼비친다// 표정이 바뀔 때마다 나무들이 우는 소리를 낸다/ 수십 년 전 심폐를 빠져나간 녹슨 공기의 진동// 돌개바람이 인다// 피와 재가 섞인 물단지 하나,/ 참수당한 시간의 머리통인 양/ 길 위에 구른다// 문득 지구의 원형이 대기 바깥에서 우는 소리// 가장 가까운 곳의 나무가 천천히 걸어와/ 핏물을 들이켠다// 뒤돌아본 옛 도시가 불타고 있다// 마지막 봄이 오면/ 말끔히 성장(盛裝)한 거지가 잿더미를 머리에 이고/ 바람을 순장(殉葬)할 것이다//

共有結合공유결합 / 강정
햇빛 속에 당신의 부드러운 털올이 떠다닌다/ 불현듯 공기 속에서 푸르른 비단이 펼쳐진다// 당신은 물길처럼 연하게 시간의 능선을 넘어갔다/ 오래 만질수록 미끄러져 사라지는 지상의 마지막 온기// 기다란 비단결의 밤에 무릎을 찧는다/ 몸속에서 흰 꽃이 벙벙 터져 별들이 눈물 흘린다// 당신의 살결을 뒤집으면 시간은 빛의 속도를 넘어/ 이 생 바깥의 무늬를 내 몸에 새긴다// 龍과 장미의 선율로 몸피를 두른 채/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를 밀쳐내는 이상한 놀이에 전념한다// 머나먼 바닥으로 추락하는 공기방울들의 날 선 飛散/ 귀를 닫은 수천 년 전의 음악// 나는 손바닥을 펼쳐 어지럽게 갈라진 지문 속으로 숨는다/ 실선 마디마다에서 분수가 터져 기나긴 강으로 흐른다// 누구인가/ 비단의 양쪽 귀를 잡아당겨 힘차게 고인 물을 털어내는 당신은……// 장미를 입에 문 龍이 커다란 불을 뿜는다/ 나의 정신은 알몸으로 얼어붙어 서서히 녹는다// 추락한 별들이 열어젖힌 밤의 빗장/ 암청색 비단결 위에서 당신의 투명한 陰毛가 불타오른다//

지우개로 지은 집 / 강정
전하려던 말을 적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던 날이었다/ 지워진 말이 더 전하려는 뜻인 것 같아/ 아무 말이나 적고/ 아무 말이나 적자마자 아무렇게나 지웠다// 생각이 지워지고/ 지워진 생각이 다시 글이 되고/ 글이 된 뜻이/ 전하려던 뜻을 전하지 않겠다는 체념이 되어/백지 뒤가 두텁게 열렸다// 집이 일순 넓어지고/ 창문이 크게 열리고/ 창밖 소음들이 전하려던 말의 배음으로 번졌다// 맞은편 건물이 거대한 입이 되어 벌어졌다// 뿌리 뽑힌 나무가 쏟아지고/ 무너진 건물의 진해가 철근째 쏟아졌다// 집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지 않았고/ 태양의 보풀에서 빛의 누더기를 걸친 채/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나무줄기나 녹슨 철근에 매달려/초록 이끼로 번졌다// 집이 무너지고 속도만큼/ 나는 더 높게 떠올라/ 나 자신이 더는 알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잠시/돌아본 자의 뒷모습이 평생 동안의 나였다// 살아 있던 시간이,/모든 시간이 다 지난 다음 조립된/시간 스스로의 관이었던 거다//

녹슨 꽃 / 강정
희열에 찬 눈을 보고 있으면 많이 생각난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지 않을 때도/ 너의 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이 고체처럼 느껴질 때도/ 긴 섹스가 어두운 사막 속에서 차가운 돌을 꺼내는 일 같을 때도// 내 입맛은 텁텁하고 무거웠다/ 피부를 떼어내면 비명 대신/ 입안에서 붉고 차가운 항아리 같은 게 쏟아져 나올 거다// 너는 꽃이라 여겨 방긋 웃고/ 나는 근육마다 굳어 있는 피를 벗겨낸다// 푸르스름했다가 누랬다가 다시 하얘지는 그것은/ 착각의 거울이었다/ 이를테면, 죽음의 여러 낯빛이었다/ 산 사람의 열망을 해체한 도끼날처럼/ 행동과 판단 사이를 쪼개 놓은 물체의 그림자였다// 벽 앞에 서 있다/ 꽃이 흠집처럼 꽂혀 있다/ 오래 닳아 가루가 돼버리기 직전인 쇳덩이의 벽/ 죽음 쪽에서 버짐 핀/ 영생의 종안 같은 (?)/ 너는 꽃이라 여겨 피워 올리려 하고/ 나는 온몸으로 퍼뜨려 더 큰 상처로 내보이려 하는//

봄눈사람 / 강정
다리 사이 불이 꺼지고 난 뒤/ 눈사람이 되었다/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다// 물의 옷을 입은/ 흙의 죽음// 녹아 흐르던 것에서/ 일어서 굳는 것으로,/ 절멸하던 것에서/ 영원의 화석으로// 서서 운다/ 소리 없이/ 눈썹 아래/ 돌 떨구며// 입에서 꽃이 핀다/ 내 입에서 난 것들을/ 나는 먹을 수 없다// 향기는 봉오리보다/ 멀고/ 색채는 해의 이빨 틈새에서/ 십만 분의 일초대로/ 분열 중//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박고/ 꽃의 그림자를 핥는다/ 먼 땅끝이 오금에 닿아/ 무릎 뒤에서 누가 말을 건다// 해가 하얗다/ 꽃은 하양을 삼킨 모든 빛//

최초의 책 / 강정
희원일까 체념일까/ 책갈피 속에서 동그란 점이 하나 떨어졌다/ 지난밤에 올려다본 달일 수도 있다/ 부식토 냄새가 난다/ 한 개 점을 오래 들여다본다는 건/ 세계로부터 자신을 덜어내/ 다른 땅을 핥겠다는 소망/ 머리를 박고 울면서/ 점 안으로 자라 들어가는 고통의 뿌리로부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무와 풀들의 수원(水源)을 찾는다/ 나는 머잖아 숲이 된다/ 나무들을 끌어안고/ 나무들의 무덤이 되어/ 다시 동그란 점이 된다/ 지구를 알약처럼 삼키고/ 손때 묻은 우주의 벌목 지대에서/ 천년을 잘못 읽히던 책 한 권,/ 비로소 제 뜻을 밝힌다/ 수의(壽衣) 벗듯 문자를 풀어헤쳐/ 돌의 이마 위에 투명하게 드러눕는다/ 나뭇잎 한 장이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는다/ 나는 미래의 기억을 다 토했다//

아름다운 적(敵) / 강정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 맨발로 걷는 많은 꽃들을 피워야 한다 부풀어오르는 공기를 뜯으면 뜯을수록 너는 더욱 선명한 나의 적이 된다 유일한 대안, 유일한 결론, 유일한 삶이 된다 공기처럼 나는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내가 아름다운 적인 너에게 내 큰 입을 내민다 내 입이 닿았기 때문에 너는 아름답다 네 입과 닿았기 때문에 추해진 나를 너는 더욱 추하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음악이 네가 만든 추함마저 아름답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알면 알수록 네가 추해진다 너도 나를 몰라라 숱한 꽃들이 자기 이름마저 지울 만큼 부풀어 너를 보는 나의 추함을 지운다 너의 아름다움에 칼을 쑤시는 내 아름다운 음악을 맨발로 더듬는다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한끝으로 나를 내몬다 너와 부딪치니 내 아름다운 음악마저 추하다 죽어라, 죽어라, 너를 벗어던진 나여, 한번도 제 소리로는 빛나지 못하는, 입술을 닫은, 도저한 직유의 세계여//

음파 / 강정
해가 우짖는 파동이 물속을 치밀게 하여/ 물 위에 거대한 나비가 떴다// 물의 포만감이 불러낸/ 해와 달의 악취여// 냄새의 빛기둥 위에서 누군가 죽은 별을 센다// 물위에 뜬 숫자들이 거대한 나비의 행렬로 번지는데,/ 어찌하여 이런가/ 손에 붙들린,/ 피에 번져 멀리서 이 몸을 적신,/ 이 하얀 손은 누구 것인가// 누구의 입을 막아 노래는 노을에 찢긴 물빛이 되는가// 이마를 누르는 나비의 날개/ 물결 안에서 녹아 펄럭이는 해// 누구의 배내옷 자락인가/

고등어 연인 / 강정
같이 고등어 살을 발라 먹던 여자가 살짝 웃던 날이었다/ 입술에 묻은 고등어 기름이 낡은 암자의 처마처럼 햇빛을 받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대며/ 자꾸 웃어 보이라던 여자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배 속에 삼킨 고등어가 알이라도 까는지/ 물컹물컹 낯선 감정들이 몸 안에 물길을 내고 있었다/ 여자는 입술을 핥던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심장에 넘쳐흘렀다/ 여자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시간이라는 평상에 톡톡 금이 가고 있었다/ 발라낸 고등어 뼈를 냄새 맡던 고양이와/ 고등어 냄새를 물씬 풍기는 내가 한 프레임 안에서/ 여자의 밥이 되었다/ 갈라진 평상 위에서 여자가 파랗게 웃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돌아오는 대한항공 여객기의 비행운이/ 지구 밖의 시간을 떨어뜨렸다/ 배부른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잠을 깨던/ 지상의 마지막 오후,/ 여자가 찍은 풍경들이 새로운 어족의 표본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고등어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로 하며 긴 슬픔을 우렸다/ 처음 마주한 밥상에서 서로에게 영원한 미지로 남은 것이다//

오래된 그림이 있는 텅 빈 식탁 / 강정
벽에 걸린 그림 속에 둥글게 흰 다리가 있고 그 위를 걷다가 문득 우산을 펼쳐 드는 사내 하나 반대편 벽 깊숙이 향해 있는 숲/ 길을 되짚어 사내에게로 다가오는 여자 하나 바라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사람은 마치 길 위에 길게 두러누운 죽은 나무 같고/ 부러진 등걸 주위에 핀 버섯들이 사람처럼 보일 때 우리는 오래 떠들던 입을 다물고 혀끝에서 소리 없이 지워진 단어들을 식도/ 깊숙이 감추며 진짜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동공을 텅 비운 채 사심 없는 짐승처럼 열어 보이는 것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 속에 당신을 보는 내가 둥글게 흰다리 위를 서성이고 창밖 태양과는 상반된 표정으로 비는 그림 위에 언룩을/ 남기고 얼룩 속을 한참 바라보던 당신은 내가 어느덧 다리를 다 건너 당신이 걸어 나온 숲길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람/ 속에 띄운 미소처럼 여기는 듯하지만 오래지 않아 비는 그치고 우산을 고이 접어 젓가락처럼 숲길을 콕콕 찍으며 내 그림자를/ 시작하는 당신은 조만간 버섯들의 먹이가 될 터, 정작 그림 바깥으로 사라진 건 내가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도 아니었다// 그림 바깥으로 나오니 다시 햇빛,/ 다섯 시간 동안 내리지 않는 비/ 어전히 주린 눈빛의 앳되고 착한 짐승 두 마리/ 만발하는 버섯의 차가운 毒!//

안녕 / 강정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 노트가 허공에 나부낀다/ 가을비가 뜨겁다/ 안녕이라는 한국어는 중성명사다/ 밤이 온다/ 낮이 왔다/ 적멸은 배부르고/ 와인잔은 오래전에 깨져버렸다/ 나는 나의 질긴 두통과 결혼하기로 했다/ 두통은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천형/ 여자들은 두 개의 입으로 날 유혹한다/ 그때마다 안녕/ 하고 발음한다/ 내 혀는 도토리묵보다 단단하지만/ 바위 앞에선 이만큼 부드러운 육질도 드물다/ 나는 늘 이런 상식에 굴복한다/ 상식은 궁극의 예술이다/ 창조는 내 친구 이름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곧잘 나의 외모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그는/ 심정적으로는 늘 여성을 지향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를 그릴 수 있겠다고 썼던/ 스무 살의 내가/ 서른여섯 살의 나보다 더 또렷하다/ 다시 와인을 따른다/ 오래전에 깨진 와인잔이/ 붉은 물길을 연다/ 오래전에 깨진 것들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그건 일종의 원형상징이다/ 또 안녕이 왔다/ 와인잔을 따르니/ 와인이 넘실거린다/ 新約을 뜯어 먹던 스무 살의 내가/ 사전을 뒤적여/ '寶血;이란 단어를 흡수한다/ 이 씁쓰레 달콤한 맛/ 내가 단어를 말할 때/ 단어는 말해지고 싶지 않은 나를 말한다/ 후자가 결정적이다/ 안녕이 간다/ 안녕/ 그것은 性器가 없다/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다/ 깨진 와인잔이 빈다/ 빈다는 베인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깨진 와인잔이 날 빈다/ 나는 안녕에 베인다/ 안녕/ 그것은 만화에서나 보던/ 육식식물을 닮았다/ 나는 몸소 안녕을 체현한다/ 안녕/ 이 말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살갑다//

사후(死後)의 바람 / 강정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불안한 것들 / 강정
파도가 바위를 으깨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바위가 바닷속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봄밤을 건너뛰는 바람이 여름에게 죽지 않는 게/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수천 번 죽음을 노래했건만/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 비린 물고기의 살덩이를 나는 좋아한다/ 역한 감각을 발산하는 것들에 나는 내 고통을 교통 시킨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내가 아프다고 느낄 때조차 나는/ 아프지 않다 내가 아플 때 내 몸은 물고기들 아가미 속에서/ 아파하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재, 정말 아픈걸까?// 뚝뚝 부러지는 세상의 근골을 나는 읽는다/ 제 몸이 떼어져나가도 아픈 걸 모르는 죽은 짐승들의/ 백색의 유언을 듣는다 누구든 날 먹어 제 살을 불리는 족속들을/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은 아프다 아픈 걸 모른척하기에/ 더 아프다 모른다는 게 너무나 잘 아는 것이라는/ 걸 모르기에 더더 아프다// 나는 기다린다 폭풍이 몰아쳐 의연한 바윗돌들의 뒷다리를/ 물어뜯기를, 나는 기다린다 이상하게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릴 게/ 아무것도 없는데 기다리는 나는 참 이상하다 세상/ 의 하복부를 적시는/ 빗물 속에서 나는 기다리는데 정말 이상하다 완전/ 히 허물어졌는데/ 내 시가 파멸을 상정하지 않다니?내 기다림은 불안일까?//

너를 죽인 후, 다시 바다 / 강정
길이 끝나는 곳에서 너를 다시 만난다/ 죽이려는 건 아니었는데/ 내 마지막 살들이 흔들리며 다시 바다,/ 瀕死(빈사)의 넋이 물결 위에 떠돌며/ 너는 한 잎 꽃다운 피를 깨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바다의/ 피가 되고 오물이 되는/ 내 마지막 살겨운 실수의 動線(동선)으로 퍼붓는 비,/ 너를 죽이는 나는/ 그 언제도 내 것이지 않았던/ 無念無想의 팔을 쳐들었다/ 빗물에 깍여 칼자루로 곤두선 팔 끝이/ 빗물이 여린 물고를 찔렀다/ 하늘 높은 곳에서/ 비는 핏물의 그림자,/ 파닥파닥 젖은 땅을 튀기며/ 핏물이 다시 없는 눈물의 잎사귀를 틔웠다/ 길과 길들이 그 아래에서 끊어지고/ 세상이 온통 피의 바다, 피의 속도로 내질러갔다/ 죽은 길들의 등피가 바다에 묶이고/ 하늘의 모든 물방울들이 줄기차게 땅을 뒤섞고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태양,/ 바다의 끝에서 끝끝내 바다가 되어버리는// 바다와 노을이 섞여 피가 되는 곳,/ 다시 바다에서,/ 入棺과 再生의 절차가 다시,거기서, 개진되었다//

목련아 , 목련아, 목련아 -'그대'에게 / 강정
자색 이파리 몇 개 휘장처럼 내려진다/ 밤이 오기 직전, 나는 천 개의 사랑을 깨물고/ 버려지고 싶구나 돌 틈으로 흐르는 내 몸을/ 구 누구야, 낚아다오// 빛이 내 화려한 안광 속으로 녹아든다/ 봄이 왔다 나는 적어도 만 번쯤 내 이름을 다시 부른다/ 만년의 세월을 나는 이 순간 죽이고 있다/ 온몸이 날개인 너를 유혹하려 내 이빨들이 빨간 불씨를 터뜨린다// 비에 젖어도 살아남는 내 꽃들/ 너의 살 속에 너의 날개들을 휘어감고, 나는 숨는다/ 숨겨지지 않는다 만 번의 봄이 만 번씩 나는 다시 낳고/ 다시 나는 만 겹의 네 이파리 속을 헤집는다// 어디에도 없다 너의 드센 눈빛 까마득한 기억의 전쟁터/ 네 꽃잎들이 찢기며 찢어진 꽃잎들 낱낱이/ 내 만년 輪生의 틀 속에 숨는다 너무나 잘 숨겨지는 너/ 이런 고백도 너는 네게 상처라고 할까?// 만년 동안 시들지 않는 이런 걸 나는 사랑이라고 했다/ 너는 내 혀끝에 머무르지 않는 너는/ 죽어 떠도는 어느 오랜 기억 위에 조용히 숨어 자란다/ 내 흘린 피들이 빛의 채찍에 길들여진다 오랫동안/ 너는 나다, 목련아//

물 위에서의 정지 / 강정
날아오르기 직전일 수도/ 떨어져 내리기 직전일 수도 있다// 나는 물을 보고 있다/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가라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사이의 정물이 되어 있었다// 물 표면에 뜬 그림자가 움직인다// 지나가는 것일 수도/ 다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내가 움직일 때/ 그림자는 고요히 멎은 채/ 어느 먼 곳의 파도 소리를 이끌고/ 물 위에 뜬 작은 꽃잎들의 일상 속에서 지분댄다// 물 위에서 멎은 것과/ 물속으로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울려 나오는/ 깨알 같은 총성/ 물방울들의 내밀한 和姦// 죽어가는 순간일 수도/ 다시 깨어 다른 물체가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바람은 꽃잎에 내려앉아 투명한 옷을 벗는다// 꽃이 꽃이라 불리기 전에 태어났던 물고기들이/ 허공에 멎은 나를 본다// 그림자는 그물처럼 물 위를 휘저어/ 물고기 잇자국 명료한 그날의 해골을 건져 올린다// 웃고 있는 흰 꽃이다//

나의 음악이 나를 / 강정
나의 음악이 아름다운 까닭은/ 남자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여인들이 헌 담요를 햇볕에 넌다/ 어디선가 짧게 아이들이 운다 용케 죽지 않은 남자인 나는,/ 전쟁을 모르는 남자인 나는 그러나/ 매일 밤 조용히 전쟁을 치른다 목청을 열면/ 헐은 가슴에 볍씨처럼 흘러 박히는 눈물 방울방울들/ 전쟁을 몰라 갇혔던 맨몸뚱이 튀어 나온다/ 내가 모르던 내 핏줄들 엉겨 노래 만든다/ 어떤 여인의 자궁을 내 빌릴 것인가?/ 터져나오는 노래의 홍수를 담을 새로운 집을 위해/ 고추씨처럼 툭툭 터져나와/ 새롭게 전쟁을 일으킬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모든 죽은 남자들의 힘줄로 살아나는/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나는 지금 죽어야 하나?// 바람 잃은 깃발을 들고 죽은 남자들 돌아온다/ 여인들의 담요를 말린 햇볕에 숨은 피/ 삼단요 같은 침묵을 열고 아이들이 뛰쳐나간다/ 나의 음악이 제가 낳은 모든 소리들을 벗고/ 이건 전쟁이야, 전쟁!/ 물기 빠진 영혼이 드디어 여자가 되는//

왼손 미사 / 강정
백지 위에서 오른손은 한갓 환상통의 여운/ 공기 속에 뿌리내린 투명한 풀잎// 왼손으로 붓을 들어 점을 찍는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 안에서 끄집어낸 침묵을,// 점을,/ 점점이// 오래 바라보다 눈이 감긴다// 왼 눈꺼풀 안쪽엔 푸른색 바다/ 눈꺼풀 바깥엔 갈색 탁자// 오른손이 사라진 자리에 끼워 넣은 왼손/ 사방이 역방향으로 휘어져/ 흉부에 꽂힌 세계// 오른 눈꺼풀 안쪽엔 붉은색 의자/ 눈꺼풀 바깥으론 해변을 달리는 초록색 기차// 점의 반대편에 점을 또 하나 찍는다// 바다 속으로 돌진하는 기차/ 탁자 위에 올라 천천히 걸어 다니는 의자// 오래 감았다 뜬 눈엔 노란색 빗금이 수직으로 번진다// 땅과 하늘 사이 곡선을 지우는/ 오른손의 그림자// 왼손으로 움켜쥔 첫 번째 점/ 강직이 일어난 시체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다//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는 한낮//

왼발의 구도 / 강정
해의 동심(同心)이 무릇 불의 비 같던 날,// 갈림길에 우뚝 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누구에게 총을 쏘고/ 누구에게 꽃을 건네야 할지/ 왼발은 몰랐다// 무릎 안에서 자기 얼굴 찾으려/ 어제 꿈의 진창 속을 여전히 뒤뚱거리는 왼발/ 시계를 봐도/ 밤낮 구분 못하는 천치(天痴)의 기둥// 나란히 서 있던 오른발이 벌컥 화를 내며/ 장딴지가 올라붙었다/ 이리가 옳고 저리가 틀렸으니/ 너의 저리는 그저 갈 수 없는 저기일 뿐이라는 것,// 오른발이 방향을 잡을수록/ 자꾸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며/ 오른발의 신념과/ 오른발의 과오를/ 오늘 아닌 다른 날에서/ 불쑥불쑥 끄집어 저기로만 향하는 나의 왼발// 계속 나아가며 연신 시계를 가리키는 오른발/ 그럴수록 반대 방향으로 헛돌며/ 오른발을 축 삼아 허공에 원을 그리는 외로운 왼발// 마음의 눅은 때들이 얼핏 설핏 초록빛이었다가/ 앞만 보던 눈이 정수리로 올라붙어/ 이내 붉고 노란 해의 심줄이 발끝의 흑점으로 찍히던 그날,// 웬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내 왼 무릎 안쪽에서 밤새 울고 있었다는,/ 오래전 죽은 춤꾼이었다/ 시곗바늘이 줄창 왼쪽으로 돌고 있으니/ 오늘은 다만 기나긴 어제의 짧은 저쪽일 뿐이라고도 했다//

짓눌린 날개 / 강정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는 12층/ 팔다리를 쫙 펴/ 새 흉내를 냈다/ 옷자락에 티브이가 걸려 넘어져/ 사람 말소리는 그대로되,/ 수직으로 직직 그어진/ 푸르고 빨갛고 노란 선들만 화면에 선명하다/ 사람 말은 알아듣겠으되,/ 사람 꼴은 검은 면과 색색의 선으로 분해되니/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수긍이/ 짐짓 앙큼한 술수 같고/ 면식 있던 모든 꼴들이/ 우주 어딘가에서 분사됐다 점멸하는/ 빛의 요분질일 터,/ 미세 화소 하나하나가/ 점점이 별다른 말의 입자로 맥놀이하다가/ 돌연 소리가 지워지며 선들도 사라진다/ 까맣기만 한 평면에 평소 비치지 않던 내 모습만 돌올하거늘/ 필시 몸에 전기가 도는 걸 테다/ 화면 속에서 떠들던 사람들이 몸속에 들어와/ 갑론을박 주리를 틀고/ 그 주파에 맞춰/ 두 귀가 펄럭펄럭 춤추는데,/ 중심을 찾는 일렁임인지/ 중심 없이 흐트러지는 잔망인지 헷갈려할 때,/ 날개 달고 날아오르려는 사람이/ 검은 액정 속에서 돋을새김 기어 나온다/ 스스로 짊어진 날개가 버거운 건가/ 날개의 찬란함이 스스로를 옥죄어/ 네 발로 길 수밖에 없는 건가/ 비상의 환희보다는/ 비상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홀로 지친 몰골이/ 음화처럼 떠 있는 공중의 섬에서/ 날개를 펼쳐야 내려갈 수 있는가/ 날개를 접어야 걸어갈 수 있는가/ 두 발을 귀에 대고 몸 안의 전파 소릴 들어봤다/ D메이저에서 G메이저로 옮아가는 기본음이었다//

E-D-Am-E / 강정
물감이 번진 곳에 책이 있고/ 다가가면 피부에 전기가 흐른다// 불꽃을 튀겨대는 정신 따윈 없다// 모공毛孔이 꿈틀대며 색 쓰는 소리/ 열두 살 때 외웠었떤 반야심경의 둥그런 여음// 마룻바닥에 모래를 깔곤 우산을 꽂아/ 방안에 바다가 흐르게 한다// (이 모든 정경을 카메라로 찍어낸 사람에게// 자아自我란// 모래알갱이 속 물방울 같을 것)// 3번 줄이 끊어진 기타로/ 연신 다장조만 짚으며/ 우울하게 노래하는 남자//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줄 알았더니 이미 죽은 자다// 물감 풀린 곳에서 펄럭이는 책장이/ 서로 베껴 쓰다 혼절한 후렴구만 쏟아낸다// 모래알에서 터진 바다가/ 우산 속에 고여 파란 불꽃으로 춤추는 그림자// 나는 손에 물감을 묻혀 바닥에 네발로 기며 색칠했다// (이 모든 정경을 담아낸 카메라 액정에//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기타를 치며 웃는다)// 보는 자가 찍힌 자라는 걸// 보고 있는 자만 모른다)// 어떤 말을 해도 내 목소린 아니다// 뇌의 반쪽이 버섯 형태로 부푼다// 바닥 그림이 숲으로 자란 거다//

실패한 산책 / 강정
혼자 걷는 천변이 너무 고요해,/ 해만 둥그렇게 입 벌리고 있어,/ 그 입에서 나온 말을 길 위에 그려 보려고,/ 그 입에서 터진 소리를 울려 귓속 동굴을 꺼내 보려고,/ 길을 짓밟고 동굴 속에 불을 켜 해를 가둬 보려고,/ 해의 심지를 부추겨 세상을 태워 보려고,/ 햇빛을 백색 가루처럼 뒤집어쓴 너는 말끝이 자꾸 불꽃 되어 지워지는 시를 썼다/ 밤의 허기로 채운 책들이 저물녘에야 오리 떼처럼 꽥꽥거리고// 양쪽 귀 사이로 타전되는 밀담을 알아들을 수 없다/ 나는 네가 되기 위해 말할 뿐,/ 내가 나를 말하기엔 나는 나를 이미 모른다/ 머리에 뿔을 달고 혼자 떠도는 저녁 모퉁이,/ 빛과 어둠 사이에 그림자가 없다/ 해의 밀령을 판독 못해 저격당한 별만 오롯하나/ 오리 발자국 무늬만큼의 기별이나마 해의 이마에 적어 두지 못했다//

 

 

기타와 詩에 미친 '삐딱한 딴따라'… 문학의 중심에 섰다

미국 가수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어떤 이들에겐 놀랍고 당혹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수'와 '노벨 문학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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