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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진혜진 시인

부흐고비 2022. 1. 19. 09:12

진혜진 시인
1962년 경남 함안 출생.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1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6년 계간 《시산맥》 등단. 시집으로 『포도에서 만납시다』(상상인, 2021)가 있음.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현재 도서출판 상상인 대표.

 



얼룩무늬 두루마리 / 진혜진
너는 나로 나는 너로 감겼던 얼굴이 풀립니다 겹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풀려야 할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군요 풀린 것들에서 배웅의 냄새가 납니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을 다녀갑니다// 내려야 할 물도 우주라 욕조에 몸을 띄웁니다 세면대의 관점에서 얼굴은 흐르는군요 얼룩의 심장이 부풀어 오릅니다 비누거품에서 맹세는 하얗다는 걸 보았습니다// 이제 거울의 시간입니다 위험을 느끼는 것은 숨의 기억입니다 피를 흘립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얼굴에는 새카만 통로가 생겨납니다 너의 손안에 나를 풀어놓고 얼룩을 통과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통화음이 길어질 때 /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했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 2016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수상한 색맹 / 진혜진
그의 눈길에 닳아 사라지는 것들은 살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초록에 묻힌 단풍잎을 여럿의 불면으로 본다// 색이 색을 놓치고/ 그는 그림 앞에 서 있어도 그림이 없다/ 물방울 눈을 뜨고 있어도 오전 10시의 침실은 캄캄하고// 간밤의 난반사처럼 누군가의 손길을 덧칠하면/ 와인을 들고/ 체리를 물고/ 살바도르 달리는 달리 모르는 달리도 달리// 한 사람의 초록 아침과 또 한 사람의 붉은 저녁이 만나는/ 그곳의 색깔이 궁금하다// 색의 앞뒤를 만져볼 수 있을까// 빨강을 해방시키는 햇살이 미술관으로 뛰어든다// 초인종 소리, 고양이 소리, 거꾸로 흐르는 시계 소리, 여자의 서성이는 구두 소리…/ 초록 초록 사라지면// 그가 빨강 빨강으로 살아지는//

제2의 사람 / 진혜진
그녀의 난자에는 0.2mm 간절함이 있을까?// 고유한 A와 그녀의 발자국에 고유한 눈이 내린다/ 가능성을 차지한 그녀에게도 눈이 산란한다// 발정 휴지기였던 가로등의 점호로 골목은 살아나고/ 그 길로 입성한 그녀의 긴 생머리에 눈이 머문다// 누군가를 속인다는 꽃바람 아이디/ 쓰레기통 옆 고양이는 간절함을 뒤진다/ 그녀의 치마를 따라와 킁킁 뒤진다// 비밀은 비밀로 고유번호가 되고/ 속임수는 속임수로 사람이 된다// 운전면허를 따듯 감별 법 학원이 성황을 이룬다는데// 아이를 갖고 싶어/ 혼잣말은 하얗게 내리고// 편리라는 명분이 세상을 정복하는 오늘/ 박물관에는 아버지들 목소리가 숫눈처럼 쌓인다// 그녀의 넘버 71, 꽃뱀 유전자가 A의 눈을 녹이고 있다// 그녀의 난자에 애니미즘이 들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야/ 50년을 거슬러 온// 꽃바람은 사람의 성기와 성기가 만날 경우의 수를 데려갔다//

아나키즘 / 진혜진
연애할래? 아나키스트/ 펜은 유일한 믿음이 된다// 눈을 뜨면 싫어 좋아/ 잠이 들면 좋아 싫어, 그런 날이면// 양초를 사고 마스크를 사고 자주 악수를 한다/ 불빛은 얼얼한 입김으로 흔들려/ 방 안에 있는/ 펜은 유일한 믿음// 빈약합니까/ 왜 용서는 확률입니까// 이탈한 질문, 이탈한 의혹, 의혹의 7할은 나라는 광대의 출렁임// 투사든/ 아나키즘이든/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의 반쪽이 자신의 전부라니/ 반쪽도 못 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가 머리입니까// 문장을 잡으러 해도 내 손가락은 딱 세 개뿐/ 경계 앞에서 수많은 너를 놓친다/ 학명을 구하기엔 네가 너무 많다// 벗어날 수 없고 달아날 수 없는 다짐들이/ 펜 아래 있다//

빗방울 랩소디 / 진혜진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 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 수감된 몸에서 목걸이 발찌는 창살 소리를 낸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로 나는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의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으로 남고 절반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파/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두 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검은 우산과 정차 없는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내는 피날레//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기도가 잠겨 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앙상블 / 진혜진
내리는 비는 여럿입니다/ 둥근 입술에 앉은 둥근 시간/ 테이블 위에서 당신 없는 하루가 발간됩니다// 우리는 마카롱을 먹을 수 없습니다/ 격식 있는 루머는 실제보다 우아하게/ 가끔씩 깃털로 내려앉습니다// 달달하게 시간을 넘겨볼까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검은 입술이 되어 볼까요/ 사실과 사정/ 사물과 사람/ 소문으로 구성된 노천카페에서 없는 당신은 없는 분위기일까요// 이 비는 반성입니까/ 반목입니까 반복입니까/ 젖은 소문이 주르르 흐릅니다// 분홍에서 하양으로 가는 꽃말은 싱싱함을 끝까지 사랑할 줄 압니다/ 코러스를 완성하려면 없는 입술이 필요합니다// 내 앞엔 달달해서 딱 씹기 좋은/ 추문의 배후가 있고// 젖은 새는 쫓아내도/ 집요하게 누군가를 향해 날아옵니다// 동고비,/ 하고 입을 모으면/ 새는 발자국 활자로 앉습니다//

B203에는 장수하늘소가 산다 / 진혜진
장수하늘소는 구름입니다. 뒷모습엔 장수가 없고 하늘이 없고 코뿔소가 없어서, 그냥 지금 여기입니다. 언제부터 그늘 밖을 겉돌았는지. 시장 모퉁이를 돌면 좌판에서도 꽃이 피는 대파와 두부를 담은 검은 봉지가 따라다닙니다// 장수하늘소는 날개 꺾인 부엉이인지 낙오된 청둥오리인지 본인은 알지 못합니다 이름만 장수인 장수하늘소, 장수하늘소는 누군가가 떡갈나무를 침범하고 누군가가 산허리를 치받아도 묵묵히 이름에만 머뭅니다// 손에 든 대파 한 단 속으로 동그라미가 뭉쳐집니다 파는 사라져서 된장찌개가 될지 어떻게 돌아오게 될지 모르지만 동그라미를 장수하늘소가 꽉 붙잡고 있을지 모릅니다. 주변엔 오답이 널려 있습니다. 허무만 장수합니다 B203호에 연필심만 뿔이 되어 그를 들이받고 있습니다//

앵두나무 상영관 / 진혜진
이 도시에 봄이 없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몇 분 간격으로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 터져 나온다// 한쪽 눈을 감는 사이/ 바닥으로 누운 흰 사다리를 건넌다/ 소나기 그친 사이를 아이가 손을 들고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짚고 넘어간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순식간에 달려간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에 물리듯/ 빨강을 물고 앵두나무는 발설하지 않은 소문까지 뻗는다// 앵두가 지면/ 초록 이파리가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에 매달릴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신호등이 봄을 켠다// 짧은 치마를 입은 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맨 처음의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점토인형 / 진혜진
1// 어둠과 빛은 붉은 진흙의 심장을 가졌습니다/ 흑과 백을 쥔 채 우리는 너무 단단해서 어쩌면 텅 빈 속입니다//
2// 당신은 나를 비 맞은 매화나무로 베어내고 속을 묻습니다 손에 쥐었던 새를 공중에 날리면 젖은 손바닥에서 어둠의 길목들이 생깁니다// 매일은 빚어집니다 가짜가 진짜로 바뀔 때 비로소 충돌하는 어제가 빚어집니다 이쪽에서 보면 우리는 만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한 쌍의 인형처럼//
3// 순간이 흙인 사람이 있습니다/ 순간은 순간을 닮아 태어나므로 잘못이 없을까 한 번 더 만져봅니다// 모든 끝은 스며들다 사라집니다 한 번도 순간에게 나를 내준 적 없는데 당신과 흑백은 그 이후가 됩니다// 버려진 흙처럼 세상에 없던 이방인들이 내 안에 군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붉은 심장은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생생하게 부서져야 만날 것입니다//

물을 따라 번지는 불의 장미 / 진혜진
더 처음으로 가면/ 끈에 묶인 물고기자리와 통하는 물, 그러므로 나는 불// 붉은색은 인주처럼, 왜 풀어지는 장미목줄 사라지는 도장을 새긴 것일까// 물결치는 당신에게 휩쓸리면 허우적거리는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 나는 물을 따라 번지는 불/ 불이 숨을 쉬면 전체가 소문이야//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일까 헤어지자 우리// 우린 닮아서 다름과 다름 아닌 것도 증명하는 서로의 극, 불에도 비린내// 도드라진 몸이 도장으로 박히고 붉어지는데//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결별하고 수천번 감정을 사고팔지// 수는 木 화는 土와 통한다는데/ 신뢰 앞에 증인으로 소환된 당신은 끝까지 수, 나는 마침내 화/ 좋았던 기억은 유실물, 증인이라는 유일한 가능성// 더 장미의 바닥으로 가면 발바닥이 없고/ 만발했던 계약 5월 중순의 진원지가 없고// 벼락 맞은 서로의 대추나무가 몸속에 있어//

자하 / 진혜진
숲을 사막까지 끌고 갔다 공기는 주름져 있고 숲의 끝엔 자하가 매달려 있었다 몸꽃을 던졌다 어떤 얼굴이 복엽기처럼 타원을 그리다 지평선으로 떨어지고 맨발이었다 해바라기보다 활짝 벌어진 너를 가질 수 없어 아름다웠고 안타까웠다// 바닥으로 떨어진 태양이 움직이지 않아요 비행기가 지나가요 빈틈은 없었어요// 멀어지는 한 방울 더 멀어지는 일조량을 잡으며 바라보는 사막이 되었다 살래말래 다정이 공기에 붙어 꽃송이가 한꺼번에 터졌다 헛기침이 났다 끌고 간 측백나무엔 비행운의 무덤이 있고 우리라는 텅 빈 한순간이 있고 떨어뜨릴 눈빛이 남아 있었다// 라디오에선 흑인영가인가 레퀴엠인가 그날의 선언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막은 노래를 버리고 숲은 숲을 버리기 위해 자하를 끝까지 은닉하고//

스테인드글라스 / 진혜진
아이섀도 색들이 얼굴을 통과한다 저 눈부신 몸에 든 색들 드러낼 방법이 없고 드러날 표정이 없다// 눈 화장을 한다/ 부드러운 붓질은 마지막 기도// 색이 아닌 선악으로 장식된 기억들 그녀의 숨소리를 기억하는 식물들 아낌없이 구멍 뚫린 시간들 저녁 햇살이 묻은 오랜 기다림// 시간이 지워진 최후의 처음으로 그녀는 너무 빨리 도착해버려 너머를 흡수하는 것은 이음매를 갖는 일// 노랑은 보라, 보라의 이음매는 그녀, 그녀의 색들이 문양 속에 빛나고 우리는 유리를 통과한다// 목요일 미사가 끝나고 손바닥 안에 고인 기억들이 종소리로 출렁인다 우리는 유리에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 몸의 간이역에서 마지막 열차는 떠나고 그녀의 그림자는 되돌아오는 것을 놓친다 화장은 붉은 유리를 통과하는 것// 어둠이 속살뿐이라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망치를 든 니체 / 진혜진
눈이 머는 것은 가슴이 뛰는 일, 홍수를 피해 마음의 둑을 높이 쌓는 일, 음모를 나눌수록 둑은 금이 가고 배반은 깊어간다 거짓말을 나눌 사람도 깊어간다.// 비공식과 같은 관계의 관계 안에 답지가 무용일 때, 더 천사스러운 날개들, 하얀색 슬립으로 그 날개에 두 팔 벌리고 날아가는 비밀이 될 때 다리와 다리가 엉겨 그 아래 누워 버릴 때, 이다 아니다 이다 아니다 깊어가는 꽃잎이 모과향기로 완성될 흠모하는 죄들. 너와 내가 조우해서 바늘이 황소가 되는, 흰색에서 회색, 회색에서 검은 색이 될 때// 망치를 들고 바람을 박는다. 아무리 내리쳐도 박히지 않는 바람, 제 몸의 뿌리를 고정시킨 잡초를 바라본다. 오늘의 몸과 마음, 이원론을 때려 부수고 싶어 나는 니체의 망치를 빌려왔다//

발가락이 다른 발가락을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 진혜진
동쪽에 닿고 싶어 뒤꿈치를 든다/ 까치발은 높은음자리 또는 발가락이 만든 절벽// 한파특보가 발효 중인 가운데 봄은 어디 있냐고 묻는다 신호등에도 다이소에도 먼 산에도 없는 봄을/딛고 뒤꿈치를 든다// 죽더라도 약속은 지켜야지 기침 섞인 아버지의 마지막이 서쪽으로 흐르고 맹세는 동쪽을 붙들고 있다// 마음이 멀어 꽃을 시샘한 적 없는데 꽃은 더디 피어나고 발가락들의 방향은 처음부터 서쪽이었다// 뒤꿈치를 들고 해가 보이지 않는 아침을 바라본다// 해보다 커튼이 참 편안하네 서쪽은 어둠의 밀도가 싱싱하네 발가락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은 누구의 발뒤꿈치만도 못하다는 말을 참아야 한다// 우리의 이름이 악보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당겨지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오르면 당신 방향으로 가까워질 수 있을까// 가로질러야 할 걸음을 전부 옥탑방에 놓고 와 횡단 보도를 뛰며 당신을 닮아가고 있다// 발가락이 다른 발가락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생겨나는 자물쇠 / 진혜진
자물쇠가 생겨난다 그의 방 앞에 버스가 멈출 때까지/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생기고/ 홍채 속 잠자리의 날개가 투명해진다/ 그는 실핏줄에 걸린 정물, 다리 풀린 저녁이 무심해지면/ 왼쪽 모퉁이에서 백일홍이 멀어진다/ 버스가 풍경을 바꾸며 얼굴을 지운다/ 또 하나의 고백은 그도 자물쇠라는 것/ 비밀번호는 정착할 수 없는 물결일까/ 눈은 닫을수록 여백이 커진다/ 비를 예감하는 풀 비린내가 뒤를 통과한다/ 너무 많은 모습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눈을 뜨면 달아나는 것들, 팔을 뻗으면 아픔이 자란다/ 가지치기를 하자 물오르는 나의 비밀 나의 독선/ 그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내 몸에 자물쇠가 생겨난다/ 눈에 지문처럼 각인된 그도 스쳐간다 때로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이 있다/ 비가 사방의 문을 두드리면 비밀은 시동을 걸고/ 철분 함량 초과의 길이 덜컹덜컹 떠난다//

적극적 빨강 / 진혜진
함께 살든가 함께 죽든가/ 부겐빌레아는 타오르고 있었어 나는 책을 가졌고 꽃이 가진 대답은 햇빛보다 적극적이었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했지 필 때와 떨어질 때, 같은 질문과 대답, 아무것도 아닌 말을 발화점으로 만들었지// 왜 나머지를 태우고 싶어 했을까/ 냉담은 안 되고 나는 적극적인 빨강으로 이미 타버린 것들을 밑줄 바깥으로 데려가려 했어 이 수많은 맹목의 작은 길목을 어떻게 버려 이마를 떨어뜨린 곳에 불덩이도 있을 텐데// 솔직해지자/ 발자국이 포개지는 것뿐이야// 진짜거나 가짜거나/ 그게 그거 같은 빨강이 나를 삼킬 때까지//

드라이플라워 / 진혜진
완벽한 피라미드 모양이다// 잘 마른다는 것은 꽃의 방식을 거꾸로 세우는 일// 꽃의 심장과 결탁하면 본능은 필까 꽃의 수요일은 고백이 될까// 살아야 하는 날, 그래도 꽃은 꽃이다// 중심이 없는 우리/ 한 잎 바스락거림 속에 미라는 누구의 결말일까// 싱싱하던 무덤들은 다 어디로 갔나/ 욕망은 마르지 않고/ 우리라는 전설은 찾을 수 없다// 무성했던 안개가 한 다발의 화석이 되어 멈추는 일은/ 오늘을 제사장의 입맛에 맡기는 일이다// 마른 꽃을 화단에 묻는다 한 송이 한 송이 떼어서 버리고 싶은데 한꺼번에 무너진다/ 무엇이든 함께 묻어주고 싶다 우리가 나눠 낀 이어폰, 이집트 달력 속 파라오의 박제된 표정, 노예처럼 남겨진 감정까지…// 다발을 밀어낸 벽엔 선명한 자국이 남는다/ 그 속에 안치된 여운, 불후의 벽, 다신 꽃을 사랑하지 않을 거다//

잠 몽타주 / 진혜진
맨 앞줄과 재즈 사이를 오고 가는/ 그런 잠을 왜 끌어모아 편집한단 말이지// 베이스 기타와 드럼의 거리에서/ 혼몽은 얼마나 가까운가// 촛불과 불면은 사회적 모순과 상관없이 서로를 태운다/ 캄캄하다는 것은 장벽이 아니다 선글라스를 낀 가수처럼 너머로 흩어진다// 무대의 장면들을 짜깁기 한 잠은 구성이 허술하다 어떤 자리에선 영감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어떤 자리에선 벽보에 너덜한 얼굴이 붙어 있다// 나는 나와의 거리를 실패하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너는 재즈카페와 가까운 사람, 누군가의 말이 흘러든다/ 재즈에게 미안해서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려 본다// 잠아, 얼른 헝클어진 거울을 보렴/ 즉흥적인 잠은 있어도 즉흥적인 우리는 없다// 불면이 없는 밤은 재즈를 버리고 맨 앞자리로 추락한다//

몽유 / 진혜진
암만 걸어도 걸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휠체어에 머문 다리 하나, 다리 둘, 레고로 만든 다리, 타워 브리지가 있습니다 템스강에 버지니아 울프는 없고 그녀는 욕조 속 비눗방울을 걷습니다// 102호는 문턱이 없습니다 체리마루에는 흥해반점 스티커와 저녁이 담긴 빈 그릇, 하루 지난 초인종이 있습니다.// 문고리를 따라가는 그녀의 시선에서 날개가 돋습니다 수선화는 자기 사랑, 노랑은 펼쳐질까 야경이 밤을 건너가네 그녀는 런던을 바라볼 수 있는 타워 브리지를 구축합니다// 초록이 뽑히도록 우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출렁다리를 끊을까요/ 꿈은 건너지 못하는 관념의 다리를 이해할까요// 화면에는 다리 하나, 다리 둘, 타워 브리지가 있습니다/ 빽빽한 숲을 허락할 수 없어,/ 빠져서 허우적거릴 강이 없어 다리에는 걸음이 자꾸 잘려나갑니다//

1990년 / 진혜진
사랑 같은 건 장식장 속 와인처럼 오래 두지 말 것// 방치된 줄 모르고 방치되고 있는 사람의 표정// 더는 연명할 수 없는 관계가, 병 속에 고여 있습니다// 우리는 액체성/ 당신은 발효를 끝냈나요/ 당신의 취향대로 드라이한 감정의 도수는 높아졌나요// 실온에서 30년 동안 당신은 자줏빛 몸으로 젖어들지 못합니다// 와인과 위스키와 코냑의 차이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포도밭으로 시작된 일입니다// 우리를 구분하는 것은 색깔입니다 그러니 구분된 우리는 입술입니다// 코르크를 따는데 나는 여전히 서툴고 당신은 유리잔을 잘 부딪힙니다// 둘러보니 포도덩굴이 없습니다/ 내가 알맹이었는지 버려진 껍질이었는지/ 아니면 흙냄새였는지// 저 병 속에 든 사랑 하나// 먼 데로 흘러가 다른 이름으로 찾아오는 걸까//

이분법 코코넛 / 진혜진
툭 떨어지는 코코넛과/ 굴러 떨어지는 사랑이라는 말,// 나뭇가지 사이로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이/ 흔들린다// 어느 한쪽이 무거워지면 바다의 한쪽도 무거워져/ 파도는 질리도록 하얗다// 물살을 가르는 휘파람만이/ 거품이 사라진 이전의 기록// 상처를 타고 오르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하나 이후의 하나// 기우뚱한 의자 아래로/ 당신이 나에게 준 구두 한 켤레, 족적을 더는 남기지 않는다// 꼭지를 칼로 도려내서 마시면 높아지는/ 불안한 단맛/ 빨대가 꽂힌 텅 빈 담화와/ 지글거리는 태양// 하나의 테이블은 하나의 맛인데/ 중심이 쏟아지는 테이블과/ 한쪽으로 쏠린 단맛과 헛맛은 동시적인 관계//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털고// 이별을 통보한 당신/ 코코넛나무 아래로 보내야겠다//

나비의 탄생 / 진혜진
나비가 되었지만 나는 나비가 아니다/ 더 이상 상징이 아닌데도/ 누군가 고양이를 나비로 불렀고 가끔 나를 흘겨보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수많은 전단지가 태어난다/ 롱패딩이 점령한 거리/ 꿈틀거리는 애벌레들/ 겨우 태어난 계절의 끄트머리// 방학 특가 세일, 가족 활인/ 메스로 명징 해지는 선과, 불가능한 다음번 겨울// 나는 성형 나비들을 채집한다/ 전단지 속의 여자는 날아갈 것만 같은/ 애드벌룬처럼 성형 전과 후로 나뉜다// 나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백 년 동안 전단지를 나눠줘야 한다// 한 장에 지루한 노랑 한 움큼/ 접히고 구겨지고 버려지고/ 보도블록에 박혀있는 나비 사체들// 기다림이 달라서 날개는 이동의 방식이 다르다// 내일부터 강력한 한파가 몰려온다는 전광판 뉴스/ 다음 생에서 온전한 나비로 태어날 수 있을까// 12월에도 나비는 복제 중이다//

아홉을 돌려줘 / 진혜진
9가 1보다/ 가벼워서/ 하나가 아홉보다 무거워서// 그 하나에 정복당한 일상이 아홉 시에/ 멈춰 있네.// 10은 만남의 숫자/ 순간이 아홉보다 긴 물결일 때// 1과 9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캄캄해/ 아홉까지 잘하고도/ 하나를 망친 날.// 죽은 집요에 눈빛은 필까./ 당신의 눈빛을 찍은 도끼에 꽃잎은 열릴까.// 한강 둔치에 앉아 있는 내가/ 양한마리양두마리를 세는 밤./ 아흔아홉 번 수신 차단/ 하백의 행렬이 다 지나가도록 그립다가/ 당신의 숫자를 놓친다.// 9를 건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아흔아홉 번의 믿음, 열아홉 번째의 물구나무서기,/ 아홉 번째/ 눈물길 건너/ 그다음에 채우게 될 숫자는?// 10이 되지 못해 용서하지 못해 건너뛴 9의 물결이/ 지나가네./ 돌아오지 않을 하나를 채우려고/ 하나 때문에/ 아홉을 놓치고// 십진법에 없는 사랑을 하류로/ 떠나보낸//

의문 기울기 / 진혜진
한 생각이 문턱을 넘고/ 다른 생각이 오지를 벗는/ 왜, 라고 묻는데/ 뭐, 라고 대답하는/ 질문은 질문의 소유물/ 각은 각을 턱에 괴고 골똘해 한다.// 한번 물어버린 의문은 위아래가 없어/ 서로에게 역삼각형 위험 표지판에 닿는다./ 수풀이 무성한 국경선쯤에서 너머를 접는/ 같거나 다른 우리들/ 고개를 숙여야 바라볼 수 있다.// 가끔 팔은 바깥으로 굽기도 하지만/ 등변 다리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나를 고집한다.// 바깥이라 묻고// 늦은 가을이라 말하는/ 우리는 엇박자로 자란다./ 늘어날수록 오지 않는 계절을 걸어둘 수 있는/ 삐딱한 각도는/ 잡풀을 키우는 모선./ 내 생각도 23. 5도 기울어간다.// 시간을 당기던 기대가 손을 놓자/ 서성이던 부호들이 시계 밖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여우비 / 진혜진
나를 감추기 위한 한계/ 어느 날 얼굴에 내리는 백색문장// 비를 줄게 햇빛을 다오// 전복이 필요한 날// 경계를 무너뜨릴 이변은 없다/ 삼단우산처럼 예감을 펼쳐 보아도// 소리는 없고 젖은 사람만 있다// 지붕에서 내리는 비는 눈물이라고// 나는 오랫동안 젖고 싶은 생각뿐이라고// 하얗게 안쪽을 들어낸 마당에선/ 심어놓은 작약이 쩍쩍 갈라진다// 불임인 구름의 한계// 어디론가 여우비// 서사는 짧고/ 흘러들지 못한 목마름이 눈썹에서 휘발된다//

조롱박 / 진혜진
조롱박은 연리지의 반대말//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 미처 몰랐던 반쪽의 반쪽// 생으로 쪼개질 때 당신에게 흘러드는 나를 보았다/ 내게서 등 돌리는 소리// 한때 우리는/ 덩굴손에 매달린 요가 자세처럼/ 어느 수행자의 허리춤에서 물구나무로 서 있기도 했지// 조롱이 조롱조롱/ 어떻게 매달려 살거니 어떻게 견딜 거니/ 받아 삼키면 아픈 말들// 달을 퍼 담던 약수터에서/ 막걸리집까지 걸어 나간 표주박/ 엇갈린 길/ 우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목이 탄 햇살의 눈총이 카톡 알람처럼 쏟아지는 약수터/ 당신은 평생 약수에 젖고/ 나는 어느 저잣거리에서 술에 절어 늙어 간다// 우리는 헛 몸/ 언제 한 몸이었던가/ 텅 빈 속을 채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위아래가 사라진 표주박, 맞닿으면 몸이 뚜껑일 수도 뚜껑이 몸일 수 있다//

판화 / 진혜진
너를 눕히고 날을 세워 나를 고정했다// 우리의 가늠을 가늠하며/ 닫힌 문, 닫히지 않는 몸틀// 하나이기만을 바랄 때마다/ 다른 네가 그려진다 다른 내가 지워진다// 나의 나는/ 수많은 너// 의식을 생략한 수술대처럼/ 피의 급박함으로 우리를 응급 분류해야 하나// 이대로 봉합이 가능합니까?/ 가늠함이 가능하겠냐는 말입니다// 너는 말문에 본을 뜬다// 속이 훤히 다 보여/ 감염되어도 좋단 말이지// 너든 나를 속인 내 손바닥이든/ 순정의 깜냥은 지니고 있겠지// 판화 적으로/ 응급 적으로/ 균열과 교섭 중이다// 드러난 너와 더 드러난 나는 서로의 판이다/ 너는 누구야?//

[진혜진 시인의 블로그] 통화음이 길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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