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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원 시인

부흐고비 2022. 1. 18. 09:08

이원 시인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형평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등이 있다.

 




사랑은 탄생하라 / 이원
우리의 심장을 풀어/ 발이 없는 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하나의 돌은// 바닥까지 내려온 허공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봄이 혼자 보낸 얼굴/ 새벽이 받아놓은 편지// 흘러간 구름/ 정적의 존엄// 앞에// 우리의 흰 심장을 풀어/ 꽃/ 손잡이의 목록// 그림자를 풀어 그림자 없는 그림자/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 울음이 나갈 수 있도록/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하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렵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릐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가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영웅 / 이원
오늘도 나는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무서운 속도로 짜장면을 배달하지/ 왼쪽으로 기운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나의 생이야/ 기운 것이 아니라 내 생이 왼쪽을 딛고 가는 거야/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야/ 기울지 않으면 중심도 없어/ 나는 오토바이를 허공 속으로 몰고 들어가기도 해/ 길을 구부렸다 폈다/ 길을 풀어줬다 끌어당겼다 하기도 해/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내 배후인 철가방은 안팎이 똑같은 은색이야/ 나는 삼류도 못 되는 정치판 같은 트릭은 쓰지 않아/ 겉과 속이 같은 단무지와 양파와 춘장을/ 철가방에 넣고 나는 달려/ 불에 오그라든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은 짜장면을/ 랩으로 밀봉하고 달려/ 검은 짜장이 덮고 있는 흰 면발이/ 불어 터지지 않을 시간 안에 달려/ 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 아니 중력을 이탈한 내 생이야//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이곳이 아니야/ 이곳 너머야 이 시간 이후야/ 나는 표지판은 믿지 않아/ 달리는 속도의 시간은 지금 여기가 전부야/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내 한쪽 다리는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그래서 재미있지/ 삐딱해서 생이지 절름발이여서 간절하지/ 길이 없어 질주하지//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나도 가끔은 뒤를 돌아봐/ 착각은 하지마 지나온 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야/ 나도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그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모두의 밖 / 이원
의자의 편에서는 솟앗다/ 땅속에서 스스로를 뽑아 올리는 무처럼// 마주해 있던 편에서는 의자가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림자의 편에서는 벽으로 끌어 올려졌다// 벽의 편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긁혔다/ 얼른 감춰야 했다// 의자는 날았다 그림자는 매달렸다 속은 알 수 없었다// 그림자는 옆을 본 채 벽에/ 의자는 앞을 본 채 허공에 정지했다// 의자와 그림자는 모양이 달랐다/ 의자의 다리 하나와 그림자의 다리 하나를/ 닿게 한 것은 벽이었다// 의자와 그림자의 사태를 벽은 알 수 없었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 이원
이상한 봄// 깊은 발은 희망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바닥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실밥 푸는 곳을 모를 테니//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식탁 의자에 몸 냄새가 밴/ 카디건을 걸쳐두었지만//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다시는 환청과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림자의 무릎 뼈가 미처 펴지지 못했다 해도//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이상한 봄/ 달아나는 발목// 엄마 아빠/ 피가 흩어지는 축제// 비명과 꽃잎과 누수를/ 돌멩이와 비닐봉지의 중력을/ 나란히 이해해// 땅을 오래 두드린 발/ 열리지 않은 땅/ 풀들은 담장 위로 위로 솟아오른다// 이상한 봄/ 춤을 추다 발목만 남았어/ 내용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 온몸에 죽음의 불이 붙었었거든// 작은 점 하나가 목젖 부근에/ 눈물을 참으면 울퉁불퉁하다/ 지구에서처럼// 홈리스는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다/ 새들은 허공을 깨고 간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타본 적이 없어도/ 바다와 하늘이/ 바로 다음 언덕에서 만나고 있어도/ 사방의 벽마다 출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해도// 구겨진 틈 아니면 조롱/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등 너머에서 붙잡던 목소리를/ 혀처럼 뽑아 쥐고 있어도// 나는 사람이다/ 팔다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너는 사람이다/ 예쁘고 연한 발목을 가졌다// 자를 게 남았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목소리들 / 이원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겉,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귀, 기어 나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시인들 / 이원
조금 외롭거나 조금 웃는 사람들/ 먼 시간을 보기 좋게 섞어놓는 사람들/ 옆구리가 벌어진 사람들/ 벌어진 옆구리가 얼굴보다 간절한 사람들/ 성큼 성큼 문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어느 순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빈 그 자리를 채우지 않는 사람들/ 길을 돌돌 말아 책처럼 끼고 다니는 사람들/ 허공으로 들린 다리가 아니라/ 땅에 닿아 있는 다리가 녹아내리는 사람들/ 녹아내리는 제 다리에 사로잡힌 사람들//

자화상 / 이원
머리를 일산 시장 좌판에 내놓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사가는 사람이 없다// 머리를 옥션 경매애 올렸는데 클릭을 해도 머리에서 모래시계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다// 머리를 벼룩시장 난전에 가져 갔더니 대뜸 풍선처럼 불어본다/ 쭈글쭈글한 머리가 조금씩 펴지고/ 입이 벌어진다 남의 지문을 씹고 있는 입은 다행히 아직 울부짖지 않는다//

반가사유상 / 이원
방 밖이 아니라/ 방 속으로 열린 문으로 양변기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살은 없고 뼈만 남은 몸을 생각했다/ 뼈만 남은 몸도 추울까 한참을 들여다보았을 때/ 살이 흘러낸 것임을/ 흘러내린 살이 썩지 않는 것은/ 몸 밖으로 몸을 내보내기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벽 속의 몸은 벽 속의 몸만/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명상이 저렇게 치열한 것인 줄 알았다면/ 방 속에 화장실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명상이 저렇게 끔찍한 것인 줄 알았다면 변기가 보이게/ 문을 열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닫아놓으면/ 어둠뿐인 곳에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을 변기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이어서/ 하수구로 연결되어 있는 변기의 좁은 관이 떠오르는 것이어서/ 감추어둔 발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어서/ 다시 문을 열고/ 자꾸 맨 몸으로 변기에 앉아보는 것이다 나는// 반가사유상의 무릎에 앉아 반가사유상의/ 손이 되고 배꼽이 되고 발이 되고 반가사유상의/ 절망이 되고 반가사유상의 알리바이가 되고/ 반가사유상의 부끄러운 목숨이 되어/ 내 몸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몸 밖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시간을 물고 있어/ 자꾸 흘러내리는 내 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발은 몸의 것인데 발자국은 왜 길에 찍히는 것인가를/ 비명은 몸의 것인데 왜 몸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것인지를/ 끔찍한 것을 알아버린 좁고 깜깜한 목구멍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내 몸에서도 생각에서도/ 낙타의 땀이나 소젖처럼 다시 냄새가 나기도 하는 것이다/ 몸도 생각도 진창으로 미끈거리고 숨 막히기도 하는 것이다/ 내 두 발은 반가사유상의 명상으로 끓기도 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 이원
내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거위남자를 따라갔던 밤 / 이원
깜깜해서 손을 잡고 걸었찌요/ 발소리는 둘밖에 없어서// 돌멩이 같은 마음으로도// 손을 감싼 손은 참 컸지요/ 계절을 깜빡 잊어버리기 좋았지요// 점점 밤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유일한 기분/ 하나둘 벗어 던지는 기분// 키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손과 손은 어떻게든 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했지요// 악력만 있다면// 뺨을 쓰다듬으며/ 넓적한 것은 펼럭였지요// 같이 날아올라보는 거야// 날개였을까/ 날개를 펴서 더 어둡게 만들었던 것일까/ 가리는 것이었을까// 발을 굴렀던 것도 같습니다// 넓적한 것이 쓰다듬을 때/ 뺨은 펄럭였어요// 바람이 좋았다고요// 세상은 밝아오면 안 되는 것이었찌요/ 그러나 밝아오는 세상을 어떻게 막을 수 있나요/ 그 날개 하나로// 베였는지 몰랐어요/ 금으로 빛이 스며들기 전까지는요// 얼굴이 뒤죽박죽이지 뭐에요/ 축축한 날개 한쪽으로 머리를 덮어주고 있더라니까요// 그때에도 거위남자는 눈알을 떼룩떼룩 굴리고 있더라니까요/ 뻑뻑하게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났어요// 굳게 닫힌 부리를 믿었었나 봐요//

쇠 난간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 이원
쇠 난간 끝에서 새 한 마리가 중심을 잡는다 그 옆에 화초의 동그랗고 빨간 열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들도 여물고 있다 여무는 것들에게는 씨가 생긴다 중심이 들어선다 새는 눈에 씨를 심어놓고 있다 두 다리 위에 떠 있는 새의 눈에 확확 달궈진 햇빛이 박힌다 난간의 중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새는 온몸이 검다 흘러내리는 살은 난간에 거꾸로 매달린 그림자에 달라붙는다 햇빛에 숨구멍을 모조리 틀어막힌 화초가 사방에 비린내를 풍긴다 공기들이 몰려들어 단물을 핥는다 하늘을 벗을 사이도 없이 구름들은 몸 안 가득 물고 있던 칼날들을 뭉텅뭉텅 떨어뜨린다 남은 살을 추켜올리며 새는 난간 밖의 허공으로 들어간다//

검은 홍합 / 이원
검은 냄비 속에 검은 홍합이 가득하다/ 켜켜로 쌓인 홍합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홍합과 홍합의 틈바구니에/ 소리가 묻혔다// 냄비에는 찬물이 들어 있고/ 홍합은 바다에서 왔다// 한 번도 물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한 번도 물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 옷을 입고// 가스 불에 올려졌다/ 불꽃은 새파랗고// 추워/ 저절로 부딪치던 이를 넣고 입이 닫혔다/ 무서워// 파도를 입고 입고 입고/ 단단해졌다// 갇혔다// 물이 들어오지 않게 붙지 않는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것/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끝까지 주먹을 풀지 않았던 것// 홍합이 덜그럭거리며 끓어올랐다/ 딱딱 이를 부딪치듯이// 여기는 아직도 구겨진 벽/ 거품이 넘친다 냄비 뚜껑이 열린다// 어린 손목이 알고 있는 시계는 어디에서 멈췄을까// 홍합이 벌어지고 있다/ 선홍색 잇몸이 보인다//

검은 그림 / 이원
비행기를 타고 와 커다란 사탕을 줄게/ 노래를 불러봐/ 검색대를 통과하면 소리가 달라져/ 크리스마스가 지났어도/ 산타와 함께 나타날게/ 찢어지도록 입을 벌려봐/ 작은 상자 속엔 어린 양이 있고/ 울지 못하는 양/ 귀는 뾰족한 양/ 비밀이 흘러든 양/ 상자를 열어봐 절망을 선물해 줄게/ 꼬불꼬불해/ 손을 활짝 펴고 하늘을 가로질러봐/ 검은 구름을 줄게/ 더 이상 눈부시지 않을 거야/ 두 개의 기다란 창이 나란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자/ 창에는 파도가 멈추지 않는 바다가 들어 있다는 것/ 파도는 바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항변/ 창 사이에 숨어 차를 마시자/ 모든 빛을 버릴 때까지/ 볼과 입술을 비벼 줄게/ 굿나잇/ 별을 줄게 파묻을 수 있는 어둠과 함께/ 긴 회랑을 따라 달려와/ 내일 보면 좋겠어 나는 내일 멀리 가/ 산타 앞에서는 입을 크게 벌려/ 수치를 슬픔으로 위장해봐/ 선물을 줄게 공항에 갈게//
* 검은 그림: 고야의 작품에 붙여진 제목.

검은 모래 / 이원
발목과 손목을 해변의 모래에 파묻은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하늘이 길고 넓은 천처럼 내려왔다 펄럭이기 직전이다 색이 자꾸 바뀌었다// 아이들은 모래에 말굽자석처럼 척추 뼈를 말아 넣고 있다/ 아이들의 몸에 원무가 들어있다 떠밀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파도도 파도소리도 검다/ 허공은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중/ 모래도 검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바람에 씻긴 말들이 데리고 오나// 안간힘으로 달빛을 밀어내주고 있을 것이다/ 물 밑을 열며 올라오는 손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검은 모래에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을 파묻고 있다/ 물이 들어오는 해변에 아이들이 있다// 신이여 아이들을 버리소서/ 세상이 이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못 박힐 순결한 손이 필요 없나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아이들을 삼켰다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하므로/ 당분간 종려주일은 없을 것이므로//

오늘은 천사들의 마지막 날 / 이원
햇빛이 각도를 조금씩/ 바꿀 때/ 얼굴이 하나씩 늘어났다// 햇빛이 얼굴을/ 조금씩 열고 들어갈 때/ 골목 냄새가 났다// 초록 직전/ 땅속을 상상하는 일// 심장을 가볍게 옮겨보는 일// 허공은 신들의 자세를 닮아갔다// 흰 옷/ 긴 삽// 햇빛 한 삽에 얼굴 하나씩 떠졌다// 하양 바탕/ 하양 얼굴// 햇빛은 늘 처음이다// 앞을 향해/ 손을 가만히 내밀었다// 허공이 잊은 것은 날개// 모두 사라진단다/ 날개는 신들의 유머였다//

밤의 놀이터 / 이원
한밤중 놀이터에 말이 있었다/ 모래 속에는 몸통만 남은 말이 다섯 마리 있었다/ 희고 검고 파랗고 노랗고 붉은 말이 있었다/ 머리를 관통한 쇠막대기가 함께 있었다/ 내륙 산간에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온 신의 메시지는 모래 위에 새겨지지 않았다//

작고 낮은 테이블 / 이원
작고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을 때는/ 바닥에 앉아 다리를 접고 등을 구부려야 하지요/ 이 작고 낮은 테이블에 무엇을 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주 앉아 있는데요/ 저녁이 왔는데요// 작고 낮은 테이블을 놓고 마주 앉을 때는/ 모퉁이가 되어야 하지요/ 쪼그리고 앉아/ 우리는 부리가 길어지지요// 작고 낮은 테이블이 사이에 있어/ 우리는 손을 들어/ 비어 있는 둥그런 접시를 들어 올렸지요// 네 개의 손이 하나의 접시를 잡을 때// 어떤 기원을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얼굴을 지나/ 허공의 입구까지 빈 접시를 들어 올려야 했나요/ 접시는 소용돌이를 언제 멈출 수 있을까요// 볼로 접혀 들어가는 얼굴// 깨져버렸어요/ 다리가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는 무릎이 있던 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구부려보았어요//

오토바이 / 이원
왕복 4차선 도로를 쭉 끌고/ 은색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오토바이의 바퀴가 닿은 길이 팽창한다/ 길을 삼킨 허공이 꿈틀거린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끊긴 길을 좋아하고/ 4차선 도로는 허공에서도 노란 중앙선을 꽉 붙들고 있다/ 오토바이에 끌려가는 도로의 끝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따라온다/ 뽑혀져나온 아파트의 뿌리는 너덜너덜한 녹슨 철근이다/ 썩을 줄 모르는 길과 뿌리에서도 잘 삭은 흙 냄새가 나고/ 사방에서 몰려든 햇빛들은 물을 파먹는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뿌리의 벼랑인 허공을 좋아하고/ 아파트 창들은 허공에서도 벽에 간 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 도로의 끝을 막고 있던 아파트가 딸려가자/ 모래들이 울부짖으며 몰려온다 낙타들이 발을 벗어들고 달려온다/ 그러나 낙타들은 우는 모래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모래들은 울부짖으면서도 아파트 그림자에 자석처럼 철컥철컥 붙어간다/ 모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여서/ 오토바이는 허공에 제 전 생애를 성냥처럼 죽 그으며 질주한다/ 아파트는 허공에서도 제 그림자를 다시 꾸역꾸역 삼키고 있다//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 이원
곧추 세운 등뼈 아래로/ 엉덩이를 엉거주춤 유지해야 하는/ 이 포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각자의 배후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포즈를/ 우리는 언제부터 배워야 했습니까/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부터 구부려야 했습니까/ 어디를 숙여야 했습니까// 의자를 닮기 위해/ 발을 매단 채 손을 매단 채/ 이상한 도형이 되어야 했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이 짐승은 언제 달리기 시작하나요// 창 밖 난간으로는 발음을 모르는 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밤의 숲에 가면 뼈의 외침이 나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로잡힌 척 의자에 앉아 우리는 손만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왜 멈출 수 없습니까/ 항문과 입을 동시에 벌리는 법//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징그러운 동작을 배웠을까요// 의자 손잡이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입이라 해도// 고해성사의 순서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 또한/ 사소한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뒷모습이 구겨져 있습니다/ 깜깜한 곳에 우리는 너무 오래 접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의자와 의자가 대화하는 것을 믿습니까// 토하고 말았지요// 이런!/ 의자들끼리는 당황은 하지 않습니다//

길 또는 그물 / 이원
길은 그물이다 몸을 가진 것들은 걸린다 걸려본 발이 길을 알리라 길 가운데 선 청동의 동상에도 그물의 그림자가 비친다 허리에 찬 위풍당당한 칼도 예외는 아니다 공기가 포장지처럼 바스락거린다 길 밖의 키작은 채송화는 다른 길을 만든다 간간히 꽃망울 잎망울까지도 물과 흙을 담은 길이다 길의 무너지는 무덤들이 꽃속으로 스며든다 이파리와 아파리 사이에서 조금씩 벌어지는 하늘이 새하얗게 바랜다 공기는 얼룩이 져 있다 어김없이 하늘을 따라가는 길 가파른 매듭을 보여주고 매듭은 깊은 골짜기를 몰고온다 높은 곳의 웅덩이에서 몇 개의 자루를 지고 가는 구름 구름속으로 지상의 그물이 삭아내린다//

시간과 비닐봉지 / 이원
검은, 비닐봉지 하나, 길바닥을 굴러다닌다 계속해서 시간은, 길보다 먼저 다리를 뻗는다, 검은 비닐봉지, 이번에는 계단이 있는 곳까지, 굴러가더니 멈춘다 잠시 따갑게, 부스럭거린다 시간은 다리를, 양옆으로 길을 벌리며 간다, 가다 간판, 밑에서 멈춘다 무방비 상태로 옷의 앞을 모두, 풀어놓은 채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며 비닐봉지, 검은 쓰레기가 있는 곳으로 굴러 들어간다, 한참 나오질 않더니 검은, 그림자를 흔들며 헤집으며, 나무 밑에 멈춰 있다, 그곳에서 시간과, 비닐봉지가 같은 색으로 만난다, 나무에 등을, 기댄 시간의 한쪽 다리가 무릎에서, 잘려 있다 뒤를 보니 나무의, 중간쯤에 다리를 접어 올리고, 있다 비닐봉지는 여전히, 나무 밑에 머물러 있고 몸을 앞으로, 숙인 시간은 무엇인가를 뒤로, 껴안고 있다//

애플 스토어 / 이원
숲이 된 나무들은 그림자를 쪼개는 데 열중한다/ 새들은 부리가 낀 곳에서 제 소리를 냈다/ 다른 방향에서 자란 꽃들이 하나의 꽃병에 꽂힌다/ 늙은 엄마는 심장으로 기어들어가고/ 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뒤엉킬 때까지/ 사과는 둥글어졌다//

애플 스토어 2 / 이원
남자가 걸어온 길을 게웠다// 그림자는 비좁았다// 업힌 아기가 엄마의 등을 때리며 악을 쓴다/ 눈물은 없다// 슬립을 입은 여자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흰 베개/ 뽑힌 깃털로/ 둥근 어깨// 내 몸에서 나온 내 피를 믿니// 이빨 자국은 사과 속살에 남겨진다//

애플 스토어 3 / 이원
6225 봉화산행 지하철은 지금 합정에 있다/ 나는 절두산과 잠두봉을 지나 광흥창역 지하에 있다/ 걸을 때마다 온몸에서 쇠붙이 소리가 나는 노인이 지나갔다/ 새들의 입술에서 사람이 줄줄 새고 있다/ 내몰린 것들을 안고 바다는 곡선을 깎아냈다/ 밤이 왔는데 아직도 다물어지지 않은 입이 있다//

애플 스토어 4 / 이원
젖은 비둘기를 안고 낮에 아이가 찾아왔다/ 억지로 물에 넣었냐고 했다/ 아이는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해질녘에 산양을 안고 아이가 찾아왔다/ 다리를 다쳤냐고 했다/ 누구 다리냐고 물을 수 없었다/ 한밤에 까마귀를 머리에 얹고 아이가 찾아왔다/ 살아 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여름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출판기념회처럼 고독하다/ 영혼 없는 영혼처럼/ 코스프레처럼 고독하다//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한 개에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체조선수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 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길들은 끊어지고 싶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우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토끼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가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두 사람 2 / 이원
여자와 남자는 앉을 때 같은 모양을 가졌다/ 손을 살그머니 오므려 무릎 위에 놓는 방식/ 살그머니/ 따뜻한 빛이 생겨나게 하는 방식// 남자는 여자의 눈을 보고 웃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눈빛을 맞추며 웃는다/ 둘이서만 바라보게 되어/ 알을 품은 모양이 되었다// 남자는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다/ 여자의 손은 꽃묶음이 살짝 가려주고 있다// 지구에서 한 자리// 사랑의 모양//

이것은 사랑의 노래 / 이원
언덕을 따라 걸었어요 언덕은 없는데 언덕을 걸었어요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양말은 주머니에 넣고 왔어요 발목에 곱게 접어줄 거예요 흰 새여 울지 말아요/ 바람이에요 처음 보는 청색이에요 뒤덮었어요 언덕은 아직 그곳에 있어요/ 가느다랗게 소리를 내요 실금이 돼요 한 번 들어간 빛은 되돌아 나오지 않아요/ 노래 불러요 음이 생겨요 오른손을 잡히면 왼손을 다른 이에게 내밀어요 행렬이 돼요/ 목소리 없이 노래 불러요 허공으로 입술을 만들어요 언덕을 올라요 언덕은 없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요 새의 발이 가득해요 발꿈치를 들어요 첫눈이 내려올 자리를 만들어요/ 흰 천을 열어 주세요 뿔이 많이 자랐어요 무등을 태울 수 있어요 무거워진 심장을 데리고 와요//

그림자 가이드북 / 이원
찍어 먹어보면 짜다 다 쫄았다/ 만지면 버석거린다 모래만 남았다/ 펼쳐진 것은 아주 작다 우주와 같은 사이즈다/ 내막을 다 안다 길이 그 무엇도 모르게 멈칫한 순간을 알고 있다/ 음악, 태아, 구름과 같은 족속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나왔고 의지와 무관하게 버려졌다/ 아직도 출구가 있다고 믿는다 몸에서 먼 쪽으로 뻗고 본다/ 모르는 몸에 가서 겹쳐진다 겹쳐져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낯선 것이다 낯선 것들은 서로 붙는다/ 피 닦아, 빛 속으로 막 나온 어리둥절한 몸에게 말한다/ 다리는 점점 길어지고 가늘어진다 끊어지려는 발목 속을 점점 가팔라지는 허공이 힘줄로 버텨준다/ 벽에서 솟아오를 때가 있다 벽은 물렁하다 벽을 뚫고 나온다 파도치지 않는 벽은 없다/ 뼈를 숨기기에 가장 완벽한 장소/ 흘러나오는 것은 계속 흘러나와 그런 건 어때?/ 불길한 것은 팔팔 끓고 있어/ 불길한 것은 순결한 것//

잘려서, 플라잉 / 이원
오토바이와 트럭이 부딪쳤다/ 오토바이에서 사내가 튕겨져 올랐고/ 다리 한쪽이 포물선을 그리며 사내보다 더 높이 튕겨져 올랐고/ 오토바이가 쓰러졌고/ 사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리는 사내의 몸과 반대 방향으로 떨어지더니 조금 더 굴러갔다// 잘린 다리는 신발이 신겨진 채로 나뒹굴었다/ 무릎 위에서 잘린 다리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은 X자로 발을 꼭꼭 조이고 있었다/ 신발 속에서 새끼발톱이 짓이겨졌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잘 채워진 순대 같은 무릎 속에서 그레고리성가처럼 피가 흘러나왔다/ 뼈가 심겨졌던 무릎의 안도 둥글었다// 차들이 잘린 다리를 피하며/ 다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묻히며 지나갔다/ 타이어도 잘린 무릎처럼 닳아있었다/ 사라지는 차들을 따라 핏자국이 생겨났다/ 무릎에서 흘러나온 피가 신발을 물들였다/ 신발 끈이 차들이 남긴 속도를 X자로 묶고 있었는지는/ 짓이겨진 발톱 안으로 피가 다시 흘러 들어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바닥이 동시에 펄럭이는 듯도 했다/ 새들이 똑같은 포즈로 똑같은 높이를 가로질러갔다/ 새들이 두고 간 새들의 길은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사내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오른 그 순간/ 잘린 다리가 제 그림자로부터 튀어올랐다/ 사내는 없어진 다리 쪽이 아니라/ 붙어있는 다리에 두 손을 갖다 대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쿠키들의 접시 / 이원
정오와 자정 사이/ 달콤함과 웅성거림/ 고소함과 단단함/ 테이블과 흐느낌 사이// 바삭,/ 부서질 수도/ 퉁퉁 불어터질 수도/ 분비물까지 뒤집어쓰면서// 나는 쿠키입니다 불의 뜨거움으로 탄생한/ 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울겠습니다// 눈물도 없이// 여행용 가방 속/ 덜컹거리면서/ 저며진 살/ 비좁은 통로// 교통량이 점점 늘어난다/ 흐릿한 밤/ 달이 내내 따라오고 있을 것/ 파도 소리를 상상했어요/ 벽은 빛마저 빨아들인다// 이런, 또 사막에 놓일 줄이야/ 모래는 내 안에도 충분하다고!//

봄 셔츠 / 이원
당신의 봄 셔츠를 구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져본 팔이 들어갈 곳이 두 군데/ 맹목이 나타날 곳이 한 군데 뚫려 있어야 하고/ 색은 푸르고/ 일정하지 않은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면 했습니다// 봄 셔츠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차돌을 닮은 첫번째 단추와/ 새알을 닮은 두번째 단추와/ 위장을 모르는 세번째 단추와/ 전력(全力)만 아는 네번째 단추와/ 잘 돌아왔다는 인사의 다섯 번째 단추가// 눈동자처럼 끼워지는 셔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도/ 사명감으로 달린 여섯 번째 단추가/ 심장과 겹쳐지는 곳에 주머니가/ 숨어서 빛나고 있는/ 셔츠를 입고//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당신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목에서 얼굴이 뻗어 나가며,/ 보라는 것입니다// 굳지 않은 피로 만든 단추. 우리의 셔츠 안쪽에 달려 있는//

월요일 / 이원
여자는 서쪽 허공을 낙타처럼 잡아끌고 이곳까지 왔다/ 여자는 사방에서 유리가 반짝이는 거리를 지나왔다/ 유리가 있는 한낮과 길은 계속되었고/ 여자의 몸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속으로 쉴 새없이 기름을 실은 탱크로리가 달려갔다/ 몸 속으로 차오르는 것은 어둠이어야 했다/ 그곳을 향해 여자의 밸브는 자주 열렸다/ 여자의 몸은 밤의 전극에 닿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은 오랫동안 낮과 밤을 갈아 끼우지 못했다/ 여자의 발자국은 몸에 새겨졌고/ 도시에서 빼내고 있는 여자의 두 다리는 녹이 슬어 있었다//

일요일의 고독 2 / 이원
속옷만 입고 여자는 침대 한가운데에서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다/ 여자의 몸에 얼굴에 햇빛이 죽죽 그어진다// 여자의 얼굴은 휴일의 상가처럼 텅 비었다/ 열린 창의 끝에서 흰 커튼이 양 갈래 머리처럼 흔들린다// 여자의 등 뒤에는 벽 여자의 얼굴 앞에는 창/ 초록색 뿔테 안경을 쓴 남자 아이가 노인의 걸음걸이로 창밖을 지나간다/ 여자의 등이 점점 더 둥그렇게 휘며 벽에 가까워진다// 뼈의 감정 같은 것/ 브래지어 버클보다 먼저 여자의 등을 물고 있던 살이 툭툭 터진다/ 뼈의 안쪽에서 뼈는 무엇을 붙잡고 있을까// 고독이 꼭 추운 것만은 아니다/ 그물이 된 얼굴을 들고 여자의 뼈는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맛있어요! / 이원
동시 신호 직전 횡단보도 앞에 어떤 짐승의 배가 터져 있다 터진 모든 순간은 폭죽이라 어리광 같은 네 발은 허공을 놓지 않고 있다 어둠에 파 먹힌 눈을 반짝이며(어둠이 파먹은 것들은 반짝인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터진 몸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안을 핥는다(샘물을 먹을 때처럼 혀가 단 소리를 낸다) 날 것의 맛을 아는 혀와 날 것의 맛을 알던 살이 닿는다(가르릉거리는 목구멍과 가르릉거리던 목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다) 산 짐승이 아직 뼈가 놓아주지 않는 살을 이빨로 뜯는다 산 짐승이 죽은 짐승의 살을 씹는다(산 짐승이 산 짐승의 살을 씹어 삼킬 때도 있다) 죽은 짐승은 마지막 숨이 제 몸에서 나가던 때의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산 짐승은 제 살을 비집고 나온 울음을 죽은 짐승의 배 속에 떨어뜨린다 여전히 어리광처럼 마주보고 있는 네 발들이 들어있는 길이 젖 냄새를 풍기며 동그랗게 오므라들고 있다//

한 여자가 간다 / 이원
등에 짐을 지고 한 여자가 언덕을 내려온다 땀이 흥건한 여자의 가죽을 햇빛이 옥수수 껍질처럼 벗긴다 사나워진 햇빛에 찔린 새들은 뜨거운 다리를 떼어내지 못하고 날아간다 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여자는 몸에서 쉬지 않고 길을 뽑아낸다 길은 연탄집게 같은 여자의 맨발이 지나간 곳에서만 생겨난다 살로 만들어진 물컹거리는 길 아래로 지붕들이 모여든다 여자의 몸에서 두 개의 유방이 나란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유방은 하늘 속을 파고 들어간다 떠도는 두 개의 봉분이 된다 허공에서도 지우지 못하는 대지의 시간을 피해 새들이 급강하한다 하늘에는 몸의 길이 끊긴 유방이 떠가고 언덕에는 녹슨 자궁이 덜그럭거리며 떠밀려온다 같은 풍경을 담고 썩지도 못하는 창 근처까지 온 새들은 먼저 날개부터 감춘다//

쿠키들의 접시 / 이원
정오와 자정 사이/ 달콤함과 웅성거림/ 고소함과 단단함/ 테이블과 흐느낌 사이// 바삭,/ 부서질 수도/ 퉁퉁 불어터질 수도/ 분비물까지 뒤집어쓰면서// 나는 쿠키입니다 불의 뜨거움으로 탄생한/ 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울겠습니다// 눈물도 없이// 여행용 가방 속/ 덜컹거리면서/ 저며진 살/ 비좁은 통로// 교통량이 점점 늘어난다/ 흐릿한 밤/ 달이 내내 따라오고 있을 것/ 파도 소리를 상상했어요/ 벽은 빛마저 빨아들인다// 이런, 또 사막에 놓일 줄이야/ 모래는 내 안에도 충분하다고!//

간이식당 / 이원
끊어져버린 전기처럼 한 사내/ 등받이가 없는 간이 의자에 앉는다/ 그가 꽂힐 콘센트가 보이지 않는다/ 사내의 잠긴 허리 근처에서/ 수도꼭지 두 개도 잠겨 있다/ 카운터 너머 진창 같은 여자는/ 수도꼭지 옆 온수 탱크 앞에 선다 그래도/ 온수 탱크와 수도꼭지는 차가운 은빛이고/ 허옇게 뒤집어진 고무장갑은 시간을 잔뜩 묻히고/ 붉은 벽의 허공에/ 형광등과/ 여자와 사내가/ 흐릿하게 떠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손잡이는 보이지 않는다/ 유리문 밖은 차들이 굉음을 내며 도로를 질주한다/ 여자와 사내는 모른다 어디쯤이 이 세계의 통제선인지는/ 헐거운 세계를 조이고 있는 나사못처럼/ 단단한 등만 보이고 있는 여자와 사내/ 여자와 사내를 열고 밤이 산업용 석회액을 부어넣는다/ 굳은 후에 사내와 여자를 뜯어낸다/ 엉킨 전선 다발 같은 것들이 석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나이키 2 / 이원
한 아이가 달려 간다/ 오른팔은 땅을 향에 떨어지고 있고/ (오른손은 손등을 보인 채)/ 왼팔은 팔꿈치가 살짝 안으로 꺾인 채 올라가 있고/ (왼손은 손바닥이 본인 채)/ 오른쪽 다리는 앞으로 들려 있고/ (오른발은 신발 뒷꿈치가 땅에 닿아 있고)/ 왼쪽 다리는 뒤쪽으로 높이 올라가 있고/ (왼발은 허공에 들려 신발 밑창이 다 보이고)/ 단추를 목까지 세운 몸통이/ LPG통처럼 덩그러니 가운데 떠 있고/ 땅바닥으로 그림자가 가스통처럼 새어나오고/ 고개를 약간 쳐든 얼굴은/ 하늘 쪽으로 둥둥 떠간다// 여섯 조각으로 해체된 아이/ 발은 나이키가 꼭 조이고 있다//

아파트에서 1 / 이원
​한 남자의 두 손이 한 여자의/ 양쪽 어깨를 잡더니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살 속으로 쑥쑥 빠졌다/ 여자가 제몸에서 뒤엉켜 있는/ 철사를 잡아 빼며 울부짖었다/ 소리소리 질렀다/ 여자의 몸에서 마르지 않은/ 시맨트 냄새가 났다/ 꽃 피고 새가 울었다//

거울 속에서 낙타는 어디까지 갔을까 / 이원
사막의 달은 차고 환해 내가 들여다봐도 내가 나오지 않는 거울이야. 인공 관절을 두 개 박고 병원 문앞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낙타와 그 낙타가 눈 속에 급히 쑤셔 넣은 모래의 허공과 어제의 표지로 뒹구는 뼈와 사막을 뜯어먹는 바람이야. 나도// 거울 속으로 밧줄을 늘어뜨려/ 거울 속으로 낙타를 산 채로 들여보내/ 거울 속으로 돌을 떨어뜨려// 달의 사막은 미끄러워 숨차 당신의 그림자만 깔려있는 거울이야. 숫자가 박힌 문짝과 핏빛 미로와 낙타의 울음소리가 묻은 달빛과 죽은 자의 귀 두 개와 귀에 붙어 있던 바다야. 나도// 몸 속에서 손에 잡히는 해는 건져내/ 모자와 말발굽쇠는 집어내/ 죽은 양의 가죽을 벗겨 거울 밖에 내걸어// 우리들이 저 거울의 모뎀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몸이 쉴 새 없이 두려움의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이 세계가 아니라면/ 이 한밤에 거울이 대용량의 길을 장착했겠니//

사랑 또는 두 발 / 이원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찾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와 몸 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어김없아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몸이 쓰라리다//

근거 / 이원
광화문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같은 방향으로 뛰어나갔다/ 장군 동상은 투구부터 칼까지 한 색이고/ 왕의 의자에서 왕은 너무 크다/ 색색의 연등들도 바람이 불면 같은 쪽으로 흔들렸다/ 햇빛은 골목으로 숨어들고/ 간판들은 복고다/ 과거로 돌아가자고?/ 스님?/ 횡단보도를 건너던 스님이 부르자 스님이 돌아보았다/ 여스님 둘이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봄이었는데/ 한 명은 털모자를 한 명은 여름모자를 쓰고 있었다/ 스님들은 옷도 모자도 몸이 희미해지는 회색이었다/ 경복궁에서 길쭉한 그림자가 튀어나올 때/ 하맘터면 심장을 가졌군요/ 말할 뻔했다//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 / 이원
실습용 재료 같은 사내와 여자가/ 나란히 검은 주유기를 제 옆구리에 꽂고 서 있다/ 그들은 서울의 밤이 꿈 대신에 선택한 텍스트이다// 허공의 미터기에서 그들의 몸까지는/ 부패한 내장 같은 검은 호스가 늘어졌고/ 주유기의 금속성 손잡이는 옆구리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두 발을 각각 흰 정지선 앞에 멈추었다// 오아시스 같은 붉은 간판은 허공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길을 가야 한다/ 지도를 내장한 몸은 어둡고 뻑뻑하다/ 미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사내와 여자의 주유량은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판독되지 않는 그들의 그림자가 도로로 흘러넘쳤다// 밤의 표면은 접시처럼 미끄럽고 불안하다/ 서울은 텍스트인 사내와 여자를/ 퓨즈처럼 갈아끼우기 시작한다/ 밤의 흐린 불 속에/ 공기가 철근처럼 삐죽삐죽 뽑혀져 있다//

당신이라니까 / 이원
동그란 눈알과 동그란 입술이// 나란히 벌어질 때까지/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이 튀어나올 때까지/ 뺨이 번질 때까지/ 휘파람이 될 때까지/ 숲에서 바람이 새지 않을 때까지/ 구역을 잃어버릴 때까지// 허공을 건너는/ 긴팔원숭이가 되어// 떨어지는 꽃잎들을 받아먹을 것/ 꽃나무 옆에 게워낼 것/ 토사물의 울음소리가 될 것// 0이 될 때까지 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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