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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머니의 의자 / 진영숙

부흐고비 2022. 2. 13. 04:59

일주일에 한두 번, 오전 일정이 없는 날에는 습관처럼 커피잔을 들고 거실 창가로 향한다. 창 가까이에 놓여 있는 빨간 의자를 친구 삼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화하는 바깥풍경에 빠져들곤 한다. 어제와 오늘, 모처럼 쌓인 눈으로 제주는 하늘길과 바닷길이 모두 막혀버렸다. 공항에서는 매트와 담요로 하룻밤을 지낸 여행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어찌 막을 수 있담?”

창가에서 서성일 때마다 나는 푹신한 소파보다 어머니가 즐겨 앉던 빨간 의자에 눈길이 더 간다. 겨우 엉덩이를 걸칠 수 있고,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한 의자인데도 말이다. 그때마다 생전에 어머니가 남긴 말 한마디가 가슴 속을 맴돈다.

“5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어머니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설거지를 하시곤 했다. 허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점점 굽는 허리보다 높은 싱크대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방석을 네 겹으로 접어 나일론 끈으로 칭칭 감아 사용하였지만, 의자에 묶어 놓은 방석은 얼마 가지 못하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하였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송구스러워서 시내의 의자 가게를 급히 찾아 나섰다. 몇 집을 돌고 나서야 마음속으로 그리던 의자를 구할 수 있었다. 높낮이의 조절이 가능한데다 허리도 약간 받쳐주는, 360도 돌아가는 회전의자였다. 단숨에 의자를 사서 차에 싣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의자를 본 어머니는 며칠 동안 졸라대던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며 함박웃음을 머금으셨다.

삼 년 전 겨울, 어머니는 옆구리가 결리다면서 한의원을 찾아갔다.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별 차도가 없자 종합병원으로 갔다. 검진 결과가 나오던 날, 오빠는 병원 휴게실에서 급히 가족회의를 열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오빠의 목소리는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우리 자식이기를 포기하자!” 그 말에 어머니의 병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술이나 항암치료 같은 의술의 도움을 받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탄식. 이제,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떠나시는 날까지 어머니의 곁을 지켜 드리는 것뿐이었다.

병상에서 어머니는 이따금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셨다. 당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는지, 바람처럼 던진 말 한마디가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5년만, 5년만 더 살 수 있다면…!’

그때 어머니가 왜 5년만 더 살고 싶어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당신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자식들을 위한 일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히 여기셨던…. 그날 이후, 나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문득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한마디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하나님, 제 생명의 5년을 어머니께 드리면 안 될까요?”

그 말이 왜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는 나오지 않았는지를 모르겠다. 이기심인가, 무심함인가. 그 무렵, 나는 교회에서 전임 사역을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휴무인 월요일과 퇴근 이후의 시간, 그리고 주말 오후에나 짬을 낼 수 있었다. 병원을 찾아갈 때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거나, 소문 난 식당을 찾아 음식을 사 들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싱겁게 만든 병원 밥에 질렸다며 맛있게 드시곤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3월이 오면서, 나는 이미 계획해 놓았던 상담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휴무인 월요일에 광주를 오가다 보니 몸은 점점 지쳐가고,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에 쫓기면서 잠시 어머니의 병실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늘 무거웠다. 게다가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어머니의 가슴에 붙인 패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혼수상태에 빠져들게 했다.

어느 월요일, 어머니는 병상에서 두 달도 버티지 못한 채 세상의 끈을 놓아버리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학교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공항까지는 또 어떻게 갔는지, 비행기는 어떻게 탔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다만 강의실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온 운동장에는 만개한 목련이 눈부시게 생명의 불꽃을 내뿜고 있었고, 몽실몽실한 벚나무의 꽃망울은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지구를 떠나고, 새로운 생명들은 떼를 지어 지구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의자는 한동안 친정집 부엌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의자는 얼마 후 우리 집 거실,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지인이 보내온 드립 커피를 머그잔에 가득 따른 뒤 어머니의 의자로 향했다. 특유의 고소한 향이 방안 가득 퍼졌다. 폭설로 오후 상담도 연기되고 저녁 모임도 취소된 터라, 모처럼 만에 이 의자에 앉아 기억 저편의 어머니를 불러내어 담소를 나누고 싶어졌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시자, 울컥하는 감정이 속수무책으로 밀려와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머니의 빨간 의자에 얼굴을 묻는다.



진영숙 수필가 제주 출생, 호남신학대학원 상담학과 졸업(상담학 석사), 교육전도사, 청소년상담사, 백록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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