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후레자식들 / 강호형

부흐고비 2022. 2. 13. 22:59

잠자던 벌레들이 놀라 깬다는 경칩驚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생식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인간이나 동·식물이나, 무릇 생명을 가진 무리들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것이 본능이자 자연현상이기도 하다. 그 본능이 수억년 동안 대를 이어 지구를 지켜왔다. 인류도 그중의 한 종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천륜天倫이라고 한다. ‘하늘이 정해 준 거스를 수 없는 관계’, 또는 ‘서로 간에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말을 영어권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natural law” 또는 “the natural relationships of man”이라고 되어 있다. ‘天(하늘)’을 ‘nature(자연)’로 본 것만 다른데, 인류도 자연의 일부이니 ‘천륜’은 곧 자연계의 순환법칙인 셈이다.

얼마 전, 90대의 노인이 아들인지 손자인지를 상대로, 물려준 재산을 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극진히 모시겠다는 말만 믿고 전 재산을 넘겨줬더니 받고 나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연락조차 끊어서 생계가 막막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고소인이 100세에 가까운 고령이어서 화제가 됐을 뿐이지 비슷한 일이 일 년에 수백 건씩 벌어진다고 한다. 이건 뭔가 천륜natural law 내지에 위배되는 일인 것 같아 나처럼 물려줄 재산이 별로 없는 부모로서는 계산이 자못 복잡해진다.

‘동방예의지국’이 이 지경이라 다른 나라들의 사정은 어떤지가 궁금했는데, 모 일간지 최근호에 실린 ‘윤희영의 News English’라는 영어 학습코너에서는 더 기막힌 기사를 교재로 다루고 있다.

<부모 고소하겠다는 황당한 이유> 이런 제목의 기사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도의 27세 청년이 자신의 동의 없이 자기를 낳았다며 부모를 고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라파엘 새뮤엘이라는 이 청년은 자식을 이 세상에 강제로 태어나게 하고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은 유괴 납치 및 노예화와 다를 바 없다며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하겠다고 예고해 전 세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부모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원하지도 않는 아이가 태어나 학교생활과 구직이라는 복잡하고 기나긴 고행을 겪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변한다. 위한다면 아예 낳지를 말았어야 한다고 훈계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다.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부모에 의해 부양되고 살아갈 돈이 주어져야 마땅하다. 부모는 자식을 투자 또는 보험증권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

자칭 인구 억제주의자인 그는 이 험한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자식을 퍼지르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고 명분을 내세운다.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좋은 정자들을 짓밟고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바로 너다.” 라는 댓글도 달렸다. 하지만 변호사 부부인 그의 부모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감싼다. 아버지는,

“네가 두려움 없고 독자적 사고를 가진 젊은이로 성장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행복한 인생을 찾아가기 바란다.”고 했다.

다만, 엄마가 변호사다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아빠, 엄마가 어떻게 너에게 사전 동의를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제시한다면 나도 내 실수를 인정하마.”

가뜩이나 온 천지가 미세먼지에 뒤덮여 숨쉬기가 어려운 판에 이런 기사를 보니 기가 막힌다. 누구인들, 어느 생명체가 제 의지로 세상에 태어났겠는가. 만일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세상에는 태어나기를 원하는데도 못 태어나고 있는 아이가 태어난 아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ㅍ 우리나라 정부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아이 낳는 걸 극구 말리더니, 불과 반세기 만에 갖은 감언이설로 출산을 독려하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거둬 바쳐가며 아이 만들어내기를 간청해도 출산율은 오히려 더 떨어져서 국가위기론까지 나오고 있다. 이쯤 되면, 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원하면서도 태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이 정반대의 소송을 걸어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늘의 뜻이든 자연의 법칙이든 정해진 우주의 순환 원리를 거스르면 재앙이 오기 마련이다. 요즘 우리가 미세먼지를 마시며 살아야 하는 것도 인류가 자연계의 질서를 깨뜨린 죄과다. 이처럼 물이 썩고 빙산이 녹아내리고 먹을거리가 중금속에 오염돼서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인류가 어머니 같은 지구를 경쟁적으로 능멸하여 천륜을 어긴 벌이다.

천륜을 어긴 자식을 후레자식이라고 했다. 산천초목과 금수禽獸들은 다 의연하게 천륜을 지키는데 오직 인류만 점점 더 못된 후레자식이 되어가고 있어 걱정이다.

“후레자식들!”

내뱉고 보니 내게 한 소리 같아 입맛이 쓰다.



강호형 수필가 경기도 광주 출생, 1988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수필집: 『돼지가 웃은 이야기』 『행복을 디지인 하는 부부』 『붕어빵과 잉어빵』 『빈자리』 수필선 『바다의 묵시록』 『20세기의 전설』 『정류장에서』 등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황의순문학상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 / 박현기  (0) 2022.02.14
돌멩이 / 양상수  (0) 2022.02.14
늙은 난 / 강성관  (0) 2022.02.13
어머니의 의자 / 진영숙  (0) 2022.02.13
표지(標識) / 홍혜랑  (0) 2022.02.1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