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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목포항 / 조문자

부흐고비 2022. 2. 23. 08:08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떠나간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만남과 헤어짐 중간에 목포항이 있다.

바다와 육지, 두 개의 맥박이 선명하게 뛰는 해안 도시다. 노령산맥을 끼고 다도해를 연결하는 해상로 관문이다. 삼학도를 막아 개펄 위에 세워졌다. 개찰구에서 배로 올라가는 길이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지나간 시절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는 나이 든 귀부인같이. 인간들이 무심코 던진 삶의 오물과 욕망의 쓰레기를 어쩔 수 없이 삼켰다. 그래도 견딜 만할 터이다. 광활한 서남해로 나아가 둥둥 떠다닐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받아 품어주고 삭혀주는 그 품은 속됨으로 성스러운 천혜의 항구다.

목포항의 아침은 안개로 시작한다. 매서운 찬 공기가 바다에 내려앉으면 물과 찬 공기가 만나 뽀얀 물안개를 피워 올린다. 밑줄 그어진 상처까지 덮을 태세다. 추울수록 물안개는 높이 솟아올라 연기처럼 깔린다. 먼동이 트고 바람이 분다. 물안개가 이리저리 일렁인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항구에 대한 위안의 손길일까. 선착장에 묶여 있는 배들을 어루만진다. 항구가 물안개를 반긴다. 아스라한 동화 나라가 몽환적인 아침을 만들어낸다.

어물이란 어물은 죄다 목포항으로 몰려오는가. 습기 젖은 푸른 새벽을 헤치고 고깃배가 들어오느라 왁자하다. 비린내 폴폴 나고 노릇노릇한 삶들이 알알이 박힌 항동시장이 바로 옆에 있다. 금방 잡아 올린 감성돔처럼 펄떡펄떡 뛴다. 사무라이같이 짙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툭툭 뱉어내는 사투리에 수더분한 사람들이 배에서 내린다. 시장 들머리 국밥집으로 간다.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밤 기차에서 내린 어머니의 손에 배표가 들려있다. 뽀얗게 우려낸 바지락 국물로 빈속을 푼다. 고소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보리밥으로 허기를 달랜다. 걸쭉한 막걸리에 홍어보리앳국이 톡 내는 알싸한 맛, 구수하고 시원한 국물, 여린 보리 싹의 풋 냄새를 목포에선 빼놓을 수 없다.

항동시장이 붐비는 이유는 꼭 음식 맛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 사이 오가는 인심 때문일 것이다. 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찰진 인심을 찾아 외로운 사람들이 몰려드는지도 모른다. 그 식당에 가면 식사 후 어김없이 다디단 인스턴트커피 한잔을 다정하게 건네주는 넉살 가득한 곱슬머리 영감이 있다. 벽에 착 달라붙은 세 개짜리 전등 아래서 목포항에 관한 구닥다리 이야기를 틈만 나면 들려준다. 시시콜콜한 내 이야기도 들어줄 것만 같다. 만나기만 하면 손주 자랑하는 그 친구는 흉보는 척 자식과 남편 이야기를 꺼내 장편으로 끌고 가다가 끝내는 자랑으로 마치는 속셈을 내가 모를 리 없다. 자랑할 것 없는 내 기를 죽여놓는 그 친구를 오늘은 맘먹고 곱슬머리 영감에게 일러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가게 문이 열릴 때마다 맑고 자그마한 소리로 딸랑딸랑 종이 울린다. 살아 있는 것들은 위풍당당하다. 살려고 꿈틀거리는 생명은 눈이 부시다. 바닷물이 담긴 고무대야에서 낙지와 주꾸미들이 여덟 개의 다리를 굳세게 흐느적거린다. 해풍에 말린 쪼글쪼글하고 꺼들꺼들한 건어물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꾸덕꾸덕 말린 민어, 농어 장대, 서대, 우럭은 소쿠리에 가래떡처럼 누워있다. 목포항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이쪽으로 가도 저쪽으로 가도 풍광이 죄 비슷하다. 길을 잃어봐야 비싸고 맛있는 아귀, 갈치, 병어는 물론이려니와 가마솥 뚜껑만 한 홍어, 넙치, 준치, 조기가 있는 가게 어디쯤이다.

목포항 건너편 골목으로 잇대어진 집에서 살았다. 간이 닿을 만큼 야들야들한 비밀 사랑 나눌 술집이 내 집 뒷담과 옆집 앞뜰과 옹기종기 경계를 맞대어 있었다. 보자기만 한 창에 주홍빛 알전등이 켜지면 산도둑같이 생긴 남자가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아릿한 사과 향내를 풍기는 언니와 나눠 마신 술잔 끝엔 독이 들어 있었던가. 염천에 늘어지는 엿가락처럼 목청을 길게 뽑다 입씨름이 벌어진다. 맞고함으로 번져 시월상달로 접어든 밤공기를 흔들다 급기야 골목으로 나와 서로 패대기치며 엎어지곤 했다. 바람 따라 뒤집혔다가 그 바람 따라 가라앉곤 하는 바다를 닮은 포주 아줌마는 눈자위를 삼엄하게 치뜨고 구경꾼들에게 냉큼 물러나라고 손사래 쳤다. 삶을 영위해가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늘 그렇게 있었다. 인간의 깨끗한 면, 부끄러운 면, 지저분한 면을 책이 아니라 뒷골목에서 배웠다.

고단한 하루의 저물녘 짐 실은 배가 목포항으로 들어온다. 아버지는 화물선 선장이었다. 그때그때 물때를 알고 바다 색깔 변하는 것과 구름 발이 뻗치는 것을 보고 하루나 이틀 앞의 날씨를 점쳤다. 섬에서 채취한 미역과 말린 생선, 소금과 농산물을 싣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목포로 나온다. 그것을 팔아 생필품을 사고 현금으로 바꿔 거룩한 소임을 맡은 수도자처럼 섬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목을 빼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목포항은 섬사람들에게도 부족함 없는 생존의 디딤돌이었다. 일주일쯤 빨랫비누 맛을 못 본 아버지의 남방에선 해감내가 났다. 수평선이 노을로 끓어오를 때 갑판에 끊어질 듯 걸려 있는 밧줄을 보며 내 마음 까닭 없이 미어지곤 했다. 바다에 홀로 갇혀 사는 아버지 몰래 운 날이 참 많았다.

살아가야 할 날이 아득하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청춘의 푸르름이 실직의 고달픔으로 빛을 잃던 서른 즈음이다. 생(生)이 내게 보낸 조소와 야유는 서울 변두리 지하 방이었다. 희망 없는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하루하루 쓰디쓴 현실에 허덕여야 했다. 지독히 슬픈 일이 생기고 사나운 고통이 심장을 갉아 먹었다. 어느 집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와 이팝나무에서 재잘거리는 동박새 소리, 담 안 꽃밭에서 날아오는 꽃향기까지 뼈저린 단절감을 자아냈다. 두려움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두 팔 벌려 힘내어 살라고 다독여줄 널따란 품이 그리웠다. 그 품은 아버지였으나 아버지 생에 휑한 바람이 불었다. 강한 만큼 짧았다. 쉰이 못 돼 이생과 작별하던 날 내 머리 위에서 겨울새 몇 마리 몰려와 울어대고 하늘 꽃송이 나불나불 날렸다.

사람은 가도 흔적이 남아 있는 목포항은 불쑥불쑥 발목을 잡는 내 그리움의 쇠사슬이다. 갖가지 모습으로 나를 손짓하고 수많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들어오고 나가는 선박들, 부두 노동자의 구릿빛 얼굴과 뒤척이고 몸부림치는 바다의 우수가 정박한 땅,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이다. 대기실에 몇 사람이 망명객처럼 앉아 있었고 나는 구석에 천천히 멎는 시계처럼 서 있었다. 하염없이 혼자였고 이방인이었다. 귓전을 울리는 시퍼런 파도 소리에 압도되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끊임없이 선착장에 부닥쳐 깨지고 다시 잘디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꿈결인 듯 아닌 듯 아버지의 기침 소리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달파도 삶을 사랑하는 마음 끝끝내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어서 인간의 바다로 돌아가라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저마다 에겐 저만의 꽃을 피우는 시간이 있다. 가만히 촛불 켜고 기다리리라.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살아야겠다. 더는 절망하려야 할 수 없었다. 파도 소리가 나를 감싸고 있었으므로

이제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나는 다시 목포항에 왔다. 조그마한 풍경들이 쟁강 쟁강 울린다. 화물선 한 척이 깃발을 펄럭이며 들어온다. 나도 저렇게 왔다. 우리 모두 저렇게 왔다. 배가 출항하는 이유는 돌아가기 위해서다. 어느 항구에서 출항했던지 그곳으로 돌아간다. 우리 모두도 맡은 바 임무 마치는 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목포항은 탄생과 죽음의 적나라한 원형적 그림이다.



조문자 님은 1954년 전남 목포 출생.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전주 한일장신대 신학과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도사로 30년 시무. 제4회 농촌문학상, 제5회 기독여성문학상, 제11회 들소리문학상, 제6회 서울 중구문예 최우수상, 제4회 통일문화재 문학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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