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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빗 / 조문자

부흐고비 2022. 2. 23. 07:59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머리를 빗질하는 시간은 마음을 다독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빗은 여인의 모습을 더 선명히 드러나게 한다. 머리를 빗질하면서 삶의 궤적과 사랑의 세월을 들여다본다. 빗은 추억과 회한과 그리움을 빗어내는 조그만 현악기처럼 보인다.

빗을 샀다. 화장대 한쪽에 딱히 이유도 없이 사들인 빗들이 풀꽃처럼 빽빽이 통에 꽂혀 있다. 빗살이 논의 벼 포기처럼 촘촘히 붙어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빗은 각 시대 생활양식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다. 최근에 와서 인체 공학과 재료 공학의 발달은 빗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피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넓적한 쿠션 빗을 비롯하여 생머리 구부리는 드라이용, 긴 머리 다듬는 일자형 빗, 짧은 머리에 꼬리 빗, 웨이브를 살려주는 도끼 빗까지 색상과 모양도 갖가지이다.

빗살이 가늘고 촘촘하게 박힌 참빗과 빗살이 굵고 성글어 등이 활꼴인 얼레빗은 어머니가 아끼던 빗이었다. 머리를 매만지고 나면 어김없이 칫솔로 때를 제거하여 명주 수건에 곱게 접어 싼 다음, 경대서랍에 간수했다. 한 달에 한 번쯤 팔팔 끓는 물에 소독하여 햇볕에 바짝 말리기도 했다. 은장도를 가슴에 품은 듯 어머니의 빗은 왠지 쉬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뿜어냈다.

군청 빛 새벽이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풍속화 속의 여인처럼 등을 꼿꼿하게 세운 어머니가 장지문 쪽으로 몸을 돌려 앉는다. 앉은뱅이 거울을 가져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넓은 수건을 무릎 위에 펼치고 서랍에서 빗치개를 꺼낸다. 허리까지 낭창낭창 흐르는 머리를 어깨 앞으로 잡아당기어 왼손으로 훑어 내린다. 빗을 쥔 오른손이 허공에 반원을 그리면 어깻죽지가 올라간다. 눈동자는 위로 몰리고 이마엔 골 주름이 잡힌다.

세상 풍진을 밀어내듯 어머니가 머리를 빗는다. 빗살과 머리카락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처음에는 가르마를 따라 빗어 내리다가 참빗으로 바꾸어서 물을 살짝 적신다. 다시 머리를 한쪽으로 몰아 손목에 힘을 들여 착착 빗어 내린다. 뒷목의 잔주름이 촘촘하게 접힌다. 휘어져 감기는 사박사박 빗질 소리가 귓가에 와 닿는다.

바람을 맞아도 쫀득하니 달라붙어 있으라고 정수리에 돋아나는 새치까지 동백기름을 바른 다음 뒤로 넘겨 틀어 올린다. 비녀를 찔러 삐비 잎처럼 연한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톡톡 다독인다. 뒷목의 잔주름이 펴진다. 손놀림이 익숙하여 은비녀로 쪽을 찌는 동작에 어찌 그리 힘이 있어 보였던가. 훤칠한 이마에 젊은 어머니, 고운 머릿결이 기름이 흐르듯 곱고도 아련했다.

어깨가 넓어 외모가 훤칠한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한 십여 년이나 젊어 보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여자는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려진 흑발로 아버지 마음을 녹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가. 두 사람은 바닷물이 흘수선을 넘어가듯 어느 날 새벽 몰래 도주했다.

어머니의 생(生)은 헛간에 던져 놓은 검불처럼 풀리지 않은 실마리들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랬다. 삶이 잘못 낀 단춧구멍처럼 엇물린 날이면 짙은 생각에 호젓이 잠겨 하염없이 밖을 응시하다가 놋 등잔에 불을 켜고 방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빗은 억만 가닥 머리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거리가 십 리라도 되는 양 무겁기만 하다. 아무도 어머니의 빗질을 가로막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듯 머리를 빗어 내렸다.

제 숨소리조차 잦아드는 적막 속에서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다듬는다. 허공을 향해 가슴을 열고 일렁이는 숨을 애써 삼키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안 돌아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머리를 빗는 것은 비 맞은 나비처럼 힘겨운 날갯짓이 아닌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기다림이요 안존한 여인의 품위였다.

사람은 누구나 불우한 현실에서 탈출과 자유를 꿈꾸는 영원한 도망자이리라. 아무도 힘주어 밀지 않아도 흔들리며 어디를 향해 밀려가는 파도처럼 아무도 몰래 잔물결 일으키며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것이리라.

빗은 어머니의 생채기를 따뜻이 어루만졌다. 머리를 빗는 일도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었을까. 기도 끝에 무료히 앉아 쉬고 있는 순례자처럼 마음 바닥에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았다. 참된 삶이란 예속이 아니라 자유이던가. 자신의 인생행로를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낡지 않고 헐지 않으려는 의연함이다. 넓은 뜰 가운데 혼자 서 있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이미 충족된 모습이었다.

봄도 여름도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고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날, 어머니는 세상에 닻을 내렸다. 어머니 손에 이제 쥔 게 없다. 누군가가 어머니 머리에 마지막 빗질을 해 드렸다. 홀로 외로움에 몸을 떤 빗질과는 다른 평화스러운 빗질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불안과 쓰라림을 오뇌처럼 벗어 버린 그 마지막 빗질을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빗는다. 나는 화려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으나 한순간의 마주침에도 영원을 예감하는 아늑한 빛깔로 나만의 멋을 지니고 싶다. 영양이 빠져나가 마른 풀잎처럼 바스락거리는 머리에 오일을 발라 가지런히 빗어 내린다. 허허로운 내 영혼도 가지런해지고 싶다. 머리를 빗질하면서 내 마음의 음정을 가다듬고 시름도 잠재워버린다. 거울 속에 표정이 환한 어머니와 내가 만난다.



조문자 님은 1954년 전남 목포 출생.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전주 한일장신대 신학과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도사로 30년 시무. 제4회 농촌문학상, 제5회 기독여성문학상, 제11회 들소리문학상, 제6회 서울 중구문예 최우수상, 제4회 통일문화재 문학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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