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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놋쇠종 / 지영미

부흐고비 2022. 2. 25. 08:08

2021 스틸 에세이 동상

작고 앙증스러운 모양이 한 손안에 쏙 들어온다. 세월의 때가 묻었다. 장인이 수없이 두들겨 만들어낸 고운 결은 시간 속에서도 그대로다. 나비 모양 무쇠공이가 가만히 흔들린다. 바람결에 깊은 여운을 담은 소리를 금방이라도 들려줄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 대문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어느 해 할머니가 메어 놓은 후부터 청아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것이 질병이나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마치 고목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종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주술적인 믿음을 담은 종은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와 함께했다. 어린 나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나도 모르게 주문을 걸었던 것 같다.

종소리는 주인의 마음을 담는다.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읽힌다. 그 소리는 부모님의 팍팍한 삶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안 좋은 일로 퇴근하시는 날은 유난히 거친 소리가 났다. 저녁 무렵 다급하게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종소리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사춘기 시절 기타 치기에 빠져 늦은 귀가를 하는 남동생의 소리는 나지막하고 조심스러웠다. 종소리는 다른 소음을 차단할 정도로 크고 어떨 땐 너무 작게 들려 인기척을 못 느낄 때도 있었다. 적막한 밤 식구들이 잠이 들면 종소리도 잦아들었다.

문득 ‘내 종소리는 어땠을까’가 궁금해졌다. 나의 십 대는 춥고 외로웠다. 마음 붙일 곳을 찾아 늘 배회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무엇이 그토록 힘겨웠을까.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고민이 꽤 많았던 것 같다. 늘 무표정한 부모님의 얼굴과 암울한 나의 진로가 그랬다. 밤이 이슥해지고 불빛이 잦아들 무렵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날은 대문 앞에서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마도 그때 식구들의 귀에는 내 종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종은 마지못해 울렸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아예 할머니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기설기 엮은 싸리문에도 어김없이 종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할머니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던 것 같다. 종소리에 할아버지 목소리를 떠올리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칠흑 같은 겨울밤, 바람을 머금은 종소리가 할머니 집을 감싸면 스르르 눈꺼풀이 감겼다.

종소리는 간절한 기다림을 끝내는 소리다. 세상에 기다리는 일만큼 가슴을 졸이게 하는 일이 있을까. 가족의 빈자리가 어린 나에겐 참기 힘든 경험이었다. 엄마의 한숨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파른 삶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을 한동안 들어야 했다. 나는 종소리에 깃든 혼령이 간절한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동생들과 기도를 했다. 어디 계실지 모를 아버지에게 간절한 우리 마음을 담아 종이 멀리까지 울려주기를 빌었다. 시간을 묵힌 뒤 초췌해진 아버지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때의 종소리는 아마도 결연하게 울렸을 것이다. 엄마의 초조한 기다림은 거기서 멈추었다. 당신은 일터로 돌아가셨고 그 소리는 다시 평온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싸리문에 매달린 종이 쓸쓸해 보였다. 애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 애잔하게 들렸다. 나는 처음으로 종소리가 주는 슬픔을 들었다. 마치 명을 다한 소에서 떼어내는 워낭 소리처럼. 나는 할머니의 온기 가득한 손과 목소리 대신 혼이 담긴 놋쇠 종을 어디든 품고 다녔다. 타향살이가 지치고 힘들 때면 가만히 흔들어 보곤 했다. 종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할머니 집 대문을 지켰던 종은 여전히 우리 집 현관에 자리하고 있다. 당신이 그렇게 믿으시던 주술의 힘을 영험하게 품은 채 세월을 곰 삭이고 있다. 삶이 팍팍할 때면 낮은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진다. 경쟁하는 시간 속에서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놋쇠 종이 말해 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속적인 나는 저만치 가버리고 없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청춘의 치열함 그리고 다시 부모가 된 지금 나는 단단해졌다. 할머니 집 놋쇠종이 나를 반겨 주었듯이 우리 집 종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가족의 발걸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종소리에 그들의 하루를 고스란히 느낀다. 그 소리에 아이들과 남편을 다독이고 위로한다. 이제 나의 기다림은 예전처럼 무겁지도 힘겹지도 않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정령의 힘을 품은 종이 늘 내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어설피 긴장이 해소될 무렵 간간이 종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다반사 한 일상 속, 미처 올려다보지 못한 하늘과 별을 대신해준다. 어떤 위로의 말도 눈빛도 없이. 그저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뾰족했던 마음이 알아볼 수 있는 모양으로 거듭난다. 산란해지는 마음을 놋쇠 종소리와 함께 가만히 뉘어본다. 별도 달도 고요해지는 밤이다.



지영미 님은 2018 《수필미학》 신인상. 청도 공공 도서관 수필반. 오후 수필회원. 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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