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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홍어 / 이종임

부흐고비 2022. 2. 28. 00:45

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주먹만한 눈송이가 함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린 나는 쪽창에 얼굴을 대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더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차게 굳은 마루에도 습자지처럼 눈송이가 덮였다. 한 발 디디자 마당을 향한 작고 선명한 자국이 생겼다. 양말을 털고 새로 산 털신을 신었다. 성근 측백나무 울타리에 몰아치던 눈바람은 나뭇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넓은 마당에는 두터운 솜이불을 깔아놓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로 발을 디뎠다. 뚜렷한 지그재그 문양이 고대문자처럼 떠올랐다. 강아지처럼 깡충깡충 뛰어 눈그림을 그렸다. 눈송이는 발자국 아래서 아프게 눌리고 쉽게 뜯어지지 않을 흰 판자처럼 다져졌다. 긴 발자국을 내며 대문간으로 나갔다. 대문간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 안으로 구부러지던 고샅길과 대지의 주머니인 논과 채전밭들이 각각의 구분을 버리고 한 몸으로 누웠다. 둥근 초가집들은 흰털 짐승이 되어 깊은 잠에 빠졌고 팽팽하게 긴장한 전선줄은 가르릉거리며 울었다.

장에 가신 아버지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눈발을 하얗게 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흰 김을 뿜어내는 아버지 입에서 불쾌한 술냄새가 풍겼다. 아버지는 마루 위에 장보따리를 올려놓고선 “어이, 춥다” 며 마른 손을 비볐다. 모두 둘러선 가운데 보따리를 풀자 식은 호떡과 사과, 신문지에 싼 돼지고기 등이 나왔다. 빨간 핏물이 신문지를 적셔 검은 글자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어머니는 맨 아래에 있던 두꺼운 푸대 종이에 싼 것을 들어냈다. 그것은 쟁반만 했다. 젖어 찢어진 사이로 번들거리는 살이 드러났다. 홍어였다. 흑산도나 그 어디 남해 바다를 유영하다 어부의 그물에 걸린 홍어 한 마리. 포장을 벗겨내어도 홍어는 눈을 감은 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이미 사람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다는 듯, 어스름이 덮이는 마루 가운데 활짝 누웠다.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은 저녁때가 되어도 그칠 줄 모르고 더욱 세차게 날리었다.

어머니는 뒷마당 수돗가에 홍어를 내려놓았다. 눈도 입도 감춘 채 커다란 몸뚱이를 검붉은 자락으로 휘감고 있는 모습은 정체를 숨긴 첩보원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작둣물을 뿜어냈다. 땅속 깊은 데서 올라오는 물은 김을 올리며 쏟아졌다. 어머니는 솔로 홍어의 몸을 문질렀다. 거친 돌기가 젖은 몸을 마구 비벼대어도 한마디 말도 없이, 변명을 위한 비명도 없이 잡힌 첩보원은 묵묵했다. 우물물을 쫙 끼얹어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홍어를 뒤집었다. 뒤집혀진 그의 안쪽은 눈처럼 희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새로 입혀놓은 의복과 같았다. 위쪽에는 지나간 과거를 묻어놓은 입이 우묵자로 걸려있었다. 자물쇠를 채웠는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익숙하게 칼을 잡고 홍어의 배를 갈랐다. 길게 난 칼자국을 들추자 감추어 둔 생애와 같은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저녁 어스름은 더 짙어지고 여전히 함박눈은 내려 어머니와 내 머리에 쌓였다. 어머니는 찌개감인 내장을 물에 몇 번 흔들어 양재기에 담고 홍어를 잘랐다. 얇은 지느러미가 주름치마처럼 펼쳐졌다. 때때로 칼이 홍어의 몸을 지나쳐 시멘트 바닥을 갈랐다. 쓰렁쓰렁-- 완강한 시멘트 바닥의 저항소리는 거칠었다. 길고 네모나게 조각이 난 홍어는 물에 씻기어 빨래 한 벌 없는 빨랫줄에 매달렸다. 뒷마루에 앉아 빨랫줄에 걸린 홍어를 바라보았다. 눈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홍어의 몸이 흔들렸다. 휭휭 우는 전깃줄 아래 바람에게 맡긴 몸이 한 마리, 한 마리의 홍어가 되었다. 여러 마리가 떼 지어 몰려갔다 저녁 물살을 가르며 몰려왔다. 어둠이 깊어지는 밤바다에서 팔랑 팔랑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쳐 갔다. 눈바람이 그려내는 물풀 사이를 헤치고 어둠으로 쌓은 바닷속 모래더미를 헤집다 솟구쳐 올랐다. 찰랑찰랑 검은 물살이 일었다. 흰 눈송이가 언뜻언뜻 꽃잎처럼 피어났다. 망망한 밤바다는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았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앞집 처마등이 홍어떼를 좆는 고깃배 불처럼 깜박였다. 밤새 바람 불고 눈이 올 것이었다.

사나흘 북풍한설에 홍어는 얹었다 녹으며 구둑꾸둑 말라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잘 마른 몸에서 바다 내음이 피어났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가지런한 연골뼈로 도드라져 있고 얇게 말라 살짝 치켜 올라간 지느러미는 축약된 바다가 껄껄거리는 듯--.

대기는 시리게 차고 손바닥만한 햇덩이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어머니는 빨랫줄에서 홍어를 걷어왔다. 한 조각 한 조각 채반에 담아 실고추와 파 참깨로 버무린 고명을 박고 가마솥에 넣었다. 불을 지폈다. 맹렬한 불땀이 가마솥 바닥을 핥아대자 가마솥은 쉭쉭 수증기를 올렸다. 뜨거운 수증기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정렬되어 나온 홍어의 몸은 윤기가 났다. 흰 살은 도톰하게 부풀어 놀랐고 검은 표피는 무두질한 가죽처럼 빛났다. 제 몸이면서도 이미 제 것이 아닌,

김이 오르는 홍어를 금방 먹어도 맛있지만 차가워진 홍어를 석쇠에 얹어 화롯불에 구워 먹으면 별미였다. 불기운이 천천히 스며들어 겉은 적당히 마르고 속은 넓고 풍부하게 익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깍뚝 썰어 얹었다가 뜨거워지면 양념장에 찍어먹었다. 젓가락으로 홍어를 집어 한 입 깨물면 희고 검은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그 사이로 양념장의 짭쫄하고도 고소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오도독오도독 연골뼈를 씹으며 바다 저편의 어두운 항해를 생각했다. 한참을 깨물어 목안으로 넣어 삼키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말끔한 맛이었다. 아버지는 경계가 무너지는 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깨끗이 사라져버리는 뒤끝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홍어를 좋아했다. 홍어가 예전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소식은 우울했다.

그러나 재빨리 청춘이 된 나는 도시 음식에 길들여져 갔다.

겨울이 스무 번도 더 지나는 사이 펑펑 내리는 눈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 어쩌다 눈이 오면 창문에 얼굴을 대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른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고, 아이들은 아파트 앞 미니 운동장에 모여 재잘재잘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고 있다. 어느 사이 해가 기웃해진다. 시장에 나가면 칠레산인 커다란 가오리 조각이 쌓여 있다. 반쯤 말려지고 함부로 취급 당한 채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국의 좌판이 내내 낯설고 두려운 표정이다. 허옇게 드러난 이빨들은 이미 체념한 자의 것이기에 어떤 날카로움도 없다. 홍어가 생각나도 좀처럼 손이 가질 않는다.

음식은 몸의 기억이자 몸의 기운이다. 자연의 어느 것이 음식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의 온갖 내력과 그것이 가진 낭만과 페러독스도 함께 얹는다. 어떤 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소곤거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입 안의 혀를 지나 곧 잊혀진다. 음식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향취가 있고 말이 있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은 내 안에 납작 엎드려 있던 홍어가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앉더니 나를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식탁에 앉았다. 입맛이 없다 라는 건 딴엔 지쳤다는 것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싫고, 두 패가 벌이는 쌈박질을 바라보는 일이 피곤하고, 여기 저기 왕왕히 눈길을 잡아 끄는 통에 두통이 밀려오고, 이견의 대립을 판별할 수 없어 어지럽다. 눈도 오지 않고 휭휭 바람도 불지 않고 남해의 홍어는 자취를 감추었다. 젓가락을 든 채로 무엇을 집을까, 망설인다. 희고 검은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싹뚝 잘라버리듯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음식 맛은 오래 가는 향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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