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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초상화를 그려주는 세탁소

오늘도 그 세탁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벌써 보름째다. 며칠 전에 문 앞에 써 붙인 옷 찾아가실 분 연락주세요 000-000-0000 라는 흰 종이만이 찢긴 채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나와 이 세탁소의 인연은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를 하고 남편의 옷을 맡길 세탁소를 찾던 중 외진 골목이지만 그럭저럭 집과 가까운 곳이기에 선택한 것이다.

남편의 양복바지 두어 벌을 들고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커튼으로 드리워진 내실에서 이제 막 낮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얼굴로 내게 다가 왔다. "네. 어서 오세요. 옷 맡기시려고요? 드라이요?" 마땅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아주머니는 내 손에 들 바지를 받아 들더니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조금 전의 부스스한 눈동자가 아니라 눈을 크게 뜬 채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 분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딱히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균형이 맞지 않는 얼굴이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에 머리카락은 수가 별로 없어 대머리에 가까울 정도였는데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중간부분의 훤한 두피가 드러나 보였다. 큰 눈은 앞으로 튀어나왔고 입은 얼굴에 비해 입술이 너무 크고 또 돌출되어 있었다. "내일은 안 되겄고 모리 찾아 가시유." 어투 또한 조금 어눌해 보였다.

"네. 그런데 이름은 안 적어 놓으세요? "

어느 세탁소를 가나 처음에는 옷을 맡긴 사람 이름과 전화번호 아니면 아파트 호수를 적어 두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 알아서 한다며 내가 들고 온 바지들을 한쪽으로 치워 놓더니 다시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조금 이상하면서도 황당했다. 세탁소를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바지를 잘못 맡긴 것은 아닌지 다시 바지를 찾아 다른 세탁소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 전 그 세탁소 아주머니의 외모가 자꾸만 떠올랐다.

약속한 이틀 뒤 다시 그 세탁소를 찾았다. 세탁소 입구에서는 그때 보지 못한 주인아저씨가 다림질을 하며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옷을 찾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외모에 키는 무척 작았다. 머리꼭대기까지 훤한 대머리였으며 얼굴은 가무잡잡해서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아저씨가 뭐라 큰소리로 외치니 내실에서 이틀 전에 보았던 그 아주머니가 나왔다.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세탁비닐에 쌓여 주렁주렁 매달린 옷들 속에서 이틀 전 내가 맡겼던 바지를 찾아 내밀었다. "6천원 인디요. 처음인 게 그냥 오천 원만 줘요." 어눌한 말투였지만 그때와는 달리 나를 보며 살짝 웃으니 큰 입술이 더 커보였다. 나는 오천 원짜리 지폐를 아주머니께 드리고는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와 찾아온 바지를 비닐 속에서 꺼내어 펼치는 데 안쪽에 붙어 있는 흰 라벨이 눈에 띠었다. 어느 세탁소에나 있는 명찰이나 집 호수를 적은 종이려니 하고 떼어내려는데 뭔가 이상해 보였다. 그 종이에는 특이하게도 이름이나 호수는 보이지 않고 검은 볼펜으로 그린 듯 한 동그라미 하나에 그 양쪽으로 긴 선을 그어 놓고 동그라미 안쪽 오른편 위에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세탁소 아이들이 장난을 친 것인가 싶어 종이를 버렸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바지를 입더니 바지 주름이 잘 잡혔다며 옷매무새에 까다로운 남편도 만족한 듯했다. 며칠 뒤 다시 그 세탁소에 남편의 셔츠를 들고 찾아 갔다. 출입문의 종소리를 듣고 내실에서 아주머니가 나왔다. 들고 온 셔츠를 받아 들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라벨을 꺼내 볼펜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쓰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계셨다. 동그라미 그리고 그 양쪽으로 긴 선이 그려져 있고 동그라미 안 오른쪽 위에 점 하나, 얼마 전 남편바지에 붙어 있던 그 라벨과 같은 그림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하여 여쭈어 보려니 내실에서 전화벨소리가 들렸다. "내일 저녁때 찾으러 오시유." 말만 남긴 채 그녀는 재빨리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더 기다려 그 궁금증을 풀고 싶었지만 다음날 옷을 찾으러 와서 물어보려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저녁 나는 그 세탁소에 들렀다. 여전히 주인아저씨는 다림질을 하고 있었고 재봉틀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어제 맡겼던 셔츠를 건네주었다. 나는 셔츠를 싼 비닐봉지 아래에 어제 아주머니가 그렸던 그 라벨종이를 들어 보이며 "표시하는 방법이 참 특이하시네요? 다른 곳에서는 이름을 적어놓던데?" 그 말에 아주머니는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옆에서 다림질하던 아저씨는 다리미를 올려놓더니 내게 얼굴을 돌리면서, "그건 우리 집사람만 알 수 있는 표십니다. 이 사람이 까막눈이라서 이름을 쓸 줄도 모르고 몇 년 전에 머리를 다쳐 수술을 하고나서 말도 이상하게 하고 그래서 이 사람은 손님이 오면 손님을 보고 알 수 있게 거기다가 그림을 그려놓더라고요. 그래도 여태껏 헷갈리게 옷을 찾아 준 일은 없어요." 주인아저씨의 말을 듣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나도 몰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동그란 얼굴에 머리가 길고 오른쪽 눈썹위에 좀 특이하게 점 하나가 있지 않는가. 그 라벨지에 그려진 그림은 바로 내 초상화였던 것이다. 작은 라벨지에 그려진 내 얼굴이지만 단돈 2천 원에 내 초상화 한 점을 얻은 게 아닌가.

얼마 뒤 다시 그 세탁소를 찾은 나는 세탁비닐에 쌓여 주렁주렁 매달린 옷들 속에 붙은 라벨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동그라미에 찢어진 눈, 길쭉한 얼굴에 뽀글거리는 짧은 머리카락, 뾰족한 동그라미 안에 코 같은 것을 크게 그려 넣은 그림, 어느 동그라미 안에는 입술 하나만 그려져 있고, 눈 하나만 그려져 있으며, 점 하나만 찍혀 있는 것도 있었다. 세탁소를 찾은 손님마다 그 사람의 특징만을 그려 넣은 것이리라. 참 천태만상의 얼굴들이 다 모여 있는 듯 느껴졌다. 그리곤 간혹 이름들이 적힌 라벨종이가 눈에 들어 왔다. 분명히 아저씨가 적은 놓은 것인 듯했다. "이제 보니 아주머니는 멋진 화가셨네요!" 나의 그 말에 아주머니는 소리를 내어 웃으며 부끄러워하고 옆에서 이를 본 아저씨도 크게 웃었다. 엄지손가락만한 그 작은 라벨종이에 그려진 초상화는 그 어느 화가 못지않은 예리한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5년 동안 그 세탁소와 인연을 맺어 오면서 내 초상화 동그라미 안에는 때론 눈도 생겨났었고 입술도 생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세탁비가 아니라 "초상화 값 드리고 가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보름째 그 세탁소는 문이 닫혀 있다. 부디 나쁜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늘 기도한다. 하루 빨리 그 아주머니에게 긴 머리가 아닌 내 단발머리가 그려진 초상화를 받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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