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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낯이 맑아서 하늘이 앉았다. 바람도 피해 간 우물이 고요하다. 산속에 숨어 있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우물이다. 얕은 우물은 속이 환히 보여서 편안하다.
주르륵 두레박줄이 손바닥을 타고 내 안의 우물 속으로 미끄러진다. 유물처럼 남아 있는 우물을 두레박이 깨우자 출렁하며 잠을 깬다. 손바닥에 열기가 짧게 스칠 때쯤 텅 하고 두레박이 물에 닿는다. 그 순간 긴장하고 있다가 손을 힘을 주어 기억의 줄 끝을 붙잡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안에서 아찔한 두려움이 훅 끼친다. 어렸을 때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서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우물 끝에 설핏 비치는 하늘 조각은 어지럼증을 일으켰다.
큰 정자나무 가지가 뻗은 곳쯤에 앞가르마 반듯하게 타서 쪽을 찐 큰고모가 살았다. 순해 보이지 않는 눈썹을 가진 고모, 고모 집 마당은 나무 그늘이 깊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으면 살갑지도 않은 큰고모를 찾았다. 어느 날 한쪽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을 때, 엄마는 큰고모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이른 아침이었다. 우물 가 장독대에 서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라고 했다. 내 등 뒤에서 고모는 붉은팥으로 감은 눈을 비비며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그 의식은 경건하기도 했지만 어린 내 눈에 큰고모가 마치 무당이나 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보였다.
사촌오빠가 달걀귀신 이야기를 해주던 마루 앞에 있던 우물이었다. 얼굴이 없다는 귀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새파랗게 질리곤 했는데, 그럴수록 오빠는 목소리를 무겁게 깔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길게 이야기를 늘여 갔다. 그런 날 들여다본 우물은 더욱 깊었다. 축축한 우물 벽엔 푸른 소름이 돋은 이끼가 보였고, 돌 틈 바위취 잎이 은하수 너머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방학이면 달려가곤 했던 고모 집, 시래기 지져서 차려 준 밥은 편해서 맛있었다. 고향엔 큰고모 말고도 작은집과 고모 집이 더 있었다. 사촌들과 어울려 노느라 정신없다가도 한 번쯤은 들러서 돌아가실 때까지 쪽진 머리를 그대로 하고 있언 큰고모를 뵀다.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 맞은 방학 때, 깊은 마당을 들어서는 나를 부둥켜안고 고모가 울었다.
차는 서두르지 않고 날렵한 꼬리지느러미를 조용히 움직였다. 뿌연 물살이 잠깐씩 길을 열고 닫았다. 눈을 감았다. 설렌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좀 무겁고 아린 느낌이 들뜬 감정을 지그시 눌렀다.
태어난 강을 떠나 바다로 갔다가 다시 그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기억 깊은 곳에 넣어 둔 고향의 물맛과 냄새를 더듬으며 강을 찾아들었다. 눈도 채 뜨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떠난 고향을 둘러보며 '내 어머니의 강은 참 아름다운 곳이구나.' 비로소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세상 바다를 떠돌았다. 낯선 곳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 용기를 내어 지느러미에 힘을 주고 헤엄쳐 보기도 했다. 부딪치고 상처를 입을수록 멀리서 고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서지 못했다. 그곳에 가면 상처가 아물 것 같기도 했지만 고향은 상처 난 모습으로 돌아가며 안 된다는 생각에 매몰차게 돌아서 있었다.
높은 다리를 놓아 산꼭대기를 이어 놓은 길을 따라갔다. 안개 속에서 하늘과 산머리만 흐릿하게 보이는 고개를 넘어 고향 냇물에 닿았다. 작은 웅덩이를 파서 땅 짚고 헤엄치던 냇물, 해 저물면 냇물가로 까맣게 모이던 다슬기. 물놀이하다가 방천 둑을 오르면 우리 아름으로 몇 아름 되는 정자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어서 아이들의 또 다른 놀이터가 되었다. 나무는 해마다 속없이 푸른 입을 피워 그늘도 내주었다.
여기쯤이었지, 아마. 정자나무도, 큰고모 집도, 우물도 바위취 따라 은하수 너머로 갔다. 모두 사라진 넓은 길 위로 아무것도 모르는 차들만 오고갔다. 고향 냇물의 시원이야 따로 있겠지만 내 마음속 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정자나무 그늘이 앉던 곳, 고모 집 우물에 가 닿는다. 마음속 우물을 들여다보면 지워진 줄 알았던 기억의 조각들이 흐린 빛줄기를 타고 한 켜씩 일어난다. 우물 속에서 자라던 바위취가 내 가슴 벽에서 귀를 쫑긋 세운다.
한경선 님은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3년 《수필과비평》 등단.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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