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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울기 좋은 곳 / 민명자

by 부흐고비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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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십 대로 보이는 남성 10여 명이 한 카페에 모였다. 그곳은 그들이 울기 좋은 곳이다. 그 시간 카페 입구엔 일반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팻말이 걸린다. 그들 앞에는 손수건이나 일회용 휴지가 놓여있다. 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영화를 보면서 거리낌 없이 운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훌쩍거리거나 소리 내서 울기도 한다. 평범한 영화동호회원처럼 보이는 이들은 한국판 ‘루이카쓰(淚活)’ 모임 회원들이라 한다. ‘루이카쓰’는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함께 모여 우는 일’을 일컫는다 한다. 일간지에서 읽은 내용이다.

옛 어른들은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눈물은 나약함의 증거이며 남자는 강인해야 한다는 게 정석이었다. 젠더(gender)의 관점으로 보자면 남성들도 그 불평등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던 게다. 남자라고 왜 눈물이 없겠는가. 골키퍼가 골문을 지키듯 가정을 지켜야 하는 가난한 가장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울고 싶을 땐 울 수 있어야 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단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인생이야말로 눈물 날만큼 비정하고 슬픈 일이 아닐까. 사람은 처음 태어날 때 울음의 고고성으로 세상을 연다. 울음은 그만큼 인간본성과 가깝게 닿아있어 순수하다. 악어의 눈물이 아닌 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절한 울음은 카타르시스와 치유의 힘을 준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면 마음껏 울지 못한다.

M에겐 못다 푼 숙제처럼 여겨지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일찍 세상 떠나신 부모님이 생각날 때 찾아갈 묘소가 없어 늘 아쉬웠다. 두 분 모두 화장하여 강물에 골분(骨粉)을 뿌렸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꿈에도 보이지 않는 부모님이 가끔 보고 싶을 때마다 어릴 적 아버지 손 잡고 성묘를 갔던 일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어느 분의 묘소였을까. 할아버지? 할머니? 찾고 싶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였다는 기억 하나만 붙들고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망우리 묘원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자신의 신상을 밝히고 알아낸 건 조부의 묘가 용미리 제1묘지에 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곧바로 용미리로 갔다. 그곳 관리사무소엘 들러 조부가 묻히셨다는 300구역을 찾아 올라갔다. 혹시 비석에서 존함 석 자라도 확인할 수 있을까. 그러나 기대와 달리 조부는 봉분 한 기(基)에 무려 12,811분의 골분이 합장된 무연고 묘에 안치되어 계셨다. 망우리 공동묘지 이장사업이 진행될 때 당신 외아들인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이승을 떠났고, 외동손자인 그녀의 오빠는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게다.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던 사무소 직원은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밤엔 편히 주무셔요.”

묘소 참배도 결국은 산 자들의 위로를 위한 게 아니겠는가. 마치 죽은 자들의 도시처럼 무덤이 즐비한 그곳 묘역 한구석에 이름도 없이 묻히신 조부님. 무연고라니. 자손들이 어찌 그리 박복하고 변변치 못했단 말인가. 자손을 잘 두어야 조상님 유택도 자리를 보전한다. 무명의 영혼들과 함께 지하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는 60여 년 만에 찾아온 손녀를 알아보셨을까. 그녀, 그냥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하늘과 땅이 아득하게 펼쳐진 옛 요동벌판을 ‘호곡장(好哭場)이라 명했다. ‘참 좋은 울음 터’라며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드넓은 천지에 혼자 던져진 듯 막막한 인간이 느끼는 절체절명의 존재론적 고독과 더불어 ‘칠정(七情)의 극한’에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토해낼 수 있는 울음이다. 그러나 이 좁은 도심 한복판에서 어찌 그런 곳을 찾을 수 있겠는가.

M은 울기 좋은 곳으로 대중목욕탕을 꼽는다. 거기선 눈물을 흘려도 땀인 듯 물인 듯 섞이고, 흐느낌도 여러 사람의 샤워 소리나 탕으로 쏟아지는 물소리와 잡다한 소음에 묻히고, 얼굴이 붉어져도 열탕의 온기 때문으로 보여 눈치 채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우는 모습에 마음 쓸 남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용미리에서 망연하게 귀가하던 날도 그녀는 목욕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
살아가면서 울고 싶을 때가 많았을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가 열 살 즈음에 아버지는 20대의 꽃다운 처녀와 재혼을 했다. 그 후, 이복 여동생 둘이 태어났다. 새엄마와 그의 나이 차이는 겨우 열한 살, 큰누나 같은 새엄마는 착했고 잘해주려 애썼지만 그는 할머니 치마폭 뒤에 숨기 일쑤였다. 할머니는 새 며느리가 혹시라도 손자를 구박할까 싶어 매사에 눈을 밝히며 싸고 돌았다. 그럴수록 그는 집 밖으로 겉돌았다. 학교도 출석하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고 부모가 주는 등록금을 허투루 써버리곤 했다. 바쁜 아버지 대신 새엄마가 학교엘 수시로 불려 다녔다. 사춘기가 지나고, 조부모가 차례로 돌아가시고도 그의 방황은 끝나질 않았다. 그는 그렇게 부모님의 애를 태웠다. 결국 아버지가 세상을 버렸고 그 충격으로 이태 뒤엔 새엄마마저 병사(病死)했다. 그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그 남자, M의 오빠다. 그의 첫 이복 여동생인 M의 또 하나 숙제는 오빠를 찾는 일이었다. 실은 예전엔 원망이 컸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오빠의 일탈과 무관치 않아서였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다 보니 오빠도 운명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천성이 여렸다. 그런 만큼 상처도 방황도 깊었을 것이다. M과는 열두 살 터울이었지만 잔정이 깊었고 쌓인 추억도 많았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어린 여동생과 M은 외가로 들어가고 오빠는 빈집에 홀로 남았다. 무탈한 듯 몇 년이 흘렀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에서 오빠가 거의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일이 생겼다. 자기 탓도 아닌데 항변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오빠는 부모님이 쓰시던 세간살이를 간수 할 데가 없어 이삿짐 트럭에 싣고 나와 모두 고물상에 팔아 넘겼다. 직장도 변변치 않은 처지에 하루아침에 오갈 데가 없어졌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그때는 오빠의 처지보다는 부모님의 유품을 함부로 없앤 것에 대한 서러움이 더 컸다. 어찌 그리 철이 없었을까.

그녀에겐 마음에 걸리는 일이 또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아들을 맡아달라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던 아내 사이에서 낳은 아이였다. 그때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하면서 여동생을 데리고 와 시집살이를 하던 처지라 조카까지 도맡을 여력이 없었다. 그 청을 들어주지 못한 채 오빠랑 또 헤어졌다. 그녀가 처음으로 집을 샀을 때는 오빠가 찾아와서 두 손 걷어붙이고 집수리를 해주었다. 허름한 한옥이었다. 그런데도 어렵게 집을 장만한 뒤끝이라 러닝셔츠 한 장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그리고는 숨바꼭질하듯 오빠와 다시 헤어졌다. 그 후 소식이 완전히 끊긴 채 30여 년이 흘렀다.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오빠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서로 전화번호가 바뀌고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찾을 길이 없었다. 몇 년 전, 그녀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경찰서 민원실엘 찾아갔었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법이 강화되어 생사 여부 외엔 아무 것도 알려 줄 수 없다 했다.

“사망신고는 안 되어 있네요.”

오빠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로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오빠 나이가 팔십을 넘어서니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번엔 주민 센터를 찾았다. 그녀의 사정을 들은 여직원이 잠시 기다리라 했다. 한참 동안 컴퓨터로 조회를 하더니 말했다.

“돌아가셨네요.”

어쩌나. 실낱같은 기대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인정에 호소해보았으나 자기들은 개인정보 보호법이라는 입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면…. 오빠를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빠, 그동안 고생 많았지? 나 이젠 오빠 마음 이해해.’

위로해주고 싶었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더 기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늦었다. 하나뿐인 오빠는 이 세상에 없다.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 사방을 둘러봐도 막막하고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선대(先代)가 이북에서 월남해서 독자로 이어져 왔으니 그녀의 윗대로는 피붙이나 친정 식구가 단 한 명도 없다.

직원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봐 황망하게 주민 센터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울면서 걸었다. 길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집에 와선 남편을 보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했다.

그날 저녁에도 그녀는 목욕탕엘 갔다. 한여름에도 냉수와는 상극인 그녀였지만 그날은 냉탕 천정에서 폭포처럼 내리꽂는 찬물에 몸을 맡기고 등줄기를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고는 감기를 된통 앓았다. 세신(洗身)과 함께 세심(洗心)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
오빠 사망 소식 이후, M은 한동안 깊은 우울과 허무의 수렁에서 허우적댔다. 민들레가 슬쩍 스치는 미풍에도 제 몸을 흔들어 갓털을 털어내듯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온몸에 고여 있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일어나야 한다.

이번엔 그녀의 여동생이 자신이 사는 주소지 주민 센터엘 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순 없었다. 다만 여직원이 “돌아가셨네요.”라면서 무심코 흘린 입속말 한 마디가 지푸라기가 되었다.

“전북에 계셨나보네요. 요양병원에…”

딱 거기까지다. 동생이 놓치지 않고 전해준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전북’과 ‘요양병원’을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차례차례 한군데씩 전화를 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거의 막바지에 오빠의 기록이 있다는 곳을 찾아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곳에서도 전화상으로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요양병원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다행히 남편이 선뜻 나서주었다. 폭염 속에서 고속도로를 달리기를 서너 시간, 드디어 그녀의 눈앞에 하얀 요양병원 건물 한 동이 몸체를 드러냈다. 아, 오빠가 여기서 마지막 길을 떠났구나. 막상 도착하니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왠지 두려웠다. 잠시 숨을 고르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관계를 증명할 서류와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며 서울에서 찾아온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담당자는 온정으로 대했다. 그는 다행히 오빠를 잘 기억하고 있었고 비교적 소상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오빠는 암과 투병했으며 의대 병원에 시신을 기증했다 한다. 마지막 보호자가 누구였는가 물으니 올케언니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전화를 했다. 한 번, 두 번, 불통…. 담당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간병 하실 때 몸이 안 좋아보였는데 그동안 혹시 돌아가셨는지도 몰라요.”

통화 신호는 계속 울렸다. 그렇다면 전화를 받지 못할 상황인가? 낯선 번호라 안 받나? 아, 제발…. 저녁나절에 다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언니!”

수십 년 만에 자신도 모르게 목젖을 타고 울컥 터져 나온 ‘언니’라는 말, 그 호칭의 온도가 뜨겁고 뭉클했다. ‘내게도 언니라고 부를 가족이 있구나.’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M은 여동생과 함께 언니를 만났다. 길에서 무심히 보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변해 있었다. 그래도 약속장소인 지하철역 입구에서 눈빛으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고생을 많이 했으련만 곱고 정갈하게 나이든 언니의 모습을 보니 안도와 고마움이 교차했다. 오빠와 한자리에서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동안 막혔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언니는 말했다. 오빠가 두 동생을 무척 보고 싶어 했다고, 임종 전까지 애타게 찾으며 기다렸다고. 더욱 안타까운 건 M이 오빠를 찾기 시작하던 몇 년 전 그때가 바로 오빠의 병이 위중했던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이다. 피붙이의 신묘한 끌림이었을까. 게다가 별세 후 의대생들의 교육현장에 있던 시신이 수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와 화장 후 납골당에 봉안되던 날짜가 M이 요양병원을 찾던 바로 며칠 전이었다. 요양병원엘 며칠만 일찍 찾아갔다면 추도식에서라도 오빠를 만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수 있었을 텐데 간발의 차이로 어긋난 것이다.

올케언니는 역시 한 집안의 며느리였다. 조부의 묘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용미리 묘역에 참배를 가자고 했다. 언니의 무녀독남이자 M의 조카이자 집안의 4대 독자인, 그 식구들을 데리고 가잔다. 조카는 그동안 결혼해서 1남 1녀를 낳았단다. 조카가 낳은 아들은 M의 집안의 5대 독자다.

남편이 가정을 들락날락하는 동안에도 언니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외동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쳤고 결혼도 시켰다. 그리고 늘그막엔 “미웠지만 불쌍해서” 병든 남편을 간병했다며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그 생에 머리가 숙여졌다. 어느 한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길 잃은 미아처럼 평생을 정처 없이 떠돈 남자, 한 아내의 지아비로서 한 아들의 아비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한 남자, 오빠의 생에 박수를 보낼 수는 없다. 자신의 외아들은 아내에게 맡기고 남의 부모 없는 자녀나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검은 얼굴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옷과 신발을 사주며 돌보았다는 남자, 그 모순된 삶과 연민의 정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마지막 요양병원에선 아내가 곁에 있길 애소하며 임종 직전엔 혼수상태 중에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는 남자, 나약한 인간으로서 오빠가 보여준 한계와 고독한 영혼의 무게가 통증으로 남아 M의 명치끝을 누른다. M의 언니는 남편이 움켜잡았던 손힘과 느낌이 내내 떨쳐지지 않는다고 했다.

늘 울고 싶었을 한 남자는 그렇게 한 생애를 마쳤다. 그리고 M은 그렇게 오빠를 잃었고 언니를 다시 찾았다. 무릇 세상 인연의 만남과 이별은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 여겨야 하려나.

나는 지금 왜 이 글을 쓰는가. 어린 시절부터 상실감을 혼자 속으로 달랬을 그 남자, 바로 나의 오빠다. 이 글은 나, M이 오빠에게 바치는 고백록이자 진혼곡이다. 수필 공간은 남루한 정신을 씻어낼 수 있는 곳이기에, 허식의 너울을 벗고 울울하게 갇혀 있는 언어들을 풀어 다비식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풍진 세상에 몰아치는 눈비에 몸 적시며 속울음 삼키는 영혼들과 교감하며 승화의 씻김굿을 할 수 있는 ‘문학의 호곡장’이기에.

혹시 오빠의 유혼이라도 이 글에 담긴 나의 마음과 끈이 닿는다면 지상에서 맺힌 매듭 모두 풀고 천상의 꽃밭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길, 엎디어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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