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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다시, 빨간 립스틱 / 한정미

부흐고비 2022. 3. 30. 06:16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형형색색의 립스틱 광고전단이 가던 걸음을 돌려놓았다. 화장품 가게에 들어서자 곱디고운 색깔의 립스틱이 예쁜 꽃처럼 내 손을 끌어당긴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립스틱 중에 빨간 립스틱을 집어 든다.

금방이라도 톡 하고 동그랗게 방울지어 떨어질 것 같은 맑은 빨간색이다. 손님들이 발라 볼 수 있도록 둔 샘플을 손등에 발라 본다. 색깔이 참 곱다. 덜컥 집어 들고 계산대 앞으로 가니 점원이 선물할 거냐고 묻는다. 망설이다 그렇다고 하니 예쁘게 포장을 해준다. 정말 오랜만에 내가 나에게 선물하는 빨간 립스틱이다.

내 나이 스물이었다.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시작한 사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용모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느 날 선배가 여자의 화장은 예의라고 충고를 했다. 더없이 난감했다. 화장을 해 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더구나 엄마도 늘 아파 누워있었기에 화장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 끝에 그나마 입술이라도 빨갛게 바르면 되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것이 나의 첫 빨간 립스틱이었다.

뽀송뽀송한 민얼굴에 빨간 립스틱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선배는 나에게 잘 어울린다며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젖살 여전했던 스물에는 무엇인들 곱지 않았을까. 뜻밖에 빨간 립스틱은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르듯 내가 생각한 사회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분명 출퇴근 시간은 있었지만, 각종 회의의 자료를 만드느라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빨랐고 퇴근 시간은 늦었다. 피로에 젖어 무거운 걸음으로 일과를 마치고 회사를 나서면 이미 어둑어둑 어둠은 저만큼 내려앉아 있었다. 숨겨두었던 나의 꿈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훔치곤 했었다.

어느 날,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을 옮기다가 화장품 가게 안의 빨간 립스틱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무엇인가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검은빛이 감도는 빨간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손에 꼭 쥐고 주머니 안에 깊숙이 질러 넣었다. 내 손 안에서 뜻밖에 온기가 전해져 왔다. 얼마나 따뜻하던지 립스틱을 꼭 움켜쥐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나는 공부를 다시 시작했었다. 처음 사회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시작했었는데, 출석 수업이라는 난관에 부딪혀 한 학기 수업만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한차례 쓴맛을 보았기에 이번에는 꼭 마무리 짓고 싶었다. 가정, 아이들, 직장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으려 애를 썼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평소보다 두세 시간 먼저 일어나 공부를 하고 아침을 지었다. 종종걸음으로 출근하고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 몰랐었다.

그러던 중 나의 몸에 적신호가 켜졌다. 왼쪽 눈 밑에 경련이 일었다. 평소에도 몸이 곤하면 그러는 경우가 있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한편 직장에서는 보직이 바뀌어 신경이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경련은 강도가 세지고 횟수가 더 늘어 갔다. 급기야 경련이 멈추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으니 무조건 쉬라는 의사의 처방이 내려졌다. 순간 굵은 눈물이 손등 위로 뚝 떨어졌다.

한동안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병원을 오갔다. 가정도 직장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나는 공부를 접었다. 졸업을 바로 코앞에 둔 4학년이었다. 봄의 문턱을 넘던 그날의 햇살은 무거운 나의 걸음과는 달리 따스하기만 했다. 햇살을 쫓아 고개를 돌려보니 작은 화장품 가게가 보여 성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더 검붉은 립스틱을 샀다.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고, 아이들이 차례대로 수능을 보고 나의 손길은 더 바빠졌다. 그사이 나는 연이은 휴학으로 제적되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 한쪽 깊숙이 간직해 두고 있었다.

검붉은 립스틱을 산 그때로부터 강산이 한 차례하고도 더 바뀌려는 세월이 흘렀다. 더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재입학 승인을 받고 취득한 학점은 그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등록금을 내고 교재까지 받고 보니 가슴이 설렜다. 돌아오던 길에 화장품 가게 앞을 지나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립스틱을 모아 둔 상자를 열어 본다. 빨간색이 이렇게 다양할 줄 미처 몰랐다. 선홍빛을 띤 것, 맑고 투명한 것, 검붉은 것 등 다양하다. 그때 기분에 따라 골랐음을 굳이 기억을 되살리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립스틱을 하나하나 보다가 유난히 검은색을 띠는 립스틱이 눈에 들어온다. 뚜껑을 열어 돌려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 뚜껑을 돌려 제자리에 두고, 조금 전 가게에서 산 빨간 립스틱을 조심스럽게 발라 본다. 거울 속 나의 입술에는 이미 봄이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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