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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특성상 일주일에 한 번 코로나19 검사를 한다. 오늘도 출근하기 전에 검사하는 날이다. 보건소까지 가려면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 출발점이 아파트 단지 앞이고, 마을버스는 1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출발하는 시간 맞추어 나가면 되니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몇 분 정도 단축된다. 바쁜 아침 시간에 짧은 순간이나마 여유가 생겨서 좋다. 매번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으니 편하게 간다.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지만 단점이 있기도 하다.
마을버스는 골목골목을 누비며 달린다. 굴곡이 심한 도로 모퉁이마다 곡선을 그린다. 모퉁이를 돌 때 몸 중심이 흐트러지고 아차 하면 넘어질 수도 있다. 오르막 내리막길 위에 정차하는 횟수가 잦다. 운전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이면도로 사정 때문이다. 어느새 이순을 넘어서일까. 근력이 떨어졌는지 예전과 다르다. 의자에 앉는 것이 좋다. 지하철 승차 무료 카드 이용하는 나이도 훨쩍 지났으니 그럴만하다고 받아들인다.
허리 협착증을 치료한 적이 있다. 허리와 다리를 생각해서 안전을 먼저 염두에 둔다. 마을버스 탈 때는 신경을 조금 더 쓴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앞쪽에 앉았다. 아픈 후에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다. 여느 때는 가능하면 앞쪽 의자는 피한다. 매번 내가 선호하던 뒷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날만은 맨 앞쪽 의자에 앉고 싶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연세 높은 분이 탑승할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서너 정류소가 지났을까. 머리가 하얗고 중절모 쓴 할아버지가 탔다.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내 마음은 아직 젊음으로 가득하다. 얼굴 피부를 봐도 경로우대를 받을 때는 아니다. 나도 흰머리가 있고 머리카락도 가늘고 엉성하며 숱이 적어졌다. 노화는 계속 진행 중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경로석에 앉아 버티기는 젊다. 내 모습의 모순이다. 나는 아직 직장인이다. 행여 직장에서 동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싫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 업무는 정확하게 해 둔다. 웬만한 문서는 젊은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 않고 스스로 한다. 컴퓨터를 배워둔 것도 참 다행이다.
요즘 어디서나 컴퓨터로 하는 일이 많다. 음식 주문하는 것도 모니터로 하는 곳도 있다. 오래전부터 신세대와 구세대가 생활방식이 다르게 살았지만, 식당도 젊은이들의 생활에 비중을 더 두는 음식점이 늘어난다. 사람을 보면서 주문하던 음식을 모니터에서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린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의 한 부분이다.
연세 많은 할아버지께 자리 양보하고 핸드폰과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버스 손잡이에 의지했지만, 몸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낙상을 당한 자의 배려처럼 차내에서는 가끔 방송한다. 이동시 손잡이를 꼭 잡으라고 친절을 베푼다. 그때다. 앉았던 청년이 미소를 머금으며 일어섰다. 나에게 앉으라고 하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손사래로 사양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재차 손짓하며 앉길 원했다. 고맙고 미안했다. 내 처지가 연로한 사람에게 자리 양보할 형편이 아닌데. 착한 척한 것 같아 미안했던 짧은 순간이다. 웃으면서 권하는 젊은이의 고마움은 배가 되었다. 마음의 빚을 안고 다시 앉은자리가 할아버지 바로 뒷좌석이다.
마을버스는 1호선과 2호선을 쉽게 탈 수 있도록 이어준다. 대부분 승객은 지하철로 환승하는 사람들로 꽉 찼다. 짧은 시간에 복잡하고 만원이다. 마을버스는 몇 개의 정류소를 지나는 동안 흔들고 흔들며 주택 골목길을 다 빠져나왔다. 큰 도로 2호선 지하철역 정류소까지 소요 시간은 10분 정도 되는 거리다. 나는 젊은이 덕분에 편하게 앉아서 온 셈이다. 지하철역에서 많은 사람이 하차했다. 그러나 젊은이가 내리지 않았다. 젊은이에게 다시 앉아 갈 것을 권했다. 나는 목적지가 되기도 전에 일어서 출입문 쪽으로 와서 섰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차창 밖에는 시내버스가 달리고 있다. 대중교통 버스가 다니는 도로에서는 마을버스도 힘들지 않다. 10분을 차 안에 서 있어도 큰 불편을 못 느낀다. 얼마 뒤 젊은이는 큰 마트 앞에서 내렸다. 나의 목적지보다 한 정류소 먼저 내렸다. 다음이 종점이다. 백발 할아버지는 종점이자 지하철 1호선 환승하는 시청역까지 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시내버스 안에서 젊은 여자가 양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짐을 받아 주고 했는데 요즘은 맡길 생각도 받아 줄 마음도 없다는 것이다. 짐을 들어주는 배려 문화를 논하고 있었다. 공감하는 말이다. 나도 가끔 물건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가능하면 젊은이들 앞에 서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내 모습이 스마트폰 하는 데만 열중인 자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다.
가끔 생각한다. 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는 모습 그들의 일상이 연장됨을 느낀다. 어떤 사람이 타고 내리는지 관심조차 없는 세상이다. 이미 오래전 습관화돼버렸는지 모른다. 가끔 오죽하면 마을버스 기사가 양해를 구하는 멘트를 할까 싶다. ‘불편한 분에게 자리 양보 좀 해주세요.’라고. 스마트폰이 우리 사회에 많은 정보를 주고 편리를 제공한 물건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을 외면하게 한 주범이 스마트폰도 한몫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이것도 새로운 문화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을까. 물건을 받아 주던 그때를 문화라고 옛이야기하듯이, 훗날 이런 풍경도 하나의 문화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
짧은 순간, 아침에 만난 젊은이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맘이 더 크게 와 닿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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