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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순 시인

부흐고비 2022. 4. 18. 09:16

강순 시인
제주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사춘기 / 강순
여울에는/ 밀어, 꼬치동자개, 버들매치, 배가사리, 감돌고기, 점몰개, 참마자, 송사리, 갈문망둑, 눈동자개, 연준모치, 모래주사, 새미, 누치, 흰수마자, 납자루, 열목어, 꺽저기, 수수미꾸리지, 금강모치, 돌상어, 꺽지, 점줄종개, 돌마자, 둑중개, 버들가지, 꾸구리, 모샘치, 어름치, 부안종개, 자가사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 199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숲 속에서 숲을 찾다 / 강순
PC 파워를 누른다/ 마음 속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검문소가 있다/ ID : 오늘, 지금 이 순간/ 비밀번호 : 아주 가볍게/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다/ 검색 : 숲/ 잠시 기다린다// 당신은 숲을 찾고 있군요 숲은 나무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욕망의 숲, 그 아래로 매일매일 떨어져 내리는 절망의 숲…… 진짜 숲, 가짜 숲, 허무의 숲, 우울의 숲, 희망의 숲, 슬픔의 숲,……// ‘진짜 숲’으로 마우스를 이동하고 클릭한다// 진짜 숲은 아름답고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들의 숲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누구나 탈퇴할 수 있습니다. 단,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울의 숲’을 클릭한다// 우울의 숲은 지금 당신이 들어가 있는 숲입니다 아주 노오란 숲 속으로 당신은 무작정 걸어가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있으면 정신 건강을 해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만 숲 속을 빠져 나오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아주 가볍게> 사라져 버린다//
* 199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똥은 화두(話頭)이다 / 강순
1// 새벽 세시 오분에 싸는 똥은/ 똥이 아니라 화두이다/ 어두운 화장실 속으로 퍼져가는 구린내 나는 삶들을/ 오롯이 꺼내 놓고 확인하는 절차/ 나는 준엄한 심판대에 나를 패대기쳐 놓고/ 나를 해결할 구멍을 찾는다 구멍 속에서 느릿느릿/ 작은 물음이 기어 나온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준다/ 그러나 더 이상의 물음은 고통이다/ 변비에 걸려 본 이는 잘 알리라 차라리/ 블랙홀로 떨어지는 환희를 꿈꾼다는 걸/ 나는 조금씩 시간들을 풀어서 저울대에 올려놓고 질량을 재기 시작한다// 웃음의 시간, 슬픔의 시간, 거짓말의 시간, 회의의 시간, 바보 같은 시간, 히죽히죽 나를 향해 비웃고 있는 시간, 돌팔매질하고 싶은 시간// 저울은 넘쳐 나고 나는 나를 더 이상 매달 수가 없다/ 아, 새벽 세시 오분은 새벽 세시 삼십분으로 나를 매달고 간다 드디어 나는 변기 속으로 나를 풍덩 쳐 박는다 시원하다// 오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고통의 자유를 아는 일이다// 2// 똥은 싸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닦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배에 힘을 줄 때마다 나는 나를 닦는다/ 그리움을 닦고 그리움으로 얼룩진 기억들을 닦고/ 게으름을 닦고 슬픔을 닦고 항문을 닦고/ 무질서를 닦고 그 속에 살아 있는 바이러스의 침투를 닦고/ 닦고 또 닦아 최후의 한 방울까지 사수하는/ 지금 시각 새벽 세시 삼십 오분//
* 199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8월, 그 유혹 / 강순
하얀 백지에/ ‘그냥 담쟁이덩굴이 있다’라고 쓴다/ 그리고 ‘그냥 한 여자가 담쟁이덩굴 앞에 서 있다’라고 쓴다/ 그리고 8월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한낮/ 그냥 담쟁이덩굴 속에/ ‘그냥 고개를 조금 젖히고 있다’라고 쓴다// 자꾸만 담쟁이덩굴은 종이 밖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고/ 그때마다 이파리에선 노오란 햇살이 빈혈처럼 흩날리고/ 백지 속의 그녀는 고개를 어느 방향으로 돌릴까 잠시 생각한다/ 담쟁이덩굴은 어느덧 내 뇌수의 들판으로 줄기를 뻗고// 그냥 담쟁이덩굴을 바라본다/ 그냥 담쟁이덩굴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냥 담쟁이덩굴 위로 날리는 8월의 햇살을 바라본다/ 그냥 8월의 햇살에 걸려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본다//
* 199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사라지는 것은 이유가 없다 / 강순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 그 사이로 세상을 본다/ 손가락 사이로 서로 다른 강물이 흐르고// 손가락을 왼쪽으로 30도 가량 기울여 본다/ 창 밖 마음식당의 ‘마음’ 자가 지워지고 있다/ 마음은 두 번째 강에서 세 번째 강으로 흘러간 모양이다// 오른쪽으로 둘째손가락을 조금 돌리면/ 잊었던 미움이 되살아난다/ 강과 강 사이를 가르는 산이 자라고 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영원한 사랑>/ 오래된 배냇저고리 같은 제목 위에 손가락을 놓는다// 영원히 사라(져라)/ 바람 부는 한강 고수부지, 멀어져가는 K의 뒷모습이 보인다/ 강물이 일렁이고, 관악산이 위로만 자라고/ 마음식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로 다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 199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사춘기 나무 / 강순
한 그루 사람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때마다 젖을 물렸습니다./ 무럭무럭 자라 애인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 쪽으로 고개를 드는/ 사춘기 나무가 되었습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거짓말이 자라는/ 비밀의 협곡에 갇혔습니다.// 나무의 왼쪽은 사막으로 향합니다./ 가엾은 맨발을 보여줍니다./ 태양은 혼자 뜨거워서 나무를 돌볼 여력이 없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푸른 산 쪽으로 도망갑니다.// 흔들리는 줄기가 자라/ 바람의 노래를 만들 거라고/ 누군가 예언합니다만/ 나는 늙어가는 팔을 뻗어/ 나무의 뿌리를 힘껏 감쌉니다./ 많은 구름이 몰려와 구경합니다.// 비바람이 세찬 날은 더 위험합니다./ 나무 지지대도 흔들립니다./ 나는 자장가나 진혼곡을 불러줍니다./ 지나가는 소문들은 입이 백 개입니다.// 햇살이 가루처럼 내리는 날/ 나무가 스스로 눈을 뜨고/ 세상을 빛내는 그늘을/ 소명처럼 내어줄 지도 모릅니다만/ 소문은 톱니가 달린 손을 보이며 지나갑니다.// 그래도 나무는 나의 한 그루 애인입니다./ 나는 그를 등질 수 없는 대지입니다.//

곶감이라는 숭고한 대상 / 강순
설익은 기억을 허공에 내놓자/ 바람이 하루 종일 슬픔의 두께를 잰다.// 푸른 과거로 도망치는 일은 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나의 운명은 천여 톤의 붉은 질문들/ 바람에게 슬픔의 두께를 내어놓는 일, 오로지 망각이다.// 배고픈 바람이 슬픔을 다독여 슬픔을 먹고 슬픔으로 배부르는 일// 망각은 버거운 사치여서 밤마다 어지러운 환상/ 먼 곳 슬로바키아에서 달빛이 몰려온다.// 당신에게 달콤한 유혹을 헌사하기 위해/ 지젝*처럼 난해한 까마귀가 운다.// 작은 슬픔의 편린조차 잊는 일/ 모든 망각에는 희망의 꽃씨가 들어 있어/ 상처 자리 쓰다듬은 지 백 번 천 번/ 부끄러운 맨살 위 붉은꽃, 검은꽃, 흰꽃 피어난다.// 혼자 울던 문장들, 만 번째, 새로운 해답이다.// 내 몸은 꽃들의 은밀한 색감을 훔쳤나/ 새로 태어난 나를 자꾸 훔쳐보는 당신,/ 이제 달콤한 나를 유혹해도 당신은 무죄/ 슬픔을 모두 망각했으니 나의 과거도 무죄//
* 슬라보예 지젝: 슬로바키아 출신 철학자

꽃의 사체 / 강순
가장 낮은 자세로 살다가 눈을 감든/ 가장 높은 자세로 살다가 눈을 감든/ 사체가 되어/ 가장 숙연해지는 순간 올 줄 알았다/ 아름답다는 혹은/ 화려하다는 찬사/ 다 필요 없을 줄 알았다/ 내 이름 거룩하게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사랑이든 미움이든/ 한 조각 풍문이 될 줄 알았다/ 많은 주문들을 주워들은 허공이/ 그래도 그립다/ 풍장을 해달라/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다/ 짐승의 발자국을 온몸으로 받으며/ 지구에게 유언을 남길 때/ 한 조각 쓸모 있는 말이 생겨/ 흙에 닿고 싶다// 기억들에게 할퀸 문장들/ 촛대에 이는 바람 한 조각//

아픈 의자 / 강순
내가 얼굴이 있었던가요/ 눈을 감아도 하늘이 보여요/ 내 안의 내가 너무 작아 다리가 아파요// 쓸모없는 기억만 가득 차서 허리가 구부정해요/ 새들이 작은 나를 비웃으며 날아가요/ 바람이 낡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요// 담벼락이 나에 대해 아는 건/ 내 몽상에는 숲이 하나 있고/ 숲에는 착한 요정이 웃고 있고/ 요정은 튼실한 나무집에 살고/ 그 집 안에 나의 근육이 살아있다는 것// 나는 실종되고 편집되다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홀로 우주의 왼편을 살짝 흔들어/ 담벼락에 푸른 그림자를 흘릴 거래요/ 그리하여 새벽녘 당신의 눈길에 닿을 거래요// 아직도 꿈이 넘쳐 다리가 아파요/ 질문을 덜 하고 침묵을 더 해도 별은 너무 멀어요/ 여전히 등이 아파 하늘을 모두 버렸어요/ 젊고 강한 내가 되려고 새들과 바람을 도로 불렀어요// 그러니 눈을 뜰 얼굴을 달아줘요/ 물어뜯을 엄마라도 낳아줘요/ 당신 있는 곳 주소를 보내 줘요/ 당신 가슴 속에도 근육이 있잖아요//

권력 / 강순
내 안의 내가 나를 본다 내 뒤의 내가 앞의 나를 부른다 내 왼쪽의 내가 오른쪽의 나를 듣는다 내 앞의 내가 돌아서서 뒤의 나에게 걸어간다 내 뒤의 내가 앞의 나에게 너는 늙어 버렸구나라고 말한다// 내 앞의 내가 뒤의 나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내 오른쪽의 내가 내 왼쪽의 나에게 몸을 보여 준다 내 왼쪽의 내가 아이스크림을 빨다가 당황한다 근육을 많이 키워야겠어라고 말한다 내 오른쪽의 나를 지나 러닝머신으로 다가간다 내 앞의 내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뒤의 나를 응시한다// 나는 세포분열하는 나들을 바라본다 나는 기억 위를 날아가고 나는 배꼽 티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고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입술을 내밀고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뒤태를 확인하고 나는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나에게 보여 주고 나는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뻐끔거리고 나는 거울 속을 또각또각 걸어 애인에게 걸어가고 나는 오후 세 시의 그림자를 확인하며 커피를 마시는데// 모든 나는 젊은 나를 바라본다 늙은 나는 젊은 나에게 꾸벅 인사한다 내 왼쪽의 나와 내 오른쪽의 나도 모두 젊은 나에게 인사한다 젊은 나는 내 뒤에서 모든 나들을 조종한다 기억 속에 마녀로 앉아 나 밖으로 나오지 않고 천 년 만 년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 강순
즐거운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오렌지라는 단어에 힘을 뺀다/ 쪼그라든 혹은 비틀린 연애가 된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파먹다가 오렌지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남겨진 혹은 떠나간 연인이 된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오렌지라는 단어를 먼저 먹는다/ 실체 없는 혹은 맹목적인 사랑이 된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숨기고 오렌지라는 단어도 숨긴다/ 누가 오렌지를 엿볼까 훔쳐 갈까 종일 일을 설치고 있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길게 잡아 늘이고 오렌지라는 단어도 길게 잡아 늘인다/ 외줄 같은 혹은 엿 같은 기억이 된다/ 펜대를 굴리며 머리를 박고 즐거운을 파먹다가 버리다가 숨기다가 늘이다가 오렌지를 내뱉다가 먹다가 숨기다가 늘이다가 우울한 핫도그를 먹는다//

밀애(蜜愛) / 강순
오렌지는 동그란 달/ 오렌지는 밤을 달려서 온/ 오렌지는 유혹의 향기를 지닌/ 오렌지는 왈츠처럼 신나는/ 오렌지는 무게 잡지 않는/ 오렌지는 훔칠 수 있는/ 오렌지는 꿈길을 달려오는/ 오렌지는 슬픔을 버리는/ 오렌지는 졸면서 깨어 있는/ 오렌지는 속눈썹을 가늘게 떠는/ 오렌지는 속살이 부드러운/ 오렌지는 어둠을 펑펑 살려 내는/ 오렌지는 밤에 쑥쑥 자라는/ 오렌지는 바보같이 웃는/ 오렌지는 밤을 새워 우는/ 오렌지는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오렌지는 그러나 먼 길을 동경하는/ 오렌지는 귀가 쫑긋 열려 있는/ 오렌지는 돌아오는 길을 잃은/ 오렌지는 너무 멀리 굴러간// 슬픈 달// 오렌지가 욕조에 뜨고 있다//

인플루엔자 / 강순
적당한 거리에 대해 아무도 정의할 수 없다// 나와 당신이 건널목에서/ 비 오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비에 젖은 우산을 사이에 두고/ 할 말을 찾으며 마주 서서/ 푸른 신호등처럼 갑자기 터지는/ 적당한 인사말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잘 지냈어요? 북극은 아직 겨울인가요?/ 북극에 당신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떠나간 말들을 주워 올릴 도구가 없어서/ 우산을 열심히 들고 있다// 당신은 북극에 간 적이 없고/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적 없지만/ 서로의 위치에서 서로의 기억을 재기로 한다// 북극의 날씨는 어때요?/ 백야는 우리만큼 가깝고 멀어요// 당신이 도로를 건너오면/ 나는 도로를 건너지 않을 것이고/ 내가 도로를 건너가면/ 당신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해/ 북극에는 느린 우체부가 항상 대기 중이다//

식물성 / 강순
어쩌니 당신은 아직도 나를 모르고// 작은 단어 틔울 때 연신 자궁에 힘을 주다가/ 방금 낯선 문장을 쌌다/ 문장 푸를 때까지 모든 계절 눈치 보다가/ 거대한 산통이 우르르 파도로 몰려와// 여기는 당신을 밀어낼 수 없는 화분 속/ 당신은 말을 하고 나는 듣지/ 경청은 나의 운명/ 내가 귀를 열 때 당신이 걸어 들어와/ 내가 입을 닫고 당신이 앉거나 눕는 소파에서/ 당신은 생각난 듯 가끔 나를 칭송하지// 내가 할퀴지 않아서 지구가 안전하다고/ 내가 반항하지 않아서 지구가 평온하다고/ 내가 무섭지 않아서 지구가 고요하다고// 어쩌니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모르고// 어린 새끼들을 할퀴며 손톱을 물어뜯고/ 어미에게 반항하며 발톱을 세우고/ 벌레들에게 악문으로 저항하다/ 방금 또 낯선 문장을 피똥으로 쌌어// 검은 그림자는 왜 계속 검은 그림자일까//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자궁이 하혈하는 소리// 어쩌니 지구는 아직도 지구를 모르고//

혀를 잘랐다 / 강순
혀를 꺼냈다/ 검은 말들이 딸려 올라왔다// ​혀를 만졌다/ 검은 말들은 어둡고 음습한 곳에/ 검은 습성으로 굳어 있었다// ​검은 말들은/ 혀에 안착해서/ 혀의 숙주가 되어/ 혀를 점점 검게 물들이고// ​당신의 가슴에서 악몽이 되고/ 당신의 호흡에서 천둥이 되고/ 벼락 속에도 알을 낳고/ 깊은 동굴의 괴물로 포복하고// ​나는 어쩌다 당신의 검은 혀/ ​10분 간 목 놓아 혀를 잘랐다/ 태초의 언어를 찾았다/ “엄마”// ​붉은 피가 한참 쏟아지고 나면/ 나의 혀에 꽃이 필까// ​바람이 불어 검은 혀가 차가워진 밤에/ 당신에게 내 잘린 혀를 보낸다//

버려지는 울음은 없다 2 ⸺자귀나무 / 강순
내 영혼은 꿈이 커서// 붉은 왕관 두르고 팔을 멀리 뻗어/ 나는 여름의 제왕으로 산다// 당신은 울지 말고 내 품으로 오라/ 여름 태양이 잔인하니/ 나의 품은 당신의 자리// 내 울음을 보라/ 당신 대신 울어주는/ 위로의 문장, 세상에 지친 이들 다 안고/ 나는 이미 뜨거운 문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들은/ 나를 버리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바닥으로 향하는 깊은 한숨이고 싶어// 낮은 것, 나의 당신아/ 소실점에서 당신과 나는 살 맞대고/ 천 톤의 문장을 섞자/ 비단뱀조차 쉬어 가라/ 첫사랑도 쉬었다 가는 내 허리야// 나는 제왕답게/ 왕관 쓴 채 일어나고 왕관 쓴 채 잠이 든다/ 울음에 지쳐 어느 순간 왕관이 더 붉어진다// 내 울음이 가장 붉어서 푸른 순간은/ 지나가던 당신이 나를/ 아! 자귀나무 꽃이야! 라고 소리친 때였다//

가로등의 목격 / 강순
한 나무가 왔다가 간다/ 한 나비가 갔다가 온다/ 어떤 것들은 나를 좋아하다가 등을 돌린다/ 목소리가 고운 것들은 바람을 좋아하며 까르르 거리다가/ 바람의 앞잡이가 되어 나를 떠나간다/ 사라진 목소리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밤/ 줄기조차 바싹 마른 목숨들이 제 방향을 잃는다/ 서로의 침묵이 서로의 그림자를 늘리는 시간/ 그들의 침묵을 받아내느라 허공은 더욱 바빠진다/ 아무도 모르는 언어를 아무도 모르게 소화하느라/ 또 한 목숨이 깊은 밤에 남모르게 흔들린다/ 누군가에게 빛인 것이 누군가에겐 어둠/ 누군가에게 어둠인 것이 누군가에겐 빛/ 나는 여전히 가난한 차림으로 주름을 늘리며/ 같은 자리에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갔다가 다시 오지 않을 바람의 말을 이제 배운다/ 슬픈 목숨과 내통한 바람의 비릿한 냄새/ 그 속에 출처 불명의 낯선 언어들을/ 내가 밤새 해독할 테니/ 나는 깨어 있어서 증명해야 한다/ 하나의 목숨이 흥건한 피를 내게 남겨 준 날조차도// 이 밤, 누군가가 날 훔쳐보고 있다//

중환자실 / 강순
우주의 미아처럼/ 미동이 없는 생물체/ 시간은 누가 훔쳐서 숨긴 걸까// 날개 없는 나비에게/ 밤 이후 세상은 어둠/ 낮 이후 세상도 어둠// 태양이 없어서 나비는 촉수조차 잃었다// "얘, 그만 눈 좀 떠 봐!"/ 살짝 벌어지지도 못하는 꽃 같은,/ 한때 지구를 주름잡았던 자유라는 그것// 태양이 없으니 나비의 그림자가 없다/ 시간이 없으니 구름의 이름이 없다/ 봄이 오지 않는 침대에 오래 있는 건 죄악이야// 어떤 소리도 전달되지 않는 동안/ 그곳은 20광년을 지나 도착한 낯선 행성이었다/ 아직 젊은 행성의 이름은 JINㅡ49// 지구에서 배운 언어를 잊는 데 성공한 듯/ 끝내 침묵이다 젠장!// 이제 새로운 외계어를 배워야 할 때다//

푸른혀도마뱀 / 강순
당신을 피해 스스로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다,/ 나의 몸은 그때부터 자꾸 가렵다./ 꼬리가 다시 자라는 동안/ 어둠 속에서 시간이 푸른 혀를 키운다.// 배를 바닥에 대고 죽은 듯, 죽은 듯/ 어둠이 되어가는 동안/ 기억은 잘린 꼬리처럼 꿈틀거린다.// 나무 구멍에 슬픈 역사를 숨기고/ 납작 몸을 엎드리는 일은/ 당신을 몸 안에서 덜어내는 일.// 달빛이 속눈썹을 떨며 내게 말을 걸 때/ 그 문장은 내 혀를 닮은 푸른 윤슬이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위험이다./ 온종일 어둠을 엎드려 받드는 이유는/ 위험한 당신을 덜어내기 위함이다.//

벽의 변명 / 강순
벽을 오래 바라보다/ 내가 이미 벽이 된 걸 알았다.// 벽 밖의 사람들 모두/ 스스로를 부지런히 학습하며/ 벽이 되는 줄 모르고 벽이 되느라 서로 바빴다.// 나는 벽 안에서 벽 밖을 구경했다./ 목에 스카프를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자/ 내 몸에서 못들이 솟아나 그녀의 스카프로/ 그녀의 목을 달도록 도와주었다.// 술에 취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서/ 나를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그도 죽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가제트처럼 로봇팔이 불쑥 솟아나/ 그를 번쩍 들어 내동댕이쳤다.// 나는 도움을 주는 벽이고 싶었다./ 죽음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죽음이란 선물을 바로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벽이라니!/ 벽이 되고 나니 다른 많은 벽들이 더 잘 보였다.// 그들도 나처럼 밤에 가끔 잠을 설쳤으나/ 안으로 언어를 삼키는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나는 벽의 패턴이 좋아졌고/ 벽의 문화조차 사랑하게 되었다./ 벽과 결혼하고 아이 둘이 생기자/ 벽의 자식이라 그들도 모두 벽이 되었다.// 벽을 너무 오래 바라보면/ 벽이 될 수 있다는 예언을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았기에/ 이 모든 일이 생겨날 수 있었다.// 벽이 벽을 깨고 무너뜨렸다는 얘기는 기네스북에/ 아직 등재되지 않았다.//

K씨와 비상구 / 강순
비상구엔 많은 대답들이 쏟아져요. 배고픈 생쥐들이 계단 위를 배회하고 목이 없는 꽃병들이 바닥에서 부서져요. 밤마다 가난한 소음만 들린 건 아니에요. 낮마다 닫힌 귀가 열린 것도 아니에요. 대답들 때문이에요.// 그를 위한 계단이 수십 개 놓여요. 대답과 대답과 대답 속, 가난은 소문보다 먼저 존재하고 더 오래 머물러요. 나무가 태양과 땅 사이에서 바람을 필요로 하듯, 계단들은 고장난 의자와 책상들을 지키며 바람에게 소문을 들어요. 대답들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자신만의 계단을 밟으며 창밖을 지나가요. 그들은 그들의 계단을 위해 바람에게 소문을 듣는 성실한 그의 이웃들이에요. 그들은 모두 같은 계단으로 동네를 다니지만 사실 모두 다른 비상구를 만들어요. 그도 부지런히 바람에게 귀를 맡겨 통장 잔고를 확인해요. 대답들 때문이에요.// 이제 대답할 시간이에요. 생쥐들이 벽속으로 우르르 숨어들고 목이 긴 꽃병 속 꽃들이 화들짝 피어나요. 일을 마친 그가 비상구 방향으로 걸어가요. 평범한 이웃들처럼 미래를 걸어하는 그의 꿈 속, 비상구 표시등이 반짝여요. 평범한 대답이란 고단한 꿈을 담보로 하잖아요. 당신도 그런가요?//

불면의 배후 / 강순
왼손에 장미를 든 여자와/ 오른손에 망치를 든 여자가/ 만나는 새벽.// 문장은 문장끼리 모여서 고독하다./ 시간을 쪼아먹는 새는/ 마지막 문장 안에서 파닥인다.// 새벽 세 시 삼십분은/ 세상 온갖 새들이 몰려와/ 문장들을 쪼아대는 시각./ 고독한 문장들 속에서 주어를 찾는/ 왼손에 망치를 든 여자가 웃는다.// 오른손에 장미를 든 여자가 운다./ 왼손에 망치를 든 여자가 주어를 던져준다./ 오른손에 장미를 든 여자가 주어를 받아든다./ 새가 파닥이고 고단한 주어가 일어선다.// 문장을 독살하려는 장미와/ 문장을 내려치려는 망치를/ 양손에 움켜쥐고/ 주어, 부엌으로 걸어간다.// 머리 없는 문장을 파먹은 새 한 마리.//

사라지고 싶은 것들 / 강순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햇빛이 이사 왔다./ 햇빛은 꿈속에 사는 소문인데/ 어느 구멍으로 흐른 것일까.// 의자가 있던 자리에/ 그림자가 남았다./ 그림자는 기억 속에 사는 유령인데/ 어느 벽을 허문 것일까.//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소문이 무성하다/ 피아노가 중고로 팔렸다고 하고/ 애인이 떠나자 주인이 버렸다고 하고// 애인의 실종과 관련 깊어서/ 모두 주인의 애인되기를 갈망한다고 하니/ 우리는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서랍장이 햇빛을 몰아내고 (그래서 소문이 사라졌다)/ 탁자가 그림자를 몰아내고 (그래서 유령이 사라졌다)/ 새로운 구석과 중심이 되어간다.// 사라지고 싶은 것들은/ 낯선 8요일에 한쪽 발을 담그고/ 미련과 슬픔을 두고 가지 않는/ 예의의 절차를 모색하고 있다.//

달팽이가 간다 / 강순
오늘밤은 잠이 안 와서/ 사과 만큼의 거리를 갔습니다.// 나의 걸음에 대한/ 당신들의 소문은/ 이제 폐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과만큼의 거리란/ 사과 백 개 천 개를 늘어놓은/ 아주 숭고한 목표일지 모릅니다.// 나무들도 제 자리에서 걷는다지요./ 새들도 자면서 어둠을 건넌다지요.// 내가 있던 자리에/ 풀이 자라납니다./ 나는 밤잠을 잊었으니까요.// 나의 이동은/ 남몰래 연습하는 침잠입니다.// 삼백 오십 번째 사과가/ 단맛을 풍기기 시작합니다./ 내 몸 밖으로 진물이 흐릅니다.//

나비와 꽃 / 강순
나는 날갯짓을 만 번 쯤 해서/ 네게로 간다./ 너는 나의 방문에 초연한 듯/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모든 꽃들은 웃지 않는다./ 인간만이 꽃을 오해한다./ 꽃을 미소로 읽고 사랑이라 말한다./ 꽃을 눈물로 읽고 이별이라 말한다.// 내 눈빛을 읽은 너는/ 이제 붉은 입술이 없구나./ 몽상의 한가운데/ 나는 너의 왼쪽 시린 곳에 앉는다.// 나의 생은 부풀어 올라 달에게 가고 싶었다/ 신을 만나 약속받고 싶었다./ 달의 신은 유효기간이 얼마일까?/ 눈을 감을 때는 아껴 두었던 네 오른쪽을 꺼내 본다.// 어둠 속에 떠오르는 노란 이마/ 네가 내준 게 입술뿐이 아니었구나./ 네 몽상에 나를 자주 초대하였구나./ 나처럼 바람에 흔들렸구나./ 나처럼 부풀어 올랐구나./ 신에게 질문도 저항도 하였구나.// 밤마다 한 잎 한 잎 색 입혀/ 나를 그렸구나./ 아, 우리는 벌거벗고/ 달빛 열반에 있었구나./ 네게로 가던 허공의 빗금들/ 꿈에서 깨면 날갯죽지가 많이 아프다.//

어쩌면 나비 / 강순
슬픔은/ 당신 등을 평생 파먹은 곤충// 등을 동글게 만/ 애벌레처럼/ 엄마의 일생은 펴기가 징그럽다.// 좋은 시절을/ 질곡의 그늘을 건너다/ 날개를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나.// 꿈틀꿈틀/ 몸 안팎에 익명의 선언문을 쓰느라/ 신음으로 지우고 고치는 순간.// 생의 종점에서/ 못내/ 나비는 다다를 수 없는 낯선 혁명 같다./ 눈 감아 가는 안락국 어디쯤이다.// 눈물보다 강한 문장들을/ 마지막 유언으로/ 야윈 등에 새기는가.// 동글게 기억을 말며/ 속절없는 허물 벗느라/ 다리 백 개 모두/ 놓치기 싫은가.// 섬모 같은 기억들/ 대롱대롱 달려/ 날기 무거운가.// 이제 저기 햇볕 쪽으로 가요./ 조금만 더 힘을 빼고/ 징그러운 문장들을 버려요.// 날개가 등을 뚫고 나와/ 저쪽 언덕으로/ 날아 날아/ 끙, 끙, 신음소리 만발하도록// 당신은 어쩌면 나비를 태우고 가는 타임머신에서/ 천만 년 과거로 버튼을 누르고 있는 거다./ 병실 침대가 허공에 떠 있다.//

망각의 기원 / 강순
고장난 선풍기는/ 옛 이름을 잃었어.// 바람은 비루한 고유명사/ 애매하고 모호한 기호로 남았다지.// 당신 꿈속에 나는/ 부서진 날개를 달고/ 벙어리 유령처럼 출몰한다지.// 가난한 뒷목을 먼저 보여 주고/ 속뼈의 고단함을 알려 줬다면/ 당신이 내 속살을 동경했을까?// 내 안에 떨림이 조금 남은 건/ 당신의 마지막 지문이야.// 당신을 못 잊어서/ 나를 벌주었어/ 허리가 아프도록 종일 골방에 서 있었어.// 따뜻한 여우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겨울밤엔 당신을 몇 번 올라탔어./ 그래서 당신이 반쯤 잊혀졌어.// 슬픔이란 이제 운명의 정곡이 아니지./ 어느 날 갈비뼈 하나를 뽑아내는 일.// 바닥에 쓰러진 이카로스가/ 당신이 아니라 나이기를 바라는 일./ 슬픔은 시간 앞에 붙는 관형어 같은 거잖아.// 바람이 지나간 구석에서/ 모든 게 잊혀지기를 바라는/ 나는 망각의 기원이 되었어.// 골방의 어둠은/ 죽은 시간을 살려낼 수 없잖아.//

 

말하는 겨울나무 / 강순
겨울엔 발이 깊어져/ 꿈을 꿉니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추위가 온통 감옥인 들판에/ 푹 푹 발자국 찍고/ 가난한 연인을 구출합니다./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와요)// 독재자의 외투와 털모자를 벗겨옵니다./ 로힝야족 난민에게 꿈을 빌려줍니다./ (밤을 온통 초록색으로 칠했어요)// 밤을 지키는 달의 임무는/ 그림자로 내 발자국 덮는 일/ 고단한 것들은 입조차 얼었습니다./ (문장들이 초록을 뜯어 먹고 자라나요)// 어둠은 밤이 쓴 격려사/ 외딴 별처럼 독해하기에 난해합니다./ (초록은 꿈의 껍질 색이에요)// 어둠을 읽어내는 일은/ 언 땅 위에 발자국 찍는 일/ 밤의 역사는 좌표 잃은 지 오래입니다./ (문장들이 밤새 알을 품고 있어요)// 내가 걸으면 달도 바빠집니다./ 나는 개선장군처럼 밤을 휘저어/ 우듬지가 산덩이만 해졌습니다./ (꿈에도 척추가 생겨나요)// 나의 발은/ 지구를 사랑하느라 깊어집니다./ 오늘 당신을 다 가졌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당신, 날개가 있군요!)//

화장지, 피어나다 / 강순
구겨져 아무데나 버려지자/ 오물을 너그러이 이해하자/ 다른 것들과 두루 섞이자./ 섞이다 보면 만나는/ 원초의 세계/ 나는 펄프의 근원에 닿자/ 보르네오 섬 벌목공의 땀에 이르자.// 애인들이 애인들에게 버려질 때/ 눈물을 닦아 준 나는/ 깊은 정적으로 몸을 적시자.// 천사들이 세상에서 떠나갈 때/ 젖은 두 눈을 닦아 준 나는/ 아무데나 고요히 쓰러지자.// 벌목공은 보스에게 버려지고/ 천사는 신에게 버려지고/ 난민은 이웃에게 버려지고.// 돌고 돌아 내게로 온다./ 모든 버려진 것들은 내게로 온다./ 슬픔을 받아먹은 나는 점점 피어난다.// 손이 천만 개였다가/ 억만 개의 입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벽을 뚫고 나가/ 카오스의 모든 문을 연다./ 화성인의 똥을 먹는다.//

수도꼭지 / 강순
나를 비틀면 타인에게 그 무엇이 되곤 하지만/ 나를 비우고 나면 내 안의 어둠이 더 깊어진다// 히말라야 계곡 같은 시원(始原)은/ 일찌감치 잊었다/ 시답잖은 이상도 꿈꾸지 않고/ 현실에서만 허락된 작은 관념들을 토해낸다// 지극히 원초적 속성의 배설이니/ 나는 참았다가 콸콸 쏟아낸다/ 유행가처럼 슬픔도 기쁨도 속절없이 쏟아낸다// 혁명만이 희망이라고 누군가 말하며 지나간다/ 뜨거운 태양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나는/ 정작 나의 어떤 희망인가/ 얼마나 나를 더 참아내야 뜨거운 피를 토해내는가// 주어야 할 것을 내주는 건 두렵지 않으나/ 하늘의 명을 모르고 어둠마저 고갈되는 게 두려울 뿐// 프리트*나 피르** 같은 평화주의자처럼/ 제때 본질을 토해내고 흘려서 세상으로 번지는 혁명// 매 순간 기로에 서 있으면 필요한 건 오직 인내 뿐/ 아직도 나는 세상의 중심으로 흘러들기를 꿈꾸는가//
* 프리트 [Fried, Alfred Hermann] 오스트리아의 평화주의자(1864~1921). 독일 최초의 반전(反戰) 평화 잡지를 창간하고 주재하였으며, 독일ㆍ오스트리아 평화 협회를 공동으로 창설, 191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피르 [Pire, Dominique Georges]: 벨기에의 평화주의자ㆍ신부(神父) (1910~1969). 빈민 구제 시설의 건설이나 난민 원조 기관을 설립하고, ‘유럽의 마음’ 운동을 벌이는 등 인종 간의 상호 이해를 위하여 활약하여 1958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꿈꾸는, 자작나무 / 강순
가슴으로 더 울기 위해 소문을 떨구고/ 상처를 새겨 견고한 옹이를 꿈꾸지요/ 통증이 몰고 온 바람에도 맞서며/ 들뜬 가슴 차분히 설득하는 형용사,/ 낯선 변죽에도 기죽지 아니하고/ 쭉쭉 뻗어 우주를 우러르는 감탄사,/ 그렇고 말고, 자라는 일은 꿈꾸는 일!/ 마지막 생명 자작자작 태울 때까지/ 부지런히 목숨을 키우는 나는/ 집념이 징그러운 고집스런 족속/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어제도/ 시끄러운 소문이 몇 번 다녀갔지요/ 귀를 막지 않아도 눈물을 그친 건/ 내일 하늘이 푸르기 때문이지요//

아나키스트의 전언 / 강순
그녀는 연기하듯 책을 들고/ 나의 왼손은 그녀의 가슴에/ 아, 부디 우리 행복을 길게 해석해 줘// 순간의 사랑은 긴 죽음보다 달콤해/ 가슴이 한껏 벅차오를 때/ 죽음은 그녀의 몸속에 잔인한 씨앗을 남겼지만// 세상을 실컷 비웃어 줘야잖아/ 이곳을 더러운 감옥이라 하지 않겠어/ 나는 침범당하지 않는/ 억만년 간 터지는 자유// 통증이 나를 몇 십 년 가뒀지만/ 나는 불꽃으로 펑, 펑, 터지잖아/ 그러니 내 왼손은 종내 따뜻했어// 무시무종(無始無終)/ 절망 연기를 하던 내가 번쩍, 거릴 때/ 당신 가슴을 아주 잠깐 붉게 다녀가는 나는/ 영원히 슬픈 역할을 맡은/ 푸른 섬광/// 이제 당신이 터뜨릴 차례야//
* 영화 ‘박열’의 마지막에 엔딩샷으로 올라가는 박열과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을 보고.

광장 / 강순
2016 12월/ 지난 시간이 만든 건 천 가지 비밀이어서/ 광장은 통증의 온점을 잃어 버렸다/ 은밀한 곳에서 자란 그림자들 도망친다, 잡아라!/ 제의식의 형식은 성난 구호와 함성!/ 검은 그림자들 밟힌다 쭈그러든다 지하로 숨는다/ 영혼 없는 함박눈은 제의식의 배경/ 나목들은 채찍 앞에 맨살 보이며 죄인 대신 끌려 와/ 발언권도 없이 무성한 소문을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통증의 온점 찾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불온한 그림자와 적당히 거리를 두다/ 내일의 일터를 걱정하며 서둘러 이불을 뒤집어쓴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가짜 뉴스들,/ 그림자들 저쪽으로 도망친다, 잡아라!/ 숨바꼭질의 무대, 촛불과 태극기의 무대/ 부모 손을 잡은 어린 아이들, 아픈 다리를 끄는 노인들/ 난곡을 연주하느라 시퍼렇게 떨고 있다/ 얍삽한 그림자는 그 사이 지하로 꼭꼭 숨어들고/ 통증의 느낌표가 넘쳐나는 젖은 전단,/ 시민들이 너덜너덜해진 역사를 말없이 줍고 간다//

제삿날 / 강순
골목을 돌아 저벅저벅 걸어오는 저 달/ 노랗게 분장한 저 낯/ 밤의 지구를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힘/ 아무데나 널브러진 벌레들 겁을 먹고/ 깊은 땅속으로 숨어든다/ 보름달은 늙은 군주 같이 골목을 본다/ 멍든 세월을 진압하기 위해/ 골목마다 귀신들을 풀어놓는다/ 지붕도 돌담도 술렁이며 달을 경배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것들이 섞여/ 허공으로 날아가다 부딪치는 한숨 소리/ 어느 편을 애도하기 위해 달이 지구를 점령했나?/ 저항할 힘이 없는 어린 계집애에게 달려들어/ 다릿살을 물어뜯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개는/ 순전히 달의 폭압에 복종한 것이다/ 붉은 대낮같은 광기의 제국을 세우고/ 어린 아이의 피를 제물로/ 날카로운 이빨을 풀어놓은 독재의 영토// 겨울 봄 여름 가을, 골목 안에/ 거대한 달의 적요가 침입해서/ 미물들이 숨죽여 납작 엎드려/ 겁먹은 흰 낯 드러내는/ 제주 애월// 보름달 뜨는 밤이면/ 그쪽으로 자꾸 귀신들이 달려간다//

유언장 / 강순
끈끈이에 붙은 날개가 내 유언장이다./ 날 선 바람에 붙잡혀 밤까지 떠밀려 왔다./ 빠져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악착같은 문장이/ 숨구멍을 턱, 막는다./ 파리 하나 죽어도 세상은 아무도 몰라/ 나는 안데스 산맥 위를 유영하던 콘도르 독수리라는 기억/ 그것이 이 비극의 실마리인지 모른다./ 나의 다리는 당신 속을 우아하게 걷는 홍학의 것이고/ 나의 부리는 당신 주검을 쪼던 갈까마귀의 것인지도/ 출렁, 왼쪽으로 사십 도 각도/ 밤은 죽어가는 문장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소란스럽다./ 다시 출렁, 오른쪽으로 이십 도 각도/ 망각 속에 일어서는 날카로운 통점/ 출렁, 발버둥 칠수록 끈끈이 속으로 빨려드는 백 톤의 질문/ 출렁, 천 톤의 대답/ 대답의 무거움이 질문의 가벼움보다 더 서럽다./ 출렁, 날개가 조금씩 찢어진다./ 낯선 문장을 새기는 오른손은 내게 원래 없는 것/ 그동안 변명들로 사기 친 죗값/ 썩은 세포들을 쳐낼 손톱이 없는 곤충/ 마침내 날갯죽지가 툭, 찢어진다./ 나는 고작 바닥으로 고속 추락하는 파리일 뿐/ 처음부터 내게 날개 같은 건 없었는지도//

새의 행방 / 강순
창문 밖 서어나무/ 과거로 달아나는 바람을 덮고 누워/ 햇살을 조금씩 베어 물며/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한다.// 새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작은 러시아 인형처럼 몸을 떠는 애인아/ 새 소리 아직 들리지 않는/ 그대 옆에 나란히 누워 볼까.// 털어내도 털어내도 다 털리지 않는 게 질문이다./ 질문들을 바닥에 털어내며/ 허공에 없는 입을 다무는 이여// 새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3월의 부산한 고요 속/ 푸른 옷을 다시 꺼내 입는 이곳은/ 왼쪽 가슴 두 시 방향 안쪽/ 봄이 질문 속에서 해답을 잃은 지점.// 고단한 몸을 가진 애인아/ 과거로 달아나는 바람을 덮고 누워/ 천천히 오는 새를 함께 기다릴까./ 서어나무, 새의 깃털 색깔을 아직/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K씨와 반지하방 / 강순
월세방엔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요. 맹그로브 나무가 축축한 방바닥에 쓰러지고 발이 잘린 그림자가 침대를 지배해요. 밤마다 바람이 분 건 아니에요. 낮마다 태양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에요. 질문들 때문이에요.// 그를 위한 의자가 수십 개 놓여요. 질문과 질문과 질문 속, 어둠은 빛보다 먼저 존재하고 더 오래 머물러요. 뉴턴이 사과와 지구 사이에서 등이 잠시 필요했듯, 의자들은 나무와 그림자와 어둠을 받히느라 밤새 등이 아파요 질문들 때문이에요.// 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고 창밖을 지나가요. 그들도 시간에게 월세를 사는 그의 겸손한 척하는 이웃들이에요. 이웃들은 모두 같은 월세를 계약하고 모두 다른 월세를 내는 데 익숙해요. 그는 아직 몇 달치 월세가 밀려 있어요. 궁색한 답변을 찾으며 시간의 눈치를 보고 있어요 질문들 때문이에요.// 이제 아침이에요. 빛이 질문들을 몰아내요. 맹그로브 해안에 떠밀려온 나무가 순식간에 뿌리를 내려요. 두 발이 생겨난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요. 월요일 아침 방향으로 바삐 걸어가요. 등에 단단히 붙어사는 시간 때문이에요. 앞만 보고 달려가요. 이웃들처럼 그도 출근을 서두르고 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ㄴ과 ㅁ 사이 / 강순
함박눈이 오고 나서/ 햇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햇살은 ㄴ과 ㅁ사이로 미끄러지며/ 길을 버리고 바쁘게 달아났다// 내가 ㄴ이었던가 당신이 ㅁ이던가/ 시간을 잃어버린 게 ㄴ안이든 ㅁ밖이든/ 행복한 자들은 관심이 없다// 태양도 잠시 지치겠지/ ㄴ과 ㅁ 사이로 눈이 내려 길은 꽁꽁 얼어붙는다/ 온종일 햇살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 자들/ 밤거리에서 ㄴ 혹은 ㅁ을 무작정 기다린다// 버스가 오지 않는 밤/ ㄴ과 ㅁ이 죽음을 맞기 딱 좋은 길 위/ ㄴ과 ㅁ사이로 누군가가 미끄러지다/ 다가오는 눈빛 밖으로 ㄴ과 ㅁ이 밀려난다// 헐거운 옷을 입은 자들이 손 비비며/ 은밀한 기도로 햇살을 불러들이는 거리/ 유신론자들이 가식을 숭배하는/ 잔인한 12월, 밤 가운데// ㄴ과 ㅁ 사이로 문장이 닿을 지도 몰라/ 오래 전 영화 ET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 끝에 삶을 모으고/ 길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자들을 본다/ ㄴ안으로 ㅁ 밖으로 크리스마스 캐롤 들린다//

안구건조증 / 강순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이 많아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다// 강물은 침묵을 키우느라 거친 호흡을/ 밤은 고백을 듣느라 예리한 귀를// 봄은 자신의 권좌를 가장 크게 증명하기 위해/ 요란하다 거짓말 같은 소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계절// 눈을 질끈 감아 버려버려, 는 지상 최고의 외로운 말/ 목적어를 버리고 고립된다는 말/ 서술어를 강물 속에 빠뜨려도 된다는 말/ 주어를 내려놓고 도강(渡江)해도 된다는 말// 버려, 다시 시작이다/ 숨겨 둔 고깔모자와 지팡이를 꺼내와 새로운 주문을 외워 보자// 하나, 얼음을 깨며 강물이 오줌 싸는 소리/ 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혓바닥소리/ 셋, 꽃잎들이 바닥으로 하강하며 옷 벗는 소리/ ……당신도 거기 있나요?// 눈꺼풀 속에서 시간은 한낱/ 시침과 분침의 노예/ 멈춘 시계가 가장 권력적이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사이/ 나무에서 애인들이 떨어지고/ 지구가 와르르 흔들렸다// 그러나 지구의 척추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 강순
-창문을 열면-/ 이 문장에는 어떤 사연이 있다// 창문은 슬픔 속으로 들어가거나/ 슬픔 속을 빠져 나오는 입구/ 긴 미로 속 어둠이 몇 년째 동면하는 곳/ 어둠 이쪽에는 덜덜거리는 지하철 진동처럼/ 어둠을 털어 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이생에 열심히 버튼을 누르고 있다// 김치찌개가 맛있게 끓는 밥상 주위에/ 좋은 사람의 얼굴과 웃음/ 다정한 말소리와 은은한 음악/ 창문을 열면 사람이 사람을 반기는 그곳에/ 오늘이라는 시간을 액자처럼 두르고/ 창문을 열면, 이라는 말은 사진의 소망 색이다// 나는 닫힌 기억을 열고/ 당신의 심장을 닮은 사과를 깎으며/ 미완의 문장을 쓴다/ 어둠 저 편에 있는 당신을 꺼내 오려고// 다시 창문을 열면/ 창문 너머에 당신이 밀랍인형처럼 서 있다/ 당신을 거기 홀로 눕히고/ 닫힌 창문 안쪽에서/ 나는 북극을 잃은 백곰처럼 앓으며/ 녹아내리는 빙벽 앞에서/ 사라진 빙산 하나를 생각한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빙산 하나를 어찌 잡을지 몰라/ 펜을 여러 번 내려놓다가// -창문을 열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이 문장을 반복해서 쓰며/ 야윈 북극곰 등 위에 당신을 태우고/ 빛 쪽으로 당신을 꺼내 온다// -창문을 열면-/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얼음으로 덮인 빙하를 공들여 만들고/ 당신을 수없이 살려 낸다/ 단단한 거짓말처럼 창문은 열리지 않고/ 나는 슬픈 북극을 버리는 날이 올까// 오늘은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열아홉 당신의 제삿날이다//

서울역 프로메테우스 / 강순
서울역을 지나가다 프로메테우스를 만났다/ 모든 권능을 포기하고 종이 박스 위에 자신의 하루를 맡긴/ 무력한 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지막 남은 불조차 다 줘 버려/ 더 이상 가진 게 없어 외면당한 신/ 자신의 불을 다시 돌려 달라 시위하는 신/ 잘 사는 나라의 공허를 증명하는 신// 냉기에 결박당해 신문지로 몸을 가리고/ 너덜너덜한 양말과 한쪽이 벗겨진 신발을/ 시위의 흔적으로 내놓고 있다// 겨울 한기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어젯밤의 가혹한 승리를/ 낡고 냄새나는 외투에 가득 담아 와서/ 조금씩 꺼내며 되새김질 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새로운 신으로 섬기는/ 내가 외친다 여기 있으면 얼어 죽어요/ 당신의 불은 오래 전에 도둑맞았어요/ 나의 불이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의 불을 포기하세요// 엉켜 버린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침묵과 외면으로 그는 자신의 위엄을 지킨다/ 불이 꺼져가는 내 가슴을 들여다보는 듯/ 나는 괜찮구나 안도하게 하려는 듯/ 목도리와 장갑에 고단한 하루를 의지하고/ 참견 말고 인간사나 보라 무시하는 듯// 그는 어디서 불을 훔쳐 어디서 잃어버렸나/ 가족들이 그 불로 오래 아팠을 것이다/ 그들의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다/ 점점 사그라지는 불씨를 살리려고/ 집 대문을 수없이 들락날락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볼품없는 졸음을 흘리며/ 세상의 냉대를 온전히 초연해서/ 앙상한 뼈가 되어 간다// 인간으로 환생한 그가/ 주섬주섬 일어나 발을 옮길 때/ 나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사람들의 가방에서 죽은 신 냄새가 나요/ 신을 버리려고 신을 몰래 숨기고 가요// 우리가 잃어버린 불씨들이/ 여기 길바닥을 둥둥 떠다녀요//

키스 / 강순
네가 떠나가던 날/ 나는 입술의 중심을 잃었다// 입술은 꿈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지 않고/ 눈 알갱이처럼 부서졌다// 입술에 비보가 닿았다/ 얼음 조각들이 중심을 찌르자/ 가장자리만 남았다// 나는 얼마나 긴 기도를 해야/ 끝이 보이지 않는/ 살의 회랑을 지나갈까// 금색 테두리 접시 위에/ 달콤한 초코케이크가 봉긋이 놓인/ 순간을 꿈꾸며/ 내 입술에 네 입술을 두고// 달콤해// 꿈 밖의 미각에 홀려/ 꿈 안에서 중심을 잃는/ 현혹(眩惑)// 입술의 중심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점점 길어져서 이제/ 구부러지는 문장들//

타종(打鐘) / 강순
내게 총이 생겼다/ 탕, 한 방을 쏘면/ 당신과 나는 십 분 간은 인연// 당신은 안드로메다 은하에 사는 왕자처럼/ 유리관에 누워 있어라 나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나는 부지런히 생각할 것이다/ 십 분을 울어 당신을 깨울 것인지// 십 분을 깨어 당신을 죽일 것인지/ 당신은 맛보고 싶은 부위가 많아/ 십 년을 더 유예하기로 하지// 사람이 벗어 놓은 허물과/ 인연이 남겨 놓은 가시들을/ 모두 맛보기엔 십 년은 너무 짧아// 당신을 버릴수록 내 안의 내가 비어/ 나는 울림이 커진다// 나의 목소리가 백년을 살아 내니/ 나는 블랙홀처럼 깊어져/ 이제 당신이 천 년 동안 나를 기다릴 차례// 나는 매달 당신에게 총을 쏘고/ 당신은 악몽을 헤매다가/ 나의 총알에 박힌다//

춤의 바다 / 강순
허리가 갑자기 마비되던 날, 오늘을 전복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며 벌떡 일어나 북극행 썰매에 올랐다/ 응급실에서 진통 주사를 맞으며 애인과 키스를 나눴고/ 엑스레이를 찍으며 눈보라 속을 헤맸다/ 바다에 몸을 던져 눈썹을 버리는 보름달처럼/ 기억을 비워 전복 위에 누웠다/ 바다로 가자 아픈 그림자를 버리러 가자/ 시간을 움켜쥐거나 시간에 끌려다니다가/ 시간을 버리고 시간을 탈출한 자의 춤을 추자/ 타임머신 침대를 타고 북극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몰아쳤지만 오두막은 안전했다/ 북극점을 탐험한 피어리가 원주민 소녀와 침대를 덥히는 그곳/ 나는 소녀를 질투하는 유령처럼 천천히 춤을 춘다/ 아직 이별의 고통을 몰라 밤은 황홀했다/ 전복된 오늘이 어제와 그제를 다 삼키고 무거워질 때/ 눈 폭풍 속에서 시간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오두막 안에는 석탄 난로 불꽃이 사그라들고/ 한밤이 되자 아픈 허리에서/ 천천히 백곰 하나가 걸어 나왔다/ 백곰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천둥을 보여 주며/ 꿈속을 함부로 삼키려고 어슬렁거리고/ 꿈 밖으로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소녀를 지키기 위해/ 나는 백곰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검은 머리 소녀가/ 덜컹이는 창문 너머 북극의 달빛을 경배하며/ 전복된 오늘을 버겁게 지켜 낼 때/ 춤은 통점에 맞춰 천천히 바다를 출렁였다/ 전복된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갔다/ 통증을 뚫고 나오는/ 춤의 반란을 오래 바라보았다// 하루 동안에 백 년 치 만큼의 손톱이 자랐다//

오늘의 처방전 / 강순
어제는 몇 개의 목적어를 잃고 귀가했습니다 당신이 내 목적어 중 하나를 습득했다면 발견하는 대로 속히 연락 바랍니다// 나는 어제 태풍 속 벽오동처럼 많이 흔들렸습니다 의사는 어려운 말들을 대롱대롱 가지에 늘어놓았습니다 가지가 바닥을 향해 출렁이자 줄기가 허공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오늘 내가 쓴 문장은 주어가 여러 개여서 당신도 내 문장들 속 주어가 되었습니다 햇살이 좋은 세 시쯤 당신이 내가 잃어버린 목적어들과 교합할 때 꽃잎이 잠시 반짝였습니다// 나의 서술어들은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습니다만 내일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운동 요법도 함께 처방 내리며 경과를 보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정직한 서술어는 종종 어간과 어미를 혼동하며 말끝이 밟히는 습관을 지녔습니다// 한숨을 매단 느낌표가 나타나서 의사가 진단내린 문장을 자주 반복적으로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가구 위로 날아다니는 예민한 느낌표를 잡아다가 어제 저녁 과감하게 서랍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 후 서랍 속에는 하루 세 번의 처방약을 먹고 말줄임표가 마구 자라납니다 침묵이 보약이 될지 몰라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을 예정입니다 많은 말들을 서랍에 구겨 넣었더니 오늘 밤 책상 위에는 나라는 단독 주어만 남았습니다// 당신의 물음표가 한밤중에 침대에서 발견되어 허겁지겁 일기장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만년필을 침대맡에 두었습니다 당신의 물음표는 색깔과 크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의사를 만나고 왔으니 안심입니다 내 증상에 대해 의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이십삼 점 오 도 정도 기울이며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의사는 지구의 자전축 각도만큼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의자를 마당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연필 / 강순
나는 너를 잘 모른다/ 너는 미지의 문장이라 내가 미리 다 읽어볼 수 없잖니/ 너는 미지의 음악이라 내가 미리 다 들어볼 수 없잖니// 너는 미지의 휘파람, 그래/ 미지의 문장들이 미지의 음악이 흐르는/ 미지의 창문 밖으로 미지의 나를 불러내어/ 미지의 빗물에 자빠뜨리네// 미지의 물결, 그래/ 미지의 빗물이 흘러들어 미지의 바다 안으로 풍덩 빠질 때/ 너는 시니피앙 나는 시니피에/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섞이고 있나// 미지의 나는 미지의 너에게 미지의 기억/ 너의 몸에 나의 의식을 눕혔다 일으키며/ 너를 조금씩 알아갈 미지의 나를/ 잘 부탁해// 부디, 미지의 망각은 되지 말자/ 서로를 부르려다 미지의 이름을 잃어/ 미지의 공원 벤치에 미지의 역사로 버려지지 말자/ 쉽게 빠져 들었다가 쉽게 잊히는 미지의 혁명은 되지 말자// 사각사각 꿈속을 걸어오는 너의 소리/ 벗겨도 벗겨도 신비가 탄로 나지 않는 미지의 연애처럼/ 서로의 고독을 깎고 서로를 열렬히 그리워하는 뾰족 입술처럼//

 

귀를 씻었다 / 강순
귀를 주웠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운동화 같은// 귀를 주웠다./ 누군가가 쓰다 버린 지우개 같은// 귀를 모았다./ 귀들이 섞여 내 귀가 없어졌다.// 귀를 만졌다./ 기억은 활짝 꽃피지 못한 암갈색/ 귀 속에서 슬픈 짐승 소리가 났다.// 귀 속의 귀/ 귀 밖의 귀/ 다 버리고,// 어느 새벽/ 서랍에서 빛바랜 낡은 두 귀를 꺼내/ 천천히 씻었다.//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나의 이름은 막 피어나는 분홍색이었다.//

 

연꽃 피는 자세 / 강순
나의 관심이 온통 내 안의 나를 해독하는 일에 쏠릴 때 연꽃은 하나의 자세가 된다/ 익숙한 나를 버리는 자세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하는 자세 울음보다 더 아픈 건 거짓 미소라는 걸 알아버리는 자세/ 어떤 자세를 위해 어떤 식물들은 매일 밤 운다네 천둥소리 같은 바늘을 가슴 속에 박고 가슴 속을 찌르며 자신을 혼내고 달랜다네/ 내가 나를 듣기 위해 밤마다 열 개의 귀를 이웃에서 빌려 오듯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스무고개 연습을 수도 없이 실패하듯/ 연잎과 줄기가 연꽃을 우아하게 받치기 위해 진흙 속 뿌리는 매일 밤 몸부림치지 사바세계를 열고 백팔 번을 도망친다네/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은 너무 광활한 비좁은 세계 우주의 문을 찾다가 못 찾고 밤이슬을 맞으며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네/ 꽃이 꽃이기 위해 밤마다 백팔 개의 바늘이 필요하듯/ 뿌리가 뿌리를 감으며 되뇐다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를 파고들 거야 내 자리를 줘/ 이생에 태어난 죄로 서로 부둥켜안고 슬픔의 모양을 찌그러뜨리며 서로의 슬픔에 바늘을 꽂아 펑펑 터뜨리는 자세 서로의 겨드랑이를 내어주며/ 울음은 참는 게 아니라 밤에만 남몰래 하는 거래/ 새벽이 되었으니 울음을 그치고 미소를 준비하라는 저 목탁 소리//

18 / 강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내가 무엇으로 변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사슴이 된다/ 미움이나 분노를 잡아먹지 않아도 되는 순한 짐승이 된다 무거운 책가방과 만원 버스가 없는 아프리카 초원이 된다/ 퀴퀴하고 눅눅한 장마를 가로질러 비루한 도시의 뒷골목에 이르지 않아도 된다 골목의 끝 허름한 자취방에서 가난한 한 끼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 초원은 만들다가 쉬다가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재활용할 수 있다 나는 사슴이 된다 사슴이어야 한다/ 가젤과 영양과 사이좋게 초원을 나누는 종족이어야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쏟아지는 등판에 하얀 꿈들을 찍어내는 사슴이 되고야 만다/ 가는 다리와 순한 눈망울로 귀를 쫑긋 세우고 당신이 오는 내일을 듣는 나는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안에서 바닥을 기는 이름 모를 벌레들에 놀라지 않아도 된다 온기 없는 방바닥에 넓고 푸른 초원을 가득 펼쳐 놓으면 된다/ 그림 오른쪽에 유포비아잉게스 왼쪽에 아카시아를 심고 가운데에 바오밥나무 몇 그루 세우고 나는 아주 편안하게 초원에 드러눕는다//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 강순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막대사탕을 빨고 있는 나와 입술이 녹아내리는 나/ 내게 막대사탕을 던지는 나와 왼쪽 눈을 찔린 나// 기억을 해독하는 어둠 속/ 당신은 내가 아끼는 나침반을 훔쳐들고 멀어져간다// 나는 목이 없고 당신은 귀가 없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우리는 입술이 녹아내리며 사탕을 빠는 인형들// 진실은 산스크리트어 불경처럼 난해해서/ 심장을 지배하는 노래가 되다 마는 걸까// 어떤 인형은 풍문의 모서리에 가슴 베인 후/ 한밤에 조금씩 녹아내려 왼쪽으로 기운다네// 기억의 미로에서 키운 근육들이 사라지는 심연/ 내 것인지 당신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등뼈만 남기고/ 못내 쓸쓸히 사라져갈 것을 아는/ 작은 눈사람// 당신에게는 어떤 내가 배달되나요?/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얼굴이 서쪽으로 슬프게 흐른다면/ 그건 나일 거예요 왼쪽 볼에 박힌 별이 녹아내리는/ 흐물흐물한 꿈이라면 진짜 나일 거예요// 만지면 바스라지다가 물이 되었다가 말라 버리는/ 당신 안에 망연한 상념조차 남기지 않는// 오래된 박하사탕 맛이 나는/ 왼쪽 어깨가 없는 눈사람 인형이/ 한밤에 배달된다면//

온종일 걸었다 / 강순
해답 없는 질문들을 버겁게 둘러메고/ 거울 속으로 옷장 속으로 정처 없이 걸었다// 문을 부수며 혹은 문을 세우며/ 벽지 무늬마다 붉은 눈동자를 박으며// 죽은 너의 이름 애타게 부르며/ 우리는 어디에 있지? 찢긴 불경과 성경책을 밟으며// 햇빛 안 드는 네 방에 허망하게 널브러진 목숨 일으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엄마, 심부름을 완수하면 칭찬 쿠폰 백 개 주세요// 죽을힘을 다해 벽을 넘으면 여태 그 자리/ 네가 평생 건너지 못한 사막은 나의 사막// 불을 끄고 벽 속에 들어가 앉았더니/ 불면증과 거식증에 걸린 낙타가/ 죽을 때까지 물을 만나지 못한 목마름으로/ 광폭한 사막에 신음을 토하다/ 원래 주인 없는 그림자처럼 온몸이 사그라진다// 발을 뒤집어 보면 너는 발뒤꿈치가 없네// 다리가 삼백육십오 개인 벌레 같은 태양아/ 우리는 어디쯤 왔니? 바다 위로 솟구치는 청고래를 만날 때까지// 도착이라는 말 없는 발바닥이 뭉개지는 말/ 울음조차 말라가는 오염된 이생에서// 무너진 모래집 뒤로하고/ 고래가 쉬어 가는 섬 방향으로/ 막막한 그 말을 찾아 두 눈이 벌게지도록/ 온종일 걷고 또 걸었다//

미문을 생각하다가 / 강순
몇 겹의 거짓말을 새에게 던져준다// 시고 떨떠름한 맛이 나는 과일 앞에서/ 달콤함을 외치는 장사꾼처럼// 나의 몸은 거짓말의 흔적으로 가득해// 예1, 햇살이 뜨거운 여름의 외출에 대하여/ 여름을 한 입 베어 물고 음미한다// 예2, 무더운 날씨 속 불편한 마스크 착용에 대하여/ 여름은 열정을 보여주느라 숨 가쁘다, 하는 식이다// 나의 혀는 온갖 감미료로 만든/ 즉석 식품 같은 계절을 건너는 중// 예3,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이 문장의 매력은 애매성이다, 하는 식이다// 나의 심장은 방부제도 없이 거짓말로 빛나다가/ 그만큼의 고독의 방 앞에 놓이지// 모든 것이 막힌 새장이다, 라고 말하면/ 영원히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해도 덜 부끄러운 퍼소나를 세우고/ 그에게 문장을 던져주는 건/ 너, 내 안의 작은 올빼미구나// 부리를 들고 가장 윤기 나는/ 거짓말 살점부터 찾아/ 진실을 파먹은 거짓말의 깊이를/ 변명으로 쪼는 새가// 언어의 집을 세웠다가 허물었다가//

무리수 / 강순
산사 연못에 나무배가 하나 떠 있다 밖은 연못에 담그고 안은 폭우에 담근 채 안과 밖 무리수의 감정에 결박당해 있다// 물에 뜨지도 가라앉지도 못한 채 겨우 버티고 있다 누군가 바가지를 들어 내 안의 질문들을 퍼내 주기를, 내 몸을 스스로 흔들어 끝없는 과욕의 계절에 파장을 일으키기를,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훼훼 젓는 내가 있다// 배 위로 새들이 똥을 싸며 지나간다 사람들이 혀를 차며 구경한다 머리를 다친 해당화가 말라가는 허리를 굽히며 인사 한다 겨우 이런 넘치는 대접이라니!// 배의 안쪽에는 찢긴 종잇장과 흙가루, 꽃잎과 나뭇잎의 어지러운 감정들이 있다 배의 바깥에는 먹구름과 수련, 폭우와 장마, 바위와 연꽃들, 통점이 날카로운 계절의 폭력적인 무늬들이 제멋대로 뻗쳐 있다// 금세 허물어질 기억들이 영겁처럼 둥둥 떠다닌다 나의 찰나들은 끝이 없는 징그러운 질문들 온 밤을 흔들어 소리 없이 외치는 대답들 뱃머리 끝에 매달린 색이 바랜 문장들// 누군가 다가와 바가지를 들어 배 안의 물을 퍼낸다 나는 계절의 상처를 증명하는 부르튼 속살을 내보인다 그리고 온 몸을 비틀어 여러 번 출렁인다 내 안의 감정들이 세상 밖의 말줄임표가 된다// 안을 점점 비워내자 뱃머리에 어린 새가 날아든다 나를 퍼낼수록 내 안에 허공이 넘쳐난다 밖으로 버려지는 과욕의 증거들 한 계절이 이렇게 가는구나// 연못의 수련들이 모두 귀를 열어 듣고 있다 내 안의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아 노승의 독경처럼 이어지는 대답의 꼬리// 나는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무리수//

거울의 통증 / 강순
내가 당신에게 안착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부턴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래전에 얼굴을 버렸는지/ 아침마다 얼굴을 몇 번이나 깼는지/ 새를 몇 마리 죽였는지/ 밤을 쨍그랑 깨고 출몰했는지/ 한낮에도 햇살에 놀라 울었는지/ 이제부턴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직 미소만 키웠습니다/ 당신의 눈길을 기다리며// 그러다가 백 년을 깨어 있어도/ 지구는 늘 허풍쟁이처럼/ 인내만을 강요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돌보지 않았더니/ 아침마다 새들이 날아오르지 않더군요/ 껍질을 바닥으로 내버렸더니/ 떠나가는 새들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더군요// 통증은 통증을 느껴야 통증입니다/ 나의 뼈가 비틀려도 단단한 근육이 잡아 주면/ 더 이상 통증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에게나 웃습니다//

당신은 어디까지가 가면이고 어디까지가 얼굴입니까 / 강순
얼굴을 찾고 있어요// 나는 반죽처럼 작습니다/ 나를 요리해 볼까요/ 밝은 톤으로 응 하고 대답하면/ 내가 점점 부풀어요/ 나는 윤기 나게 구워지는 빵/ 선이거나 악이어서/ 대부분 좋아해요// 배고플 때 나를 생각하면/ 당신은 착해지거나 슬퍼져요/ 응 혹은 아니를 선택해야 할 때/ 맛있게는 나의 목표랍니다// 응 혹은 아니는 비슷한 풍미일지 몰라요/ 안녕? 혹은 안녕!이 단맛이 나는 것처럼// 나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살아요// 이기적이라고요?/ 배고플 때 빵 맛이에요/ 잔주름은 기다림의 대가(代價)라서요// 말랑말랑한 말들이 구워지는 아침/ 하루를 위해 나는 바빠져요/ 입술에 붉은 꽃잎을 올려 볼까요// 말들을 조합하면/ 이제 하루의 빵이 완성되네요/ 거울 속 나는/ 완전하답니다// 진짜 얼굴이죠//

미스 미스터 임파서블 / 강순
너는 바다를 말하고 나는 바이올린을 듣는다 나는 나무를 말하고 너는 피아노를 듣는다 너는 미래를 말하고 나는 과거를 듣는다 나는 사물을 말하고 너는 허공을 듣는다 그사이 첫 번째 접시가 비워진다// 미끄러지는 과거와 미래 사이 토끼가 울타리를 벗어나고 어미 개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흐르는 달빛과 강물 사이 너의 아이가 전교 1등을 하고 나의 소녀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사이 두 번째 맥주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토끼 대신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고 강아지들이 이웃에게 분양되었다 타원형 얼굴이 말하고 각진 얼굴이 듣는다 각진 얼굴은 진급을 해서 급여가 오르고 타원형 얼굴은 암막 커튼을 치고 시를 썼다 아빠가 되어 본 적이 있는 미래가 말하고 소녀가 되어 본 적이 있는 과거가 듣는다// 그사이 세 번째 접시가 우아하게 물러나고 냅킨이 공손하게 우리의 입술을 닦는다 사물들이 귀를 열고 우리를 잘 들어서 너의 아이가 도피 유학을 가고 나의 소녀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훌쩍 자라는 사이 다섯 번째 맥주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우리는 아무 사물에나 대고 안주를 더 달라고 말하고 사물들은 우리의 눈치를 보며 허둥댄다 네게는 그런 아내가 없고 내게는 그런 소녀가 없다는 걸 사물들이 눈치챘는지 모른다 모든 사물들은 너와 나를 모짜르트처럼 들었다가 베에토벤처럼 떠벌린다// 어느새 우리는 바다와 나무를 함께 듣는다 토끼와 강아지가 잠시 잠든 사이 카페 창문 밖에는 눈빛이 붉은 달이 휘영청 우리를 주시하고 사물들은 곧 입을 열어 우리의 현재를 소문낼 준비가 되어 있다 너의 아내가 해장국을 끓여 너를 부르고 나의 소녀가 밤새 시 한 편을 완성했다 그사이 여섯 번째 맥주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우리는 서로에게 손톱의 안부를 묻지 않고 헤어지는 법을 알고 있다//

질투의 메커니즘 / 강순
8월의 도로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길가의 칸나는 유혹의 방점이고 붉은 입술 남자는 나의 애인,이라고 하자 나의 가슴은 온통 붉어진다. 순간 남자는 칸나의 빛나는 붉은 입술에 키스한다. 아, 칸나를 사랑한 나의 남자는 칸나에 빨려 들어간다. 나보다 더 매력적인 대상이 나의 남자를 유혹했다,라고 생각하고 나서, 나는 갑자기 차가운 캔 맥주를 찾는다. 오늘의 안주는 거꾸로 매달린 시간일까 불러 세워진 기억일까,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나는 이미 질투를 맛보고 있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중독성 청량한 관념, 그것은 붉은 입술의 칸나와 겨루는 우아한 맛 이제 칸나와 나의 대립만 남았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는 칸나에게 유혹당했다. 그러나 나는 칸나보다 더 유혹적인 입술을 가질 수 없다,는 나의 생각은 나를 도로 화단 앞에서 고문한다. 칸나의 입술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달려들어 살갗을 붉게 태우는 한낮, 질투는 기억에 취해서 붉게 온다. 나는 붉은 입술 남자를 기어코 생각한다. 이별의 값을 이런 식으로 치른다. 칸나를 사랑한 나의 남자가 8월마다 떠나간다. 칸나, 이제 나마저 눈독 들이고 있다. 기억을 파먹는 식충식물.//

사과라는 질투 / 강순
사과는 꿈을 꾸면 나무가 되고/ 사과는 꿈을 버리면 꽃이 되고// 사과는 꿈을 떠날 때 울지 않고/ 사과는 무심히 길을 잃어도 되고// 사과는 천둥과 벼락을 동경하고/ 사과는 계절에 집착하지 않고// 사과는 마음대로 굴러 벼랑 아래로 가고/ 사과는 자신의 절정을 황홀하게 내보이고// 사과는 자신의 치부를 도려내는 이를 만나고/ 사과는 붉기 위해 밤새 울어도 되고// 사과는 떠나기 위해 종일 웃어도 되고/ 사과는 황홀한 죽음을 꿈꿔도 되고// 사과는 과거를 버려서 과거가 있고/ 사과는 꿈을 버려서 꿈이 있고// 사과는 날카로운 칼에게 도도하고/ 사과는 죽을 때까지 힘껏 단정하고// 두 글자가 활활 타올라/ 내 안에서 질투의 화신이 되고//

올바른 결혼 생활 ㅡ마녀일기 13 / 강순
애인이 내 옆에서 잠을 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키우고도 내 옆에서 잔다 자다가 깨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잔다 나쁜 꿈을 꾸면 이게 꿈이지? 중얼거리며 잔다 간혹 거친 바람에 집이 흔들리면 이게 깨지 않는 꿈이지? 맞지? 다짐하며 잔다// 나는 마력이 약해지기 전에 주술을 건다 마술봉을 두 손으로 잡고 어제보다 좀 더 강력한 주문을 왼다 아침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고 출근을 서두르며 왼다 두 아이가 싸울 때 더 간절히 왼다 주문을 놓칠까 봐 밤에도 새벽에도 왼다 약발이 안 들까 봐 이게 영원히 깨지 않는 마법이지? 맞지? 확인하며 왼다// 애인이 잠에서 깨어 나를 본다 나의 푸석해지는 긴 머리카락과 손톱을 본다 탁자 위에 놓인 낡은 뾰족모자와 뾰족구두를 본다 마력이 세서 더 이상 낡지 않을 것 같았던 침대에서 늙어가는 내가 늙어가는 애인을 물끄러미 본다 젊은 애인이라고 주술을 걸며 본다// 밤마다 숲길을 걸어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침대가 보이고 냄비가 보이고 드레스가 있는 집 애인과 아이들의 냄새를 묻힌 의자에 앉는다 마력이 약해질 때마다 약을 풀어 한 솥 가득 찌개를 끓인다 집안 곳곳에 냄새를 바른다// 밤에 깨어 새로운 약을 더 주문한다//

우리의 선택 / 강순
삼복더위 속에 학원이 땀을 흘린다 학원은 교회 옆에 있고 헬스클럽 아래층에 있고 일상 위에 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린다// 학원은 발이 빠져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페달을 밟아도 끝이 없는 터널, 아이들은 숨이 가빠 산소통을 찾지만 어른들은 물고기의 크기가 더 궁금해// 선생은 물속에 쓰러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다 얘야 여기는 잠이 들면 안 되는 곳이란다 구덩이에는 못생긴 요정이 살고 있어 잠든 아이들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하지 깨어나지 못하면 루저야// 선생님, 루저가 뭐예요? 루저는 음, 그러니까 루저는, 물이 없다는 거야 사막에서 물을 찾아 오래 걸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도 오아시스를 만날 수도 있고 히치하이킹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건 더운 여름 연못 위로 눈이 내려 썰매를 타는 일과 같단다 연못 아래쪽 지하 터널을 지나면 다른 세상이 나오지 않나요? 사막은 계속 땅속으로 자라지 않나요?// 사막은 아무리 걸어도 물고기가 생기지 않는 곳이란다 그렇지만 거기는 신기한 게임이 있고 모래 썰매가 있고 동굴이 있잖아요 음, 그러니까 사막은 말이지 큰 캔버스에 모래와 낙타를 가득 그려 넣고 나서 사람들은 서둘러 작아지는 곳 그렇지만 연봉이 아주 세면 출근할 수는 있지// 선생은 희미하게 웃고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막이 궁금해서 학원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어떤 하루는 상용로그 함수 / 강순
어떤 하루는 오후 여섯 시 노란 그림으로 걸린다// 햇살은 시간의 비늘을 무방비로 쓰다듬는 손길// 어깨가 졸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여자와 함께/ 파스를 붙인 뒷덜미 근처에 난민의 자세로 엉켰다가// 제 운명에 겨워 탈진한 세월만큼/ 좌판 위로 부르르 쏟아지고// 하루가 너무 무거우니 싼값에 드릴게요/ 자, 생선 떨이 떨이 반 값도 안 돼요// 여자는 상용로그 함수 상승 곡선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함수는 종일 여자의 입속에 눌어붙지만/ 난제는 여전히 해법이 없어/ 처진 목덜미에서 노을 한 권을 꺼내 펼칠 뿐이다// 육십삼 페이지는 죽은 남편의 얼굴/ 목 없는 인형을 행과 연 사이에 숨긴 채// 무탈을 노리던 도둑처럼 은밀하다가/ 하루를 홱 낚아채며 부활하는 서러움// 햇살의 패잔병들이 시장 바닥 위로 드러눕고/ 꼭꼭 잠긴 방에서 인형의 목소리가 번진다// 여보 도와줘 내가 잘 버티도록// 여자는 가장 아끼는 수사법을 그 페이지 여백에 쓰기 위해/ 파리채를 휘휘 내젓는다// 어떤 하루는 인형을 수백 번 버리는 하루/ 어떤 하루는 인형의 목소리와 내통하는 하루// 어떤 하루는 텅 빈 노란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죽은 인형을 끌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하루// 상용로그 함수 슬픔의 상승 곡선을/ 버리지도 풀지도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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