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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왕노 시인

부흐고비 2022. 4. 14. 09:00

김왕노 시인
1957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88년 공주교대와 2002년 아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이별 그 후의 날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제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시와경계》 주간.

 



꿈의 체인점 / 김왕노
산다는 것이 따분하거나/ 눈물나면/ 신종사업을 원하거나/ 안전하고 탄탄한 사업을 원한다면/ 이곳으로 오라/ 봄이면 바람에 휘날리는 배꽃/ 아침이면 안개처럼 피어오는 새떼/ 흥건히 고여 냇물처럼 흘러가는 푸른 달빛 사이/ 몇 백년 묵은 소나무 숲 사이/ 꿈의 체인점이 있다/ 방안에 흑백 TV 한 대/ 나무 기러기 한 쌍/ 송사리 떼가 헤엄치는 작은 어항/ 고만고만하게 모여/ 손때 묻고 길들어지며 먼지를 덮어서기도 하지만/ 걸레질할 때마다 당당해지는 그들/ 방문 왈칵 열고 들어오는/ 텃밭의 파꽃 냄새 밤꽃냄새 미치도록 진동하는/ 조그만 꿈의 체인점이 있다/ 이곳에 오면/ 사랑이 샘물처럼 퐁퐁 솟는 꿈의 체인점이 있다/ 이곳에 오면/ 신속히 수선되거나 갈아 끼워지는 당신의 꿈/ 새살이 돋아나는 당신의 꿈/ 꿈속 가득 들어찬 바람도 피고름도 말끔히 짜준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잿 비둘기/ 패랭이꽃 언덕도 가꾸어 준다/ 이 근처에 오면/ 거친 꿈의 면을 손질하는/ 톱밥도 휘날린다/ 일이 밀리 목재소처럼/ 밤새 불이 켜져 있기도 한다/ 주문을 하면/ 숲속으로 드나드는 족제비처럼 신속히 배달도 나간다/ 휴전선을 국경선을 넘어 배달도 나간다/ 우리의 사업은 세계적으로 번창해야 하니까/ 앞으로 전망이 좋으니까/ 비도 바람도 무릅쓰고 배달 나간다/ 당신이 이곳에 와 별을 원하면/ 당신의 녹슨 하늘을 닦아/ 지금도 생생한 오리온좌를 큰곰자리를/ 견우와 직녀성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깨어진 술병처럼 날이 서/ 누군가의 발바닥을 찌르거나/ 헌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뒹굴 때/ 당신의 불면 속으로/ 질 좋은 석탄 같은 잠을 화석 같은 잠을/ 수십 삽 퍼 넣어줄 것이다/ 화력 좋은 꿈에 불도 당겨줄 것이다/ 이제 이 꿈의 체인점으로 오라/ 정 바쁘시다면 당신의 집 가까이서 찾아보라/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당신의 집 근처에서/ 꿈의 체인점은 성업중일 것이다//
*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영일만 / 김왕노
지금은 귀신고래 돌아오지 않아/ 풀이 죽고 만선이 사라진 바다고/ 뒷전에 나앉은 바다지만// 유년의 잔잔한 새벽 시린 바다에 아버지 몸 담그시고/ 조개를 잡으셨다. 온 몸이 시퍼렇게 얼어 조개를 잡아 나올/ 아버지를 위해 조그만 모닥불을 피우려고 바닷가에 밀려나온/ 마른 삭정이를 주웠다. 이제야 저제야 아버지가 망태기를/ 조개로 가득 채워 나오시겠지 기다리며 바닷가에 써본 수평선/ 순이, 새 연필, 새 공책, 거북이, 용궁, 필선이 누나는 잘 있을라나/ 아버지가 조개 잡는다고 무리해 덜컥 병들어/ 어머니가 달이던 한약냄새가 지금도 골목을 서성이고 있을까/ 한약냄새 속에 해국이 해맑게 피고는 있을까/ 허기를 채운다고 마시던 말갛게 차오르던 백년 우물물은/ 불온서적을 읽었다고 한밤에 검은 세단차가 들이닥쳐/ 구둣발로 방안을 뒤지고 형을 데려간 그 사람들은 잘 살고/ 그날 밤 놀라 숨죽여 울기만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가슴은 이제는 꽃잎 되어 바다 위로 떠돌까/ 찢어진 내 꿈을 한 땀 한 땀 기워주던 소금 꽃 핀 별들은// 지금도 잔잔한 새벽 바다면/ 허리 굽은 아버지 대신/ 내가 시린 바다에 몸을 담그고/ 무겁도록 조개를 잡아 올리고 싶은데//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세상에 비 내렸다 / 김왕노
우리 오래 참아왔던 말을 서로에게 강물처럼 흘러 보내자 한 호흡 두 호흡 뜨거운 우리의 숨결이 되살아날 때/ 이 순간이 천벌을 가져오더라도 후회 없다며 빈 집의 아궁이 같은 마음에 군불을 떼듯이 생솔가지 같은 사랑의 말을 뚝뚝 분질러 넣을 때/ 어둠 깊어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무엇도 보이지 않고 후박나무 그늘마저 콜타르 같이 손에 척척 달라붙는 난리 중에 허연 달덩이 같이 네가 떠오를 때/ 끊어진 인연의 올을 하나 둘 이으며 끝없이 나부끼다가 찢어진 그리움을 한 땀 한 땀 깁던 네 섬섬옥수로 차가워진 내 손에 가만히 온기를 전해 올 때/ 발해로 가 우리의 꽃이 피고 우리의 하늘이 펼쳐지고 우리의 새가 우는 것을 보러가던 발길을 잠깐 멈춰 명아주 이파리에 얹힌 햇살 머금은 이슬방울을 보듯 고이 너를 볼 때/ 바람과 달빛이 오럴섹스로 부들의 귀두를 오래 핥아 참다못한 부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하늘로 부들의 씨앗을 쭉쭉 사정하듯 휘날리는 것을 우리 함께 볼 때/ 오동나무 아래 탯줄을 묻듯이 묻은 손톱이 오동나무 꽃잎으로 하나 둘 피어났다가 맨 땅을 수놓으며 뚝뚝 지는 소리 들릴 만큼 우리 예민해 졌을 때/ 살얼음 뜬 동치미 국물위에 별이 뜨던 씨족 마을의 밤과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강낭 꽃 보다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게 흐르던 마음을 우리 연모할 때/ 곳집에 붐비는 달빛과 빗소리로 꽃상여의 꽃이 더 소담스러워지고 선소리 앞세우고 너울너울 북망산천 간 할머니 할아버지 개 복숭아 꽃 피니 잘 개실 거라고 우리 입 모을 때/ 광활한 역사 위에 뜬 별이 북방여치 울음 위에도 뜨고 문턱을 넘어 자갈밭으로 간 아무르장지 뱀 꼬리 위로도 뜨고 우리가 벗어둔 신발 위에도 뜰 때/ 그 많은 순간순간이 닥치고 멀어지고 할 때 너와 내가 순간순간 닿을 때마다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가까워질수록 더 아득해지는 안타까움으로 더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죽음으로 가는 휘어진 길이라 해도 둘이는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끔 뜨거운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듯이 들려오던 빗소리,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세상에 비가 내렸다. 온톤 세상이 푸르러져 있었다.//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오래된 TV 드라마에서/ 한 밤중에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자 뭐 하느냐고 물으니/ 고독에 몸부림친다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그 때 웃을 일이 아니었고 지금 나도 고독해졌다./ 친구와 휩쓸려 1 차 2 차 술자리를 하다가 3 차 노래방에서/ 그 겨울의 아침을 부르고 장밋빛 스카프를 부르던 날이 꿈이었나 싶다./ 스마트 폰의 많은 연락처 중에 선뜻 눌러야 할 이름이 없다./ 이렇게 고독한 날은/ 화투 패를 뜨거나 전신에 문신을 새기고 싶다.// 몸을 화판으로 더 이상 고독하지 말라고/ 나와 함께 살아갈 문신을 새기는 것/ 깍두기처럼 가끔 어깨에 힘을 넣고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는 것/ 닭 피로 문신을 새기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순하게 느끼도록 사군자를 새기던지 풀꽃을 새겨도 좋지만/ 용 문신을 새기고 싶다./ 천지를 우레로 뒤흔드는 용, 여의주를 물고 청동의 몸을 꿈틀대며/ 어둠에 불의 칼을 휘두르듯 일획을 그으며/ 끝없이 승천하는 용꿈을 꾸고 싶어// 머지않아 용이 내 몸에서 벼락 치듯 날 것이다./ 내 몸은 용의 터전, 나를 박차고 용이 치솟는 날을 기다리다보면/ 내 고독도 용꿈에 밀려 사라질 것이므로/ 앞으로 용 문신을 새길 몸에 피가 나도록 박박 문지른다./ 용이 나를 낚아채 하늘로 오르다가 떨어뜨리는/ 악몽을 꾸더라도 고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이 모든 것을 견디며 기다리리라.// 다시 한 번 단언하지만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너무 늦은 중년의 편지 / 김왕노
오래 전 너는 아카시아 숲에서 트럼펫을/ 밤하늘 깊이 불어 올렸지./ 곡명을 몰랐지만 너무 애절해 듣는 사람의 심금을 올렸다는 말이 맞겠지./ 실연의 아픔으로 망가져 어딘가로 가버린 너는 잘 있나./ 네가 두고 간 바다에는 멀리서 배가 오고 아카시아 숲에는 벌이 들끓는다네./ 그러나 그것들로 네가 가버린 빈자리를 채우기는 부족해// 네가 있는 곳이나 내가 사는 곳이란 사람 살만한 곳이라 하지만/ 삶도 하나의 혁명 같아 사랑에 실패한 너는 녹슨 장총 같은/ 꿈의 입구를 닦아 입맞춤할 테지/ 꿈의 노리쇠를 당겼다가 놓을 때 한 발의 사랑이 장전되기도 할 테지/ 그러면 네 사랑이 다시 시작되어도 좋아// 나는 주둔군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가 끊기는 이곳에서/ 불량한 그들의 꿈을 훔쳐보며 얼마나 화음을 맞춰 찬송가를 부르면/ 그들을 용서할지/ 무장해제 된 이 거리에서 사제 총을 만들어서라도 공포탄을 수없이 쏘며/ 갓뎀 갓뎀 외치고도 싶어 안방처럼 차지하고 마이웨이를 부르는/ 그들을 견딜 수 없어// 고향을 떠나와 주둔하면 낯선 태양에 당황하기도 할 테지/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적의를 불사르다보면 붉은 장미만 봐도 할 발작/ 하나 동두천 우리의 민들레 윤금이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 짐승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일을 한 주둔군의 발소리에/ 누구나 악몽을 꾸기 시작하는 아픈 밤이 시작 되었다.// 아득히 멀어진 곳에서 네가 그리워하는 이곳의 나는 가난한 시인으로 살아/ 여행가가 되어 전 세계를 유랑하겠다는 꿈이 한 풀 꺾이기는 했어/ 하나 너는 먼 이국에서 시거를 태우다가 무대에 나가/ 트럼펫을 릴 암스트롱처럼 불어 댈 것 같아/ 이제는 중년의 네게 늦게 찾아온 사랑을 위해 장미를 바치고/ 아직 여긴 네 트럼펫 소리를 기억하는 아카시아 꽃이 수없이 지고 피는데// 아카시아 숲이 바람에 물결칠 때마다 비릿한 네 사랑의 슬픔도 물결쳐/ 멀어져간 네 연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네가 불어 올린/ 트럼펫소리를 도리어 네가 비처럼 흠뻑 맞고/ 그리움짐승으로 네가 오들오들 떨 때 난 어떤 위로도 없이/ ‘떠난 사람은 잊어 잊어라.’ 는 죄 많은 말만 되풀이 했다.// 하여튼 이곳의 나는 가난한 시인 너를 찾아 집을 나서지는 못했어./ 고백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트럼펫 연주자인 너의 팬이었다네./ 때가 되면 우리 이곳에서 한번 뭉치자./ 옛이야기 하며 술잔을 나누다가 네가 비장하게 우리의 하늘, 아카시아 숲 위 밤하늘로/ 트럼펫을 불어 올리면 정박의 닻 내린 바다의 배마저 뱃고동 울리게/ 죽어간 사랑, 죽어간 청춘을 위한 진혼곡이 밤하늘로 빈 가슴마다 메아리치게//

수목한계선 / 김왕노
내가 더 이상 북상할 수 없는 것은/ 싸늘한 에고이즘의 이 거리를 건널 수 없기 때문// 그러나 한계선을 따라 피어난다./ 한계선 저 너머 북쪽/ 아득한 언덕에 올라/ 제 생을 물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어/ 제 영혼을 담배로 태워 물고 쪼그린 기다림이 있어// 난 수목 한계선 붉은 철조망을 움켜잡고/ 북진가 부르며 끝없이 피어나고/ 벌건 녹슬어도 밤새 피어나고/ 그래도 다 피우지 못한 한계선 저 너머를 가늠하는 타는 이 목마름// 그러다 사나운 이 그리움 북진하면/ 내일이나 모레 쯤/ 네 가슴 안까지 나는 피어나고/ 네 가슴 오지까지 점령해 나는 피어나고// 시베리아 찬 기단 아래서도/ 냉해 입는 이 도시에서도/ 싸늘한 에고이즘의 이 거리에서도/ 나는 철쭉 같이 붉게, 붉게 피어날 테고//

붉은 연쇄반응 / 김왕노
그 해 명우 아버지 쓰러지고 다음 해 아버지가 쓰러지고/ 우리집 후박나무의 광합성 작용의 푸른 숨소리/ 마당 가득 차오르는데 아버지 바람에 밟히는 잡풀 같이 맥없이 쓰러지고/ 아버지 쓰러진 다음 해 팔팔한 동네 철태 형 쓰러지고/ 몇 백 년 고목도 쓰러지고 누가 도미노놀이 하는지/ 그 해는 뜻하지 않게/ 오토바이 타고 가던 동생뻘 영태도 허공으로 바퀴 치켜들고/ 영전 속으로 가뿐히 자리 옮기고/ 봄기운이 잔물결 쳐 와 아래가 근질거리는데/ 내가 믿던 정의도 정부도 쓰러지고 뒷집 누나도 강둑에 쓰러지고/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쪽으로 쓰러지고 붉게 쓰러지고/ 사월도 오월도 썪은 고목 같이 쓰러지고 내 청춘도 모로 쓰러지고/ 누가 시도 때도 없이 도미노 놀이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세워 끄덕이며 앞세우고 가려는지 그 해, 붉게, 붉게//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 김왕노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 년을 기념해 팡파르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이 휘날리는 복사꽃잎, 꽃잎/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극에 달한 이별 / 김왕노
상가에 호상이네. 호상이네 하며 사람들 몰려드네./ 여기 고기 좀 더, 술 좀 더 하며 이렇게 먹어야 가는 사람도 좋지. 낮부터 불콰해진 문상객들 이리 저리 앉아 그 어른 참 좋지 하며, 이야기에 살이 붙어갈수록 희망 슈퍼에서 궤짝으로 술 배달오고, 잡은 돼지 바닥 나가는데, 밤이면 신이 난 듯 더 밝게 피어오르는 조등인데, 그 틈에 쓱 끼인 막내 딸 이야기, 참 그 어른 돌아가셔도 눈 편히 감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 듬성듬성 들리는데 집에 오기는 올라나, 오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데, 선산 집안 재산 다 거들내고 종적을 감춘 막내딸 이야기, 그 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딸의 남편이 나쁜 놈이라며 성토를 하는데/ 벌컥 대문 열고 들이닥치자마자 몸부림치며 딸이 쏟아내는 통곡, 저 극에 달한 이별//

 

11 월에는 꽃 걸음으로 오시라 / 김왕노
꽃의 노란 발자국 소리가 눈부시다./ 서릿발 선 맨 땅을 밟으며 잔물결이 한 곳으로 모이듯/ 아직도 걸어서 오는 소국의 무수한 발소리, 발소리// 맞지 않는 일조량 속에서/ 끓어오르기만 한 청춘의 가슴을 식혀/ 모두가 꽃 피어 영광이라며 잔을 높이 들 때도/ 꽃 기척 없이/ 떫고 작은 자잘한 얼굴로 가을 모퉁이를 지나/ 뇌관을 일제히 터뜨린 듯이/ 소국이 연쇄반응으로 피어나 꽃 걸음으로 오는 아침// 찬물소리로 귀와 눈을 맑게 씻어낸 채/ 소국이 따라온 길을 밟아 꽃구경 오시라./ 꽃 걸음으로 가을 가장 깊은 곳, 곧 겨울과 맞닥뜨릴 지점으로/ 네 귀한 걸음걸이로 와서 꽃을 즐기시라./ 꽃 하나 핀다는 것이 그저 피는 것이 아니라/ 별빛이 오래 초점을 맞춰 불씨가 피어나듯 피어나는 것이라./ 꽃 한번 피어 불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피었다가 한 번 지면 영원히 지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라/ 한 번 피었다가 한 번 지면 마감되는 꽃이라/ 꽃에게 갈채를 보내기 위해 꽃 앞에서 꽃 짐승 되어/ 꽃에게 마음껏 재롱을 부리려고 오시라./ 꽃이 오는 꽃 걸음이란 영혼의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의 꽃 걸음이라는 것을 한번 쯤 체험하며 오시라.// 새털구름이 비질하고 간 새파란 하늘 아래로/ 무청 푸르렀던 언덕을 지나 티 하나 없는 꽃의 사상에 젖어/ 한번쯤 꽃의 자세를 잡아보며 오시라./ 꽃 걸음을 걷기 전까지 몰아친 비바람으로/ 고장 난 밤과 낮의 어려움으로 리듬을 잃어버린 혼란을/ 말똥처럼 치우고 비로소 건국한 작은 꽃 나라지만/ 꽃이 세운 나라는 미지의 나라라 순결의 나라라/ 수신제가하듯 정결한 마음으로 꽃에게 오시라./ 소국이 떠받힌 작고 푸른 하늘들이/ 점점 평수를 넓혀 소국의 하늘 우리의 하늘/ 백두대간의 하늘 신화의 하늘 우사 운사 풍사의 하늘로 펼쳐질 테니/ 소국이 떠받힌 작고 푸른 하늘들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 꽃 나라로 오시라.// 와서는 국화주에 취한 듯/ 소국의 향기에 마음껏 취하시라./ 매난국죽을 치듯 정갈했던 마음을 하루 쯤 풀고/ 소국에게 환호를 보내며 소국의 제전으로 이끄시라./ 한 번쯤 소국나라를 체험한 노란 기억으로/ 혁명의 불길 지펴 어두운 이 나라의 판을 갈아엎는/ 그런 꿈꾸어도 좋으니 망설임 없이 소국나라에 와/ 소국나라를 마음껏 누리시라./ 소국이 지면 끝물의 나날이니 마음껏 소국을 즐기시라./ 11 월에는 제발 꽃 걸음으로 꽃을 만나러 오시라.//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 / 김왕노
노래를 하련다. 그늘 같은 노래는 오후의 이마를 식히고 이파리 같은 노래가 파닥여 갈채가 되는 노래를 하련다. 반듯하다고 자부하는 저 거리가 기운 제 그림자에 놀라게 혓바닥에 올려놓은 수은이 떨어지게 노래에 노래를 더하여 노래를 하련다. 그간의 노래는 소음이었다며 노래를 하련다. 그간의 노래는 음정박자를 놓친 노래였다고 노래를 하련다. 내 노래를 피해 구름이 멀리 돌아 흘러가도 강물이 흠칫 놀라도 쇠창살을 물어뜯고 담을 허물어뜨리는 노래를 하련다. 흡혈빨판을 가진 노래, 치명적인 노래라도 노래를 하련다. 노래로 가득 찬 세상이면 더할 나위없는 노래의 한 시절, 노래로 마음의 결을 골라 투명한 사람들이 이룬 수정의 나라, 노래를 하련다. 노래를 아니 할 수도 없다. 노래를 하련다.// 연애에 실패해 트럼펫을 밤하늘로 불어 올리다가 끝내 자살한 딴따라 친구가 부른 노래를 내가 부른다. 여자 한 명에게 버림 받은 것도 죄라며 자살한 친구도 있는데 저렇게 큰 죄를 짓고도 자살하지 않는 세월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른다. 죄로 물든 나도 자살하지 못한 비겁이 아파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노래 속에 부활한 친구가 기억의 트럼펫을 밤하늘로 불어 올리는데 이구동성으로 친구의 노래 따라 부르며 나부끼던 자지러질듯이 핀 아카시아 꽃이 그리운데 내 죄의 뺨을 꼬집어대며 거리에 바람이 부는데 내 삶이란 순리를 역행하고 우주의 질서를 역행하듯 막무가내였는데 부를수록 더 슬퍼지는 노래, 친구가 부른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내 노래가 내 죄의 뺨을 찰싹 찰싹 때리면서 돌아와도 노래를 부른다. 친구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도 죄라서 죄 중의 큰 죄라서 노래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마음이 서걱거려 내내 잠들 수 없다.// 어머니가 양 언니라 부르던 오동나무 집 이모 막걸리 팔면서 노래로 살았다. 재혼도 마다하고 오동나무 술잔 위로 보랏빛 꽃잎 뚝뚝 지는 날 남정네 살 냄새 그리울 텐데 전쟁에 나가 세상을 버린 젊은 남편이 무척 보고 싶다며 노래나 불렀다. 딴 사람에게 정 쏟으면 유복자 코 흘리게 아들 소홀히 한다며 차라리 남편이 좋아했던 노래나 불렀다. 오동나무 꽃 유난히 환한 밤에는 오동나무 꽃을 등 삼아 꿈속의 남편을 찾아갔다 왔는지 몰라도 오동나무 이모 수절의 과부로 노래나 불렀다. 나이 들어도 예쁜 몸매와 얼굴에 사내들 슬슬 다가가도 이모의 노래 속에 한 발자국도 발 들여놓지 못했다. 오동나무 집 이모는 노래로 모든 것을 물리치고 노래 속에서 잠들곤 했다. 지금은 애지중지 키운 아들 출세해도 며느리에 빠져 오동나무 이모를 나 몰라라 하며 팽개쳤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민 갔다는 소문도 있는데 아직도 막걸리 잔에 오동나무 꽃잎 뚝뚝 질 때 오동나무 집 이모 노래를 하려나.// 삶도 완창을 위한 노래, 몇 세기가 지나야 나는 완창에 이를까. 완창에 이른 자 아직 없는지 어떤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끝내 미완에 이르더라도 그믐에도 나의 노래는 계속 되어야 한다. 노래를 부르다가 보면 끊길 수밖에 없고 노래를 방해하는 무수한 빗방울 소리로 나의 노래는 지쳤을 텐데도 노래를 위로하는 것이 노래일 수밖에 없다. 득음을 위해 완창을 위해 나의 노래는 노래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비포장의 세월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멀미하며 게워내는 것도 아직은 가슴으로 다 삭이지 못한 삶이란 노래, 완창을 위해 노래의 고삐를 옛날 아버지처럼 다시 한 번 꽉 조인다. 노래하던 아버지의 천년 고집을 닮아간다.// 금남로에 다시 그 날이 오고 가버린 이름이 꽃잎으로 분분이 휘날린다. 이루지 못한 민주화의 꿈 이루지 못한 금남로의 꿈이 고립된 채 짓밟히고 총성이 다슬기처럼 귀에 박혀 처절하게 관에 누운 그날의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그 때가 그래도 잉걸불의 가슴이었고 가장 조국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노래하던 날이었으니 늦었지만 그 노래를 다시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며 임을 향한 행진곡을 부른다. 다시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 반드시 불러야 될 노래를// 하나 노래여 난 너를 아주 천천히 부르련다. 오랜 갈증이 있었으나/ 너를 다 부르면 나의 한 생이 다 지나갈 지도 모른다.//

난 장미의 골수분자 / 김왕노
뭐 따질 것이 있느냐. 뭐 볼 것이 있느냐./ 우리도 장미 당이 되어 장미의 숲으로 가는 거다./ 장미 당의 골수분자가 되어/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러브 이즈 필링,/ 러브 이즈 터치, 가자, 장미여관으로 ! 외친/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회색분자는 싫어. 철새가 떠돈다는 정치판도 싫어/ 오로지 장미 당에 필이 꽂혀 맹목적일 정도로 장미 당을 따르며/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은 마리아 릴케를 추모하며/ 사랑할 때마다 피어나는 신품종의 장미가 자라는/ 장미의 숲으로 가 우리도 장미를 위하여 장미의 사랑을 하는 거다./ 어느 별에서 사랑 할 때마다 장미가 피어나는 백 만 송이 장미보다/ 더 많은 장미가 피는 장미의 숲을 가꾸려고 나도 외쳐보는 것이다./ 장미 이즈 러브, 장미 이즈 필링, 가자, 장미의 숲으로// 장미의 여왕, 장미 축제, 장미의 오월, 장미의 계절, 장미의 한 철이란/ 말은 장미 당을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 겨울의 창마다 피어나는 성에꽃은 투명한 장미꽃이다./ 아득한 곳에 피는 상

고대도 장미의 숨결로 피어난 것이다./ 차디찬 겨울 하늘에 피어난 별도 장미의 별이다./ 장미 이즈 러브, 장미 이즈 필링, 가자, 장미의 숲으로// 뭐 이것저것 살펴보고 이것저것 재느냐./ 어떤 재배기술 없이도 장미 당이 되어 사랑할 때마

다 장미가 피어나므로/ 우리의 울력으로 장미의 영토는 점점 넓어져 장미의 나라 장미의 세계를/ 언젠가는 이뤄 장미

향기 휘날리는 우주가 될 것이다./ 장미 이즈 드림, 장미 이즈 뉴 월드, 가자, 장미의 숲으로// 장미가시 같은 장미의 이념에 찔려 흐르는 피를 서로 핥아주다가 보면/ 장미는 끝없이 피어나고 나는 장미뿌리 같은 닻 하나/ 어느 새 네 깊이 내리고 있을 테니/ 나마저 너에게 피어난 장미로 생명에 겨워 몸부림을 칠 테니/ 가자, 사랑의 울력으로 장미가 피어나는 장미 숲으로// 러브 이즈 로즈, 로즈 이즈 해피, 가자, 장미의 숲으로/ 사랑은 장미, 장미가 행복인 곳으로, 가자, 가자, 장미의 숲으로//
*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시를 패러디해서

검은 죄의 이파리 / 김왕노
1// 그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떠돌이처럼 마을언저리로 세상으로 떠돌며 꽃을 꺾어도 뱀을 작대기로 후려패고 남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달아나도 누군가의 엉덩이를 슬쩍 만지거나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렸다가 달아나도 깔깔거리기만 했을 뿐 죄인지 몰랐다.//
2//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손을 순수의 손이라고 불렀다. 냇물에 씻으면 깨끗해진다고 믿었다. 죄에 물든 손이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는 늘 죄에 허기져 있었고 가난으로 인해 세상의 무엇을 슬쩍해도 죄가 아니라 바로 가난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감정적 전과자였다. 누가 지은 죄에 단죄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기도로 내 죄 사함을 위해 눈물 흘리기도 했다. 그것이 또 죄를 짓기 위한 전 과정이었는지 몰랐다. 참회로 맑은 내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모범생이라고만 불렀다. 생 울타리 곁에 숨어 오줌 누는 순이를 훔쳐보고 피마자 밭에서 자위를 했다. 순이를 수없이 부르며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변성기에 숨겨진 내 슬픈 성장을 아무도 몰랐다. 변성기 속에서 이루어진 내 2 차적 성장을 아무도 몰랐다. 솔밭이 된 거웃으로 성에 눈 뜬 소년으로 목책에 기대어 풀을 뜯는 소를 보며 음탕한 노래를 부르는지 아무도 몰랐다. 친구와 서서 오줌발을 멀리 보내며 여자 따먹었다는 동네 형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짓씹으며 우리는 자랐다. 포도가 익어가는 한여름 밤에는 솔밭 모래 언덕에서 윤간의 소문이 삘기 꽃처럼 하얗게 피어나 바람에 나부꼈다. 내 친구는 한 아이를 범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다. 죄의식도 없이 침을 꼴깍 삼키며 그 이야기에 흠뻑 젖어 몽정의 새벽까지 흘러가기도 했다.// 그 때 죄가 유일한 우리의 위안이었다./ 악이 서슬 시퍼렇게 우리를 측백나무 숲처럼 둘러싸고 무성할 때/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새발의 피 같은 것이라 여겨 죄의식이 없었다./ 죄에 굶주린 짐승처럼 어금니만 날카롭게 빛났다.// 어른들은 자식을 먹여 살린다고 바빠 우리가 저지르는 죄를 몰랐다. 우리를 불러 세워 회초리로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때리지 못했다. 우리도 어릴 때는 저렇게 했지 하며 오히려 우리의 동조자가 되 주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와 의 심리적 동일화를 원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가해인지 피해인지도 모르면서 자랐다. 죄에 물든 얼굴로 자랐다. 죄 속에서 잔뼈가 굵었다. 세상은 한 탕으로 출세하는 곳으로 알았다. 저질러놓고 보면 모든 것이 내 목록에서 빛날 것이라 했다. 여전히 여자는 따먹는 과일처럼 생각하는 형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랐다. 누가 누구를 따먹었다는 이야기에 비난보다는 찬사와 부러움에 찬 눈길을 보냈다. 우리의 생각이 점점 죄의 온상이 되어가는 줄 몰랐다.// 누가 죄는 즐거운 유희라고 모래밭에 깊게 새기기도 했다./ 죄로 단정한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가 여자를 유혹하리라며 옷을 다리기도 했다./ 죄가 멋있게 보이는 계절이라고 했다./ 지구는 죄의 별/ 죄는 우리가 간직한 가장 고결한 숨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죄의 파라다이스, 죄의 다다이즘, 죄의 아방가르드/ 끝없이 죄의 결속으로 이뤄져가는 연대들/ 끈끈한 죄의 점액질, 액체로 된 죄, 연고로 된 죄, 알약이나 환으로 된 죄// 나는 죄의 소읍을 떠나 죄의 도시로 입성했다. 하찮다고 여겼던 내 죄는 여전히 이 도시에서도 하찮을 뿐이라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인데도 죄가 아닌 곳이고 모든 것은 죄와 코드가 맞춰져 있고 죄는 극히 작은 꿈의 소모품과 같아 수없이 죄를 갈아 끼우면서 점진적으로 내 꿈이 이뤄지리라는 생각이 가로수처럼 우우 물결치는 곳이다. 북방여치 같은 얼굴로 때로는 아무르장지 뱀 같은 얼굴로 모여 늘어놓는 이야기는 죄의 강물을 이뤄 흘러갔다. 죄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죄로 거둔 성과를 말할 때 우리 얼굴이 빛난다는 이상한 논리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육이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배우는 것 이라는 착각에 빠진 얼굴을 우리는 자주 지나치는 것이다.//
3// 나는 이제 완전 죄의 중독자이다. 하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친구를 사회적 약자라고 동조하는 것은 이제 나의 과오라고 생각한다. 내 죄의 이야기가 가상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우린 너무 죄의 계절 깊숙한 곳에 와 있다. 나는 죄의 검은 이파리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시드는 나무 한 그루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언제인가부터 찾아왔다.//

다한증 / 김왕노
손바닥은 내 운명이 새겨진 예언서 한 권, 손금이란 집요하게 내 운명을 예언하고 나의 운명을 끌고 모래 언덕을 넘거나 물가로 가거나 이것이다 믿는 것은 악력을 다해 움켜 쥘 것이다. 하나 주먹을 꽉 움켜쥔다는 것은 잠시 예언서를 접는 다는 것, 예언보다는 접은 예언의 모서리나 예언서가 만든 정권으로 감정으로 때로는 이성적 판단으로 불의를 못 참는 정의의 주먹이든 폭력을 행세하든 주먹이든 무언가 해보려는 의도, 아니면 예언서를 접어 만든 불끈 쥔 주먹으로 결의를 다지는 것, 하나 내 예언서는 늘 젖어있다. 상습침수지역에 있듯이 내 손으로 뿌리칠 수 없는 다한증으로 젖어있다. 예언서에 감정을 가지던지 미신의 문장으로 점철된 예언서라든지 찬사이든 비난을 하던 나의 손바닥은 쉽게 젖는다. 말랐다 해도 어느새 손바닥 안엔 비구름이 몰려드는지 장마전선이 북상했는지 저지대라 물이 많은지 습지인지 젖어있다. 배수로를 따로 낼 수도 없고 제습기를 가동할 수 없는 다한증의 내 손바닥, 나의 예언서 오늘도 젖어있다. 수성의 나무를 심고 물별이 뜨고 가시고기의 노래 수포로 떠올라야 할 젖은 내 손바닥, 나의 안구가 말라갈수록 더 자주 젖는 내 손바닥, 눈가에 눈물이 사라진 날 더 젖는 손바닥// 나의 누선이 손으로 이어진 오래된 내력을 내 몸이면서 나는 잘 몰랐다./ 오늘도 내 손바닥으로 흘러오는 눈물/ 만지는 것마다 지문이 아니라 눈물이 축축하게 남는다./ 나는 이제 내 존재란 눈물로 젖은 손으로만 증명될 뿐이다//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 / 김왕노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화무십일홍이란 말 앞에서 울었다./ 너를 그 무엇이라 부르면 그 무엇이 된다기에/ 너를 꽃이라 불렀으니 십장생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중에 학이거나 사슴으로 불러야 했는데/ 나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몰라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나 십장생을 몰라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단명의 꽃으로 불렀기에 내 단명할 사랑을 예감해 울었다./ 사랑이라면 가볍더라도 구름 정도로 오래 흘러가야 하는데/ 세상에나 겨우 십일이라니 십일 동안 꽃일 너를 사랑해야 한다니/ 그 십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너는 내게 와 꽃이 되다니/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다니 너를 꽃이라 부르고/ 핏빛 꽃잎 같은 입술로 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메랄드 진주 비취 사파이어 마노/ 자수정, 남옥, 사금석, 혈석, 카넬리안, 공작석, 오팔, 장미석/ 루비도 있는데 너를 때 되면 시드는 꽃이라 부르고 울었다./ 지는 꽃보다 더 흐느끼고 이별의 사람보다 더 깊고 길게 울었다.//

뱀의 전설 / 김왕노
나는 서울로 압송하는 전봉준을 꽁꽁 묶었던 오랏줄/ 일획의 참회하는 뼈저린 글이다./ 한 때의 과오로 평생 슬슬 기면서/ 기를 펴지 못하는 길로 꿈틀거리며 왔을 뿐이다./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봉준아 , 봉준아 하면서/ 산천도 울고 녹두 꽃 뚝뚝 지고 청포장수 울었다는데/ 나는 피가 안 통할정도로 전봉준을 꽁꽁 묶었던 끄나풀/ 내 긴 몸으로 내 긴 몸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싶구나./ 고부나 삼례쯤에서 자학으로 짓이겨지고 싶구나./ 가도 가도 끊어지지 않고 닳지도 않고 허물 벗을 때마다/ 다시 빛나는 몸으로 살아나는 내 죄의 문양과 죄의 독니/ 스스로 삼킨 독으로 대역죄인인 나를 벌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대한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삼킬 독/ 하나 나의 몸은 길지만 운명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초록나무 아래서 쓰는 머리말 / 김왕노
하늘이 새파래. 그래도 총체적 난국인 시절, 경제와 동반 추락하는 사랑이니 그리움 이별이니 만남마저 푸른 부레를 가진다면 초록나무 이파리처럼 만어사 일만 마리 물고기처럼 떠올라 끝없이 파닥이다가 깨달음으로 붉게 물들어 갈 것// 초록나무가 바람에 물결쳐서 초록바다 같은 계절이야. 나는 서두라는 말도 좋지만 머리말이라 하여 초록에 물든 머리말을 써야해. 출처도 모르는 괴 소문이 상어처럼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때 나는 초록나무 아래서 초록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 희망의 글을 써야해. 한 사나흘 걸어 내 초록 머리말로 들어오면 영원히 갈증을 씻어줄 천년 우물이 있고 푸른 대나무 마디마디로 자라는 푸른 정신도 있는 이제 초록이 대세였으면 좋겠어.// 그린벨트도 흐지부지. 옥상에도 빌딩에도 수직으로 수평으로 초록이 자라는, 뼈마저 초록으로 물들어 초록의 도시를 이루어 가는 초록 사람으로 초록 사슴으로 초록 애완견으로 초록의 이장님 초록의 대통령으로 초록의 오체투지로 초록의 설산을 찾아가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 초록나무 아래서 머리말을 쓰면 엘도라도 신천지 개벽 혁명 대초원 구름 백두대간 우사 운사 성황당 마니산 신도시 등 초록나무 보다 더 먼 것이 생각나지만 초록문장 초록 사랑 초록 물고기 초록 새 초록 글 초록 우산의 자유 초록의 입맞춤 초록의 오르가슴 초록 소쩍새 초록의 한반도 에 대한 생각도 심해서 방울방울 떠오르는 기포 같이 떠올라// 초록나무 아래로 불어온 바람도 초록의 바람이 되어 또 어딘가로 불어가. 초록의 비가 내리고 초록의 구름이 흐르고 초록의 풀마저 바람에 나부끼고 진짜, 진짜 초록의 나라가 온다면 내 초록나무 아래서 쓰는 머리말은 잘못된 낙서처럼 지워져도 좋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초록문장으로 쓰며든 내 아픈 노래, 임을 향한 행진곡도 만산홍엽같이 져도 좋아// 하늘이 새파랗고 난 운 좋게도 초록나무 아래서 머리말을 쓰는 호사를 누려. 머리말도 말 같아 머리말을 타고 북벌에 나서기 좋은 계절. 난 초록나무 아래서 머리말을 쓰고 멀리서 원정군처럼 바람이 불어와. 내 마음도 초록나무와 함께 바람에 끝없이 물결쳐, 초록 바람이 불라치면 직립의 내 중심이 슬픈 예감처럼 끝없이 흔들려 아직은 초록의 나라가 멀고멀기만 하기에//

블랙로즈를 찾아가는 밤 / 김왕노
블랙로즈는 지하의 술집 나자리노에 있을까. 한 때 작은 사롱의 얼굴 마담이, 차가운 얼굴의 블랙로즈, 떠나온 고향 이야기 할 때만은 오누이처럼 다정다감했던 블랙로즈, 장미였으나 가시가 없었던 블랙로즈, 검은 호흡을 끝없이 하던 블랙로즈/ 철 지난 줄 모르고 늦게 핀 꽃처럼 블랙로즈는 어디서 끝물의 들꽃처럼 시들고 있는지, 한 잔의 술을 따르면서도 정성을 다해 제 생을 살짝 기울여 따라주던 여자. 술에 꽃잎이 흠뻑 젖었어도 사리분별이 뚜렷했던 블랙로즈, 해저물면 날 기다린다던 블랙로즈/ 블랙로즈를 찾아가는 저녁, 블랙로즈에게로 데려가려고 어두운 골목에서 나타나는 삐끼가 그리운 밤, 담 위의 하얀 박꽃과 어우러진 달빛이 그리워지는데 숨죽인 국경 같은 마을을 지나 블랙로즈를 찾아 나선 밤, 블랙로즈를 찾아 월경하다 난사로 죽어도 좋은 밤 블랙로즈는 퇴락과 퇴색으로 블랙로즈란 이름마저 잃은 채 한 송이 드라이플라워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뒤늦게나 가시가 무섭게 돋아난 싱싱한 블랙로즈로 밤의 중심에 피었는지 모른다. 블랙로즈가 흔들렸을 때 잠시 지축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점점 거대하게 피어난 블랙로즈가 내 생을 흡입하려 먼 하늘서 블랙홀로 천천히 흘러오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지하 술집 나자리노에서 저주로 늑대가 된 내가 오기를 쓸쓸하게 기다릴지 모른다. 저주가 살아날 달밤을 기다리는지 모른다.//

 

너를 부르려고 온 세상 / 김왕노
처음엔 자유를 불러봤다. 자유가 오지 않았다. 청춘을 불렀다. 청춘은 왔으나 시원찮았다. 꽃을 불렀다. 꽃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었다. 하늘을 불렀으나 하늘은 쳐다보는 것, 은하수 낮달, 별, 구름, 비행기는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바다는 찾아가는 것, 강물은 멀리서 훔쳐보는 것, 사랑은 부르지도 찾아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기다리는 것, 그리움은 수천수만 그루 심어 놓고서 그리움이 바람에 물결 칠 때 함께 물결치는 것, 민주는 꿈으로만 있는 것, 그러면 너는 뭐냐. 너는 내가 불러야 할 사람, 너를 부르려고 이 한 번의 세상에 왔다. 너를 부르려고 온 세상이다.//

목련 / 김왕노
할머니가 마당가에 심고/ 징용 간 후 소식 없는 할아버지를/ 하나 둘 꽃을 세며 해마다 기다렸다./ 어머니도 목련을 보며/ 타관에 일하러간 아버지/ 하루하루 기다리며 늙으셨다./ 목련 꽃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낮달이 보이고 별이 보이고/ 나는 목련이 필 때 사랑도 피기를 기다렸다./ 피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다 지친/ 나를 골똘하게 바라보던 목련이 뚝뚝 졌다./ 누대의 슬픔이 뚝뚝 지고 있었다.//

불새 / 김왕노
비난은 폭설보다 심해/ 마음의 가지 적설을 못 견딘 나뭇가지처럼/ 비난에 사정없이 뚝뚝 부러져/ 고로쇠나무 수액 같은 피 철철 흘린다./ 처형의 광장에 세워진 듯/ 가혹한 비난도 망나니 칼처럼 휘 번뜩인다./ 끝없이 쏟아지는 비난과 독설은 나를 짓밟고 가는 청동 발걸음인가./ 비난에 난도질 된 내 하늘이 너덜거린다./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가혹한 혓바닥/ 살기 위해 배수진을 친다지만/ 사력을 다한들 가도 가도 비난의 목소리 뿐/ 들불처럼 일어나는 저 비난의 기세를 보아라./ 상한 마음을 물어뜯는 비난의 치명적 어금니/ 비난이란 짐승만큼 사나운 짐승이 어디 있느냐./ 수천 근 살 뜯겨 철철 피 흐르는 가슴이 아니냐./ 아무리 높은 목책도 산맥도 수 천 수만의 강도 건너/ 밤낮없이 달려오는 것이 비난이 아닌가./ 지금껏 내가 세운 명분도 방파제가 될 수 없다./ 쓰나미처럼 몰아닥치는 비난이여/ 비난의 칼날을 피해 검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오를 수는 없다./ 저 자욱한 비난, 비난, 비난의 차가운 소낙비/ 무릎을 사정없이 걷어차 오는 비난의 구둣발이여/ 고꾸라지는 나를 걷어 차올리는 비난의 완력이여./ 도가 지나친 비난이어도/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면 비난은 나를 담금질 하는/ 기름과 같은 것이나 이미 나의 숨통을 끊으려/ 필사적으로 조여 오는 아나콘다 같은 비난이여./ 너를 벗어나 내가 망명을 해 갈 나라는 어디 있는가./ 너를 세 번 부정하도록 새벽 닭 울어주는 나라는 어디 있는가./ 비난의 고삐를 풀기 위해 길길이 날 뛰는 청춘이여/ 하나 언젠가 비난을 벗어날 날은/ 샛강처럼 안개 자욱이 피어 올리면서/ 먼발치에서 출렁이며 흘러오지 않으랴./ 이미 비난의 독성으로 내 입술은 검게 변했고/ 정신은 피폐했으나/ 비난의 난간을 지나 언젠가는 아카시아 향기 휘날리고/ 호랑가시나무 기웃거리는 꿈의 베란다로/ 한 발은 반드시 내디딜 수는 있을 테니/ 오늘 끝없이 쏟아지는 비난이 푸른 내일로/ 밀어가는 힘이니 비난이여/ 때론 자신을 향해 참회로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는다./ 수천 수 만 개의 화살처럼 비난이여, 나에게 집중되라, 쏟아지라./ 온몸에 비난의 화살이 꽂혀 멸하여도 좋으리라./ 오늘 비록 내 끝없이 절뚝거리지만/ 비난으로 불구가 된 몸으로 걸어도/ 나는 내가 가야할 길 위에서 필연이든 우연이든/ 수많은 희망을 만나리라 믿는다./ 비난은 나를 무엇에도 휘지 않는 정신으로/ 결빙의 꼭대기에 창살처럼 뾰족하게 세운다./ 죽어 천년 살아 천년 가는 주목의 푸른 정신으로 곧추세운다./ 비난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차라리 불가사의 한 일이다./ 비난의 세월이란 사랑이 숙성되는 시간이다./ 비난 속에서도 힘이 되는 그리운 노래는 있다./ 나 끝내 비난의 불길을 피하지 못해/ 전신이 비난의 불길에 휩싸이더라도/ 나 어둠이나 비난을 활활 태우며/ 천지를 밝히며 치솟아 오르는 불새 한 마리 되리라./ 태양의 새 삼족오나 극락정토의 가릉빈가가 아니라/ 불멸을 향해 솟구치는 불사조가 아니라/ 어두운 판을 뒤집어 빛의 광야로 이끄는/ 절명하는 불새의 길고 긴 울음이 되리라./ 단명의 새나 꿈을 점등하고 사라지는/ 순간의 불새로 천지를 잠깐 울고 가리라./ 지층처럼 캄캄한 날에 시조새 같은 울음을 새겨/ 다시 천년의 물꼬를 터고 사라지리라./ 우주 끝까지 뒤흔드는 우레 같은 천상의 울음 울고 가리./ 내 몸은 이미 아득한 허공으로 불새가 된 영혼/ 폭죽처럼 쏘아 올리니//

눈이 잘 보이는 저녁 / 김왕노
눈이 잘 보이는 저녁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네./ 눈이 잘 보이는 저녁에는 담 위에 하얗게 핀 박꽃을 보러/ 철거덕거리는 기차바퀴소리 위에 내 저녁을 얹고 고향으로/ 목마른 짐승처럼 가고 싶은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를 읽으면서 가난한/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이 밤에 눈이 푹푹 내릴까 생각하네./ 눈이 잘 보이는 이런 저녁에는 파르티잔 넋이 깨어나는/ 뱀사골로 가 지리산 가득 피어나는 별을 헤어보고 싶은데/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가 없다. 를 읽으면서 내게는 누가 오나 기다려 본다./ 누가 오면 나도 깊은 산골에 마가리에 살자 속삭이고 싶은데/ 눈이 잘 보이는 저녁 나에게 나타샤도 휜 당나귀도 없어서/ 응아 응아 울 일도 없고 밝은 눈 속으로 슬픈 별만 뚝뚝 지네//

낙과 / 김왕노
한 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는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어차는 햇살에/ 한 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째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리아스식 사랑 / 김왕노
내 말이란 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섬입니다. 당신은 섬의 어법을 모르고 내 어법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어법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도 모릅니다./ 내 마음은 저 바다 위 뚝뚝 지는 동백 꽃잎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동백꽃의 어법을 모르고 동백 꽃잎을 싣고 먼 당신을 찾아갈 물결의 어법도 모릅니다. 동백 꽃잎을 대하고 속삭일 당신의 어법을 나도 모릅니다./ 하나 당신의 어법에 익숙해 질 때까지 나는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수없이 몰아쳐 오는 태풍에 동백 꽃잎 같은 그리움만 뚝뚝 떨어뜨리며 내 어법에 당신이 익숙해 질 때까지 저물지 않는 섬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사랑이지만 우리의 모국어, 사랑의 어법에 우리의 입술이 물들 때까지 난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바다 약국 / 김왕노
‘바다 약국’에 가 보셨습니까? 이 깊은 도시 한가운데 닻을 내린 바다 약국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유리창이 푸른색으로 선팅된 ‘바다 약국’, 진열장마다 바다를 정제한 알약, 바다가 든 튜브의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난 그 주인을 자세히 모릅니다. 서해 섬 어디에서 왔는지 영일만이나 묵호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바다 약국’으로 간판을 내건 그는 이미 나에게 바다입니다. 팔에 닻의 문신이 없어도 그는 나에게 바다 사나이입니다./ ‘바다 약국’에 가면 가끔은 거리로 헤엄쳐 온 인어를 볼 것입니다. 조용히 핸드백을 열면 그 안이 살짝 보이는 그럴 때마다 난 해마의 울음을 듣습니다. 누가 ‘바다 약국’으로 가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신 적 있습니까? 가끔은 물살보다 낮게 흘러와 귓속말로 무언가 주문하며 살짝 얼굴 붉히며 떠나는 솜털 뽀얀 소녀도 볼 것입니다. 달 푸른 밤 수면을 탁탁 치며 산란하는 고기떼의 생동감이 넘쳐나는‘바다 약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도 처방 내릴 수 없는 사연을 안고 폭설 속으로 길을 떠나고 지병을 안고 먼 고장으로 가는 밤 열차에 몸을 싣기도 하지만, 난 지금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파초 잎보다 더 큰 꿈의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바람 센 날 마음을 돛으로 올리고 뱃전 같은 그리움에 와 철썩이는 세월, 철썩임이 클수록 내 생은 즐겁기도 하고 난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두통을 호소하거나 일회용 반창고를 사는 사람마저 바다의 넓은 마음을 닮아 가는 ‘바다 약국’, 한번쯤 와서 본 적 있습니까? 깻잎 같은 그리움 몇 매달고 나 끝없이 흔들리며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운명 / 김왕노
전방의 한탄강이 보이는 언덕에 차량사고로 죽은 김 하사의 어린 아내, 아기를 업고 나와 울고 있으니 가보라는 감성이 예민한 옛 전우가 귀 뜸을 해왔다./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는 편이라 열일 제쳐두고 철원행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수통에 물 담아 먹던 한탄강가에 가니 차량사고로 한 날 한 시에 죽은 김 하사와 성삼이 현석이가 물새가 되어 울고 있었다./ 그 때 언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옥수수 대가 옥수수를 매달고 있는 것이 옥수수가 아니라 김 하사의 젊은 아내였다. 그리움의 뿌리가 밑둥치에서 뻗어내려 한탄강에서 김 하사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려는 듯 철원의 땅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비바람에 젖어 번들거리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한번 쯤 아기를 추스른다고 가슴에 품고 젖을 물려야 하나 실성한 듯 아기를 업고 오발사고로 차량사고로 자살로 전우가 죽은 전방의 아픈 이야기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젊었으니 아기를 친정에 맡기고서 재가해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밤이면 살아나는 풀벌레 소리 한탄강 구슬픈 물소리 속에 넋 잃고 서 있다니/ 찬 서리 내려 발이 시려 울 텐데도 등에서 내려놓지 않아 뚝뚝 따서 처마 밑으로 데려갈 아기 옥수수, 폭염에 노랗게 잘 익은 씨 옥수수 몇 자루에 알알이 박힌 기억, 내년 여름이면 또 옥수수로 돋아나 푸르러질 날을 운명의 날이라 불러보는 것이다./ 내년 여름이면 한탄강을 다시 찾은 나는 달래도 달랠 수 없는 망부의 한을 멀리서 지켜보며 울먹이기나 할 것이다//

천 명의 나를 낳아다오 / 김왕노
이제 나 한 사람만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 장미를 보고 꺾으며 즐기나 장미 몇 포기/ 울밑에 심고 기르기에도 부족하다는 생각/ 나 하나만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것조차/ 너는 내게 너무 큰 사람이라 죄스러운 일/ 장미에게 물 한번 뿌려준 적 없는 내가/ 장미를 즐긴다는 것도 무례한 일이라/ 장미여, 애인이여 나를 천 명 쯤 낳아다오./ 낳은 나를 내가 열심히 기르고 손보아서/ 천 명의 내가 너를 사랑해야 마땅한 것/ 장미여, 내 붉은 힘으로 나를 낳으면/ 낳은 천명의 나와 나는 장미의 노동자/ 장미여, 너의 충복으로 살아갈 테니/ 지금은 무엇을 낳아 젖 물리기 좋은 한 철//

시를 쓴다 / 김왕노
코딱지를 파면서 시를 쓴다. 내 사랑이 시시해서 시를 쓴다. 시시껄렁한 날이라서 시를 쓴다. 네가 그날이라서 시를 쓴다. 시팔 씨팔 하면서 시를 쓴다. 그게 그것이라면서 시를 쓴다. 참 거시기해서 시를 쓴다. 시가 씨였으면 네게 뿌리리라면서 시를 쓴다. 시를 쓰면서 아닌 체 시치미를 뚝 떼면서 쓴다. 아버지가 죽어서 시를 쓴다. 어머니가 죽어서 그리움이 죽어 시를 쓴다. 쓰지 않고서 못 배기므로 쓴다. 대꽃 피는 마을로 밤새 철거덕거리면서 가지 못해 쓴다. 꽃 핀다고 쓴다. 꽃 진다고 쓴다. 철천지원수 같아 쓴다. 한낮에도 쓴다. 새벽에 밤에 전쟁을 치르러 나가는 병사의 눈으로, 예지의 눈으로 멋모르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온 날 쓴다. 아프게 쓴다. 유복자를 엎고 한탄강가에 나와 옥수수처럼 서걱거리면서 피눈물 흘리는 차량사고로 죽은 김 하사의 아내가 지금도 눈에 삼삼해서 쓴다. 너무 슬퍼 쓴다. 슬프게 쓴다. 경호성삼이 현석이 내 군대시절 전사통지서를 집에 보낸 그 어린 얼굴이 아직도 떠올라 쓴다. 못 잊어 쓴다. 잊으려고 쓴다. 쓸 수밖에 없어 쓴다. 쓰디쓴 시를 쓴다. 뼈마디 마디마다 불을 붙여 쓴다. 아니 쓸 수밖에 없다. 네가 그리워서도 쓴다//

위독 / 김왕노
위독은 거대한 짐승입니다.// 위독한 사이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울부짖는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숨겼던 진실을 각혈하듯 게워내기도 합니다. 위독한 자는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하기도 합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짐승 한 마리로 먼 길을 밤 새워 왔을 때 나는 날 간 같은 영혼을 던져주려 했습니다. 살 몇 근 거뜬히 베어주려 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 스스로의 살점을 녹여 뼈마디까지 드러나게 한답니다./ 무엇을 지탱하기 위해 살가죽을 밀며 드러나는 뼈마디들인지/ 죄마저 끝까지 버티게 해주는 뼈마디의 의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결국 죽음 속으로 무너져가면서도 왜 쉬 삭아 내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속의 어둠을 견디는 뼈인지/ 후략의 말 뒤에 무엇을 덧보태고 싶은지 스스로 묻기도 한답니다.// 멀리서 그대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있습니다.// 그대에게서 철철 쏟아져 내리는 마지막 말들이 자귀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미루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창밖의 계절은 독 오른 듯 푸르다는데// 그대 이제 이승의 살점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말라가 피골이 상접한 짐승/ 그러나 지금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 나마저 화답해 우우 우는 밤이 산맥을 넘어 강을 건너/ 저렇게 성큼성큼 옵니다.//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 김왕노
황진이 네 생각이 죽은 줄 알았다. 아파트 납골당을 지날 때, 묘비가 된 빌딩을 지날 때, 황진이 생각이 새까맣게 죽어 간줄 알았다. 어디서 육탈되어 백골로 남은 줄 알았다. 난 애도나 명복 한 번 빌 줄 몰랐고/ 그러나 거리를 지날 때, 죽은 줄만 알았던, 황진이 네 생각 살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을 초월해 황진이 생각이, 긴 치맛자락 나부끼며, 창포냄새 풍기며, 자유롭게, 모든 저지선을 뚫고 오는, 황진이 생각, 붉은 입술의 황진이 생각, 진압할 수 없는 황진이, 황진이 생각/ 이제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를 찾아, 이 시대에는 없다지만 그럴수록 황진이를 찾아, 황진이 같이 붉은 칸나 키우며 황진이를 찾아, 영혼의 뿌리를 푹 담글 속 깊은 황진이,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나의 계집 황진이를 찾아, 남 몰래 살 섞을 황진이, 나의 황진이가 아니라 우리의 황진이를 찾아, 방을 붙이고, 실종 신고도 내고,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황진이, 붉은 옷자락의 황진이를 찾아, 하얀 황진이의 이마를 찾아, 조개 보다 더 꽉 다문 황진이의 정조, 죽창보다 더 꼿꼿한 황진이의 지조를 찾아/ 직장에서 거리에서, 술집에서, 강남에서, 광화문에서, 황진이 우리 황진이를 찾아,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가냘프나 올 곧은 정신의 황진이, 나를 불태울 황진이, 나를 재로 남길 황진이, 쭉쭉 빵빵 사이로 거침없이 오는 황진이, 사이트로, 극장가로, 로데오 거리로, 현상금도 내걸고, 전단지도 뿌리며, 기어코 찾아야할 내 황진이, 내 몸의 황진이, 우리 넋의 황진이, 진이 진이 황진이를 찾아/ 황진이 네게 사무치는 말이 저렇게 푸른 하늘 밀어오는데, 수수밭 사이에 초가을 호박꽃 피우며 오는데, 벌써 차가워진 개울물을 건너오는데, 말 타고 황진이 네 치마폭에 파묻히려 청동방울 딸랑거리며, 개암나무 뚝뚝 떨어지는 전설 속을 지나, 산발한 채로도 가고 싶구나. 황진아 네 은장도 빛나는 밤에, 촘촘한 넝쿨이 틈을 보이는 계절, 네 머무는 마을에 꿈이 깊고 우물물 깊어져, 마을을 파수하는 개 울음 높아가는 밤일 텐데, 너는 아직 이조의 어느 마을 모퉁이에 있는가. 기우는 사직의 뒤란에 서 울고 있는가./ 쭉쭉 빵빵하게 다가오는 세월 사이, 저 비대한 몸짓 사이로 오늘도 보이지 않는 황진이, 난 새털구름 따라 흐르는 갓 태어난 철새 같아도, 끝없이 사방으로 풀려가는 쪽물 같아도, 네게로만 흐르고 싶은데, 황진이 네 웃음소리 청아한 마을로, 처연한 내 그리움 앞세우고 찾아 가는 싶은 데, 황진이 네 붉은 마음을 찾아, 구비 구비 너를 찾아, 첩첩 세월 건너 너를 찾아//

도플갱어 / 김왕노
돌아다니는 자, 자신의 분신, 자기의 환영이 도플갱어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자기가 죽는 다는 암시도 되지만 자신을 사칭하는 또 다른 자신을 본다는 것은 곤혹스럽지만 놀라온 사실이다. 아무리 같더라도 다른 곳에서 떠돌았으므로 마주 앉아 무용담을 나누다가 보면 하루가 짧을 것이다. 나의 도플갱어도 지금 쯤 푸른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고 고대 도시의 오후를 늙은 개처럼 어슬렁거릴 것이다.// 내가 나를 스친 적이 있다. 지하철이 비껴가는 사이에 낯선 듯이 나를 바라보는 나를 보았다. 조간을 한 손에 말아 쥐고 있는 스타일이 전혀 나와 맞지 않았지만 가볍게 목례를 보내 왔다. 내게서 떨어져간 나이거나 나로부터 떨어져 나온 더블이 내 마준 편에 선 것이었다.// 어딘가에 나를 집요하게 지켜보는 내가 있다는 생각 때로는 먼 사막의 대상이 되어/ 푸른 달밤 터벅이며 내가 가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잊어버렸던 것을 또 다른 내가 가지고 있을 것도 같다./ 어릴 때 쥐똥나무 Y 가지로 만든 새총 겨누었다 하면 백발백중/ 명중에 가깝던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던 새총, 가슴의 가졌던 순정의 이름 순이/ 어느 날 밤 먼 하늘을 건너오는 외로움을 못 견뎌 울부짖는 소리가/ 또 다른 내가 지르는 목소리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때 나도 내가 너무나 외로워 벽에 머리를 짓찧는 자학으로/ 길고 깊은 겨울밤을 보낸 적이 있다./ 나와 다른 또 다른 나이나 분명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이다./ 인생이 이렇게 외로운 것은 잃어버린 나를 내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려고 나는 나에게서 또 다른 나를 세상 저편으로 보냈으며/ 나는 나로 부터 또 다른 내가 되어 어떻게 어성초 푸른 이 밤으로 떠나왔을까./ 서로가 떠나므로 반쪽의 나와 반쪽의 또 다른 나로 불완전하게 되었으므로/ 남은 생이란 하나의 나를 위해 잃어버린 원형의 복구를 위해 떠도는 것// 나는 또 다른 나와 수시로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울적 할 때 또 다른 나도 울적 한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감정의 끈을 본능처럼 흔들어 대므로 나와 또 다른 나와 감정의 합일점에 이른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떠나왔으므로 껍질인 듯 남은 또 다른 내 안으로 귀환하는 꽃 피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합체에 이르러 비로소 별을 향해 발돋움하거나 감자 꽃 필 때 비로소 하나가 된 우리가 도시 외곽으로 야유회도 갈 것이다. 지금은 다만 씨감자 같은 꿈을 가슴에 묻고 움츠려야 할 때 내 그리움만 나무처럼 일어서서 또 다른 나에게 끝없이 푸른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이다.//

블랙홀 / 김왕노
점묘화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비명도 없이 이 도시에서 흡입되거나 자진해 와 짜부라진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견고한 담도 비밀을 모르는 자물쇠도 무엇을 봉인 할 수 없고 도시는 점묘화 한 점, 우리가 만든 신화나 우리가 최고라 치켜세우는 구조물도 단지 점 하나, 블랙홀의 날름거리는 혀에 우리는 농락당하고 블랙홀의 감언이설로 우리의 이성은 마비된 채 검은 강물로 흘러가는 것이다./ 모두 짜부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짜부라진 탓일 것이다. 아무리 자기의 영토를 위해 철조망을 치고 접근금지구역의 팻말을 세우나 점 하나에 불과하다. 어디나 블랙홀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든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다. 블랙홀로 빨려들어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은 엄청난 허망이다. 하나 전략을 바꾼 블랙홀에 합의 한 듯 우리는 블랙홀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블랙홀 안에서의 산책 블랙홀 안에서 바라보는 싱그러운 햇살로 블랙홀에 가진 두려움에 무감각해진 것이다./ 명아주 푸른 날에도 블랙홀의 날이다. 인동초 열매 익는 날도 블랙홀의 날이다. 꿈이 송수신되나 블랙홀 안에서의 일이다. 생리가 순조로운 것도 블랙홀 안에서의 일이다. 블랙홀의 감압장치의 출력을 높이면 점이라 믿던 우리의 존재마저 없다. 아직은 그런 일이 없어 빛나는 눈동자, 자잘한 쥐똥나무 열매, 강가에서 읽는 물새 발자국, 으깨어지지 않은 사랑의 가녀린 어깨, 몰락하지 않는 그리움, 아직은 블랙홀의 초기, 우리는 점묘화의 점 하나가 맞을 것이다//

희야 / 김왕노
한 때 부드러운 풀밭에 고춧가루처럼 맵게 쏟아지는/ 햇살이 있었고 네가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려 보여주던/ 사랑의 신전으로 가던 사랑의 성문이 있었고// 희야, 우리가 정 맞는 돌처럼 세월이 휘두르는 해머에/ 땅땅 맞아 깨져도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꿈이 있지 않았나/ 자객의 검같이 날카로운 바람도 끊지 못할 고래 심줄 같은/ 정도 있지 않았나.// 희야, 내가 너를 부를 때마다 거대한 역사의 바퀴는 돌아가고/ 묵정 밭 같은 거리에도 풀꽃이 피고/ 우리가 역사의 바퀴 아래 깔려 짓이겨지더라도/ 사랑의 피는 장미 같이 붉을 거라고/ 붉은 장미의 강물을 이뤄 가뭄이 온 골목과 광장을 적실 거라고// 희야, 그 옛날 장승 같이 내가 세월의 귀퉁이에 서 있었고/ 나를 좋아하는 구절초같이 마디마디 그리움이 피는 네가 있었고// 봉인된 네 순결, 봉인을 뜯어야 할 할아버지를 닮아/ 뼈마다가 여린 내 손이 있었고/ 하늘이 허락할 때까지 서로를 지켜주자는 낡고 때 묻은/ 우리의 구닥다리 관념과 맹세가 있었고// 희야, 그것은 단지 우리가 신화의 하늘을 꿈꾸던 날의 일이었다.// 희야, 바람벽이 없는 우리에게 폭풍은 막무가내로 몰아치고/ 가지가 찢어지고 뿌리 째 뽑힌 우리의 꿈이란/ 회복불가능의 일이었다./ 희야, 우리가 투사로 이념의 날을 새파랗게 세워/ 혁명의 불길처럼 거리로 쏟아졌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산자여, 따르라 하고서 함께 죽으러 갈 것 같은 사람은/ 따라간 사람의 죽음 위에 홀로 서서 월계관을 쓰고 있었다.// 희야, 우리의 꿈은 헛된 꿈이라 너는 북으로 나는 남으로 흩어졌을 뿐이다./ 고수레 하듯 북향으로 잘 익은 밥알을 던지듯이 저 유장한 강물 위에/ 아직도 그리움을 한 톨 두 톨 던지며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희야.//

아직도 그리운 파란만장 / 김왕노
나를 밀어붙이던 어둠은 얼마나 완강했던가./ 미지의 수심은 얼마나 깊은 공포였던가./ 가로막던 앞길은 얼마나 캄캄했던가.// 험난할수록 몸 안에서 샘솟던 힘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먼 팔뚝에서 흘러온 것이었다./ 시드는 나를 싱싱하게 되살리는/ 온몸을 적시던 푸른 비는 어머니 말씀이었다.// 지나온 숱한 길이 내 삶의 의미를 만들었다./ 지나온 길로 내 뼈마디마디가 굵어졌다./ 지나며 수없이 스친 별과 구름과 바람/ 아스라이 멀어진 숙, 경, 옥, 자, 미, 나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꿈이 되었다.// 세월에 굴복한 것처럼 멈췄던 길을 다시/ 다시 가야한다./ 길을 가야만 길이 끝나는 것이다./ 담 위에 박꽃 하얀 집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오라 파란만장이여. 그리운 파란만장이여// 나 파란만장을 향해 서서히 신발 끈을 묶고 있다.//

나무의 울력 / 김왕노
비리고 아린 어머니 눈물 같은 꽃잎/ 소리 소문 없이 뚝뚝 떨어져 맨 땅을 수놓고 있다./ 영원히 지면서도 진다는 원망 없이 시들고 썩기 전/ 허전한 세상을 한 땀 한 땀 수놓는 꽃잎이라니/ 꽃잎이 떠나온 자리를 보면/ 짓무른 눈가에 맺힌 비린 눈곱 같은 열매가 보인다./ 익은 과일의 계절은 꽃 지는 이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 모든 과일의 맛은 져서 사라진 꽃잎의 아픔에서 왔다./ 꽃잎이 내준 자리마다 주렁주렁 매달릴 푸른 과일/ 지는 꽃잎에 보답하듯 눈부신 과일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나무들의 아, 아, 아 소리 없는 울력/ 나무들로 인해 풍요로운 추수감사절이 마련되고/ 과즙 풍부한 과일로 우리의 생은 단물 들어갈 수밖에 없다./ 분분히 꽃잎 휘날리는 사이사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우뚝 우뚝 선 나무가 이루는 연대감으로/ 푸른 계절이 오고 사랑마저 익어가는 가을은 기어코 온다./ 모난 세월을 깎아 둥근 과일로 가지마다 매다는/ 마법 같은 나무의 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은 꽃 지는 고통으로 온통 눈물뿐이었을 것이다.//

별의 문장 / 김왕노
하늘의 별을 쓸어 모으면 저녁이면 결정을 이루는 소금 같이 족히 수백 만 섬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피가 도는 별이 모여 밤하늘을 가득 채운 저 별의 문장들/ 고개가 젖혀져 꺾이도록 읽어가도 싫증나지 않는 불후의 베스트셀러// 내가 알던 죽어간 모든 사람은 별이 되어 간줄 안다. 어떤 별에서는 세상의 별처럼 살다간 한 사람의 생이 또박 또박 읽힌다. 백석, 윤동주, 나혜석, 전태일 그리고 나의 어머니 이옥남 나의 아버지 김종윤 나의 삼촌 김무웅, 나의 초등학교 친구 신후남, 옆집 숙희// 어떤 별에는 한 사람이 하이에나처럼 울다간 세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음악이 가득 차있는 별도 있고 어떤 별에는 수 천 수만의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우주의 바람이 분다. 어떤 별에는 정좌하고 앉아 별과 별 너머에서 들려오는 새벽 닭 울음을 기다리고 있다. 별은 영원히 닳거나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명문장이다.// 저녁이면 어딘가에 숨어있던 별들이 멸치 떼처럼 온몸을 반짝이며 나타나 하늘을 가득 채운다. 저 별에는 봉황이 앉는 벽오동나무가 자라고 있을 걸// 저 별은 삼천갑자 동방삭의 별이라 동방삭이 아직도 답객난, 비유선생론이란 책의 후속타인 세상을 질타하고 가르치는 책을 집필하고 있을 것 같아// 별 자욱한 밤하늘은 좋은 문장이 상전벽해를 이루어 약한 바람에도 물결치는 곳// 시정잡배나 권모술수가나 어떤 모사꾼의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곳, 투기나 투자가 불허 하는 곳, 무릉도원이 있고, 청정지역이 있고, 탕평책이 있고, 태평성대가 있고 순임금이 있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우리를 기다렸다는 것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아스라이 멀어져간 첫 사랑의 이야기도 시 한편으로 별에 나부끼는/ 우리의 역린이었던 편린이었던 이름마저 별의 모서리에 쓸쓸히 있는/ 밤하늘은 우주의 커다란 문장이다. 우리의 족적이 별로 남기도 하는/ 사랑하는 사람아, 밤에는 밤하늘로 별 아래로 나가자./ 별의 문장을 읽다가 보면 당신이 밑줄 그어놓은 별 문장 아래/ 나의 산책은 시작되고 하늘 가득 별꽃 이야기가 애절하게 흐르기도 하는/ 밤하늘이 가장 큰 말씀이고 우주의 푸른 예감이 파문으로 번지는// 은하수 끝없이 흘러가는 소리에 우리의 모든 감각이 열리며 우리가 그렇게 망설였던// 판을 갈아엎는 혁명을 꿈꾸기도 하는 때로는 아나키스트로 별의 당국, 별의 중앙, 별의 사직만 인정하는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도 별 아래로 나가 우리도 언젠가 시나브로 저물어 갈 별 하나 마음에 새기면서 철철 피 흘려도 좋고 별의 울력으로 태양계 은하계가 이루어지듯이 우리의 울력으로도 또 다른 세상 하나가 눈부시게 열릴 곳으로//

백 년 동안 그리움 / 김왕노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 아픈 일입니다. 뼈가 푸른 독 같은 슬픔에 흠뻑 젖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에 수천수만 그루 심고/ 날마다 상전벽해를 이룬 그리움이 끝없이 물결치는 소리에 귀가 젖는 것입니다.// 누구의 생이나 따져보면 그리움뿐입니다./ 가질 수 없는 것, 다가갈 수 없는 사람, 아득한 별, 멀어진 것에/ 끝없이 오라고 손 흔들거나 끝없이 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리움뿐입니다.// 평생 직립이므로 제자리인 세상 모든 나무들이 푸른 것은/ 삭일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고 그리움의 힘으로 치솟았다는 것을 압니다./ 산다는 것은 백 년 동안 그리움을 키우는 일인 줄 압니다.//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그리움으로 사랑한다는 말 흐린 창에 새긴다는 것을 압니다./ 망부석도 있고 남편을 기다리다가 숨진 열녀비도 있는데 그리움이 백 년 동안이라니/ 너무 짧지 않아 하지만 백 년이 잉걸불처럼 뜨거운 그리움의 한 철이기에/ 백 년 동안의 그리움이라 말해 봅니다.// 백 년 동안 그리움 후의 막막함, 백 년 동안 그리움의 유한함에/ 울먹이기도 할 테지만/ 그리움이기에 백 년 동안 그리움이라 불러봅니다./ 천년만년도 사랑하기에 너무 짧다 생각하지만 그리움쯤이면 백년이 적당합니다.//

모국어의 밤 / 김왕노
나는 오늘 밤을 모국어의 밤이라 부릅니다. 철철 울던 북방여치도 모국어로 웁니다. 졸졸졸 흐르던 물도 모국어로 졸졸졸 거리다 잠들었습니다. 탱자나무하얀 꽃도 모국어로 피고 오늘 하루도 모국어로 잠들었습니다. 모국어로 칭얼거리던 아이도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연인은 모국어로 사랑을 속삭이며 모국어에 젖은 입술로 키스합니다. 사랑의 연대는 모국어로 이뤄지고 모국어가 푸른 문장을 모국어로 펼치며 푸른 하늘로 접근합니다. 모국어가 물든 구름이 모국어로 우는 새에게 흘러갑니다./ 지금은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하나 모국어 속에 잠들어 모국어로 몸 뒤척입니다. 소녀는 모국어로 깨어 서툰 편지를 씁니다. 밤은 모국어가 발효하는 시간입니다. 모국어가 분열에 분열의 하는 생명의 시간입니다. 개가 모국어로 짖으며 어둠을 경계합니다./ 모국어는 절제입니다. 모국어는 모국어가 모국어를 낳고 낳은 모국어가 모국어를 낳는 연쇄반응입니다. 모국어는 김치를 담급니다. 김치는 모국어와 고등어와 김치가 모여 찜을 만듭니다. 모국어가 불러 나는 왔고 모국어로 걸음마를 모국어로 수국 꽃이라 부르는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지금 밤은 모국어의 밤입니다. 멀리서 주둔군이 마이 웨이라는 노래를 부르나 그것은 모국어에 대한 결례, 동양의 등불이 우리 꿈이지만 멀지 않아 세상은 모국어로 웃고 떠돌고 놀고 모국어 아래서 꽃잠 듭니다. 모국어가 헝클어진 세상을 올올이 다듬어 줍니다. 꽃 같은 모국어, 씨앗 같은 모국어, 마음에 등불인 모국어, 혁명의 불씨인 모국어/ 미안하지만 오늘은 모국어의 밤입니다. 모국어라는 물고기가 있어 세상을 수면처럼 끝없이 쳐대며 미친 듯 산란하고 생명의 비린내가 진동해도 좋습니다. 모국어가 신화의 물고기가 되어도 좋습니다. 방생한 모국어가 물을 걷어차고 붕새로 날아올라도, 불새로 진화해도 좋습니다./ 나는 모국어와 함께 잠듭니다. 모국어가 푸른 꿈길을 내주고 모국어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꿈속에서 장딴지의 푸른 힘을 얻어 옵니다. 지금은 모국어의 밤입니다. 240 억 광년 거리에서 별을 밟아온 푸른 머리카락과 깊은 눈동자, 안드로메다 여인을 가만히 부르다 잠듭니다. 그 여자도, 은하수, 하얀 쪽배, 해, 달, 별, 엄지, 검지 익히다가 잠들기를 바랍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세상 모든 밤은 우리 모국어로 잠들고 우리 모국어로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모국의 꿈이고 모국어의 꿈입니다.//

반가사유상 / 김왕노
이 깊은 밤 고향 집 어머니는 반가사유상이다./ 한때 정좌해 TV 드라마를 보시며/ 몇 초롱 목숨에 심지 담그시고/ 밤늦게까지 가물거리며 사위어가시다가/ 지금은 허리가 아프시니 의자에 앉아/ 홀로 TV를 보시는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일한 반가사유상이다./ 밤이면 뒤란에 별똥별 같은 감꽃이 뚝뚝 져/ 탱화를 그리듯 수놓고 밤새 반가사유상을 지키는/ 누렁이는 잠을 멀리 두고 귀가 쫑긋하다.//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 김왕노
시도 때도 없이 이 도시에 안개가 자욱하다./ 불확실성의 대명사, 안개에 갇혀 발길이 느려지거나/ 처음 온 듯 사방이 낯설어져/ 벽을 짚고 서서 불안으로 울먹이는 사람도 있다.// 백색가루와 연대를 이룬 듯 몽환적이나 무력군단으로/ 끝없이 침투하는 안개의 계엄군이여.//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걷힌 후에는/ 안개가 안개의 수갑을 채우고 가버렸는지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사랑을 약탈해 가버렸는지 안개가 걷힌 미루나무 숲에서/ 안개에 젖은 몸으로 뭔가를 찾아 날선 풀잎에 종아리가 베여/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른 채 헤매던 영문과 출신 누나도 있었다./ 안개는 먼발치의 샛강에서 몽환처럼 피어나야 한다./ 안개는 스스로 실체를 밝히며 물고기 풍덩 뛰는 샛강을 지나/ 풀물 들이듯 서서히 물들이며 와야 한다./ 안개가 가진 폭력성은 안개가 걷힌 후 여기저기 충돌로 부서진 차와/ 새롭게 작성된 실종자의 명단으로 알 수 있다.// 나의 추억엔 온통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가 내린 함구령에 굴복하여 천천히 안개로 변해가던 몸뚱이/ 안개의 작은 미립자가 되어 흩어지던 꿈/ 내 등뼈를 따라 안개의 이파리가 돋아나 파닥이기도 했다./ 나는 안개의 속도로 천천히 안개의 무리가 되어갔고/ 안개에 둘러싸인 것이 두려워 한때는 울음을 터뜨렸으나/ 안개에 젖은 눈으로 안개에 뺏긴 넋으로 안개 중독자가 되어갔다./ 안개의 힘을 믿었고 안개의 나라를 꿈꾸었다./ 누가 안개의 미립자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조차 몰랐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방을 휘둘러보며 중얼거린다./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안개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냄새가 난다./ 안개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무덤을 만들었으며/ 비문을 새겨야 했던가./ 나는 오리무중 밖으로 안개지대를 지나 충분히 왔다 했으나/ 아직 안개에 젖어있다./ 안개를 피해 지병을 앓는 사람처럼 먼 지방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뜨는 안개에 젖은 해와 별, 안개에 젖은 관공서가/ 아직 익숙지 않다./ 지금도 나는 저 완강하고 강력한 안개가 두렵다.// 나는 중얼거린다.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개꿈 / 김왕노
누군가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가져와 기름칠을 잘 하고 땅에 묻어둔/ 기관단총 한 정과 수 백발 총알이 있으면 좋겠다./ 구국을 위한 도시락 포탄 한 번 던진 직계 조상이 없고/ 외할아버지 군자금 가슴에 품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동상 걸려 발가락 몇 개 잘라냈다지만 내 성에는 차지 않아/ 죽창이라도 깎아 꼬나들고 뭔가 모를 울분이 자꾸 치솟는 날에/ 앞으로 돌진하고 싶은 데 모방범죄가 아니라/ 높은 곳에 기관단총을 거치하고 광장으로 청사로/ 끝없이 난사하다가 사살되고 싶은 데 죽어도 확인 사살하는/ 총탄으로 마음과 몸이 걸레가 되어도 좋은데/ 의기투합할 사람도 없고 나를 부채질하는 바람도 불지 않고/ 아니면 폭파공학을 전공해 이 도시 뿌리마다/ 다이나마이터를 심어 일제히 터뜨려 불의 도시를 만들고 싶은데/ 그러려고 서두르지 않는 나나, 그런 조짐이 없는 날은/ 왠지 섭섭하고 끝없이 내가 왜소해지는 것 같아/ 아니면 총을 들고 탈자본주의를 위한 인질극을 벌이거나/ 암살단원이 되어 불길 뿜는 총구를 가지고 싶은 데/ 내 손에서 너무 멀어진 무기들이여./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만 총구에선/ 희망이 나온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를 거부하는/ 은밀한 무기고들이여. 무장해제한지 너무 오래된/ 내 몸이여, 마음이여. 오늘은 잠잠했던 피가 끓어오르는 날/ 미세먼지가 사라져 시야가 확보된 날/ 난동을 부리고 미친 듯이 노래 부르다가/ 자유여, 영원한 자유여 외치면서 자살해도 좋은 날/ 삼족이 멸해도 좋다면서 일 한번 저지르고도 싶은 날/ 개 같은 날에 꾸는 개꿈이어도 내 꿈에 몇 개의 수류탄을/ 하다못해 한 정의 소총이라도 쥐어줄 의인은 없는가./ 조상 중에 너무 어이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흘러가도 좋은데/ 부관참시당해도 마땅하다 생각하는데/ 나를 끝없이 충동질 하는 피는 어디서 흘러온 피 인가./ 새파란 하늘로 반기의 깃발을 드는 것처럼 아래를 불끈/ 치솟게 하는 이 개 같은 정력은 누가 선물한 것인가./ 앞 뒤 가리지 않고 물불 가리지 않는 개꿈을/ 날마다 꾸게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조작해서/ 공각기동대처럼 정의를 위해 선을 위해 나서는/ 싸움꾼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 하나 깔고 있나./ 자꾸 미쳐 날뛰고 싶은 나를 진정시킬 비 한줄기 없다./ 이 살기 좋은 세상 왔다고 자화자찬인 세상에서/ 난 개꿈에 취해 미친개로 날뛰다가/ 내가 벼르던 사람의 숨통을 물어뜯다가 몽둥이에라도 맞아/ 아니면 출동한 엽사에게 급소를 맞아 고꾸라지고 싶다.//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 김왕노
그것이 당신의 말이었을까. 유난히 많이 피던 청매화가/ 청매화 뚝뚝 질 때 청매화 그림자로 지던 광음의 그 그늘이/ 차마 당신이 다 읽어주지 못하고 간 공산당 선언문이거나/ 내 불온을 살찌우려는 몇 줄의 비문// 해독하지 못한 문장이 청매화로 뚝뚝 지고 그 꽃잎마저 삭아지고/ 당신이 가버리자 그제야 청매화 휘날리는 꽃잎 꽃잎이 당신의/ 푸른 別辭였음을/ 인연이 아니던 맞던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는/ 생에서 우러난 당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청매화는 가지에서 피어나 가지에서 지지만 아득한 지층에서/ 청매화 꽃 잎 잎을 길어 올린 것은/ 돌 틈도 비집고 드는 긴 뿌리와 긴 뿌리 끝에서 분열하는/ 말간 생장점이었음을/ 청매화 꽃 시드는 이유도 지층을 향한 회귀임을// 하므로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수면을 스친 제비가/ 몇 방울 물의 힘으로 창공으로 솟구쳐 올라 멀어지듯이/ 끝내 연줄을 끊고 멀리로 멀어지는 연처럼// 청매화 잎잎이 당신의 별사로 지금은 나를 가르치는 일획의 글/ 아직도 비린내 풍기는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는/ 당신의 눈물 하르르 하르르 번진 말씀// 지나가는 것은 정말 지나가므로 난 영원히 당신의 고삐를/ 녹음방초 내 마음의 언덕에 매지 못한다./ 비바람 몰아쳐 가는 당신의 길이 험해도 구절양장 같아도/ 말구유 같은 내 곁으로 당신을 몰아세우지도 못한다.// 지금도 당신의 別辭로 휘날리는 몇 잎 남았던 청매화 꽃잎/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저 휘날리는 別辭,別辭//

마지막에 대하여 / 김왕노
넘치는 잔보다 몇 방울 남은 술에 대하여/ 노래의 시작보다 마지막 꺼져가는 들불 같은 노래/ 마지막에 이르러 몸부림치는 네 노래에 대하여/ 자작나무 이파리에 토닥이다 멀어지는 비 소리/ 아쉽다며 울음보 터질 듯 우는 청개구리에 대하여/ 이제는 다시 피어날 수 없는 시드는 꽃에 대하여/ 개막식보다는 폐막식에 대하여 폐막식에 번지는/ 어둠에 대하여, 버려져 짓밟히는 꽃다발에 대하여/ 마침내 진짜라 했는데 가짜로 밝혀진 반지에 대하여/ 마지막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아쉽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같고 희비가 뒤섞여 혼란하지만/ 끝물의 벌판에 와 울던 물새의 노래처럼 애절해/ 마지막은 함구가 마땅한 것 같으나 마지막이라/ 한마디 건네야 하므로 엷어지다 사라지는 비행운/ 너와 오래 사귀던 푸른 시절을 두고 떠나/ 지금껏 소식 없다는 마지막 네 남자친구에 대하여/ 용두사미라도 생의 처음보다는 끝에 대하여/ 끝에 이른 마지막 사랑에 대하여/ 처음 그리움보다 몰락의 그리움에 대하여/ 마지막이 서러워 부둥켜안고 울어도 마지막에 대해/ 때 늦지만 멸종된 진실과 사라진 나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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