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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은봉 시인

부흐고비 2022. 4. 13. 11:00

이은봉 시인
1953년 충청남도 공주(현, 세종시)에서 출생했다.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삶의문학] 제5호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외 6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한성기 문학상, 유심 작품상, 가톨릭 문학상, 시와시학상, 질마재 문학상, 송수권 문학상, 풀꽃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봄바람, 은여우』, 『생활』 『걸어 다니는 별』 등이 있고, 시조집 『파편들에 대한 단상』, 평론집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화두 또는 호기심』, 『시와 깨달음의 형식』, 『시의 깊이 정신의 깊이』 등과 시론집 『화두 또는 호기심』, 『풍경과 존재의 변증법』 등이 있다. (사)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명예교수, 대전문학관장.

 



패랭이꽃 / 이은봉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스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민들레꽃 / 이은봉
농협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 눈 내려뜨면 낮은 둔덕 아래,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오얏나무 이야기 / 이은봉
걱정이 많은 아이야 근심이 많은 아이야 너는 지금 뭉게구름보다 한두 아름은 더 크고 넉넉한 오얏나무로 자라고 있다 하늘 높이 머리카락 흩날리고 있다/ 하늘에도, 하늘의 저 푸른빛 안에도 아픔은 있다 외로움은 있다 우울은 있다 슬픔은 있다/ 몸과 마음에 담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넓게 소외되며 제 뼈를 키우고 있는 슬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좀 더 단단해지는 오얏나무의 뼈, 뼈의 갈피에도 바위는 있다/ 삭히고 나면 삭히고 날수록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바위, 끝내는 거름이 되는 바위, 영양이 되는 바위……/ 오얏나무의 뿌리, 네 뿌리도 지금은 거름이 되는 바위 뜨겁게 껴안고 있다 부서져 흙이 되는 바위, 한숨이 되는 바위, 설움이 되는 바위……/ 모든 뿌리는 줄기와 함께 곁가지를 키운다 너도, 오얏나무도 여기저기 자꾸 흔들리는 곁가지를 키운다/ 곁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며 크는 너도 오얏나무도/ 근심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오얏나무 곁가지인 아이야 언젠가는 너도 크고 단단한 열매를 맺는다 외로울수록, 슬플수록 알이 굵으면서도 달디 단 오야를.//

사루비아 / 이은봉
골목길 어디/ 부서져 딩구는 장난감 병정들/ 그 먼 장난감 나라로/ 즈의 사내/ 오오, 미운 사랑을 찾아서 떠난/ 누이야/ 네 아이 슬픈 보조개/ 네가 남긴 설움이/ 여기 이렇게 한점/ 붉은 눈물로 피었고.//

아흐, 치자꽃 향기라니! / 이은봉
허겁지겁 몇 숟가락 점심 떠먹고 마악,일터로 돌아오는 길,환하게 거리를 메우는 것들,배꼽티를 입고 날렵하게 여기저기 다리 쭈욱 뻗는 것들,백양나무 하얀 우듬지들, 그것들 아랫도리 후둘후들 흔드는 것들// 석간을 사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는데/ 정신들이 없군 우르르 흩어 퍼지는/ 아흐,치자꽃 향기라니!// 흠흠 말 더듬으며 돌아보니 원시의 숲들,신비를 만들며 솟구쳐오르는 생령 덩어리들,그렇지 풀무질로 커 오던 고향 마을 유년의 에너지들, 시원도 하지 킁킁, 코 훌쩍이며 몇 숟가락 점심 떠먹고 마악, 일터로 돌아오는 길// 석간을 사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는데/ 정신들이 없군 우르르 뿜어져나오는/ 하여튼 저 젊어터진 향기라니!//

저 산수유꽃 / 이은봉
등불 환히 켜 놓고 걷는 하늘길이다/ 길 끊긴 곳, 빈 공중을 향해 내뿜는/ 샛노란 물줄기다 절벽 끝까지/ 몰려와 삐악거리는 저 병아리 떼/ 산기슭 어디에도/ 나아갈 길 없다 종종거리며/ 치마끈 풀어 헤치는 봄, 자궁 속으로/ 뜨거운 모가지, 처박을 수밖에 없다/ 무른 버짐 피어오르는 얼굴/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꽃이여 그만 등불을 꺼라/ 끝내 네가 되지 못한, 지난겨울의 꿈/ 산골짜기 시린 물그늘 속으로/ 조용조용 스며들고 있다 이울고 있다.//

빨래하는 맨드라미 / 이은봉
담벼락 밑 수돗가에 앉아/ 맨드라미, 옷가지 빨고 있다 지난여름/ 태풍 매미에 허리 꺾인 어머니/ 반쯤 구부러진 몸으로/ 여우비 맞고 있다 도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집 장남/ 그러려니 떠받들고 살아온/ 맨드라미, 텃밭이라도 매는 자세로/ 시든 살갗, 쪼그라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피워 올리고 있다/ 톡톡 터져 오르는 큰자식의 마음/ 비누질해 빨고 있다 어머니/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으로/ 이 집 장남의 지저분한 아랫도리/ 땅땅, 방망이 두드려 빨고 있다//

무화과 / 이은봉
꽃 피우지 못해도 좋다// 손가락만큼 파랗게 밀어 올리는/ 메추리알만큼 동글동글 밀어 올리는// 혼신의 사랑.....// 사람들 몇몇, 입 속에서 녹아/ 약이 될 수 있다면// 꽃 피우지 못해도 좋다// 열매부터 맺는 저 중년의 生!/ 바람 불어 흔들리지도 못하는//

봄밭 / 이은봉
월산리 부채밭에는 벌써 어린 새싹들, 뾰족뾰족 주둥이 내밀고 있다 새들도 날아와 지저귀고 있다/ 이 부채밭, 아주 오래된 곳이다 먼 옛날 백제 때부터 조상님들 대를 이어 일구어온 곳이다/ 올해도 농사를 지으려면 이곳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트랙터가 있으면 좋겠다 쟁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때가 되면 삽과 호미로라도 여기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사는 아득한 삼한 때부터 해온 일, 이미 봄이 훌쩍 와 있으니 삽과 호미라도 들고 나서야 한다/ 월산리 부채밭, 갈아엎지 않고 어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줄 수 있으랴 겁내지 마라 누가 뭐래도 봄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계절!//

파문 / 이은봉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에 맞은 호수는 이내 파문을 일으켰다/ 애써 마음 가다듬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파문은 둥근 물결도 품고 있지만/ 날카로운 파도도 품고 있었다/ 파도는 세상을 떠도는 한 자루 칼!/ 칼을 품고 있는 파문이 문제였다/ 칼은 어떤 것이든 찌르기 마련!/ 아무데서나 상처를 만들기 일쑤였다/ 매번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한바탕 곪아 터지고 나서야 겨우 아물었다/ 누군들 아프지 않을 수 있으랴/ 반란을 꿈꾸지 않을 수 있으랴/ 공들여 마음 가라앉히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을 맞고 어찌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랴//

싸락눈, 대성다방 / 이은봉
싸락싸락 싸락눈이 내려 쌓이던 겨울, 털모자도 가죽장갑도 없었지 양 볼에서는 차가운 솜털들이 보숭거렸고/ 스물한 살, 곤색 점퍼 위로 나뒹굴던 싸락눈만으로도, 가슴은 쩍쩍 금이 갔지 붉게 아팠지/ 아픈 마음으로 역전 대성다방의 낡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는 했지 멈칫멈칫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톱밥난로 푸스스 타오르던 왼쪽 구석, 하얀 손들 번쩍 번쩍 들려지고는 했지/ 옆구리에는 비닐커버의 노트 한 권씩이 끼어 있었지 두툼한 노트 속에는 토닥거리다 만 화장기 가득한 언어들/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오늘이며 내일의 역사를 지껄여대다가는 더러 노트를 바꿔 읽으며 침을 튀기기도 했지/ 조국이니 민중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나 가슴을 쳤고, 급기야는 반유신의 불화살로 날아가고 싶어 온몸이 뾰쪽뾰쪽 날이 서기도 했지/ 다방이 문을 닫는 밤, 역전 통으로 걸어 나가면 금방과 양복점이 가득한 거리에서는 자주 길이 끊겼지/ 기다릴 수도 없이 멈출 수도 없이 내려 쌓이는 눈 더미, 함박눈 더미, 눈알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가슴의 상처는 쉽게 덧났지/ 터덜거리는 구두코를 따라 무심코 걷다 보면 성탄을 알리는 대흥동 성당의 종소리, 아기예수를 경배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지/ 이제 대성다방은 없어졌지 싸락눈 내리는 겨을, 모자도 장갑도 없이 두 손 호호 불며 키우던 꿈도 미래도 너풀거리는 은발이 다 덮어버렸지 너풀거리는 은발 너머로 또 세월은 가고 오고,//

수캐의 노래 ㅡk를 위한 변명 / 이은봉
오늘도 내가 나를 다 감당하지 못해/ 뒷골목의 검정 비닐봉지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 다닐 때/ 그때 나는 한갓 짐승, 함부로 헐떡이는 수캐라오/ 술에 취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야/ 지랄발광을 떨어야 또 한 달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짐승, 이리나 승냥이라오/ 그대여 한 달에 한 번씩/ 술에 취해 야단법석을 떨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이 고질병을 뭐라고 하지 말아 주오/ 겉으로 보이기에는 몰골이 좀 그렇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으니/ 그냥 그대로 내버려 주오/ 더러 피해를 입히더라도 어쩌겠소/ 자기가 무슨 프로이트라고/ 유년 시절 너무 엄한 아버지한테/ 너무 많이 종아리를 맞아 그렇다고/ 따귀를 맞아 그렇다고/ 내 지랄병을 두고 더는 분석하지 말아주오/ 어렵게 설명하지 말아주오/ 누구의 몸에나 짐승은 사는 법/ 내 몸에 사는 짐승은 좀 유별날 뿐이라오/ 아버지의 동상 앞에서/ 그분의 거룩한 역사 앞에서/ 내가 나 혼자 오늘을 다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턱없이 부족한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아주오 그대여 아직 나는 그냥/ 한 마리 수캐라오 수캐 같은 짐승이라오/ 한 달에 한 번씩 월경을 하는 젊은 여자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술에 취해야 하는/ 술에 취해 길바닥에 나뒹굴어야 하는/ 더럽고 서러운 천형을 타고 났을 뿐이라오.//

산길을 가며 / 이은봉
산길을 가며 나무를 만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저처럼 많은 나무들/ 나무들 중에도/ 좋은 나무가 있다// 저처럼 많은 사람들,/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숲을 만드는 것처럼.//

산 넘어 저쪽 / 이은봉
밥을 찾아 내 발로 달려온 곳이므로 즐겁게 살아야 한다 힘들여 밥을 먹는 것도 다 살기 위한 것 아닌가./ 어떻게든 이 세상 살아가려면 아무 소리 마라 참고 견뎌야 한다./ 날선 칼날이 아랫배를 스윽 긋고 지나간다 뾰쪽한 송곳이 가슴께를 콕콕 찌른다 핏방울이 땅바닥 위로 똑똑 떨어진다./ 시원하니, 시원하다 아프니, 아프다 아파도 꿍얼꿍얼 불만을 토로해서는 안 된다./ 노동을 파는 데도, 공짜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닌 데도 칼 쥔 자들은 늘 나를 굽어보고 싶어 한다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 밥줄을 쥐고 있으면서 굽어보고 내려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수만 년 동안 밥을 두고 서로를 잡도리해온 것이 인간 아닌가 온갖 우월감으로 어깨를 흔들어대 온 것이 인간 아닌가./ 밥을 찾아 기꺼이 달려왔으므로 슬퍼해서는 안 된다 슬픔을 알기에 인간은 비로소 인간 아닌가./ 수많은 생명들이 아직도 물건에 지나지 않거늘 그냥 인간인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삶을 얻어 삶을 사는 곳은 다 고향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고향이 아니랴 객지에 살더라도 서러워 말아야 한다 어디에서 산들 서럽지 않으랴.// 밥을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삶이거늘 무엇을 서러워하랴 무엇을 아파하랴 평화와 행복은 언제나 산 넘어 저쪽 먼 곳에 있거늘…….//

대전역에서는 / 이은봉
대전역에서는 가락국수 냄새가 난다/ 플랫폼에서부터 꿀꺽 침 삼키는 소리 들린다/ 지난 시절이 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눈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전역에서는 울음 삼키는 소리 들린다/ 대합실에서부터 눈물이 핑 돈다/ 지난 시대가 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최루가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전역에서는 아직도 1987년이 맴돌고 있다/ 손 흔들며 떠나던 슬픔이 남아 있다/ 한 손엔 책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젓가락을 들고/ 가락국수를 먹어치우던 절망이 떠돌고 있다.//

시간의 덫 / 이은봉
황혼이 날개를 펴는 오후였네 저녁볕 환하게 번지는 둔산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는 멈췄네/ 느릿느릿 바람이 불고, 주춤주춤 송이눈이 부서져 내렸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두리번거리며 눈길 위로 발자국을 떼었네 그러는 동안 눈앞을 지나가는 것은 앙상한 가로수들뿐이었네/ 바로 그때였네 버석대는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당신은 왔네 시나브로 열리는 자동차의 창……/ 갑자기 30년이 넘는 시간이 열리고, 여름 숲 같은 당신은, 당신의 자동차는 나를 싣고 달렸네/ 계룡으로 논산으로 회인으로 보은으로 금산으로…… 지난 시대를 향해 달리는 속도에 좇기면서도 참을 수 없는 열정은 자꾸만 꽃을 피웠네/ 지는 꽃향기 속에서도 그대와 나는 무언가 되고 싶었을까// 잎사귀를 떨구고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서, 절벽을 타고 흐르는 폭포 아래에서 나는 그대의, 그대는 나의 집이 되고 싶었을까// 끝내는 시간의 덧에 갇혀 집은커녕 문도 되지 못했네// 걸음마다 불덩어리를 앓다가는 고개를 돌리고 떠나왔던 길로, 둔산 터미널로 되돌아와야 했네// 그때의 황홀만은 잊지 말아야지 소중하게 간직해야지 다짐이나 했을 뿐이네// 황혼이 검은 날개를 펴지 않더라도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어 더는 갈 곳이 없었네// 계속해서 흙탕물 속을 헤엄치다 보니 너무 지쳤네 아가미가 없어 숨 쉴 수조차 없었네// 손사래 대신 봄꽃을 흔들더라도 그때 그 1970년대는 다시 오지 않았네// 당신은 흐느껴 울고, 나는 당신의 등을 두드리다가 어느덧 시간의 덫에 갇히고 말았네 시간의 발자국에……// 어떤 절망이 시간을 이길 수 있을까 황혼의 검은 날갯짓 속에서는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네.//

한 번만 / 이은봉
달 뜨는 어느 봄밤이었네/ 숲속 나무벤치 위/ 그녀와 함께 앉아 있었네// 시원한 바람 너무 좋아/ 은근슬쩍 그녀의 손 잡았네/ 자꾸만 가슴이 들떠 올랐네// 촉촉해진 손 더 꼭 잡은 채/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네//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그녀가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어깨에 기댄 채 말했네// 뭐라고, 한 번 만이라고/ 그녀는 부푼 제 가슴/ 내 작은 손 안에 들이밀었네.//

생활 / 이은봉
우리 집 거실 귀퉁이에는/ 무말랭이가 마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말랭이가 마르던 곳이다/ 땅콩알이 마르던 곳이다/ 은행알이 마르던 곳이다 구린내를 풍기며/ 인삼주도 더덕주도 호박덩이도 함께 마르고 있는/ 우리 집 거실 귀퉁이/ 고향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농촌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와 아내는 여태껏 농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오가며 살고 있다/ 좁아터진 거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오늘도 아내와 나는 습관처럼/ 자연에서 준비해온 먹거리들을 다듬고 있다/ 이것들 다 나날의 목구멍이 시킨 것이지만,/ 나날의 생활이 시킨 것이지만....../ 목구멍보다, 생활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조촐한 가족 / 이은봉
멀리 풍장 치는 소리 들린다/ 팔월도 한가위/ 산마을 아득한 골짜기 저쪽// 색동옷 곱게 차려입은/ 어린아이 둘……// 젊은 엄마를 따라/ 묏등 앞 오가며 상을 차린다// 조촐한 가족, 두 번 절하고/ 음식 나누는 동안/ 산까치, 참나무 끝에 날아와 운다//

만점 남편 / 이은봉
안 취하려 안 취하려 하다가/ 사람들 너무 좋아/ 그만 고주망태기로 돌아와 누운 밤/ 오늘도 어김없이/ 아내는 바가지를 긁는다/ 당신, 이럴 줄 몰랐어요/ 정말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이렇게 한심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저 혼자 실컷 왜장 치다가/ 저 혼자 실컷 핏대 올리다가/ 저 혼자 실컷 신경질 내다가/ 이것만 지키면 만점 남편이라며/ 아내는 순식간에 몇 항목 종이에 쓴다/ 쓰고 큰 소리로 읽는다/ - 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것/ - 이, 술 마시지 말고 빨리 귀가할 것/ - 삼, 제 물건은 제 자리에 - 책, 담배, 양말 등/ - 사, 하루 삼십 분 가족들과 대화할 것/ - 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목욕할 것/ 하고, 목청 높여 읽다 말고/ 아이고, 답답한 이 남편네야/ 아이고, 폭폭한 이 서방네야/ 아이고, 철없는 이 신랑님아/ 하며 내 갈비뼈와 엉덩이/ 마구 꼬집는다 주먹 꼬나쥐고/ 팍팍 쳐댄다 아이고, 사람 살려요.//

따듯한 말 / 이은봉
말에는 다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지/ 차가운 말에는 차가운 마음이 담겨 있고/ 따듯한 말에는 따듯한 마음이 담겨 있지/ 따듯한 말은 사전 속에 있지 않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날의 삶 속에 있지/ 밥솥의 밥처럼 말도 서로 나눌 때 따듯해지지/ 따듯한 세상을 위해 따듯한 말 나누어야지/ 국솥의 국 나누듯 따듯한 말 나누어야지/ 따듯한 말은 배추 속처럼 뽀얗고 부드럽지/ 언제나 가슴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게 하지/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말을 나누다 보면/ 무쇠 밥솥의 찰진 밥을 나눌 때처럼/ 세상 둥그렇고 찰지게 익어가지 주걱 위/ 밀가루 반죽 젓가락으로 뚝뚝 떼서 만든/ 구수한 수제비 같은 말 만들고 싶지/ 따듯한 말로 가득한 세상 만들고 싶지//

보석 / 이은봉
바닷속 조개의 자궁에서 크는 보석,/ 깨지기 쉬운 영혼, 건드리지 마라/ 함부로 상처를 주지 마라/ 누군들 상처가 아프지 않으랴/ 상처 난 과일이 향기를 만들지라도……/ 향기의 영혼은 날아가기 쉽다 사라지기 쉽다/ 상처받은 영혼은 다 아프다/ 당신의 영혼도 상처받은 적 있다/ 두고두고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아프다/ 출렁출렁 상처받은 당신의 영혼/ 영혼의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 아무는 만큼 반짝반짝 보석이 영근다/ 모든 보석은 아리다 쓰리다 시리다/ 당신의 영혼 속 뽀얗게 이는 설움이라니/ 고개 들어 먼 하늘 바라보면/ 진주구름 송알송알 영글고 있다.//

미인은 자유보다 / 이은봉
미인은 자유보다 돈을 더 좋아해요/ 옛날 한때는 돈보다/ 자유를 더 좋아했는데요/ 그때는 자유의 여신상처럼/ 횃불을 높이 들고 있기도 했지요// 지금도 가끔씩 그녀는/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게 해요/ 돈이 없는 걸 알면 금방 외면하지만요/ 참 뻔뻔해요 이 예쁜 미인/ 자칫하다 걸레 취급을 받기도 하지요// 미인은 오늘도 내가 저의/ 식민지 백성이 되기를 원하나 봐요/ 노예가 되기를 원하나 봐요/ 난바다 저쪽 먼 곳에 사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군요.//

흔들의자 / 이은봉
흔들의자가 있어야겠다/ 흔들리는 세상/ 더욱 흔들리기 위하여// 걸음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저 마음들 보아라// 흔들의자가 있어야겠다/ 흔들리는 세상/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휘파람아 / 이은봉
이발소 방씨의 오랜 폐렴도/ 정거장 버들가지처럼 흩날려버리고/ 제품집 순이의 고된 하루도/ 먼 하늘로 띄워 보내는/ 서럽지, 낮은 음성의 휘파람아!//

짐승 / 이은봉
먼먼 옛날 어렵게 나는 내 안의 짐승으로부터 떠났다 그때는 내 안에도 아주 쉬운, 검고 흰 짐승이 살고 있었다/ 짐승은 자연, 자연은 사물, 사물은 식물, 식물은 동물, 동물은 광물……, 식물과 동물과 광물을 떠나며 나는 한 말씀 얻었다/ 말씀은 神, 神은 法, 法은 理……, 그렇게 나는 오래 전 짐승을 떠나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秩序, 秩序는 原理, 原理는 法……, 나는 늘 법을 받들며 살았다 내내 법과 더불어 살았다/ 마침내 나는 법이 되었을까 그렇지는 못했다 끝내 나는 짐승을 떠나지 못한 채 살았다 여전히 짐승과 함께 살았다/ 별안간 꿈틀꿈틀 짐승이, 식물이, 동물이, 광물이 내 안을 꽈 차오르고는 했다 자주 짐승을, 자연을, 사물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사물은, 사물의 숲은 어두웠다 희고 검었다 잘 보이지 않았다 걸핏하면 충동이, 발작이, 황홀이 딱딱한 막대기를 들이밀고는 했다.//

 

                         눈 / 이은봉


눈이 내린다/ 두런두런 한숨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뺨 부비며//

눈이 내린다/ 별별 근심스런 얼굴로/ 밤새 잠 못 이룬 사람들/ 사람들 걱정 속으로//

눈이 내린다/ 참새떼 울바자에 내려와 앉는 아침/ 아침 공복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뽀드득 뽀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골령골의 봄 / 이은봉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민들레가 꽃 피워 몸 흔들며 운다/ 나싱개가 꽃 피워 몸 비틀며 운다/ 진달래가 꽃 피워 몸 날리며 운다// 노란 꽃들, 하얀 꽃들, 붉은 꽃들/ 꽃대를 흔들며 땅속 깊이 뿌리를 뻗는다/ 차마 뼈다귀들까지는 닿지 못한다// 사람들이 모여 술 따르고 절한다/ 조용히 음복하고 눈 감았다가 뜬다/ 피비린내의 여름이 탕탕탕 지나간다.//

길 위의 생로병사 ㅡ북간도 기행 / 이은봉
막하 시내의 자작나무 숲 공원, 주춤주춤 떠난 산책길 멀고도 깊다 내친김에 숲 공원 이곳저곳을 뚜벅뚜벅 걸어 본다/ 찌지골 찍찍, 어디선가 낯익은 새소리들 들린다/ 졸리다 거듭 눈이 감긴다 낮 동안 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크고 작은 벌레들 반갑다고 마구 달려든다/ 저것들, 저 물것들도 외로운가 보다 그렇지 움직이는 것들은 다 외롭지 흙을 떠나온 것들......, 흙이 버린 것들 흙으 로 돌아갈 때까지는 다 외롭지/ 외로움 달래려 나도 나무벤치 위에 앉아 옛 노래들 휘파람으로 불러본다/ 우물쭈물 멜로디를 잃어버리는 사이 깜박 졸았나 보다/ 끄덕이는 머리통, 자꾸만 자작나무 둥치에 부딪는다/ 여기 그냥 쪼그리고 앉아 깊이깊이 잠든들 어떠리 생로병사가 다 길 위의 것이거늘!//

소금쟁이뿐! / 이은봉
물빛 너무도 푸르른 호수 위, 사뿐히 내달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영혼을 배운, 오직 소금쟁이뿐!// 긴 다리 휘청대며/ 아스팔트 위 걷고 있는 사람아// 바람처럼 안개처럼 호수 위 내달리고 있는, 예수님의/ 저 귀여운 제자 앞에서, 너는 무엇으로 사람이겠느냐// 버들잎 살랑대며 노래하는 호수 위/ 소금쟁이처럼 가볍게 내달리고 싶은 사람아// 무엇으로 너는 소금쟁이겠느냐 아아야, 사람아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그만 사람이겠느냐.//

돌멩이 하나 / 이은봉
아침 산책길, 돌멩이 하나 문득 발길에 채인다 또르르 산비탈 아래 굴러 떨어진다/ 저런저런… 내 발길이 그만 세상을 바꾸다니!// 달팽이 한 마리, 제 집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풀섶 근처…/ 이슬방울마다 황홀한 비명, 하얗게 열리고 있다//

발자국 / 이은봉
삼짇날 지난 남쪽 하늘가, 제비 몇 마리 바람 데불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뛰놀고 있다 달리고 구르고 뒹굴고……// 더런 빨랫줄 위, 사뿐히 내려앉기도 한다// 약오른 바람들, 가끔은 제비들 날개 꼬옥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그러면 제비들, 대각선 길게 그으며 휘이익,/ 빠져 달아난다// 남쪽 하늘가 어디, 발자국 하나 없다//

북, 소리 / 이은봉
멈칫멈칫 아프다, 아프다 하는 소리 들려온다/ 귀기울이고 들어보면 어디선가/ 고프다, 고프다 울어대는 북, 소리/ 아흐, 울음소리 들려온다 저 소리/ 입 모아 南으로 열려 있다/ 한때는 둥둥둥, 가볍게 내 몸 빠져나가던 소리/ 함부로 거슬러 올라가던 소리/ 이제는 우르르 내려오며/ 와와와 개구리떼처럼 와와蛙蛙대는 소리/ 아흐 그 소리, 으흐흐 하고 울어대는 소리/ ………/ 저토록 망가질 수 있을까/ 세상의 오랜 추억과 꿈/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 하여, 마침내 의심하는 사람들/ 아름드리 통나무를 깎아/ 헉헉대는 소리의 숨구멍/ 꽉꽉 틀어막는 사람들/ 사람들 못내 구시렁대는 소리/ 도 함께 들려온다 으흐흐 웅얼대는/ 너무도 무거운 저 북, 소리/ 조바심으로 안타까움으로/ 고프다, 고프다 이윽고 소리치는/ 아프다 아프다 외쳐대는 저 北, 소리/ 들려온다 멈칫멈칫 그대 가슴으로 들려온다.//

청개구리와 민달팽이 / 이은봉
마곡사 선방 앞에 선다/ 자미나무 검붉은 꽃잎들 사이로/ 청개구리 한 마리 초싹대며 뛰어오른다/ 얼기설기 나무판자들 엮어 세운/ 선방 외짝 문 앞에는/ 숯과 고추를 끼워 만든/ 금줄 처져 있다 굵은/ 통대나무들 가로뉘어 있다/ ‘참선 중입니다’ 먹글씨 밑으로/ 엉금엉금 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가고 있다 촉수를 늘여/ 언젠가는 이 선방/ 죄 더듬으리라 마음먹는 사이/ 오조조, 자미나무 꽃잎들/ 바람에 진다 민달팽이의 발원도/ 흙 길 위로 진다 마곡사/ 지쳐빠진 선방 앞/ 늙은 매화나무 등걸을 밟고/ 언젠가 나도 청개구리 한 마리로/ 초싹대며 뛰어오른 적 있다//

청명전야(淸明前夜) / 이은봉
머릿속 지푸라기로 가득 차오른다/ 밥 짓기 싫어/ 라면 끓여 저녁 끼니 때운다// 라면에는 신김치가 제격이다// 생수병 들어 꿀꺽꿀꺽 물 마신 뒤/ 소매깃 집어 쓰윽, 일 닦는다// 담배 한 대 피워 문 채/ 베란다로 나간다 멍한 마음으로/ 아래 쪽 화단 내려다본다// 샛노랗게 지저귀고 있는/ 개나리꽃들 사이/ 철늦은 매화 몇 송이 뽀얗게 벙글고 있다// 저것들은 좋겠다 외롭지 않겠다// 쉰의 나이를 넘기고서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무언가 크고 높고 귀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로 가득 찬 머릿속/ 디록디록 굴러본다 사랑은 본래/ 차고 시고 아리게 크는 법//

당나귀 / 이은봉
1// 눈을 떠보니 귀뺨 파란 당나귀, 곁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 내 속을 빠져 나온// 촉촉이 봄비가 내려, 하늘과 땅 사이, 경쾌한 음악을 만드는 시간, 솜털 뽀얀 당나귀, 서서히 잠 깨며 기지개 켜고 있다 젖은 발꿈치로, 착한 휘파람으로 내 작은 아파트 방바닥, 식어빠진 욕망들 뒤흔들고 있다// 혈관 속, 넘쳐흐르는 검붉은 포도주라니! 불길이 인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청춘, 천천히 몸 비튼다// 이렇게 불태우고서도/ 火印을 남기지않을 수 있을까/ 목덜미로 번져오는/ 술기운처럼 스며들 수 있을까//
2// 잠시 눈감은 사이, 철부지 어린 당나귀, 다시 내 품 안으로 기어들어 온다 허리를 접고 천천히 눕는다// 봄비가 내려, 하늘과 땅 사이, 몽클몽클 리듬을 만드는 시간, 차마 어찌 할 수 없어서일까 당나귀는 누워, 살포시 내 품 안에 누워 방안 여기저기 깜짝깜짝 놀라는 눈망울들, 지그시 손가락으로 눌러 덮는다// 넘쳐흐르는 혈관 속, 검붉은 포도주라니! 불길이 인다 오래도록 누워 있던 죄, 천천히 녹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지켜보는 마음 어지럽다/ 너무 무섭다 악착같이/ 투명한 유리벽 세우는 마음!//

무엇인가 / 이은봉
무엇인가/ 三藏寺 골짜구니에/ 누워 있는 社主는/ 시체는 무엇인가/ 허리에 칼이 꽂힌 채/ 피비린내 바람 속/ 신음소리 목탁소리/ 새벽 내내 휘돌아간 장삼자락에/ 씌어 있는 글씨는 무엇인가/ 상좌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죽음은/ 性도사라고 씌어 있는 글씨는/ 무엇인가 그 못난 社主의 생전에/ 쏟아져내리던 달빛은/ 지폐다발은/ 속삭이던 눈웃음은 지금/ 그런데 무엇인가.//

향수 / 이은봉
불고추를 먹은 듯한 더위가/ 마지막 몸을 푸는 밤/ 여자는 바라본다/ 이층 베란다에 올라/ 무엇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끈끈한 바람, 흐벅진 중년의/ 벅찬 군살을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바라본다/ 길 건너 나무판자로 이은/ 여름밤 쫄쫄이 수돗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구릿빛 총각들이 모여/ 왁자지껄 물을 끼얹는/ 오오, 아름다운 나라/ 설레설레 고갤 저으며/ 그리움이, 첫사랑이 밀려나오고/ 너도밤꽃 향기/ 미운 오리새끼처럼 종종거린다/ 뒤뜰 정원을 가득 메운다.//

겨울 방학 / 이은봉
내 나이 그새 서른하나/ 어쩌다 잘못 시작한 공부를 하겠다고/ 쫓기는 마음으로 책을 잡는다/ 친구들은 모두 장가를 들어/ 어허 춥다. 안방에 누워/ 여우 같은 마누라와 자식새끼들/ 솜털 같은 사랑을 어우르는데/ 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나/ 무수한 돌팔매에 얻어 맞으며/ 빌려 쓰는 연구실 창 밖엔 눈 내리고/ 엉덩일 부비며 눈 내리고/ 배고프지, 어지러운 세상을 향해/ 나는 뜻모를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학생들은 나보다 더 폭폭해서/ 번번이 몰려와 치를 떠는데/ 그나마 식민지 토막난 나라 /오오, 중진국 가난한 젊은 학자여/ 주당 일곱시간 시간강의도/ 실은 얼마나 큰 혜택인가/ 살뜰한 부모님 못뵌 지 오래/ 고향 눈보라 속 청정한 소나무를 생각다보면/ 텅빈 외양간, 녹슨 쇠스랑을 생각다보면/ 잘도, 타는구나 먼 나라 중동에서 온 /석유, 난로 위에 구수한 라면이 끓고/ 나는 또또 콧노래 중얼대며 책을 잡는다/ 그만 악착같이 책을 읽는다.//

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 ㅡ송윤옥 / 이은봉
매우 두부두루치기 백반을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리어카에서 파는 헐값의 검정 비닐구두 잘도 어울리던, 반주로 마신 몇 잔의 소주에도 쉽게 취하던, 마침내 암소를 끌고 가 썩은 사과를 바꿔와도 좋다던, 맨몸으로 좋다던 여자가 있었다 한때는 자랑스럽게 고문진보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여자, 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 장독대 같은 여자/ 두부두루치기 같은 여자/ 맵고 짠 여자// 가 있었다 어쩌다 내 품에 안기면 푸드득 잠들던 여자가 있었다 신살구를 잘도 먹어치우던, 지금은 된장찌개 곧잘 끓이는, 두 아이 의 엄마가 된 여자......//

책바위 / 이은봉
바위는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다/ 바위 위에 앉아 그냥 벅찬 숨이나 고르다 보면 책의 흐릿한 글자들 보이지 않는다/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갈피도 찢겨져 나가 자칫하면 책이 숨겨져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은 일실된 옛 글자로 씌어진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자꾸만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홍당무처럼 낯을 붉히는 참식나무들의 마른 잎사귀들이나 귓가에 다가와 글자들의 뜻을 겨우 속삭여 주기 때문이다/ 더러는 멧새들이 날아와 하나씩 글자들을 짚어 가며 재잘 재잘 뜻을 설명해줄 때도 있다/ 제 몸에 숨기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책의 내용이 대견스러워서일까 바위는 가끔씩 엉덩이를 들썩여 가며 독해를 재촉하기도 한다/ 내 둔한 머리로는 뽀얗게 형상을 그려가며 읽어도 간신히 몇 마디 뜻 정도나 깨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앞단추를 따고서도 거듭 젖가슴을 열어 보이는 바위의 부푼 엉덩이 이에 철썩, 손바닥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문득 정신을 차리는 바위는 때로, 너무 서두르지는 마세요 벌써 겨울이 오고 있지만요, 은근히 다짐을 주기도 한다/ 바위는 명년 가을이 와도 내가 제 몸에 숨기고 있는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끈질기게 그녀가 치맛자락 속에 숨기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책을 계속 읽어 나갈 작정이다/ 옛 글자들을 읽고 일실된 진실을 복원하는 일을 나 말고 누가 또 할 것인가/ 애써 궁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바위의 숨소리만을 듣고도 그녀가 제 속살에 감추고 있는 책의 내용을 다 알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

난바다 / 이은봉
난바다는 뺑덕어미, 변덕이 심한 바다. 풍랑을 일으켜서는 제 몸을 뒤집어대네./ 난바다, 사나운 바다, 뱃길이 끊긴 바다./ 서해에서 가장 먼 섬, 외연도까지 따라와서는 고약한 뺑덕어비, 심술을 떨어대네. 청이의 오래된 설움, 오돌오돌 떨게 하네./ 어쩌다 부아가 나 꼬라지를 부려대나. 거칠어라 난바다. 감당하기 힘들어라./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착한 것 별로 없네.//

분청사기 판편들에 대한 단상 / 이은봉
무등산 자락 여기저기/ 분청사기 파편들!// 깨어지고 부서져/ 조각난 세월들!// 미어져 터져버린 가슴, 너무도 많구나!// 가마터 주변마다 버려져 있는 목숨들,// 땅 속에 묻힌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저처럼 되살아나서 내일을 꿈꾸다니!// 꿈이야 뭇 생명들의 본마음 아니던가.// 버려진 꿈 긁어모아/ 이곳에 쌓고 보니/ 무등산 골짜기마다/ 동백으로 피는 봄볕!//

오류동 빈터 / 이은봉
쇠비름이며 물여뀌가 자라고, 강아지풀이며 개망초꽃이 뾰족이 민낯짝 내미는 곳/ 가끔은 콩나물이며 밥알이며 라면발 따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곳/ 자치기를 하는 아이들, 땅뺏기를 하는 아이들, 히히덕대는 소리, 엉덩이 까불대는 소리/ 때로는 고등어가 싸요 싸 꽁치도 참꼬막도 있어요 물오징어도 있어요 더벅머리 총각, 트럭을 몰고 와 생선을 팔기도 하는 곳/ 이제는 없는 곳,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빌딩들, 굶주린 마음 하나로 아등바등 똬리를 트는 곳/ 눈 감으면 곡마단 트럼펫 소리, 버나 돌리는 소리, 원숭이 달래는 소리 아늑히 들려오는 곳.//

미인은 자유보다 / 이은봉
미인은 자유보다 돈을 더 좋아해요/ 옛날 한때는 돈보다/ 자유를 더 좋아했는데요/ 그때는 자유의 여신상처럼/ 횃불을 높이 들고 있기도 했지요// 지금도 가끔씩 그녀는/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게 해요/ 돈이 없는 걸 알면 금방 외면하지만요/ 참 뻔뻔해요 이 예쁜 미인/ 자칫하다 걸레 취급을 받기도 하지요// 미인은 오늘도 내가 저의/ 식민지 백성이 되기를 원하나 봐요/ 노예가 되기를 원하나 봐요/ 난바다 저쪽 먼 곳에 사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군요.//

꽁치 / 이은봉
소금에 절여, 가스불로 구운 등푸른 바다 한 마리, 파아란 접시 위, 벌렁 누워서도 동그랗게 눈뜨고 있네/ ​고향 그리워 차마 눈감지 못하고 있네/ 폴짝폴짝 튀어오르는 이 집 아이들, 제비새끼처럼 쫙쫙 주둥이 잘도 벌리고 있네/ 엄마가 떼어주는 바다 한 조각, 재잘재잘 잽싸게 받아 처먹고 있네 등푸른 바다 한 마리, 야금야금 스러지고 있네.//

겨울의 갈피 / 이은봉
맞서 싸워야 할 공동의 적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터벅터벅 눈보라치는 산골짜기를 걸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 머리칼은 흩날리고 다리는 푹푹 꺾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운 때가 있다/ 형편이 이렇게 급박한 데도,/ 해와 별의 運氣가 바뀌면 함께 걷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송곳고드름이 열릴 때가 있다 정수리에 맞으면 죽고도 남을 날카로운 송곳고드름이/ 가끔은 어이없게도 이 송곳고드름이,/ 발등 위에 떨어져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며 눈보라치는 산골짜기를 걸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 우선은 그렇게라도 산골짜기를 걸어 내려가야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때의 일을 가슴 깊이 저장해 두어야 한다/ 겨울은 본래 갈피마다 무언가 숨기고 감추는 계절!/ 갈피를 잃어버려 영영 다시는 그것을 꺼내지 못하더라도 가슴 깊이 저장해 두는 것은 아름다운 일!/ 봄이 오고 여름이 오더라도 소중하고 귀한 일!/ 함께 산골짜기를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송곳고드름이 열리는 것이 어찌 당신 탓이겠는가/ 해와 별의 운기가 바뀌어 그렇거늘!/ 어느 누가 앞장 서 길을 만드는 고통을 원하고 바라겠는가/ 눈보라가 치는 산골짜기를 걸어 내려가다 보면 앞장 서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좀 더 세찬 눈보라를 맞을 수밖에 없다/ 눈보라 중에는 송곳고드름도 섞여 있는 법이라고 믿으며/ 일단은 불빛 환한 人家를 찾아 이 추운 산골짜기를 터벅터벅 걸어내려 가고 보아야 한다/ 인가의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묻어 몸을 녹인 뒤/ 천천히 새벽을 맞으며 털벙거지를 벗고 서로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아도 좋다/ 그때쯤에는 이미 마음이 거울!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둘러 이 추운 겨울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은 자잘한 의심 다 버려야 한다.//

초록 잎새들 / 이은봉
굴참나무 초록 잎새들 옹아리 한다고?/ 고 어린 것들 촐랑촐랑 말 배우기 시작한다고?// 뭐라고, 벌써 입술 꼼지락거리고 있다고?/ 조 작은 것들 마음 활짝 펴고 있다고?// 그렇지 녀석들 환하게 웃을 때 되었지/ 고 예쁜 것들 깔깔대며 장난칠 때 되었지// 그새 초여름 더운 바람 불고 있다고?/ 고 귀여운 것들 글씨 공부 꼬불꼬불 신난다고?//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대는 밤 / 이은봉
이놈, 한때는 반달곰 새끼들처럼 세상의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나와 뒤엉켜 뛰어놀던 놈이다/ 이놈, 한때는 국감장의 의원님들처럼 으르릉거리며 내게 침을 튀기던 놈이다// 참 한심한 놈,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밤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tv 채널을 바꿔가며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대는 밤이다/ 리모콘에서 쏟아져 나오는 총알들 피웅피웅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밤이다/ 침대머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꼬마등을 꺼버리자 창밖의 달빛들조차 파르르 몸을 떠는 밤이다// 참 싸가지 없는 놈, 이놈의 칼에 발꿈치가 잘려 제대로 걷지 못하던 날이 도대체 얼마인가/ 이놈, 죽어가면서 내 마음 속 깊이 소용돌이를 만드는 놈, 이놈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초여름 밤 / 이은봉
독감으로 몸져누운 초여름 밤이다/ 달님이 내려와 한 손에 턱을 괸 채/ 기웃거리고 있기 때문일까/ 불 끄자 창밖 환하게 밝아온다/ 매운 코 킁킁거리며 베란다에 나가본다/ 창문 열고 달님의 얼굴 올려다본다/ 무슨 설움 있나 무슨 아픔 있나/ 하늘 나는 백제관음처럼 하얀 달님의 얼굴/ 물끄러미 내 마음 내려다본다/ 안개가 피어오르기 때문일까/ 부드럽고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달님의 마음, 내 가슴 촉촉이 적신다/ 촉촉이 젖은 마음으로 나도/ 먼 하늘, 먼 도시의 변두리/ 어린 자식 키우느라고 종종대고 있을/ 늙고 주름진 달님의 얼굴 올려다본다/ 초여름 밤, 저도 독감으로 몸져 누워 있나 보다//

잠자리(첫사랑) / 이은봉
마른 수숫대 위/ 살포시 앉아있는// 가만가만 다가서면// 차르르 날아가는// 잠자리, 고추잠자리/ 서러워라 가을빛!//

결석 / 이은봉
돌 속에서 내가 자랐듯이 내 속에서 돌이 자라고 있다 돌 속에서 내가 나왔듯이 내 속에서 돌이 나오고 있다// 콩이여 팥이여 콩팥이여 돌에서 나와 돌로 돌아가는 생명이여 죽음이여//

본적 / 이은봉
창문을 열면 푸른 소나무 숲 우르르 밀려오던 곳이다/ 걸핏하면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던 곳이다/ 삼월에는 풀씨들의 엉덩이 꼬집어 늦잠 깨우던 꽃샘바람, 샛노랗게// 칼날 세우던 곳이다/ 오월에는 숲 그늘마다 꿩이며 꾀꼬리 따위, 불쑥불쑥 태어나던 곳이다/ 유월에는 두더지 흙 일구고 오소리 구멍 파던 곳이다/ 칠월에는 옥수수 밭에서 고구마가 익는 동안,/ 어슬렁대던 발길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곳이다/ 담배를 피우고 옛 사랑 따위 떠올려보며, 피식 웃던 곳이다/ 시월에는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들뜬 마음으로/ 알밤을 줍기도 하고 홍시를 따기도 하던 곳이다/ 이제는 아파트를 짓겠다고 마구 파헤쳐버린 곳이다/ 검붉은 황토만 혓바닥 길다랗게 빼물고, 질퍽하게 널브러져 있는 곳이다/ 더러는 마른 아카시아 잎사귀들 날아와 쌓여, 아픈 상처 어루만지고 다독거리는 곳이다/ 되찾을 수 없는 본적, 이제는 지번으로만 남은 곳이다.//

호박 넝쿨을 보며 / 이은봉
두엄 구뎅이 뚫고 호박넝쿨 몇 순 담벼락 타고 오른다/ 가쁜 줄타기 한다 오뉴월 마른 가뭄 뚫고 따가운 햇볕 뚫고// 소낙비에 흠씬 몸 적시며 마침내 담벼락 꼭대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내려다 보는 호박넝쿨들 장하구나 노랗게/ 피워 올리는 호박꽃들 뽀얗게 드러내놓는 젖통들 굉장하구나// 젖은 몸 털며 발 아래 시원히 굽어보면 호박넝쿨들/ 시원하구나 와락, 현기증 밀려 오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여기 담벼락 아래 두엄더미 아래 땅으로만/ 손 뻗으며 납작 몸 젖히는 놈들도 있구나 아프게 몸 비트는/ 놈들도 있구나// 놈들이 피워 올리는 꽃들 참하게 꺼내어놓는 젖통들,/ 이라고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환하게 빛나지 않으랴//

늙은 바람과 함께 / 이은봉
하루의 일 마치고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길가 생맥주집 앞/ 푸른 평상이 벌떡 일어나 반갑다고/ 손 마주잡고 흔들어댄다 오늘 하루/ 저도 많이 외로웠나 보다/ 엉덩이를 내밀며 좀 깔고 앉아 쉬었다 가라고 보챈다/ 생맥주집 안 늙은 바람도 달려 나와/ 가슴 끌어안고 등허리 토닥여준다/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으로 돌아가 보았자/ 누가 날 기다려주겠는가/ 푸른 평상이며 늙은 바람도 잘 알고 있어/ 지금 손 마주잡고 흔들어대는 거다/ 푸른 평상의 엉덩이를 깔고 앉아/ 늙은 바람과 주고받는 맥주 맛이 쓰다/ 안주로 씹고 있는 멸치 대가리 맛도 쓰다/ 더는 해찰하면 안 되지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마음 너무 잘 알고 있는 길가의 황매화가/ 귓불 가까이 다가와 혀 끌끌 차댄다/ 돌아가지 않으면 14층짜리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 저도 그만 많이 외로우리라//

P선생 욕하기 / 이은봉
평생 남 욕 안 하며 살기로 했지요/ 남 욕하면 그 남과 싸우기 쉽고/ 싸우면 이기거나 질 수밖에 없지요// 싸워 이기거나 질 수밖에 없다니!/ 차마 그 따위 짓 할 수 없어/ 평생 남 욕 안하며 살기로 했지요// 선생 P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비열한 놈, 싸가지 없는 놈!/ 지랄, 발광, 개주접 떨고 앉았네,/ 이 따위의 욕, 절대로 하지 않기로 했지요// 선생 P! 그냥 잘 먹고 잘 살라고/ 더는 아무 욕도 안 하기로 한 것이지요/ 하여 우헤헤, 혀나 길게 뺐다 집어넣었지요.//

너희들의 난생설화 / 이은봉
애비 없이 태어난 자들! 후레자식들!/ 아,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뱃속에서/ 그렇지? 정상적으로 분만했지?/ 가령 박혁거세라든가/ 김알지라든가 주몽이라든가/ 저 저주받은 자들!/ 아니, 축복받은 자들!/ 그자들이 신화를 만들었지/ 신화를 위해서는 아버지를 죽여야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듯이// 애비 없이 태어난 자들! 후레자식들!/ 가령 박혁거세라든가/ 김알지라든가 주몽이라든가/ 너희들도 그자들 속에 끼워 넣어야지/ 그래야 외롭지 않지/ 옳게 견딜 수 있지/ 하늘이 너희들의 후원자니까/ 그렇게 든든해지니까/ 늘 푸르른 오월의 하늘!/ 너희들은 그 하늘의 맏자식!/ 너희들로부터 아침 해는 늘 새롭게 떠오르지// 애비 없는 자식들! 후레자식들!/ 너희들이 예수고, 박혁거세이고, 김알지이고, 주몽이지/ 애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의 애비는 공자의 애비/ 야합의 애비/ 보리밭을 뒹굴며 너희들을 만들었지/ 머리통만 커다란 너희들을 만들었지/ 이 애비 없는 자식들!/ 후레자식들!/ 너희들이야말로 최초의 애비이지/ 그렇지 하늘이 흙으로 빚어 만든 아담이지.//

연곡사 입구 ㅡ막은골 이야기 / 이은봉
주먹감나무에서 주먹감이 익는/ 연곡사 입구, 우두커니 일주문에 기대어/ 지리산 자락 바라본다/ 피아골 물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알싸해지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기왓장 쌓아놓고/ 몇 푼 시주를 받고 있는 여인한테/ 만 원을 주고 기왓장 두 장을 얻는다/ 부는 바람에 귀 씻으며/ 오늘의 마음 거기 어지럽게 적어본다// 흰색 수성 페인트 붓으로/ 기왓장 위에 써보는 마음,/ 자유라고 해볼까, 사랑이라고!/ 평화라고 해볼까, 먼먼 고향이라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주먹감나무에서 주먹감이 익는/ 연곡사 입구, 기왓골 위에서는 둥근 달이/ 둥근 꿈으로 익는다/ 오랜 숙제로 익는다/ 아내며 아이들이 사는 타향 향해/ 훌쩍 날아오르고 싶은 바람도 함께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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