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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은옥 시인

by 부흐고비 2022. 4. 20.

김은옥 시인, 수필가
2009년 《수필과비평》 수필 신인상, 2015년 《시와문화》 봄호 시 신인상으로 등단.

창작21작가회의. 우리시. 시산맥특별회원.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의 동인지 <드문드문 꽃>, <옷의 계급론> 외 3집. 시문작가회 <말들이 얼룩말 되어> <촛불 든 밤> 외 2집. 한국작가회의 연간집 <못 부친 편지> 참여. 수필집 『고도를 살다』.

 



금방 지나가요 / 김은옥
고추를 멍석에 뉘이고 다독이면서 어머니 생각// “하나님은…, 어찌먼 이리도…, 곡식 푹 익으라고 이렇게 좋은 날씨를/ 꼭 주셔야…, 그리 퍼붓다가도…, 안 그냐”// 볼 일 없이도 핑계거리를 만들고 싶은 시월// 태풍은 일본 쪽으로만 지나가리라는 예보/ 스마트폰에서는 가을 구름 콘테스트가 한창 벌어지는 중/ 나는 고양이처럼 화단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음// 쓰레기 버리러 나왔던 앞집 아주머니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런 날씨 며칠 안 해요, 후딱 지나가요.”// 고양이 한 마리, 혀로 물을 맛있게 날름거리더니/ 조심스레 발까지 적셔보고/ 어둠 속에서 걸음을 더듬어 보듯/ 다리가 둥둥 떠가듯 물웅덩이를 사뿐히 건너/ 사철나무 뭉치 속으로 사라진 뒤// 우주 어디쯤 바람 새끼 몇 헤매고 있을 저녁/ 해거름이 몰고 오는 바람결에 막 풀 먹인 어머니 치맛자락 냄새//

* 2015년 《시와문화》 봄호 등단시

먼지는 힘이 세다 /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 2015년 《시와문화》 봄호 등단시

뿌리를 비추다 / 김은옥
아직 바람이 찬데/ 밝은 문들 조용히 귀 기울인다.// 온 마을 가득 두더지 떼가 몰려오나/ 흙의 내장들이 일어나 앉는다./ 파릇파릇한 얼굴들 밥풀만한 대가리들/ 땅의 새끼들도 앞 다투어 고개를 내밀겠다.// 수많은 말씀으로 손때 절은 골목길/ 뿌리들 웅성거리는 소리 가득하다./ 어두워져만 가는 텅 빈 제비집/ 그 샛노란 주둥이들은 언제 집을 찾을까.// 제비 기다리던 노인 하나둘 떠나가도/ 마라도 25마일까지 밝히는 등대보다/ 서해 5도와 황해의 42km까지 빛 쏘아주는/ 선미도 등대보다 더 거대한 등대가 땅속에는 있다.// 황토벌판이 온통 들썩들썩 맥놀이 한다.//

* 2015년 《시와문화》 봄호 등단시

광인(狂人) / 김은옥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건너는 중이다./ 갈지자로 우왕좌왕 십자 모양의 건널목을/ 헤매고 있다.// 두 눈이 끓고 있다./ 언젠가 맑았던 그의 두 눈이/ 네거리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중이다.//
* 2015년 《시와문화》 봄호 등단시

끝나지 않는 질문 / 김은옥
저 몸은 누구의 몸인가/ 꿈속의 꿈속까지 따라 들어와 누워있는/ 저 아가리에서 살모사가 꼿꼿이 고개를 들고/ 배밀이 하며 나온다/ 번뜩이는 살기/ 두 줄기 어둠 같은 혀가/ 독기를 품고 오래된 질문을 날름거린다// 저 꽃은 누구의 독인가/ 누가 뱉어놓은 독설인가/ 저 독은 스스로 독이었는가/ 꽃은 독의 천국인가 불구덩인가/ 저 혀는 오직 꽃이어야 했는가/ 귀에 독액을 부어 넣는가/ 똬리에서 풀려날 수 없는 불면의 저승이여/ 쩍쩍 갈라지는 마른번개는 지치지도 않는구나/ 검은 꽃이 푸른 광기로 번쩍인다// 저 독은 도대체 누구의 혓바닥인가/ 질문이 누런 침을 뚝뚝 흘린다/ 독액이 흘러내리는 자리마다 잘못된 활자들을 마비시켜버린다/ 마비되고 굳어져 가는 몸뚱어리들/ 활자들의 잔해를 지나치면서/ 신선한 질문을 뚝뚝 흘리며/ 새로 태어난 활자들을 온몸에 두르며 간다//

농아 / 김은옥
아이가 강아지풀을 고양이 볼에 갖다 댄다/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낙엽 한 장을 다시 들이대다가/ 단추 크기만 한 노란 들국화 한 송이를 따왔다/ 고양이가 두 귀를 빠르게 펼쳤다 오므렸다 하더니/ 실눈을 확장하면서 아이를 바라본다/ 고양이가 귀를 쫑긋거린다/ 꽃들이 귀를 쫑긋거린다/ 골목이 귀를 쫑긋거린다/ 세상이 물속처럼 고요하다//

사철나무가 흔들린다 / 김은옥
한 생애가 살갗을 스친다/ 사철나무 하나 흔들흔들/ 다른 나무는 조금 흔들/ 멀리 있는 나무는 살짝 흔들/ 흔들리지 않는 나무들도 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에도/ 바람의 마음이 통하는 것과 통하지 않는 것이 있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바람의 생애를 읽는 사람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오시리라는 기대에/ 미리부터 움찔 떠는 놈도 있다/ 돌멩이가 날아온다/ 큰 걸음으로 피하고 바라보니 날아가는 참새였다/ 참새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까/ 참새는 미래를 모르고/ 나 또한 돌멩이를 모른다/ 바람이 분다/ 아까 그 바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기로 다 같이 결의한 국군의장대 같다/ 바람의 생애를 읽으려는데/ 또 다른 바람이 오신다/ 바람의 심장에 손을 얹는다/ 수많은 생애가 내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촉 좋은 마당 / 김은옥
새벽이 신발 속에 발을 쑥 집어넣자마자/ 강아지도 신발 신고 따라 나온다/ 전선이나 나뭇가지가 품은 달의 공전이/ 자전의 그림자들이 그 목젖을 드러내는 중이다// 꼬리 아홉 달린 붉은 죄목으로/ 꽃봉오리 속에 유배당했던 향기가 풀려난다/ 향기의 기포들이 기쁨의 등을 켜고/ 투명한 날개로 퍼져 날아간다/ 선잠 깬 잎사귀들이 기지개를 켤 때/ 풀숲 사이로 멀어지는 새벽의 신발이 살짝 보인다/ 귀 바짝 세운 풀 비린내들 곁에서/ 풀 강아지도 솜털 일으키며 짖기 시작한다// 오늘도 깨끗한 촉으로 닦은 은수저에 이슬 받아서/ 아침이 배를 채울 것이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아홉 개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공중제비를 도는 마당//

안개의 저쪽 / 김은옥
안개가 잠 없는 말을 먹어버린다./ 입이 먼저 사라지고 귀마저 닫힌다./ 팔다리까지 뜯어 먹는다.// 시간의 가로등에 철조망까지 쳐놓고/ 도시를 탐색하고 있다./ 가끔 철조망 사이로 탐조등이 독수리눈으로 훑고 간다./ 말 잃고 귀 잃은 눈빛들이/ 주의 깊게 서행하는 중이다.// 안개는 점령군이다 권력의 추다/ 점령군에게 잡아먹히는 몸뚱어리들/ 지척을 분간하기도 힘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저 흐린 사물 뒤편에 숨어있는 눈빛들/ 불쑥 주먹을 내미는 나무들./ 발톱을 세우고 물어뜯듯 달려들던/ 밤샘 노숙에 지친 익명의 그림자들이/ 안개의 권력을 신문지처럼 덮고 있다.// 안개는 세계의 중심을 향해 전진하지만/ 그 중심을 흐리고 있다는 것을/ 안개 자신도 모를 것이다./ 안개의 저쪽이 문득 그립다.//

안개출몰지역 / 김은옥
대낮보다 더 환히 흔들리는 벚꽃에 '안'자가 가려져/ 보이다 말다한다/ 이 지독한 안개를 고무 지우개로 지우고싶다/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자동차 매캐한 매연이 상상력의 질감/ 을 울퉁불퉁하게 치대놓을 때/ 여기저기 개들끼리 컹컹대는/ 개다발지역 개잦은지역/ 안개 속에서 빼꼼히 벚꽃 구경하는 수많은 개지역들/ 밤에도 빛나는 저 푸르른 야생의 눈빛들/ 얼핏얼핏 드러나는 붉은 잇몸 사이 번 쩍이는 날카로운 덧니들/ 그덧니들에 찍히고 찢어질삶과죽음사이/ 너는 4기통 나는 6기통의 본능을 갖고서/ 낮고 느리게 짖어대는 끝날 줄 모르는/ 욕설들/ 점점 지축이 흔들린다/ 들개 한 마리/ 로켓포 추진기 발사체가 된 엉덩이 뒤로/ 바짝 뒤쫓던 들개끼리 엎치락뒤치락/ 지우려고 용쓰다 지우지 못해 더 지저분해진 사고 다발지대의/ 백내장 걸린 감시카메라 속에 '사자의 서'가 누워있다/ 개다발지역 너머 졸음휴게소 너머/ 십자가를 짊어진 견인차 줄줄이 누군가/ 의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예약된 시간들 ㅡ‘졸리면 제발 쉬었다 가세요’ / 김은옥
졸음의 그림자가 기나긴 어둠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렸습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먼 먼 오늘// ‘맨 인 블랙박스’ ⃰가 재생해주는 충돌하고 날아가고 뒤집어지고 우그러지는/ 또 충돌하고 날아가고 뒤집히고 처박히는// 비상등 점멸하는 버스 앞에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습니다./ 흰 우유와 초코 우유가 엉기고 있습니다./ 흰색 진갈색 뭉클뭉클 카페라테, 아니아니 검은 분홍/ 어디선가 낯선 빨강이 왈칵 몰려옵니다 단말마 직전 몸부림의 빛깔인가요./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내자던/ 나를 갉아먹던 핏빛 머금은 그 말씀/ 미래는 죽음을 모릅니다./ 고추기름 냄새가 지하에서 스며옵니다./ 창백한 손들이 사자死者의 얼굴로/ 길게 포개졌다 찢어지는 그림자들/ 육개장의 붉음으로도 영안실 특 102호의 흑과 백을 컬러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내게는 예약된 시간이 남아 있어요./ 예약된 화면이 반짝반짝 장례식장 로비의 잠을 깨웁니다./ 에베레스트산 등성이가 금 간 거울 같아요 칼끝 같아요./ 눈 폭풍이 진검으로 쳐낸 눈보라 속 목숨 하나 하얀 깃털 되어 번쩍이며 날아갑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빛 반사거울 산등성이에 관통당하는 미래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아닌 끝없는 재방송 속 당신의 미래는 무효입니다./ 영하 196도 액화 질소탱크 속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150구의 시신을 환자라고 부른다지요./ 차가움이나 따뜻함의 개념조차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 얼음덩어리들/ 반복 수정 편집으로 태어나는 시간도 있습니다.// 절대온도 영하 273℃를 향해 나도 서서히 얼어붙어 갑니다.//
* 맨 인 블랙박스: 블랙박스에 찍힌 교통사고 영상을 재생해 보여주는 TV채널 프로그램 이름

예약된 시간들 2 ㅡ아파트 재건축 현장 / 김은옥
불도저가 이승을 퍼 나르는 흙더미에 오래된 저승이 묻혀 실려 가면서 피식 웃는다 발인도 운구도 따르는 이 하나 없는 그래서 더욱 환한 빈터 단호한 집행자의 집게발 아래 소름 돋는 팔을 문지르다// 사인死因도 불분명한 임종을 조문하고자 소나기들이 달려왔으나 철제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예정된 죽음이었다// 이제 비가 직선으로 긋는지 사선으로 긋는지는 어느 입으로 씨부렁대든 내 알 바 아니다 정월 어느 날의 노인의 방화자살도 온몸 퉁퉁 부었던 붓기가 빠질 새도 없이 영영 간 여자의 마지막도 열아홉 소년의 수능점수 비관투신도 아파트 칸칸이 낡은 꿈들과 함께 버림받은 지 오래// 높은 철제문 다시 열린다 집채만 한 상여들 노제 떠난다 닫히고 열리고 다시 철제문이 닫힌다 장대비에 짓이겨진 아파트 뽑혀나간 검은 구덩이들마다 예비청약자의 호기심이 두근두근 선글라스 벗는다 봄볕 아래 이중삼중으로 늘어선 호기심들 끈기 있게 진맥 차례 기다리는데 철제담장 너머에서는 뇌 속까지 환히 비어가는 햇살의 염습을 마저 서두르고 있다//

흐르다 / 김은옥
밤새 보채던 아랫집 아기 울음소리가/ 봄비에 쓸려간다.// 민낯으로 들이미는 새벽 옆에서/ 시계 초침이 내게 묻는다./ 상상력이 왜 그리도 없느냐고/ 형광등 빛이 라일락 꽃 색으로 흐려질 때/ 진한 꽃향기가/ 불 켜오는 생각이/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선다./ 늘 익명으로만 살아온 여자가/ 거미줄 걷어내며 홀가분하게 걸어 나온다./ 드디어 아침은 시작되고/ 흐른다./ 산의 내장에서 내장으로/ 살피듬에서 살피듬으로/ 발등을 지나 발등으로/ 손금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 따라/ 나도 흐른다./ 비 그친 뒤/ 아래층 아기 울음이/ 다시 힘차게 벽을 넘는다.//

밤은 캄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 김은옥
어두운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대 눈빛을 더욱 뚜렷이 읽을 수 있다/ 길고양이 되어 허공을 밟으며/ 그대의 눈빛을 지난다/ 나는 불빛 아래 떠오르는 먼지/ 내 눈은 넘치거나 말라버린 샘/ 내 눈으로 나를 비출 수가 없다/ 단풍잎을 대신해서 전기톱이 울어주는 계절/ 그림자가 밤길을 간다/ 제 생각에 빠져 골똘한 산과 빌딩의/ 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밤은/ 크고 깊은 눈을 빛내며 속속들이/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코끼리 귀 같은 큰 귀 펄럭여/ 긴 코로 별빛과 달빛을 뿜어준다/ 푸른 새살 깊숙이 전기톱의 흉터를 품고/ 울혈증을 앓는 나무의 비밀들까지/ 그 눈썹 작은 떨림까지/ 세월의 파들거림까지//

포토샵 / 김은옥
포도 씨의 종말이 차라리 투명해 보였다/ 무미 무취(無味 無臭)의 뼈를 간직한 단단함/ 땡볕에서 부드럽게 부풀어갈 때부터/ 강직한 씨로 남게 되기까지 내숭도 거짓도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어느 습성에서 벗어난/ 그것을 나는 또 다른 열반이라 부르고 싶다/ 포도 씨의 묵언 수행을 배우는 시간// 빌딩과 빌딩 숲 사이에 저승사자가 날아다닌다/ 한 사람의 부음이 문자로 전달되고 있다/ 두 사람의 부음이 세 사람의 부음이/ 엘리베이터가 한 층을 올라가는 사이에도/ 떼거리로 전달되는, 이런 부음들이/ 포도 씨처럼 입에 껄끄럽게 씹힌다/ 이제는 문자가 저승사자다/ 뱉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포도 씨에게 물어본다/ 실물과 인명부를 아무리 대조해보아도/ 뽀샵 보정을 오가던 실물이 오리무중이라서/ 우주가 산목숨들로 넘쳐날 판이라는/ 불안에 흔들리는 저승사자의 눈동자가/ 회전속도를 격하게 높였으리라/ 보라를 먼저 뱉어낸다// 보라를 버리고 변환되지 않은/ 포도 씨의 콧대가/ 조용히 혀 위에서 시위하고 있다/ 포도 씨의 콧대를 갈아/ 기름을 짜야겠다/ 이 계절의 열반 포도 씨의 종말인/ 콧기름 투명한//

습(濕) / 김은옥
열리는 봄// 쑥봉 하나하나가 임시 분화구다/ 봉홧불을 올리던 산등성이 같기도 한/ 온몸 곳곳에 봉을 올리고 불을 붙인다/ 봄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심지가 영산홍으로 피어나고/ 꽃의 혈맥이 몸 안으로 서서히 뻗쳐간다/ 오른 목 뒤로부터 오른 발바닥까지 스며갔다가/ 왼 발바닥을 거쳐 왼 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되올라온다/ 살아야지/ 그래, 살아야지/ 사시사철 한랭으로 부러질 듯 굳어가던 뼛속 계절을 파고들어/ 습을 모아 말리고 태우고 뜸으로 보송보송 부드럽게 이완시킨다/ 재로 변환되는 습// 봄이 열린다//

결(結) / 김은옥
1./ 보이지 않는 발길이 중환자실의 어둠을 짚어온다/ 귀를 바짝 대고서야 들려오는 단말마/ 그가 생전 처음 불러보는 아름답고도 긴 휘파람 소리/ 블라인드 사이 쏟아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희뿌옇게 부각되는/ 꿈결인 듯 검은 실루엣을 향해 좁혀졌던 동공이/ 부릅뜬 채 멈췄다/ 머리맡에 놓인 성경책도 평생의 믿음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저 흰자위 너머/ 목 잘린 나뭇가지 사이 서쪽 하늘이 조각나있다/ 땅바닥에 검은 쌀알처럼 흩어져 있는 공포를/ 작은 머리통을 조아리며 조심스레 쪼아 먹던 참새 떼가/ 조각난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2./ 노인복지관 버스가 비척대며 떠나가는 승강장/ 뿌리 허옇게 드러난 나뭇등걸이 앉아 있다/ 버스가 떠나든 말든 복지관에서 뜯어온 화장지를 천천히 펴서/ 다시 바짝바짝 접고 있는/ 노인의 고개가 가을 하늘 아래 한없이 깊어진다/ 살짝 살얼음 낀 듯한 저 손을 본 적이 있다/ 흰 광목 제치자 툭 떨어지는 얼음장 같던/ 벌벌 떨며 끝내 잡아주지 못한 마지막 가시던 아버지 손 닮은/ 수많은 손을 흔들며/ 버스 한 대 이승을 떠나고 있다//

부고장 / 김은옥
묘지들이 층층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아파트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있는 표식/ 비어있는 집 유리창마다 직사각형 노란색 종이에/ 검은색으로 써서 붙여놓은 ‘공가’*/ 한 공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차장이 텅 텅 비어갑니다/ 뿌리째 뽑혀버린 추억 하나가 머뭇머뭇/ 남겨놓은 발자국을 먼지처럼 걸쳐놓는 창가에서/ 감나무 가지가 종이 너머를 기웃거립니다/ 머리카락 풀어헤친 나무 그림자가 귀신처럼/ 종이 위에서 어지럽게 휘청입니다/ 종이 안에서 죽은 여자가 일어납니다/ 위층 노인의 관이 천천히 내려옵니다/ 검푸른 팔을 창밖으로 내놓고 까르륵대는 아이가 있습니다/ 모든 방들이 종이 안에 시커멓게 갇혀버립니다/ 한 집씩 한 집씩 자물쇠로 완강하게 채워놓은 공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부고장을 달고서/ 삼베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 공가空家 / 재건축에 앞서 이사 가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나를 이장해줘 / 김은옥
새벽을 등짐 진 아파트 창이 못 볼 것을 보았는지/ 꿰뚫듯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층층 어두운 창에서 목 꺾인 뒤통수들이 기어 나온다/ 굶는 게 직업이었던 스스로 몸에 불 지르고 떠난 노인이/ 생 자체가 암 덩어리였던 뼈만 남긴 여자가/ 뼈를 끌며 기어 나온다 뼈들이 시퍼렇게 인광을 불 켜 든다/ 저 도깨비불 속에는 못다 한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머리통이 몸통보다 큰 아이가 벽을 타고 내려온다/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잡수시고 가신 욕쟁이 영감이/ 흐느적흐느적 대낮에 텅 빈 아파트를 거닐고 있는/ 이곳은 공동묘지// 캄캄해도 더 잘 보이는 길/ 먹물 속인 데도/ 움직이는 것 하나 없는 아파트 사이 귀신들이 세 들어 사는지/ 숨 막히도록 사방에서 목을 조여온다/ 빈집에서 누가 자꾸 중얼거리신다// 사다리차가 팔을 꺾고 이삿짐 차들이 입을 닫고/ 적막 속 어디선가 띠띠띠 번호키 누르는 소리/ 풀숲에서 뭔가가 지켜보는 것 같더니 훅 옮겨간다/ 잔디 깎기 녹슨 조각들이 풀 모가지를 콱 누르고 있는/ 먼지이불 덮은 산발한 풀숲 너머 깊은 어둠으로// 이주기간 : 20××년 2월 1일 ? 20××년 6월 30일(5개월)/ *******재건축정비사업조합/ 오늘따라 나무들이 참 정갈하고 고요하다/ 언젠가 산채로 뽑혀가겠지만// 세탁 세탁 세탁/ 귀신들만이 귀 기울일/ 저 아픈 소리//

죽음으로 향하는 말도 있다 / 김은옥
습관처럼 질주하던 말이/ 오늘도 이십 사 시간 불 밝히는 식당을 기웃거린다.// 말끼리 한 잔 또 한 잔에/ 속내를 트림하는 말/ 위장의 쉰내는 우리들의 말을 서로 반복하게 한다// 서로의 냄새에 무척 민감한 어미 다른 말들/ 뒷발에 걷어차인 소리로 언론사/ 윤전기 위에서 날뛴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활자들이 울부짖는다./ 몸부림치다가 고삐를 풀고 뛰쳐나간다.// 신호등 하나 껌벅이는 시간에도/ 말들은 수만 마리 새끼를 낳는다.// 초원의 말들은 살기가 없다./ 당근을 독점한 유비통신들이 꼭두새벽부터/ 갓 낳은 새끼들에게 모종의 살기를 불어넣는다./ 강한 말은 펜 끝에서 나온다.// 가장 더러운 말도 펜 끝에서 나온다./ 새끼들 입에서 거미줄 같은 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말이 말 타고 달리는 새벽./ 죽음도 모르고 날뛰는 말들 사이/ 진정한 말은 펜 끝에서 죽는다.//

말言들이 얼룩말 되어 / 김은옥
창밖으로까지 뛰쳐나간 너의 얼룩말은/ 내 자동차 범퍼를 발길질하기도 한다// 카페 속에 잠긴 야생의 내장들/ 코뿔소가 들이받아 흩어진 창자 속 신선한/ 신맛이 쓴맛 뒤에서 열대를 음미하는 사이/ 주술을 하듯 기다린 주전자 주둥이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본차이나 찻잔 바닥으로 에티오피아의 햇빛 한 줄기가/ 미끄럼을 타며 부드럽게 내려온다/ 카페는 어둡고 어둠의 깊이만큼 휘황했으나/ 찻잔에는 검은 대륙이 눈을 뜨고 있다./ 벽걸이 사진 속 어린 커피 노동자의 눈동자가/ 재갈이 채워진 허기진 땀방울을/ 사진 밖으로 흘려보낼 것만 같다./ 고원의 상록수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수태를 한다/ 그 출산을 돌보는 수많은 아이들/ 커피를 고르는 예닐곱 살 손길들이 찻잔 속에 보인다// 먼 천둥소리로 사자가 우는/ 이 밤 내내 흑인 소년의 얼굴이 주전자 주둥이에서/ 킬리만자로의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오늘 하루만 쇱니다’ / 김은옥
가판대 천막 깃에 삐뚤빼뚤/ 검정 싸인 펜으로 종이에 써서 붙여놓은/ 비바람에 펄럭이며/ 젖는다/ ‘죄송합니다’ 글씨도 함께/ 4월9일 토요일 오전 9시 40분에 지나가다 읽다/ 쉽니다가 아닌 쇱니다? 잘못 봤나?/ 하루를 명절 쇠듯// 어두운 안쪽을 기웃대던 빗물의 검은 눈동자가/ 내 발길에 밟히자/ 찌걱 침도 한번 불량하게 내뱉는다/ 거적에 덮인 물건들에 빗방울 들이치는데/ 포장달걀건어물채소들 모처럼의 아침늦잠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롯데 프라자 커다란 대형플랜카드/ 주말 연장근무 월 1회 휴무/ 물론 죄송하다는 인사는 없다/ 가판대 ‘죄송합니다’아래 ‘상중입니다’가 비에 젖어/ 찢겨져 너덜거린다// 건너편 스타벅스에 들어가 앉아/ 오늘 하루만 쇱니다를 희미하게 읽으며/ 나도 어딘가에 삐뚤빼뚤 검정 싸인펜으로/ 오늘 하루만 쇱니다 내걸어놓고 싶다//

단단한 긍정 속으로 / 김은옥
쓰러져 있는 비둘기 목덜미에/ 비둘기 한마리가 주둥이를 깊이 묻고 있다/ 꾸르륵 살아있다는 신호 아득하다/ 칼바람이 부드러운 털을 자꾸 일으켜 세운다/ 광장의 햇살이 모두 모여 그 모습을 비추고 있다/ 마지막 광점이다/ 청소원이 쓰레받기로 주검을 옮기는 동안에도/ 움직임 없이 서있다/ 죽은 자리 몇 바퀴 돌다가/ 바닥에 얼어붙은 빵조각을 쪼아보기도 한다/ 딱딱한 빵조각은 꿈쩍도 않는다/ 고개를 갸우뚱대며 먼 산을 바라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눈 쌓인 겨울 속으로 돌멩이처럼 날아간다//

블랙홀 / 김은옥
가스 빠진 냉장고가 산비둘기처럼 글글 댄다/ 저것들도 잠투정하나/ 생각이 생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가을 잠과 눈씨름 한다/ 보름달이 잇몸을 드러내자/ 별들이 온통 상앗빛이다/ 뇌수가 풍덩 빠질 뻔한 하늘 저수지를/ 카메라에 통째 담아 놓았었다/ 검은 사진첩에서 흰 이마가 보일 듯 말 듯 반짝이더니/ 생각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한다/ 지구와 달이 줄다리기하자 별들이 헤쳐모여/ 서로 편들기를 하며 달아오른다/ 저토록 달아오르다가 풍선처럼 꺼져갈 것이다/ 줄다리기에 과부하가 걸린 새벽, 이 모든 게/ 은하 물결마저 빨려 들어간 거대한 가을 하늘 때문이다/ 블랙홀에 부질없이 묻노니/ 우주의 하루가 꽃놀이처럼 흘러가는 물결 위에서//

가창오리 떼 / 김은옥
저 대가리들 좀 봐/ 저 물결 같은/ 저 주름치마 아가씨들/ 저 수십만 마리 말없음표//

점들 / 김은옥
어디서 날아온 별들일까/ 내 두 팔에 점점이 빨강자주깜장 색색의 깨알/ 모래 위에 놓으면 모래 빛깔 닮았을 팔뚝의 모래 같은 점들/ 아기 손주가 이건 뭐야 물어볼 때 할머니 표 은하수라고 말해주었다/ 웬만큼 나이 먹고부터 돋아난 별 같은 점들/ 구석구석 나도 모르게 나타나 있는/ 어린 날 밤하늘처럼 신비롭고 이상한 별/ 하루하루 사라지는 시간을 나도 모르는 내가/ 점으로 콕콕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나 보다/ 십 년 전보다 오 년 전보다 일 년 전보다 오늘 더 많이/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있는 빨강자주깜장 별들/ 내 팔을 하늘 삼아 잘 지내고 있구나//

터졌다 / 김은옥
땅속에서 물대포가 길을 뚫고 솟구친다/ 물샐틈없이/ 대포 정도는 아니지만/ 수류탄처럼 아니/ 폭죽처럼 아니/ 점점 하얗게 뭉실뭉실/ 게거품이 된다/ 대형하수도관이 터졌다/ 수많은 작은 물길로 뻗어나갈/ 큰물이 작은 물에/ 작은 물이 큰물에/ 서로가 잡아먹히는/ 물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길 위에 길 아래에/ 밀어붙이거나/ 버티다가 죽어 나가거나, 때로는/ 흘러가기 위해/ 때로는 개미만도 못한 사람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도 물은 흐름에 골몰하다//

날개 없는 학 / 김은옥
내가 집안의 혁명가였으면 좋았겠다/ 가문의 등줄기를 후려쳤어야 했다/ 봉건에 젖은 조부모의 이불에 대한 기대를 버리려/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족보를 들고 나가 엿을 사 먹는 동안/ 어린 세월은 단물처럼 목구멍을 지나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렸다// 할아버지는 전쟁 때 행방불명된 피붙이를 안주로 뜯으며/ 자주 술을 드셨다 그런 날이면/ 손주들을 무릎 꿇려 놓고 학춤을 추셨다/ “내 발끝을 봐라! 눈 크게 뜨고 발을 봐!”/ 어린 관절에 쥐가 오르고 고개를 꾸벅이면서도/ 눈동자를 더 똥글똥글하게 키워야 했다/ 고개를 갸웃이 비틀고 허공에 발끝을 찍어 올리며/ 하얀 소매 날개로 천천히 깃을 치기 시작하면/ 병풍 속의 소나무도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붉은 머리를 쳐들고 할아버지는 소리 없는 학의 울음을 울었다/ 주홍 불빛에 물든 긴 수염마저 학의 부리처럼 보였다/ 방 전체를 뒤덮는 소나무 그림자 격랑 속에서/ 나는 소맷자락에 휘감겨 아득해졌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혁명이란 말을 들고 나가봐도/ 엿 장사도 없을뿐더러 지나가는 누구도 엿 하나 주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알 듯 모를 듯하던 눈길/ 그 먼 곳을 나는 학처럼 길게 목을 빼고 바라보곤 했다//

물음표가 반짝이는 냇가 / 김은옥
한밤중에 눈뜨고 지금이 새벽이야?/ 저녁에는/ 지금이 밤이야?/ 새벽에는/ 지금이 저녁이야?/ 오후에는/ 지금이 아침이야? 자고 싶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야?/ 시냇물은 언제 잠 자?// 시냇물 징검다리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은 어린 철학자가/ 돌 틈 사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물살을 보며/ “거품 봐봐, 비누 거품, 물이 눈 맞고 왔어, 구름 묻었어, 구름 만져봐, 구름 만져봤어? 하늘이 왜 이렇게 낮아? 왜 여기는 세게 흘러? 여기는 왜 풀이 하나도 없어? 이 물은 어디서 오는 거야? 언제까지 흘러가는 거야? 물이 안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오리가 되고 싶어.// 백색소음 앞에 귀를 모으고 몰아沒我 되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버들강아지 같은 눈동자/ 물가죽 속에 감춰진 물 깊이를 알 리 없다/ 물속으로 어느 틈에 발을 넣는다/ 의문의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다/ 장화를 신겼지만 장화가 짧아서 바지가 다 젖는다/ 장화 옆구리에 그려있는 노랑오리가 납작해지자/ 엉덩이를 쳐들며 손을 담그고 만져본다// 어린 철학자의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산더미 같은 물음표가 반짝인다/ 저 물결이 도달하게 될/ 서늘한 눈동자에 바다가 이미 출렁이고 있다//

배꽃 치과 / 김은옥
불편하고 아파 못 참겠으면 오른 손을 드세요/ 전동 스케일러가 사이보그 같다/ 쏘아보는 눈빛 하나로 벽돌 깨트리기 완판 승이다/ 피비린내 감돈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파헤치고 긁어내고 빻고 자르고/ 불귀의 손아귀에 잡힌 가슴이 곤두박질친다/ 코와 입만 뚫린 흐릿한 세상/ 검붉은 구들장을 속속들이 들춰내고야 말리라/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다 버둥대다가 오른손을 든다/ 의자를 세워준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는 일/ 사이보그에게 입속 검붉은 방을 열어주는 일// 밖으로 나오니 봄바람이 왼손을 들고 있다/ 배밭을 어루만지고 있다//

가위눌리다 / 김은옥
똥파리 바글거리는/ 재활용 집하장/ 거미가 된 거대한 집게발이 던져놓은/ 어둠에 걸려/ 목이 ㄱ자로 꺾인 잠이/ 깰 듯 말 듯/ 베개에서 미끄러지는 머리가 중심을 잃고/ 철컥철컥/ 폐기처분 또는 정리해고 당한 고철들이 울부짖으며/ 아래로 아래로 패대기쳐지는 거미 뱃속/ 으로 나도 빨려 들어갈 뻔, 하는/ 거미손이 변환하는 낯선 중심,/ 에 놓인 끔찍한 잠/ 검은 손바닥을 펼쳤다 조였다/ 빻아지고 비틀리고 잘린 깡통들의/ 뼈다귀끼리 앉을 자리 찾느라 밀치고 밀치는 금속성/ 거미손의 거친 숨도 잠잠해진 때/ 깡통들의 우그러진 입가에 몰린 똥파리들/ 죽음의 냄새 앞에 사시나무 떨듯 날개를 떤다//

감나무 안테나 / 김은옥
지금은/ 사라진 동네/ 바람 한 점 없이도/ 감꽃 툭툭 떨어진다// 다 팔아먹었지 은수저 팔아 몇 끼 때우고 은비녀 팔아 비린 것 샀지 은수저 대신 놋수저로 놋수저 대신 양은수저로 남은 끼니를 우아하게 해치웠지 욕으로 도배된 집 적색분자의 붉은 피 더욱 진해졌지 담 결린 갈비뼈 늑막염 앓느라 숨 막히곤 했지/ 바지에 똥 지린 포즈 어기적대는 새끼까치 뒤로 눈에 불 켠 고양이 한 마리 슬금슬금 다가서는 1단에서 2단 3단까지 줄넘기 하던 어스름 녘 나른하게 땅거미 내려오던 방울토마토 같이 동그랗고 조그맣게 반짝반짝하는 어린 볼따구가 배 채우느라 볼록거리던 마호가니 밥상 갈빛으로 시들어가던 저녁/ 가게 팔아먹고 땅 팔아먹고 집 팔고 이름도 팔고 족보까지 팔아먹고 책이란 책 다 싸그리 처분해서 오갈 데 없게 만들어 놓았냐고 가슴 쥐어뜯던 앙상한 몰골 기와집 높은 담장 아래 감나무 올려다보며 절대 부끄럼 없다던 주린 입 단단히 포장된 아스팔트처럼 야무지게 닫았지만 저물녘이면 동서남북 가지 친 감나무들 안테나 되어 보내오는 욱신욱신 온몸 뼈 녹아내리는 기억/ 늙은 둥치 앞으로 새로 난 길 따라 불빛 하나 빠르게 달려간다 죽음이 이와 같이 느닷없다면 틀니 빠진 목구멍 검은 가래 끓는 사이로 마지막 숨 넘기듯 들이닥치는 통금 사이렌 울리기 직전의 새벽 같은 적막// 감나무 낡은 주파수 지지직거리는//

종… / 김은옥
종鐘이었는지 종棕이었는지 종柊이었는지 또는 종踪이었는지 종伀이었는지/ 종種이었는지 그리고 종終이었는지// 누가 가둬놓았었나/ 진정 종이었는지 아니면 송이었는지 오였는지 심장에 관념의 창조자를 모셔놓고 성호를 그으며 통성기도에 몰입하는 이데아의 그림자들은 스스로 그 소리가 너무도 소란하여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캄브리아기 이전부터의 류類가 말씀하시기를 류類의 종種은 플라톤의 그림자가 끌고 다니는 경비병 같은 순례자들이 골목을 누비기 훨씬 전부터 골목을 돌고 돌아서 가지를 뻗어나갔다 머나먼 고생대부터 이어져온 종이라 불리는 생명나무의 무수한 가지들은 골목에서 도시로 나라로 대륙으로 세계로 오래오래 이어 나가고 어느 종은 멸종했다가 새로운 종이 되어 다시 태어나고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순환이라 종의 류는 어떤 존재인가 인류의 어머니인 ‘아르디(Ardi)’인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닌 어디에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더라는 말을 네가 했었지 류가 부여했던 계界문門강綱목目과科속屬종種을 원망하는 뼈를 곧추세운 너도 생명나무의 한 가지에서 선택받아 태어난 너무도 아름다운 대자연의 숭고함 류類의 한 줄기// 종을 낳아준 류가 말했다/ “적어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드디어 내 귀에도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다윈이 임종 때 부인 엠마에게 하고 간 말

마지막 휴게소 / 김은옥
‘죽전, 마지막 휴게소’/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시간에 겁먹은 짐승들/ 서로 눈 마주칠까 팽팽한 콧김 뿜어대면서/ 전력 질주하던 짐승들이 잠시 숨 고르는 곳/ 어쩌면 죽기 전에 쉬는 곳이라 죽전일까// 머리 짧은 풀들이 비를 마시며 벌써 힘을 얻고 있다/ 말없이 진설한다/ 우산을 겹겹이 세워 막아도 제사 음식에 들이치는 비/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빗줄기 속에는 있다/ 오래도록 덤덤하던 큰언니가 물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슬픔에는 약이 없다더니// 자동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쇠북 치는 소리 같다// 어머니 아버지 고요하시다// 여기는 죽전 마지막 휴게소//

고양이 / 김은옥
마당 가득 고요가/ 까맣게 기어오르는 것을 봅니다/ 하얀 시계꽃 기울어진 잡초는/ 폐가의 병풍처럼 쓸쓸하군요/ 졸린 눈가에서 한낮은 화톳불 되어/ 타다닥타다닥 불티가 튀어 오르는/ 화장터 같습니다/ 파리 몇 마리 검은 옷 입고/ 뜨거운 잠 위에서/ 조문하는 건가요/ 끝없이 손을 비빕니다/ 땡볕으로 팽팽해진 마당의긴장을/ 고양이 수염 몇 가닥이 툭 끊어놓습니다/ 집도 슬픔도 봉투도 무덤도 없을/ 떴다 감는 흐릿한 망막 속에서/ 뙤약볕으로 익어가는 깊은 꿈//

목련 / 김은옥
어린 봄은 상여소리에 가고// 나뭇가지 높아 희고도 고요한 햇살/ 드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네// 꽃상여 구름처럼 떠있는 날//

바닷가에 서서 / 김은옥
아무리 가난한 바람이라도/ 무료주차를 거부하고 떠나는 바다에 와서/ 왜 나는 두고 온 창문들이 생각나는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햇빛을 까무러치게 하던/ 창유리 조각들이 물결마다 번득입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칼날 같은 눈빛들/ 창문들이 섬뜩할 때가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포개지고 고꾸라지며 달려오는/ 파도의 끝없는 인해전술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네요/ 바다가 온통 깨진 유리 조각으로 가득합니다// 밀리고 밀려오는 인도와 찻길 넘어/ 버스 정류장 너머/ 전철 승강장 너머/ 광장 너머/ 저 너머 너머/ 너머들끼리 모여 사는/ 마을도 넘어서/ 그 너머로 이 바람은 불어가고 있겠지요// 왜 바람은 무료주차를 거부했을까요/ 이리 드넓은 백사장을 마다하고서// 감시카메라 같은 유리창들을/ 매달고서도 지치지 않는 파도를 닮는 것도 좋겠어요/ 파도의 인해전술을 배우려 해요/ 구름이 바람 따위 피워대다가 금세 꼬리 감추고/ 머물지 않으려는 바람이 급히 스쳐 가고 있었지만/ 노을도 깨어져 파도와 몸을 섞으며 피 흘리는 저녁입니다// 누군가 철썩철썩 주차 과태료를 갯바위에 찍어대는 밤/ 내 마음의 파도가 바다를 향해 인해전술을 복습하고 있습니다//

지구 / 김은옥
손바닥에 지구를 올려놓고 보는 세상이야/ 여기에 안과 밖의 구별이 있을까/ 파랑은 바다고 오색찬란한 무늬는 육지라고/ 그렇다고 지구를 함부로 굴려서 망가뜨리지는 마/ 고통의 뿌리는 뼈를 뚫고 골수에까지 뻗어갈 거라고//

가을을 보내는 씬 / 김은옥
뭉게구름이 비 갠 동네 길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동네 아기 구름도 곁에서/ 막 목욕시킨 맑은 볼때기로 보골보골/ 눈 크게 뜨고 손가락 빨고 있다/ 구름 끼리 스치면 뽀드등 소리가 나겠다/ 폭풍우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던 지난밤/ 부러진 잔가지와 낙엽들이 길가에 어지러웠다/ 화단마다 목이 부러져 쓰러져있는 국화들/ 바람이 태양을 살며시 부채질하는지/ 잔잔한 하늘길에 고운 아가가 그네를 탄다/ 국화꽃 향기가 진하게 퍼지고 있다/ 학교 끝난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칼싸움한다/ 여자아이들은 땅에 떨어져 있는 꽃송이를/ 신주머니에 조심스레 담는다/ 아기 구름도 해님도 어느새 엄마 구름 등에 업혀/ 저만치 흘러간다 뽀드득 겨울이 오고 있다//

밤은 캄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 김은옥
어두운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대 눈빛을 더욱 뚜렷이 읽을 수 있다/ 길고양이 되어 허공을 밟으며/ 그대의 눈빛을 지난다/ 나는 불빛 아래 떠오르는 먼지/ 내 눈은 넘치거나 말라버린 샘/ 내 눈으로 나를 비출 수가 없다/ 단풍잎을 대신해서 전기톱이 울어주는 계절/ 그림자가 밤길을 간다/ 제 생각에 빠져 골똘한 산과 빌딩의/ 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밤은/ 크고 깊은 눈을 빛내며 속속들이/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코끼리 귀 같은 큰 귀 펄럭여/ 긴 코로 별빛과 달빛을 뿜어준다/ 푸른 새살 깊숙이 전기톱의 흉터를 품고/ 울혈증을 앓는 나무의 비밀들까지/ 그 눈썹 작은 떨림까지/ 세월의 파들거림까지//

페이스북 유령들 / 김은옥
주인장 부재 중 두해 째, 대문사진이/ 납골당 영정사진처럼 있다// 무한대 팔로우잉/ 얼굴 없는 관리자들이 얼굴을 관리하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여보시오 어딜 가셨나~/ 피돌기 없는 곳에 자막 같은 목소리/ 메아리도 없고 답도 없다/ 마우스 클릭, 클릭/ 습관처럼 들렀다 가는 행인끼리 좋아요 좋아요// 요즘 뵙기가 힙듭니다 무척 바쁘신가 봐요,/ 해피버스데이, 헤브어원더풀데이, 축하드립니다, 촛불 케이크, 꽃다발, 하트표시,/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평안히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길 빕니다,/ 이모티콘, 콘, 콘, 콘…// 영원히 열리지 않는 얼굴// 어둠이 지키고 있는 대문을 열고/ 커서 하나가 머뭇머뭇/ 미래의 납골당에 온 듯 쉽게 떠나지 못한다/ 겹쳐 들어왔던 또 다른 커서가 뒷 페이지에서/ 먼 행성의 빛처럼 희미하게 깜박인다// 뜬금없는 영문자 이름이 친구 맺기 신청을 한다/ 열고 닫고 떠나는 손들은 별 생각이 없다 클릭 한번이면 끝/ 부고도 띄우지 못해 떠났어도 떠나지 않았던 수많은 페북 독거유령들/ 씩 웃는 모습이 사진으로만 살아있다//

보여주기 / 김은옥
전철이 회현역에 멈추자/ 종이컵을 든 소년이 들어왔다/ 종이컵을 높이 쳐들고서 혀로 똑똑 노크 하면서/ 아까워 죽겠다는 듯 아우 요거 밖에 남지 않았군요 달콤해요/ 마시는 시늉만 하면서 입에 댔다 뗐다 건배하듯 높이 든다/ 승객들은 힐끔힐끔 모른 척 하려는 눈빛들이고/ 각종 부글거리는 생각들이 음악에 묻혀/ 귓속으로 쓸려 들어가고 있는데/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소년의 연극적인 몸짓과 말투가/ 차창에 비친다/ 나는 남은 정거장만 세고 있다/ 창문에 비치는 서로의 눈이 자꾸 마주친다/ 눈 마주칠수록 더욱 신이 나는 듯/ 뭐라고 중얼거리며 히죽히죽 웃는/ 어느 게 제정신이고 어디까지 아픈 정신이라 할 수 있을지/ 갈수록 내 머리가 이상해진다/ 혼자놀이에 빠져서도 남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 저 소년/ 소년이 나를 보고 웃을 때마다 내가/ 구경거리가 된 듯 착각이 들기 시작한다/ 아직 내릴 정거장은 한참 먼데/ 전철은 깊은 밤을 향해 달리고//

 

야맹증 / 김은옥
셔터를 내린다/ 필름은 계속 돌아가고/ 셔터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친 어둠이 상처투성이다/ 수십 년을 지나면서 갈라지고 긁히고 변색된 화면// 흐릿하던 영상이 반복해서 클로즈업된다/ 가로등 불빛이 고목에 가려져 어두컴컴하다/ 방향을 잡지 못해 나뭇등걸에 걸리고 넘어지고/ 어두운 길을 더듬거리며 간다/ 모든 풍경은 너무 아득하고 멀고 희미하다// 도깨비불 모양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저 눈동자의 시간/ 어둠의 상처는 굳은살이 된다/ 한번 가본 듯한 어두운 필름 속에서/ 비 내리듯 갈라지는 화면 속에/ 얼핏 내 모습이 보인다// 심장이 어두워지는 나이/ 산란된 빛을 잡지 못하는 시신경/ 선뜻 손댈 수 없는 낡은 필름/ 흑백이 디지털 컬러로 바뀌는 동안/ 오래된 부품을 갈아 끼우지 못했다/ 갈아 끼울 부품은 어디에 있을까/ 필름의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본다//

은행나무 / 김은옥
수억 년 전 내가 은행나무였을 때/ 수액이 차오르던 계절 쪽으로/ 채널을 돌린다/ 진눈깨비가 채널 안에 갇혀있다// 봄에 태어난 나는/ 혹독한 겨울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어떤 어둠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으며/ 눈 똑바로 뜨고 어둠을 응시하며/ 어둠의 중심 어둠의 뼈가 된다/ 열린 화면 안에서는 우중충한 진눈깨비, 뒤쪽은 분명 내 전생/ 채널을 돌릴 때마다 나는 사막이었다가 바다였다가/ 은하수였다가 짐승이었다가/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은행나무이고 싶다// 내가 수억 년 전 은행나무였을 때// 겨울을 보내는 통로에는/ 차원이 다른 삶의 무늬들이 지나가고/ 화석 속에 갇혔던 부챗살 무늬 내 유골들이 스쳐 간다/ 은행나무로 살았던 하늘이 살같이 흐르고 있다/ 피붙이도 없이 캄캄하게 혼자 죽어가는 꿈속에서/ 심지까지 젖어버린 채널을 돌렸을 때/ 달빛을 통과하는 굴절의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계절이 빠르게 바뀌고 어둠 속에서 은행꽃이 핀다/ 그리움이 꽃눈처럼 날린다/ 들판이었다가 숲이었다가 수줍은 연두로 물결치다가// 고생대 페름기부터 태양과 더불어 살았던 나는/ 뼈대를 꼿꼿하게 지켜온 한줄기 은행나무/ 비껴 앉아있던 빙하가 채널 돌아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기는 금속성 효과음이 치직대고 회색빛이 쏟아지는 봄/ 낯선 채널을 더듬는다/ 비밀번호를 모르겠다 유료 가입 후 시청//

폭염 / 김은옥
이미 죽은 것들은 도로를 피하지 않는다// 바닥에 끈끈하게 재봉 되어가는 주검/ 불 꺼진 눈구멍에 켜켜이 쌓이는 먼지들/ 아스팔트 묵은 상처가 흘리는 체액이/ 바퀴에 진득하다/ 아우성치며 달려가는 바퀴들 사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머리 풀어헤친 아지랑이// 도로는 끊임없이 도로를 낳고/ 주행 표시는 끊임없이 화살표를 낳고/ 화살표는 끊임없이 죽음을 낳는다/ 종점도 없고 상처도 없이/ 구만리 장천 흰 상여 한 채 떠가는데/ 검은 상복 입은 아스팔트가/ 뙤약볕 아래 땀 흘린다// 아스팔트 파인 흉터에 핏물이 고여 든다//

UFO, 그리고 찢어진 전단지 / 김은옥
폐지트럭에서 종이들이 날아온다/ 지구가 큰 숨을 몰아쉬자 태풍이 지나갔다/ 한 달 전 내다 버렸던 적자투성이 카드명세서와/ 오래전 끄적거리다 던져놓았던 시 몇 편도/ 울긋불긋 함께 날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던진 색종이 비행기는 어디를 날고 있을까/ 땅바닥에 금 그어 띄웠던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수상하다 뭔가 대단히 비밀스럽다/ 날아다니는 압축폐지를 감시하려는지/ 여기저기서 레이더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단풍도 아닌 것이 이건 분명 외계에서 온 것일 거다/ 고속도로 위를 선회하다가 높이 솟구친다/ 멈칫거리는 차 지붕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비행선처럼 앞 유리에 옮겨 앉기도 한다/ ‘우리ㄴ?’란 글자가 보인다/ 우리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어쨌다는 걸까/ 갸우뚱 대던 ‘우리ㄴ’가 날아가 버린다/ 하늘 저 멀리 흰 빛으로 사라지는 우리ㄴ/ 소통불능으로 나는 우리ㄴ를 따라갈 수가 없다/ 뒤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접시만한 두 눈을 번쩍이는 또 다른 괴물체들/ 색종이 비행기도 우리ㄴ도/ 어디에 가 닿으려는 걸까/ 비상 깜빡이 점멸하는 길 위에서/ 트럭이 속력을 낼수록 하늘 가득 반짝이는/ 수많은 비행선들//

자메뷔 / 김은옥
새 책을 펼치다가 종이에 베었다/ 손가락에서 붉은 글씨가 뚝뚝 떨어진다/ 붉은 글씨들이 붉은 눈동자가 되면서/ 잊었던 어떤 얼굴을 보는 중이다// 여름밤이 학질을 앓는다/ 집채만 한 솜이불 속에서도 헐벗은 듯/ 얼음장 같은 손이 허우적댄다/ 쇠창살 사이 바늘찜질 놓던/ 끔찍한 고문을 막아보려는 듯 허술한 방문 고리를 잡은/ 손등에 꽃피운 피딱지들이 핏발을 세운다/ 검은 꽃들이 터지고 적색분자의 붉은 피가 다시 흐른다/ 붉게 아주 붉게/ 오줌통에 출렁이는 달빛이/ 인광처럼 희번덕이며 지린내를 게워낸다/ 살아있는 종이가 검은 붉음을 불러냈다/ 산송장 같은 기억들은 이제 화장터로 보내야겠다/ 들이대고 있던 볼록렌즈에서/ 초점이 끓기 시작한다/ 기억의 혈관이 터진다 눈이 쓰리다/ 의식도 무의식도 암전/ 렌즈에 피폭당하는 울퉁불퉁한 방//

수평선 심포니 / 김은옥
귓바퀴는 부드러워야/ 바람도 파도도 살갑게 지나가지/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문득 생각나는 날이었지// 태풍은 아직 오지 않았어/ 뉴스에서 바닷가 오염에 대해 알려줬어/ 사람들이 얼마나 시험적 시식을 즐기는지를/ 오만가지 바닷속 퇴적물을 보여줬어/ 미친 듯 날뛰다 제풀에 가라앉는 희뿌연 찌꺼기 사이를/ 빈 병 주둥이가 서로 목 놓아 불러대는 전야제였지/ 목구멍이 캄캄해졌어/ 바람이 울컥대기 시작했지/ 부실한 모래톱에 파도가 순간 턱걸이를 했어/ 뒷걸음치나 싶더니 거대한 파도타기를 해오는 거였지/ 바다 내장들이 모두 튕겨 나왔어/ 파도가 덮친 곳에서는 두드러기가 돋아났어/ 멀리 수평선 때 벗지 못한 바다가 지금도/ 배를 위아래로 뒤집으며 북북 긁어대잖아// 자 귓바퀴를 만져볼까/ 저 고대의 피리 소리가 또 들려오고 있어/ 모든 살아있는 물고기들이 물을 차고 오르며 우글우글 몰려오잖아//

싱싱한 천만 원 / 김은옥
사내가 전화기에 대고 절을 한다 머리가 바닥을 뚫겠다 천만 원이면 어때요 내일 당장 가죠 옆 좌석 청년의 구두코는 비킬 생각이 없다 사내의 구불텅한 글씨가 수첩위에서 청년을 올려본다 검은 봉지가 옆에서 통로를 막고 있다 대충 묶어놓은 봉지 주둥이 안에 뒤엉켜 있는 티셔츠들이 붉으락푸르락 흐린 불빛에도 무늬가 선명하다 나도 모르게 색깔을 골라본다 네 네 지하철 탔어요 더 크게 말씀 드릴까요 내일 당장 오라고요? 구 평화시장 거기로요? 아유 고맙습니다 1호선 청량리행 손잡이가 느리게 흔들리며 차창에 비치는 구부정한 귀로歸路를 흘끗 댄다 사내는 등이 가려운지 몸을 뒤틀며 긁는다 수족관 물고기처럼 뻐끔 거리는 입 냄새가 졸고 있는 통로 가득 후텁지근하다 푸드득 숭어 한 마리가 튀어 오르는 듯 깜짝 졸음에서 깨어난다 사내의 얼굴에 싱그러운 비늘이 돋고 어깨에는 지느러미가 돋친다 드디어 양쪽 아가미가 치켜 올라간다// 노량진역 출구에 잔물결 인다 형광등 흐린 빛을 타고 내려가는 물고기 한 마리 점점 투명해진다 내일이면 구 평화시장 앞 청계천에 값싼 연봉 천만 원짜리 물고기 한마리 푸드덕거리고 있겠다 최저임금이라는 낚싯바늘로 건져 올린 연봉 천만 원짜리 뒷덜미를 꼬챙이로 꿰어들고 나는 싱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간다//

뱀딸기 / 김은옥
치장 좋아하는 어머니/ 무덤 위에도 보석 핀을 꽂으셨나/ 봉분 위에 빛나는 빨간 구슬/ 나는 병아리 되어 입에 뭅니다//

꽃샘추위/김은옥

온 삭신이 쑤시고 콧물 흘러요/ 기침에 오한에/ 잔디 밑동 맥을 짚어보니 툭 툭 터질듯해요/ 지독한 고뿔입니다/ 자꾸 코를 푸니 이러다 코가 길어지겠어요/ 담도 결리고 가래 끓고 눈알이 빠질 듯 아파요/ 약이 없대요/ 기침 소리에/ 꽃 피겠습니다/ 먼지 낀 어느 현관문이 새끼 코끼리 울음을 웁니다/ 아기코끼리들이 이 집 저 집 문 두드리는 모양입니다/ 어린것들을 그냥 밖으로 내보내선 안 될 텐데요/ 앓을 만큼 앓고 난 뼈마디로 푸른 근육을 입고/ 어린 코끼리 떼가 귀를 펄럭이며 달려올 겁니다//

꽃 쌈 / 김은옥
꺼질 듯 말 듯 다시 살아나는 불씨들이/ 봄을 온통 엎질러 놓고/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묵 찌 빠// 살기어린 봄의 꽃눈 톡톡 터지는 물방울 피의 맛/ 어두운 목구멍 속으로 뜨겁게 타들어 갈 때/ 눈 녹는 소리 종아리 달아오르는 소리// 아기입술 연지곤지 꽃샘바람 가슴에 무지개/ 사계절 지친 얼굴에 봄 한줌을 비단꽃잎에 젖은 햇살을/ 솜털 빛나는 오색빛깔 방울방울// 새침하게 단장한 꽃잎을 난도질하는 저 웃는 입/ 쓰고 매운 향기가 호기심에 씹힐 때// 잇 사이에 떨리는 봄//

그림일기 / 김은옥
종합장에 작은 나무를/ 그려 넣고 잊고 있었다// 떡잎이 진녹색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 째깍째깍/ 도화용지에 귀를 대보면 나비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 사각사각/ 꽃시계 덩굴 화관 쓴 아이가 책상다리하고 엎드려/ 손가락에 크레용이 묻어나도록 요리조리 매달아 놓은/ 나뭇잎 숭숭 뚫린 구멍 따라 햇빛이 드나들고/ 구멍 저편으로 먼지 하나 없는 세상들이 자꾸자꾸 자란다/ 잎줄기 모양 멀리멀리 뻗어있는 길 따라/ 어린 마음이 뒤뚱뒤뚱 꽃을 심는다/ 꼬물꼬물 고사리손이 나비 치마를 쫓고 있다//

새들의 특별시 / 김은옥
어미가 방독면을 쓰고 허공을 바라본다/ 하늘 들판에 거미줄 같은 노선을 빽빽이 새겨 넣기까지/ 수많은 어미 아비들이 희생한 시대를 기억하는 중이다// 눈 깜짝할 새 뚝딱 완성되는 도시의 힘/ 쉴 새 없이 전진하는 문명이 블루 홀 빛 닮은 오존홀을/ 만들어내고 있다/ 뼈를 튼튼히 키워야 할 도시가 근육위축증 앓는다/ 구멍 숭숭 뚫린 엽록소의 관절들이 부러진다/ 도깨비 같은 문명의 비소가 허공에 가득하다/ 어미 새는 돌연 변종의 고등동물들을 내려다본다/ 온실효과는 숲을 서서히 사막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오존홀의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악취가 빛의 속도로 퍼진다/ 어미 새가 곧 솟구쳐 오를 기세다/ 저 아가리를 향해 핏줄이 불끈거린다// 쥐라기 시조새로부터/ 멸종한 족보들의 비상飛翔하던 발자취까지/ 일억 오천 만 년 동안의 연대기를 간직하고 있다/ 기록은 계속된다// 지금 새끼 새들은/ 움찔움찔 치솟는 기운으로 한창이다/ 날개를 들썩이다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한다/ 어미의 어미들 아비의 아비들의/ 하늘 들판 가득했던 힘찬 날갯짓을 닮아가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노선을 하늘에 새기고/ 새로운 도시를 세워야 할 때// 한 무리의 새가 나뭇잎 사이로 아득하게 깃들고 있다//

 

사철나무가 흔들린다 / 김은옥
한 생애가 살갗을 스친다/ 사철나무 하나 흔들흔들/ 다른 나무는 조금 흔들/ 멀리 있는 나무는 살짝 흔들/ 흔들리지 않는 나무들도 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에도/ 바람의 마음이 통하는 것과 통하지 않는 것이 있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바람의 생애를 읽는 사람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오시리라는 기대에/ 미리부터 움찔 떠는 놈도 있다/ 돌멩이가 날아온다/ 큰 걸음으로 피하고 바라보니 날아가는 참새였다/ 참새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까/ 참새는 미래를 모르고/ 나 또한 돌멩이를 모른다/ 바람이 분다/ 아까 그 바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기로 다 같이 결의한 국군의장대 같다/ 바람의 생애를 읽으려는데/ 또 다른 바람이 오신다/ 바람의 심장에 손을 얹는다/ 수많은 생애가 내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불꽃을 불러오다 / 김은옥
등불에/ 지지직/ 하루살이 불나방/ 타들어 가던/ 심지 돋우던 팔뚝에/ 힘줄 부풀어가던 밤/ 기억을 뱉어내지 못해 꿈길을 더듬어가는/ 우글우글/ 죽은 이의 오래된 이불솜 사이사이/ 쥐벼룩이 들끓고 있었다/ 오줌 냄새도 풍겨왔다/ 곰팡이 쥐벼룩이 집 지은 솜이불을 버리고 돌아서던/ 곰팡이가 먹어들어갔을/ 아버지가 흘린 체액 같은 것들을 두고/ 돌아서던/ 단단한 딸의 등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이 있었다/ 등잔불 둘레에서 아직도 수많은 얼굴들이/ 정처 없는시곗바늘을 돌리고 있다/ 이 밤 지지직/ 하루살이 불나방 타오르며/ 불꽃을 불러온다/ 심지 돋워주던 힘센 팔뚝이/ 불쑥 어깨를 짚어온다//

투명한 얼룩 / 김은옥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예쁜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부서지는 꽃 꽃 꽃// 입술 모양이 찍힌 유리잔을 바라보다가/ 꽃잎 닮은 얼룩만 묻혀놓고 일어서지요/ 우리의 지나간 시간이 얼룩투성이로 남네요// 왜가리가 단거리 수상스키를 합니다/ 급정거를 했어요 정지거리의 흔적이 없어요/ 새끼도 동그란 몸통을 젖히고 으스대면서 미끄러져요/ 양 날개를 몇 번 우아하게 출렁이며// 바다가 파도의 거품으로 꽃을 피웠다 죽였다 하면서/ 하루를 천 년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 그러나/ 그 거품을 꽃이라 하면 그 꽃은 흔적이 없지요// 파도는 그대를 꽃으로 피워냈다가/ 부서뜨렸다가/ 또 다른 꽃을 피워냅니다/ 왜가리의 날카로운 고단수 착지에/ 찢기고 흩날린 꽃들도 태어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겁니다/ 사라져 간 그 모든 얼룩을 찾아서/ 물결 위에 꽃꽂이해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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