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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길성 시인
1961년 경기도 과천 출생.
2008년 《창작21》로 등단.
시집으로 『징검다리 건너』,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가 있음.
현재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 회원.
고요에 대하여 / 조길성
어릴 때 나는 푸른 하늘을 보고 고요를 배웠습니다 무더운 여름 이었지요 아무도 없는 마당에서 나 혼자 고요가 소리치는 걸 보았습니다 깊어서 너무나 깊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깊이까지 가 보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편안했습니다 고추잠자리가 나를 깨울 때까지 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깊고 거대한 고요는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수탉 / 조길성
억센 다리를 가진 수탉이 마당을 거닐고 있습니다 푸른 갑옷에 검은 수염이 자랑입니다 모가지가 탱탱한 놈이 부릅뜬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붉디붉은 벼슬은 제왕의 관을 닮았습니다만 언월도를 닮기도 했습니다 마당 가득 칼날 아래 피 뿜어내는 찬란한 빛입니다 누구 있어 내게 슬픔에 대해 묻는다면 그 혀를 잘라 버리겠습니다//
물매화 / 조길성
녹은 쇠에서 나온 것인데/ 그 녹이 쇠를 먹어 치운다*/ 다리 저는 짐승들이 시방 집으로 들지 못하고 한 데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사하라/ 바람이 잠든 밤에는 지구가 스스로 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독한 담배 불 하나 이승을 떠났다/ 네 눈빛이 내게로 오다가 얼어붙어 툭 부러져 내린 뒤에/ 이제는 술 먹지 않고도 울음이 네 발로 기어 나오는 나이/ 헛소리처럼 꽃이 피었습니다/ 죽은 친구가 귀신을 쓰다듬고 있는 골목 귀퉁이 누군가 쓰다버린 물감을 개어 바른 누런 창에 비치는 얼굴/ 네 눈에 숯불을 넣어주랴//
* 법구경에서
성님성님하면서 눈이 내릴 때 / 조길성
입춘 추위가 매섭던 새벽 차비도 없이 눈 속에 갇혀버린 광명하고도 사거리에서 헤메다 찾은 조모 시인의 고시원// 성님 시원한 물 쪼까 드셔 이방 저 방 다니며 담배도 얻어 와서 성님 담배 잠 피워 보드라고잉 앗따 차비라도 구해얄 텡게 또 이방으로 저 방으로 돌아친다 성님 전철비가 천 오 백 원잉께 버스비가 팔백 오십 원 이제 이천 사백 원이면 갈 수 있제 성님 꼬깃 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에 백동전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손에 쥐어준다 성님 참말로 미안하요 라면이라도 한 봉지 끼려 드려야는디 주머니 먼지밖에 가진 게 없어라 맨발로 따라나서며 우린 입춘의 눈발을 맞는다 성님 봄 되면 나가야지라 일거리도 많을테고라 방도 얻어야지라 성님 도다리 좋은 놈 잡아 회도 쳐 묵고 찌게도 끼려 감서리 소주도 한잔 찌끄리고잉새봄엔 광명한 햇살이 내리실라나 광명사거리에 눈 내린다성님성님하면서//
아무데나 / 조길성
술국이 맛나게 끓고 있는 해장국집을 들어설 때나/ 질척거리는 진창길 지나 불빛 흐린 여인숙 현관문을 들어설 때/ 지나는 고운여자 뜻 모를 웃음에 홀려 길을 잃는 오후에도/ 내 집은 바람 속에 있다/ 어델 가랴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위에서/ 고향은 언제나 변두리 버스 정류장이고 시외버스 터미널이고/ 간이역 햇살 환한 기차정거장 출발 오 분 전/ 처마 끝 배추시래기에도 뿌리의 기억이 새롭게 눈뜨는 저녁/ 낯익은 골목 밥 짓는 냄새에 살을 데이며/ 길 떠나야지/ 어느 생이 다시 온다 해도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모르는 누구의 마당을 향하는데//
바늘 / 조길성
우리 집이 고요했던 때를 안다/ 바늘을 떨어뜨렸던 때를/ 바늘은 너무 깊이 떨어져서/ 아직도 가라앉는 중이다/ 물소리도 없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해구 일만 천 미터/ 비티아즈 해연까지 내려간 모양이다/ 며칠 전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수압을 못 이겨/ 바늘이 몸 뒤틀며 지르는 신음이었던 것 같다//
고요 / 조길성
도둑이 달빛을 가로질러 건너다가 그림자 밟혀 넘어졌다/ 검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검법은 뼈를 자르는 검법인데 그 어떤 고수도 이 고요는 자르지 못한다/ 삶을 쓰려다 오타를 쳐 사람이 되었으나/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끝내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아서 잘못 쓴 유전자 지도를 들고 끝도 없이 한 밤중을 헤맬 것이다//
격파(擊破) / 조길성
왜 늘 절반 쯤 비껴 앉으시나요/ 문득 어디서 긴 머리카락이 불어왔다/ 가을/ 입 돌아간 모기라더니 쏘이니/ 뼛속까지 얼큰하다 몸 비끼면 마음 비낀다고/ 허나 절반은 두고 가니 보태 쓰라고/ 은유의 방에서는 벌써 얼음장 갈라터지는 소리 들려오는데/ 면도칼로 뇌의 지문을 도려내어 꽃밭을 온통 새로 칠했으나//
불국사 / 조길성
오래된 집은 사람처럼 앓습니다 이 빠지고 귀 어둡고 해소 가래 기침에 시달리지요 관절염 앓는 바람이 절룩이며 지나가자 가르릉 가래 끓는 소리에 낙엽이 뒤를 좆습니다 가을이면 나는 내장을 빼낸 생선 울긋불긋 갖은 양념 뒤집어쓰고서 끓습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라지만 말처럼 쉽습니까 청명한 바람이 오래된 축음기판을 지익 긁고 지나가는 소리에 서리 맞은 꽃들이 문득 깨어나 마당에서 툭 툭 불거집니다 애신각라 애신각라* 틀린 꽃 속에서는 막차 떠나는 소리도 들립니다 이 집엔 금나라를 떠난 툰드라가 살고 있어서 문고리에는 늘 살이 묻어있습니다 부리에 피를 묻혀야 우는 새가 뒤뜰에서 울면 나는 피를 빼낸 불국사 퓨즈 나간 나무가 되어 전기 없이도 홀로 타오릅니다//
* 愛新覺羅: 청나라 황족의 성씨이다.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뜻
놋쇠황소 / 조길성
고대 시칠리아에서는 놋쇠황소라는 잔인한 사형방법이 있었다 속이 텅 빈 놋쇠황소 뱃속에 사형수를 집어넣고 밑에서 불을 때 죽이는 방법이었다 사형수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는데 그 소리가 황소의 목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진짜 소 울음소리로 바뀐다 지켜보는 이들은 소 울음을 즐겼다고/ 푸줏간 쇠갈고리에 걸려 있어야할 살코기들이 길거리에 나와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머리가 없으니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습니다 입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어두운 살점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살코기마다 놋쇠황소를 하나씩 지니고 있습니다/ 질문을 그치지 않으려 별들은 눈을 감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질문 어쩌면 저 별들도 잘못된 질문일겁니다/ 누군가 불을 질렀는지 생살 타는 냄새가 거리에 가득합니다만 아무도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얼마나 독하면 유리창에 까지 스며 눈을 붉히겠습니까/ 어제는 잘못된 질문 하나가 죽었다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떤 관계냐고 잘못된 질문으로 오십 여년을 함께한 질문이지요 지하방을 술병으로 가득 채워놓고 그 가운데에 쭈그리고 있었답니다 제대로 된 질문이 되고파서 수많은 날들을 소 울음 울었을겁니다/ 지금은 놋쇠황소 뱃속의 새벽 세시입니다 전화벨이 울리는군요 어떤 질문 하나가 뜨거워 몸부림치며 놋쇠황소를 울리고 있나봅니다//
혼자 두는 바둑 / 조길성
돼지고기를 삶으면서 저녁 비 내립니다./ 하수는 겁이 없고 고수는 변명이 없다며 검은 돌을 쥐고서 어둠이 내립니다./ 끈 없는 구두에 질끈 끈을 동여매며 오시는 저녁입니다./ 흰 돌이 부족해서 어쩌나 걱정하시며 낙숫물 듣는 저녁입니다.// 살아 있는 유리창은 고요하지만 죽은 유리창은 동맥을 그을 수도 있다며 날카롭게 내리는 어둠입니다./ 그녀가 갈비뼈 사이에 살고 있는 툰드라에서 서리꽃이 피었다며 웃는 차가운 저녁입니다./ 중원에 검은 돌 한 점 놓고는 고요만이 가득한 저녁입니다.// 평생 빈삼각만 두며 살아왔다고 거북등 같은 건 본 적도 없다며 내리는 어둠입니다./ 나뭇잎을 단체로 떨어뜨리며 겨울이 강제 행정대집행 들어오는 저녁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진다며 흰 눈썹 휘날리며 그 분이 오고 계시는 계가 불가능한 어둠입니다.//
드문드문 꽃 / 조길성
어느 봄날이었지 중얼거리자 꽃이 불어왔다./ 어스름이 내리면 솜털 닮은 풀들이 깨어나는 시간,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모든 바람이 집으로 몰려가는 시간./ 흰 종이가 물러가고 검은 종이가 책상위에 펼쳐지는 시간./ 빼곡하게 적어놓은 일기는 여백을 찾을 수 없고, 세상 모든 창문들이 의문으로 빛나는 시간. 어린 어둠 속을 늙은 매화향기가 할퀴고 간 시간./ 묵은지를 꺼내던 손등에 얼비치던 노을이 뺨 위에서 어두워지는 시간./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지 않으리라 으드득 이를 갈며 넘어지며 또 일어서는 눈사람의 시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 마리 겨울새가 휘익 날아간 뒤에 국수는 새롭게 끓고 동치미는 아직 얼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 드문드문 가시가 망막을 찢고 나오는 어두운 꽃들의 시간.//
깨진 어항에서 금붕어가 / 조길성
아가미에 소름 돋는다 죽은 뒤에 자라난 아가미다 그래도 숨은 쉬어야지 목과 숨 그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얼굴이 있다// 어느 집 마당에 봄눈이 싸래기로 내렸나 싸래기 밥만 먹고 말을 씹다가 마는 검은 염소가 문지방을 넘는다// 금붕어는 신발이 한 짝 밖에 없어 어항을 벗어나지 못하고// 냉장고를 꽉꽉 채워놓아도 늘 배고픈 허수아비는 뼈가 살을 뚫고 나오는지 온 몸을 뒤틀고 있다// 울다 지쳐 잠 든 어린 숟가락이 자기 탯줄을 묻은 밤 외다리 깽깽이 나라에도 봄이 오시려는지 눈 속에서 동네 강아지들이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채우는 중이다// 가위소리 쩔겅이며 엿 장사 지나가자 꿈을 깬 사나이가 드리운 낚싯대 끄트머리 금붕어는 미끼를 건드리기만 할 뿐 물지 않는다// 평생 남의 무덤만 파다 제 무덤은 파지 못하는 끼니 거른 바람이 입만 뻐끔거리며 장님 지팡이에 꽃을 피우려 애쓰고 있다//
코끼리와 목욕탕 의자와 은행나무와 나 / 조길성
코끼리가 말했다 언젠가 너희들도 코가 길어질 거라고 아니면 귀가 커질지도 모르지 펄럭이는 귀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목욕탕 의자가 그러더군 나처럼 낮아지라고 그러면 엉덩이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가 된다고 뒤틀린 문짝이 네 눈꺼풀이란 걸 알게 되듯이 삐그덕 소리에 눈뜨는 별들도 있지 어쩌면 은행나무는 유리창에서 나왔는지도 몰라 유리창은 가끔 신음소리를 내기도 해 겨울이 감당하기 힘든 추위로 유리창에 들어와 이를 딱딱 부딪고 있어 복도는 목이 길어서 문에 가 닿기 힘들지만 끝내는 문이 되지 은행나무의 뒤틀린 문짝이 흔들릴 때 도끼는 이미 네 눈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지 햇살이 너무 단단해서 만져 본 하늘에 손목을 베었어 푸른 피가 뚝뚝 흐르고 있어 코끼리는 코가 잘리고 복도는 목이 잘리고 문은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지 은행나무는 이미 잘린 혀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고 묵묵부답이야 모든 불의 흔적이 발화점을 향하듯 목욕탕 의자는 수많은 엉덩이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지 이제 코가 길어지거나 펄럭이는 귀를 가질거야 목이 길어지는 것도 괜찮겠지//
꽃은 부드러운 칼입니다 / 조길성
당신이 칼을 들어 꽃을 베고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오늘 그 말씀이 내 혓바닥에서 다시 꽃피는 걸 봅니다. 꽃 속에는 망막 너머 깊은 바다가 있어 내 목젖 가까이 깊은 골목에까지 들어와 찰랑거립니다.// 한때 당신이 우물이었을 적에, 나는 보름달이 지나가다 떨구고 간 고등어 비늘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고등어를 마당에 꽃 피우고야 말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주세요. 칼처럼 부드러운 꽃을 내 검은 혓바닥에 피는 꽃은 말고 의주나 블라디보스톡이나 봉천이나 길림이나 목단강이나 그런 이름들로 불러주세요. 그런 이름들은 자리끼 얼어붙는 저승 윗목쯤에 있어서 죽어서도 이 으드드득 부딪는 턱으로 남아있어서 씹어도 씹어도 다 씹지 못하는 되새김질이겠지요만, 아직도 고막에 맺힌 그 말씀으로 주세요.// 다시 칼을 주세요. 아니 꽃을 길을 버린 이름들에게 말씀을, 물푸레나무 몽둥이나 소 좆 몽둥이로 맞아 흩어진 살점 닮은 꽃을 주세요. 연은 끊어져 날아가고 실타래는 엉켜버린, 이미 죽은 바람들이 날짜 지난 신문을 서로 읽으려 싸우다가 당신 뼈로 피리를 부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아무도 울지 않는다 / 조길성
피리는 스스로 울 줄 안다/ 사람이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세상 모든 악기들은/ 가장 잘 울 줄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꽃들도 울 줄을 안다/ 소월이 가르쳐 주고 갔다/ 풀들도 울 줄을 안다/ 김수영이 가르쳐 주고 갔다/ 바람이 대숲에서 눈시울 붉히고 있다/ 이제 누가 우리에게 울음을 가르쳐 줄 것인가//
두루미는 물가에서 제 그림자를 깊이 들여다보고 / 조길성
소설가 김성동 선생 댁에서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술을 먹어 그렇기도 하지만 말이 거칠어졌다/ 누군가 내가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은/ 나더러 억울해야 한다고/ 나는 우리 조상이 보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대들며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 우겼다/ 그러던 끝에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선생은 나더러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 했다/ 영평읍에서도 몇십 리 산골짜기 절터에 집을 지었으니/ 차도 없이 나올 길이 막막했으나/ 그 깊은 밤 두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화가 가라앉지를 않아 쌍코피가 흘러내렸다// 오늘 산 하나 넘어 다른 집에 묵으며 봉우리 너머를 바라본다// 그날 우리는 누구에게 화를 낸 것일까/ 억울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억울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끝도 없이 내 안에서 싸우는 소리 들린다//
은사시나무 / 조길성
울음은 공명이다/ 목숨 가진 것들의 허파에 들어있는 생명의 탄력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쓸쓸함들이 신선한 이슬의 자궁을 지나/ 드높은 소리의 사다리다/ 올라 가 보면 신비가 있을 것이다/ 울음 없이도 빛나는 은사시나무의 침묵 곁에서/ 별들을 올려다보면/ 쓸개마저 딸려 올라간 저 하늘 밤빛이/ 누구의 울음으로 저리 빛나는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의 환희의 눈물인/ 모든 눈물 가진 것들의 기쁜 손짓들이/ 은사시나무를 어루만져/ 희미한 울음의 기억을 눈 뜨게 한다/ 귀 기울이면 발자국 소리 발자국 소리/ 죽은 나무조차 되살아날 듯 반가운 속삭임이/ 별들의 피를 깨워 흰 뿌리까지 적셔오지만/ 제 몸에 키운 이슬방울들이 깨어날까/ 더욱 숨죽이는 어둠 속/ 모든 울음이 이슬 곁에서 한층 맑아지는/ 맑음으로 뿌리를 씻는/ 은사시나무 고요한 눈빛//
소식 / 조길성
땅거미가 내리는 걸 지켜봅니다/ 마당이 생각에 깊습니다/ 젖니 같은 그대/ 편지 주세요//
대숲에서 / 조길성
여기는 간이역 잠간 내려 엿들은 풍경이 전부일까요 목 없는 숟가락으로 검은 밥을 떠 먹여준 얼굴 없는 그대를 생각합니다 쓸개집을 짜내어 내뱉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녁이 창자를 흘리며 서있는 여기 귀신도 헤매다 갇혀버린 마디 속에는 얼음을 뿌드득 뿌드득 씹으며 세상을 건너온 쓸쓸한 소문들도 들어있겠지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 / 조길성
수제비를 뜯어 넣으며 하시던 푸르른 말씀들이 사람을 벗은 채 차갑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두엽에 새긴 도끼자국을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무덤을 깊이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셨지요 한 시간만 더 아궁이 재가 식지 않는다면 새벽이 가기 전에 한 줄 정도는 더 이 어둠을 적고 싶다고요//
징검다리 건너 / 조길성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파파리반딧불이/ 도랑가에 별빛으로 날아 망아지 눈 속처럼 깊은 밤을 부르던 거기/ 그리운 것들 실어 우체국으로 보내면 명왕성 해왕성 징검다리 건너/ 고향집 창가에 갈 수 있을까// 삶의 두려움이 긴 그림자 드리우는 창가/ 어린 나무들 불빛 쪽으로 키를 늘이는데/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파파리반딧불이 그렁그렁한 별빛 사이/ 징검다리 건너 대문을 여는//
‘송아지 눈 속 깊은 우물을 본 적 있니’ / 조길성
그 물에 두레박을 내려 달을 길어본 적 있니/ 그 달을 마시고 꽃을 토해본 적 있니/ 그 꽃 속에 들어가 한잠 늘어지게 자본 적 있니/ 그 잠 속에서 꿈을 불러 엄마를 만나본 적 있니/ 그 품에 안겨 은하 별들을 뚝뚝 흘려본 적 있니//
찬밥 / 조길성
혼자 먹는 밥상머리/ 어둠이 다가와 앉는다/ 그 크고 검은 눈망울로/ 세상이 살 만하냐고 묻는다./ 뜨거운 물이라도 말면/ 창자라도 데울 수 있을 텐데 하면서/ 하지만/ 어둠의 거뭇거뭇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해 준다 내 핏속엔/ 압록강 쇠다리를 건너온/ 무쇠바람이 살고 있다고/ 장마철에도 황사가 날리는 거기/ 어떤 뜨거운 입술로도/ 모진 쇠끝을 달구긴 힘들 것이라고/ 밥알 한알 한 알에/ 서리가 내려/ 말씀 깊어가는 저녁//
몸살 / 조길성
햇살이 풀 먹여 잘 다려놓은 도시이불을 닮았다/ 문틈으로 향긋한 약 달이는 냄새가 새어 든다/ 누워 있지 왜 나완/ 마당 귀퉁이 돼지우리 곁엔 진흙 바른 간이부뚜막이 있다/ 이젠 패독산 한 첩이면 감기도 정나미가 떨어져 구만 리는 달아날 게다/ 당목저고리에 수목치마 정갈한 가리마가 먼 길 떠나실 차림 같아 서글펐다/ 대가리와 꼬리를 떼어낸 통통한 콩나물에 갱엿을 얻어 아랫목에 덮어두면/ 콩나물이 명주실처럼 가늘어졌다/ 그 국물을 마신 게 어젯밤 일인 것 같은데/ 한약을 먹으려면 속이 허하면 안 되지/ 할머니 말씀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는 이 쓰려왔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라/ 골백번도 더 들어 달달 외운 그 문제가 난 참 좋았다/ 층디층 로디 츠디 라/ 만주족 말인데 젊어선 푸르고 늙어지면 붉고 입에는 맵다/ 소주잔을 비운다/ 된장에 고추를 찍어 씹으니/ 입에는 맵고 눈이 붉어온다//
다녀오겠습니다 / 조길성
볕 좋고 바람 또한 좋아/ 나무그늘에 앉았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두리번거려도/ 보이는 이 없는데/ 이번에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빈 병이 줄고 있는 거였다/ 어떤 사연을 지녔기에 이 바람은 여기서 빈 병을 울리고 있나// 다녀오겠습니다/ 이 말을 해본 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빈집에 대고 다녀오겠습니다/ 중얼거린 적 있다/ 누군가 다녀오겠습니다 하던/ 꽃잎처럼 저문 그 말씀이/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식구 / 조길성
식구라는 말이 그리워 옥편을 들추니 밥식에 입구라고 쓰여 있다./ 밥 먹는 입 밥 먹는 구멍 밥 먹는 아가리// 거지 엄마가 거지새끼들을 새끼줄에 묶어 주렁주렁 끌고 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새끼줄을 왜 새끼줄이라 부르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은 세상 숟가락 부딪는 소리 가득한 저녁 문득 새끼줄 맨 끄트머리에라도 매달려 따라가고 싶다//
허기 / 조길성
오늘은 귀로 국수를 먹습니다 바람국수를요 바람이 키운 아이가 국수를 말고 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혔네요 누군가 어깨 들먹이며 울먹이는 국수 흐느끼는 국수 한숨으로 울음으로 뜨거워진 국수를 먹습니다 내 안에 사는 허기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이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서 그 허기가 말도 못하여 저승 윗목에 부는 바람같이 막 을 길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습니다 불치의 국수를 집 없는 국수를 문이 없어 꽉 막힌 국수를 팔다리 잘리고 몸뚱이로만 굴러다니는 불구의 국수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 / 조길성
녹슬어 못 쓰는 옛 자물통 속에 들어 앉아 은하계를 여행하는 거지가 짜장면 시켜놓고 급한 일로 거처를 비웠다가 오랜만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퉁퉁 불어터진 짜장면을 꺼내먹는다// 조율 안 된 별똥별을 밟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혀 잘린 사람이 나무판자를 혀끝에 잇대어 무어라 말하고 있다 딸깍딸깍 별들이 부딪고 있었다// 별들은 사악한 놈의 맑은 눈동자/ 맑은 죽 그릇에 얼비치는 더러운 얼굴들// 당나라시인 이하는 내 한 많은 피 무덤 속에서 천년을 푸르리라 했다 이 땅에 뿌려진 피는 방사능 보다 더 오래도록 푸를 것이다/ 빛나는 걸레 나부끼는 국가보안법 다 식은 주전자가 마지막 숨을 토하는 밤이다// 주인이 찾지 않는 분실물들은 모여 앉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하고// 오늘은 등뼈에서 핏물을 뺐다 몇 글자나 적을 수 있을까 어제는 안구에서 먹물을 뺐다 내일은 무릎에서 고름을 빼야하나//
바람이 분다 / 조길성
늙은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 없이 보내는 시간이 두렵다고/ 가시가 망막을 찢으며 어둠을 데려 온다/ 등 굽은 할머니가 다리 저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지나가는 저녁이다/ 눈꼽처럼 별이 뜨고/ 개 짖는 저녁이 절룩이며 깊어간다// 나는 어릴 때 새들이 배가고파 우는 줄 알았어/ 지나가는 저 이쁜 아가씨에게 우표를 붙여주면/ 내게로 올까// 친구는 공사장에 삽을 꽂으며 웃었다/ 그 친구는 죽어서도 주소가 없다/ 내 주소는 어디쯤에서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을까// 오래전 골목으로부터 벚꽃 불어오는 밤이다// 붉은 피가 검어지고/ 그 피가 푸르게 번쩍이는 밤이다/ 외투에 묻어들어 온 찬바람이 아직 방안에 가득한데// 삽자루에 꽃핀다// 우리는 삶을 마감한 뒤에 빛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둠으로 돌아갈 것인가// 세상 모든 창문들은 질문으로 빛나는데/ 마차는 하늘 위에 있고 말들은 준비가 덜 되었다//
혼자일 때 혼자가 풍부해진다 / 조길성
날씨가 완장을 찼는지 제멋대로입니다 한나절에 사계절이 두루 다녀가십니다 주서식지를 떠나 사람으로부터는 퇴근하지 마시길// 줄거리 보다 양념이 더 많은 이야기를 지닌 몽땅 실패한 사랑의 작대기가 눈에서 고름을 짜내며 갑니다 피가 농약인 여자 누구에게도 쏟아질 수 없고 누구에게도 수혈할 수 없는 여자가 뜨거운 피에 겨워 깊은 밤 손칼국수를 썰고 있습니다// 몹쓸 놈이 듣지도 않는 약을 때마다 팔아먹는 계절입니다 푸른 것들이 수묵화를 부욱 찢으며 돋아나더니 어느새 서리 묻은 옷을 걸치고 오는 계절입니다 지팡이로 툭 치니 꽃들이 깨어난 엊그제가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사라진 뒤에 아무리 뻐꾸기 날려도 대답이 없으니// 물 밑에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체 관람 가 극장에서 만날 수는 없었을까요 여기는 심야영화관 홀로 영화를 봅니다 산비둘기 울음에 피가 맺혔어도 그 피에 젖는 이 아무도 없는 영화관 자막에 내리는 빗금 속에서 용비어천가를 듣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나니 얼음 밑으로 뜨거운 것이 흐르는 물속입니다//
대설풍경 / 조길성
달빛이 마을 구석구석 다리미질하고 있다/ 혼자 사는 영감이 움으로 고구마 꺼내러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밤이다/ 잘 다린 와이셔츠에서 뽀드득 소리 나겠다//
폭설 / 조길성
여름 내 풀벌레소리 쓸려와 창문이 막혔나 귀뚜라미 가물대던 가을 지나/ 이 밤 고요하시다// 고요가 고요를 잡수시다 체하셨나// 뚝/ 부러지며 쏟아지신다// 판소리 중에 고수가 북을 찢었나/ 세상 고요를 고막이 다 먹먹 잡수셨나//
뜨거운 열매 / 조길성
땀으로 절어 구두가 썩을 때까지 뛰어다닌 적 있었다/ 콧구멍 속 콩알이 익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본 적도 있었다/ 흘린 땀이 말라 반짝이는 소금을 모아 놓으면/ 소금가게 하나 차리겠다며 웃음 지은 적 있었다/ 질통 지고 벽돌 지고 오르내릴 때/ 언젠가 이런 집 한 채 장만해야겠다고/ 눈빛 반짝이던 날들이 있었으나/ 지나보니 알겠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열매인지를/ 먹으려 들면 입술부터 녹아내리고/ 이가 술렁술렁 빠져 내리고/ 혀가 흘러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폐가 / 조길성
경운기가/ 녹물 뚝뚝 흘리고 있다/ 이건 꿈이다/ 기름대신 피 묻은 밥을 먹는 꿈이다//
가을 / 조길성
어느 골목에나 너는 서있다/ 참빗 훑는 소리로 쨍쨍한 빛으로/ 눈에서는 불을 떨구며/ 발 등 뚫고 들어오는/ 깊은 생각으로//
한 잔 들게 / 조길성
찬바람 부니 문득/ 그 여름 박꽃이 떠오르네/ 환한 웃음이 보고싶네/ 별들은 뜨겁다던데/ 찬 기운이 독하게 밀려오네/ 영하 이백칠십 도를 견디자니/ 허공이 뼈 속에 사무친 걸까/ 새들도 상처를 받고 가네/ 은하계를 샅샅이 훑어도 찾을 수 없는 눈빛이/ 자네에겐 있었네/ 이제 창문을 닫아야겠네/ 자네도 한 잔 들게//
달 / 조길성
볼수록 닮았다/ 창문을 열어줘야지 춥겠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조길성
참 이상해/ 마당이 무언가 수상한 기운으로 가득해/ 숨바꼭질하다가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야/ 자고 나면 오이순이 호박 줄기가 고춧대가/ 상추 대가 한 뼘씩 자라는데/ 온종일 들여다봐도 꼼짝 않다가/ 자고 나면 또 한 뼘이니/ 마당엔 분명 뭔가 있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두 얼음땡이야/ 저것들이 모두 짜고 저러는지/ 귀신이 있던지/ 마당에 뭔가 있긴 있어//
겨울비 내리는 극장 / 조길성
귀뚜라미 더듬이 끝에서 더듬더듬 서늘한 바람 불어오더니 귀뚜라미 정강이살 두어 근 발라 먹고서 서릿발이 키를 늘입니다 집 나갔던 대문들이 골목에 모여 이를 딱딱 부딪는 계절입니다 열어줄 문도 없으니 그저 바라볼 밖에요//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피를 뽑아 파는 극장입니다/ 원숭이들과 슬픈 영화를 보네요 이 세상에 없는 빛깔을 설명하는 얼굴로 원숭이들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악몽을 지켜봅니다 녹슨 얼굴 녹물 뚝뚝 흘러내리는 구멍으로 당신 없는 문을 두드립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들을 부르며 없는 문을 끝도 없이 두드리며 없는 창문들을 깨트리며//
바퀴벌레들 / 조길성
똥을 먹고 무지개를 싸다니 가끔 뚜껑을 열고 생각을 덜어내야 한다 돈을 얇은 유리로 만들면 쉽게 모래로 돌아 갈 텐데 오지도 않을 내일을 기도하며 인생을 걸고서 주사위 던진 놈이 걸레 빨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바퀴는 참혹한 발명 삼각형으로 만들었어야한다 지구가 둥글지 않도록//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보면 대부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현을 버리지 않고 선비는 특별한 이유 없이 거문고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했다/ 시인이 울음을 버렸으니 무슨 노래가 나올 것인가//
아지랑이 / 조길성
빈집이 허기에 지쳐 벽지를 뜯어먹다 초벌 바른 신문지를 읽고 있다/ 무슨 일인가 마당이 수런수런 시끄러워 내다보니/ 보글보글 햇살이 마당에 모여 라면을 끓이고 있다/ 가마솥 척 걸어놓고 장작불 지폈다 기다렸다가 젓가락 들고 나가야겠다.//
그윽하다는 것 / 조길성
어릴 적 부뚜막에 앉아 있으면/ 두부가 고요히 숨 들어갈 때가 좋았다/ 두부가 두부끼리 몽글몽글/ 결 곱게 섞여드는 모습이 좋았다/ 간수는 간수대로 물빛이 맑아지고/ 젖내음 닮은 콩내가 참 좋았다 나는/ 어느 엄마와 아기가 그윽한 눈빛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기 젖살 같은 두부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게 너무 좋았다//
아직도 아궁이 불빛이 / 조길성
한겨울/ 문고리 함부로 못 만지는 마음이/ 쩍쩍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방문을 열면// 손톱으로 이를 잡아 터뜨리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에 놀란/ 싸라기눈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벼룩처럼 뛰는 밤// 아궁이 불빛이 괄게 타오르면/ 가마솥 끓는 소리가 기관총 소리를 닮았다고/ 개들이 사람고기를 뜯어 먹고는/ 철버덕철버덕 고인 물을 양껏 먹는 걸 보니/ 사람고기가 짜기는 짠 모양이라고/ 이미 기차에 몸을 싣고/ 청천강 쯤 건너고 있는 눈빛으로/ 할머니 한 분 중얼거리며 앉아 있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한 마리씩 그 곁에 서로 모르는 척 앉아있고/ 기차가 잠시 머문/ 봉천이나 장춘쯤에서/ 봄으로 가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사내가/ 아궁이 불빛을 들여다보고//
갈색 말 / 조길성
아직 이름도 없는/ 갓 두 살 된 갈색 말이/ 원형마장에서 채찍으로 맞고 있습니다/ 어린 말은 눈만 예쁠 뿐/ 아랫배는 축 쳐지고 근육도 볼 품 없답니다/ 능숙한 기수가 등짝 위에 올라앉아/ 마장을 빙빙 돌리려 하지만/ 아직 망아지 티를 채 벗지 못한 말은/ 다리를 뻗대거나 몸을 뒤틀면서/ 기수를 떨어뜨리려 하지요/ 뒤따르던 관리원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도/ 명문을 모르는 채/ 더욱 길길이 날됩니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지요/ 끝까지 거부하던 드센 몸짓도/ 미루나무 그늘이 깊어갈수록 풀이 꺽여듭니다/ 매 맞지 않으려 수걱수적 기수를 태운 채/ 마장을 돌아갑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어린 말에게도/ 슬픈 이름 하나가 주어질 겁니다//
어미라는 이름을 가진 새끼 / 조길성
맛나게 풀을 뜯던 어미소가/ 엄마아 한다/ 코도 뚫지 못한 송아지가/ 어미 소를 바라본다/ 지켜보던 동네 아이놈들/ 새끼보고 엄마래 하며 키득거린다/ 푸른 하늘 아래/ 말이 되지 못한 어미들의 슬픔을 아는 걸까/ 어미 소는 엄마엄마 부르고/ 겅중 겅중 됨을 뛰는 송아지/ 들판이 온통 제 것이다//
다리 밑에서 / 조길성
원규가 정성스레 목욕을 한다/ 고물이 돈이 안 된다고/ 일주일 벌어 이만오천원이라고/ 고개를 흔들더니 남들 출근시간에 맞춰/ 새 옷 갈아입고 나간다/ -전철 타러 가?-/ 대답대신 씩 웃는다/ 외로운 거다/ 전철이라도 타고 몸 부비고 싶겠지/ 사람냄새에 몸 떨다 오겠지/ 집도 절도 부모도 형제도 없는/ 마흔 살//
늙어간다는 건 / 조길성
퇴근길 버스/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을 닮은 중늙은이/ 곱슬머리 코끝에 걸린 안경/ 거뭇한 뺨 위에 퍼지기 시작하는 검버섯/ 팔뚝에 꿈틀거리는 거머리 닮은 힘줄/ 목과 허리가 아직은 꼿꼿하지만/ 얼마 안 있어 세월의 따뜻한 손길에/ 순하게 굽어지리라 튼튼한 두 다리는/ 이내 세 개의 다리가 되어/ 지팡이 더듬어 잃어버린 풀숲을 뒤적이리라/ 혹시라도 거기 금니같이 빛나는 어제를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어느 빛나는 아침이거나 밤이라도 좋다/ 천 년도 만 년도 더 된 오래된 운명의 눈빛이/ 버스를 세우고 그를 우리를 바라볼 때/ 어떤 빛깔의 신호등이 켜질지를/ 미리 생각할 수 있을까//
황혼에 취해 / 조길성
황혼이 내리면 그림자가 자란다/ 잊었던 슬픔을 꺼내 먹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이 세상 가장 떨리던 그날이 생각나/ 닫힌 입술을 열던 저녁이/ 그 아이 속눈썹 닮은 땅거미 거뭇거뭇 돋아 오를 때/ 기러기 울어 가을 깊던 그 골목/ 다시는 오지 않으리/ 골목 끝으로 굴러간 굴렁쇠가/ 돌아오지 않듯이/ 살다가/ 살아가다가/ 오늘도 황혼에 취해/ 술집 문을 들어설 때/ 아직도 떨리는 가슴속으로 문득/ 심장을 더듬는 손길/ 다시는/ 다시는 오지 않으리//
모시이불 / 조길성
석유등잔이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모시이불을 깁고 계시던 할머니/ 밤의 고요는 너무나 단단해서/ 바늘로 찌르고 깁고 홀쳐보아도/ 골무를 뒤집어 쓴 채 꼼짝도 안했다/ 미국에 간 아버지는 몇 년 째 소식이 없고/ 할머니와 내가 취로사업에서 돌아 온 밤 이었다// -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 모시이불 하얀빛이 서러워/ 돌아누운 등 뒤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리를 밟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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