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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금숙 시인
1957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나무 아래로』, 『레일라 바래다주기』가 있다.
2002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7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외로운 흙 / 나금숙
외로운 흙 한 덩이가 있었어/ 작은 숨구멍에 보스스 솜털을 피우고 있었지/ 시계꽃/ 사금파리/ 종소리/ 새벽시장이 왔다 지나가고/ 바닥없는 연못/ 연못바닥을 닦던 구름걸레도 지나갔지// 흙의 눈동자는/ 흙 속에서 풍선을 불다가/ 손사래를 친다/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흙/ 리코더 소나타 리듬에/ 흙의 깜박임이 눈썹을 밀어올린다/ 집착/ 미씽/ 연락 두절// 외로운 흙 한덩이는 키를 늘릴 수가 없다/ 손을 뻗칠 수도 없다/ 문이 없어/ 열었다 닫을 수 없는 그는/ 왔다가 가는 것들의/ 목록을 지울 뿐이다/ 세찬 비가 와서/ 흔적도 없어졌다/ 소멸하는/ 기억들은 구름처럼 다시 뭉칠 수 있을까// 이런 아침잠 이런 해체는 자유여서/ 해파리 같은 흙 한 덩이의 기억은 외롭지 않다/ 대칭재생 반복재생/ 살아날 때마다 팡팡 파티하고 싶다/ 이 풍경 속에 우리 모두 키맨이 되었다고//
태에 대하여 / 나금숙
다가가 보았더니 실은 썩은 구석이 있는 놈이었지 사과 창고 안에서 가장 향내를 풍기는 놈은 성한 것들 틈에 숨어 산모처럼 상처를 벌리고 있었어 상처 자국은 그의 태(胎), 벌레 몇 마리 향긋한 살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어 탯줄 마르는 향이 창고 안에 가득했어 오장에 스미는 캄캄한 향내, 봄부터 양수에 얼굴을 묻고 꼬물대더니만, 이 가을 더욱 싱싱한 물컷으로 태어났구나 날 선 체념에도 긁혀 나오지 않던 너희들은……//
처음으로 / 나금숙
같은 강물에 두 번 들 수 없다는 생(生)의 신비를/ 햇볕과 미풍에 닳아 없어지는 바위에 걸터앉아/ 느껴본다/ 이 바위가 산맥의 줄기인 적도 있었다/ 항상 처음인 신선한 만남이 마모시켜 온/ 이 단단한 침묵의 몸피,/ 언제였던가 첫 아이의 어미였다가/ 첫 밤을 지내는 처녀였다가/ 초경 치른 볼 붉은 소녀였다가/ 눈물 그렁한 딸 아이였다가/ 아이의 팥알만한 젖꽃판에 매달린 물방울이었다가/ 먼지였다가/ 차갑게 굳은 바위로 뭉쳐져 솟아난,// 모든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며/ 모든 물질이 최초라는 기억의 축적이라는 것을/ 봄 햇살에 더워 오는 강가 바위에 걸터앉아/ 느껴 보네/ 유록색 손톱만한 새잎들이 삐죽삐죽 눈 내밀 때/ 끼르륵 끼륵/ 가장 맛있는 묵은 열매를 찾았다는 쇠찌르레기의 탄성,/ 아, 처음 만난 그들 지상의 양식에/ 나무들 재빨리 건너다니는 저들의 몸짓이/ 어제도 작년 것도 아닌/ 시공 안에 단 한 번 새것이어라.//
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 나금숙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나무 아래 사과들은/ 해거름에 찾아오는/ 젖먹이 길짐승들의 것/ 꿈에서 깨어도 사과나무는 여전히 사과/ 베이비박스 속의 어린 맨발은/ 분홍 발뒤꿈치를 덮어줘야 해/ 쪼그맣게 접은 메모지에/ 네 이름은 사과/ 그러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지을 때까지 지어보려는/ 파밀리아 성당처럼/ 사과들은 공간을 만들고/ 구석을 만들고/ 지하방을 만들고/ 삼대의 삼대 아비가 수결한 유언장 말미의 붓자국처럼/ 희미한 아우라를 만들고,/ 산고를 겪는 어미의 거친 숨결이/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새로운 사과를 푸르게 푸르게 익혀가는 정오쯤/ 우리는 비대면을 위해 뒤집어쓴 모포를 널찍이 펼쳐서/ 하늘을 받는다 하늘의 심장을 받는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 아가서 8장 5절 중에서 인용.
* 마그리뜨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변용.
모란 / 나금숙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 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 소반에 만산홍엽을 내 오는 곳/ 모란에 가서 잤다/ 오색등 그늘 밑에서 잤다/ 내력들이 참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사람의 아들, 그의 불수의근을 베고 잤다//
동백 / 나금숙
이 꽃의 향기는 너무 강해 까맣다/ 깨어진 거울처럼 날카롭다/ 이 검고 붉은 향기를 꺾어 너에게 내밀 때/ 눈이 없는 너의 손은/ 흘러넘치는 붉은 향기를 보지 못하고/ 그게 불송이인지도 모르고/ 덥석 받아든다/ 이 심장은 차가운 손 안에서/ 말라가는 과일처럼 쪼그라든다/ 편과 한쪽은 검은 눈동자로 남아/ 향내도 없이 소리도 없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맨발로 동백나무 밑을 걸어갈 때,/ 지금 흙 속에 든 붉은 심장과/ 뜨겁게 펄떡이던 추억과/ 현기증 나는 그 침몰을 느낄 수 있다/ 가시떨기를 으깨듯 그 박동에 찔린다/ 동백은 묻혀서도 여전히 붉은 피,/ 침묵에의 침례/ 불모지에 떨어지는 이슬,/ 언덕을 다 태운 후에도/ 불꽃을 촛불처럼 켜고 우뚝 서 있는//
매혹(魅惑) / 나금숙
보라는 등 뒤에 숨는 울먹한 색이다/ 드러나기를 두려워한다/ 창고 옆 수국꽃 그늘 아래/ 묻어 둔 편지처럼 수줍다/ 흔들리는 등꽃 아래 누워 자던/ 너의 흰 이마에 드리우던 반그늘/ 일몰 무렵 긴 열차/ 차창 너머 산 어스름/ 한때 이런 처연한 빛을 보면/ 구름 위를 걷듯 세상이 막연해지곤 했다/ 사랑도 손에 쥐어져야 느껴지는 이쯤에도/ 보라는 여전히 매혹이다 언제 보아도/ 뇌수가 향방 없이 뭉클 쏟아지려 한다/ 오래 기다린 그대 등을 얼핏 보는 것 같다/ 더 기다려도 될 것 같다/ 한번만…조금만…이라고 되뇌다가/ 언제든 떠나도 될 것 같은,/ 돌아와도 떠난 흔적이 없는 나라,/ 보라국(國) 보라 백성들/ 잘 섞여진 기쁨과 슬픔의 빛/ 종아리쯤 닿는 맑은 시냇물 속을 걷듯/ 붙잡지만 또 잘 보내주는 인연들//
월경(越境) / 나금숙
그 무엇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주는 기쁨을, 낡고 익숙한 옷처럼 걸쳐 입고 나무는 바람을 따라 떠나 왔다 화순 다녀 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본 시냇가 버드나무가 청계천에 따라와 뿌리내린 후, 복개천 아래로 회중전등을 들고 드나드는 어른과 아이들이 생겨났다 버드나무가 푸르고 누른 나뭇잎을 천변에 흩날릴 때 수표교 아래 지나오며 흙뻘에 구두가 더럽혀진 처녀들이 영화에서처럼 까르르 웃는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잊혀지는 것의 즐거움이나 고마움을 알게 되면서, 눈부처에 오래 심어 둔 생애의 모든 나무들을 알맞은 자리에 옮겨 심었다 나무는 잘 익어 즐거운 술통처럼 가지를 잎사귀를 흔들었다 우수수 우수수 빛나는 우수가 떨어져 내렸다//
정밀(靜謐) / 나금숙
호두나무 큰 키 그늘이 넓다/ 햇빛 쪽으로 그늘 찍어 나르는 왜콩풍뎅이/ 돌아오는 발끝이 환하다/ 빛과 그늘이 서로 들락거려/ 나무는 몸속으로 길이 생긴다/ 불개미들이 줄지어 드나들며/ 나무의 부드러운 살을 물었다 놓는다/ 치어 꼬리같은 잎에 힘이 주어진다 흠칫 뒤척인다/ 맥문동 범부채 닭의장풀 우거지는 소리 아래/ 초록에 눈 먼 어린 암사마귀 제 수컷을 한 입 깨어 문다/ 먼 들판 기지개 켜는 소리/ 산호두나무 그늘이 깊어 간다/ 노란 꽃가루 묻힌 바람이/ 쉬엄쉬엄 십리를 간다//
전언(傳言) / 나금숙
승주군 모후산 그늘 아래 봄비 내리는데 마른 넝쿨 감아 쥐고 무른 흙 양 발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한 그리움이 허공으로 기어 올라가는데 비 젖는 꽃은 바위를 뒤덮어 붉음을 타고 올라가는데 부드러운 압박에 바위가 눈을 뜬다 안팎으로 천 개의 눈을 떴다 감는다 바위 안에 등이 켜졌다가 꺼진다 희고 둥근 알이 보이다가----- 빗줄기들의 어깨죽지에도 깃털이 돋아 쌍암면 들판 가득 양수가 출렁이는데 바위를 건너 가는 산양은 발이 미끄럽다 뿔이 새로 밀고 올라오며 가렵다 아릿하다 남쪽 하늘 머리털 별자리가 털어내는 전언傳言이 달다 봄비//
와유(臥遊) / 나금숙
저기 바람을 모아 둔 자리가 있다./ 네가 잠을 설치며 벽에 그리고 간 나무 아래/ 조그만 터널/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기차 꽁무니쯤/ 실뱀이 지나간 풀숲 아래/ 들판을 헤매며 네가 모아 둔 꽃잎자리./ 가을비가 내려 꽃잎은 바래져 갔다./ 벽을 쓸어보니 손에서 희미한 향이 난다./ 시드는 꽃잎은 온 방을 데우고/ 상기된 뺨을 한 채 창밖을 내다본다./ 이 잠시 잠깐 타오르는 마지막/ 희미한 불꽃이/ 눈부처로 남아/ 저 벽의 얼룩은 볼 때마다/ 무한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이 무덤은/ 이 시뮬라크르들은/ 친구보다 더 친구인 것이다.//
여름 / 나금숙
버스에서 내려/ 너의 집 앞으로 다가갈 때/ 외양간에서는 어미소가 선 채로 송아지를/ 막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송아지는/ 비척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더니/ 일어서서 겅중거렸다./ 정오의 빛을 반사하는/ 갓 태어난 송아지의 털빛이란!/ 암소의 다리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흘러 돌아나가고/ 여울에는 돌사과가/ 향내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허리까지 우거진 잡초들,/ 풀벌레들이 소리 높여 울다가/ 갑자기 그치는 적막 속에서/ 너와 입맞추기 위해/ 멈춰 섰다./ 미술관 소음 회화 앞에서/ 음향을 듣기 위해 단추를 누르듯이/ 모자를 한껏 젖히고./ 강이 하늘에 걸리고/ 낮달이, 물고기들이 그 강을 건너고 있었다.//
서천 / 나금숙
서해 바다 끝 서천에 있는 장례식장에 갔다가 나를 보았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울에 사는 달이 여기 바닷가를 비추듯이 객지에 온 어둠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달의 발자국이, 묻히고 온 부스러기를 뿌리고 있었다. 멀리서 갈대를 태운 재가 날아 와 언덕이 되고 있었다. 모두들 전에 울지 못하고 눌러 둔 울음을 꺼내 놓고 있었다. 꺼내 놓은 속울음이 먼지 중에 뭉쳐지고 있었다. 영정 속에서 한 생애가 내려와 어깨를 짚어주었다. 줄지어 나가는 검은 옷 위에 앉힌 얼굴이 똑같았다. 지고 가는 울음의 무게가 비슷하였다. 겨울 하늘이 포근하게 풀리면서 흰 눈을 바다 위에 쏟아놓을 때, 천지간에 어슷어슷한 어둑사니가 또록 또록 눈을 뜨고 서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래를 먹인 연줄이 툭-끊어지며 익숙한 얼굴 하나가 멀리 사라졌다.//
퇴행 / 나금숙
무서운 꿈을 꾸었어/ 난간 위에서 급류 속으로 떨어지려는 네가/ 제발 나를 잡아 줘/ 제발 나를 놓아 줘/ 라고 속삭일 때 내가 놓아버린 손/ 끌어올릴 힘이 없는 나는/ 허리를 꺾어 온몸으로 끌어당겨도/ 힘이 딸리는 나는/ 등 뒤로 지나가는 그림자들에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어/ 소리는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어/ 스르륵 풀리는 손아귀/ 너는!/ 탁류 속으로 떠내려갔어/ 봉긋이 부푸는 웃옷/ 부채살 같이 펴지는 검은 머리카락/ 몇번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서서히 물 속으로 사라지는 너/ 이대로 끝인가/ 안녕이란 말/ 떠나고 남는 역할이 수십 번 바뀌었지/ 이별 속의 이별이/ 정말 다가왔어//
사랑 ㅡ데자뷰 / 나금숙
언젠가 한 번 이 밀밭에 온 적이 있다/ 이 찰진 흙을 밟고 가다/ 풀숲으로 미끄러진 적 있다/ 네 팔이 내 허리를 안은 적 있다/ 종달새의 둥지처럼 아늑한 네 품에서/ 젖빛 하늘에 취한 적 있다/ 내가 처녀인 적이 있다/ 너와 팔베개하고 한잠 자고 나면/ 깃털처럼 가벼워지던 아침이 있다/ 멀리 소풍가자고 꽃시절 다 간다고/ 손잡아 끄는 너를 팔랑팔랑/ 천 년 전에 따라 나와/ 나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언니 / 나금숙
언니/ 내 두 손 모아 밝은 빛을 가득 받아 올리오니 받으세요/ 사백년 만에 만난 우리지요/ 왜 그러셨어요/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하늘이나 구름이나 나뭇잎을 사랑하셨다면/ 돌을 사랑하고 달빛을 아꼈더라면/ 애절한 언니 마음 그들은 알아주었겠지요/ 흘러넘치는 사랑과 시를/ 몰래 구부리고 앉아 쓰는 야윈 어깨가 눈에 선합니다/ 당신이 밟은 *문 앞의 돌들이 모래가 되도록/ 그이는 오시지 않았지요/ 언니가 불러들인/ 갈매기와 기러기로 해서/ 강은 넓어졌고 하늘은 길어졌어요*/ 그 큰 품을 쏟아놓을 대지를 찾느라/ 온 몸에 시를 두르고 바다를 건너셨군요/ 이 괴이하고 아름다운 주검,/ 작은 몸에 깃들인 시혼을 깊은 동해도 삼키지 못했어요/ 언니/ 옥봉 언니/ 다시 오시면 이 땅 이 하늘을 끝없이 펼쳐드릴테니/ 그 사모함 그 기상을 마음껏 쏟으세요/ 지끔껏 우리도 뚫어내지 못한/ 사람이 만든 철벽 앞에/ 몇백년 봄바람으로 부는/ 언니/ 옥봉 언니//
* 옥봉의 시 구절; 옥봉은 조선 중기 16세기 후반의 여류 시인으로, 서녀로서 사랑하게 된 조원의 첩이 됐으나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시를 쓴 죄로 내쳐져서 떠돌아 다니다 죽음.
동봉(同封) / 나금숙
그는 멀리 여행을 떠났다/ 함곡관 근처라고/ 검푸르게 무성한 백양나무 아래라고/ 한밤중에 연락이 오기도 했다/ 꽃숭어리가 손바닥만 한 희고 붉은 꽃이/ 문쪽으로 줄지어 피어 있다고 했다/ 소포에 함께 넣은 꽃잎에는/ 달빛이 도톰했다/ 발목이 젖도록, 희어지도록 그가 저어갔을,/ 날카롭게 심장 찌르기도 했을 달빛,/ 등 뒤로 적멸의 흰 꼬리 길게 따라갔을 것이다// 마른 꽃잎 다시 부풀게 하는/ 달빛을 타고/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그가 왔다/ 나가 보니/ 푸른 물고기 비늘이 뜰에 가득하다//
링크 / 나금숙
고통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우리를 구원한다지/ 정든 낙타를 안락사 시키며 울었다/ 화해 구역에 날짐승을 밀어보내며/ 푸드덕거림에 귀를 막는다/ 네 붉은 볏을 찍혀도 가만히 견뎌야 한다./ 그러니 그 장소에 가면 우선/ 구름 담요를 덮어야 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라고/ 한 죽음이 한 생을 열어줄 때/ 꿈은 눈물성의 수문을 여는 방법을 찾아냈다/ 글썽이는 탑이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키 큰 꽃나무에서 고순도 코카인 훈풍이 흩어진다/ 지구 건너편/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해질녘 가을 들판에서 이삭을 줍다가/ 부동항을 찾아 함께 떠난다/ nowhere man*/ nowhere land//
* 비틀즈 노래 가사에서 인용
청동 여자 / 나금숙
그 도시의 중심에 가면 표지석이 있다/ 수국꽃 아래에서 여자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서고에서 갓 나온 듯 묵은 종이 냄새가 나는 여자였다/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잃어버린 언어 몇 개를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넣어둔 지가 언제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디서 샀는지도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향기가 우물처럼 고여있는 꽃나무 아래/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았다 가라고 했다/ 그녀는 내 트렁크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언어가 있는지 아주 궁금해 했다/ 미래에 올 언어 같다고도 했다/ 소각장 가는 길을 내게 묻기도 했다/ 누가 다 끌어 모아다가 태워버린 것 같다고,/ 재가 되었어도 뒤져봐야 한다고 했다/ 그 도시는 길이 온통 울퉁불퉁해서 낮과 밤, 월요일과 화요일,/ 일상적인 시간들이 오가다가 자주 넘어지곤 한다고,/ 동전이 주머니에서 튀어나갈 때, 그 언어들도 튀어나갔나 보다고 했다/ 여자는 실은 죽어가고 있었고/ 잃어버린 그 언어들이 자기를 회생시키는 묘약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내가 다시 길을 물으려는데 바람에 주소를 쓴 종이가 날아가 버렸다/ 나야말로 이 말씀 몇 개를 찾지 않으면/ 오십 년 만에 도착한 이 도시에서/ 오늘 밤 당장 어디 묵어야 하는지 모른다//
뒷모습 / 나금숙
금빛 갈대를 한아름 낫으로 베어/ 안고 가는 농부/ 저 갈대로 지붕을 엮어/ 새로 덮은 오늘 밤엔/ 아내의 엉덩이가 달덩이처럼 떠오르리라/ 잘 익은 밀맴새, 낙엽 타는 냄새를 풍기며/ 파고드는 둥근 얼굴에 입맞춰 주고/ 서로의 몸 속으로 바다처럼 스며들어/ 잠에 무거워진 머리를 팔게개 해 주리라/ 오늘 밤 달빛은/ 그들의 뜨락에 와서/ 돌부리에 걸려서도 자지러지고/ 모래 속에 묻어 둔 알들/ 추워질까봐 날개 파닥이는/ 무덤새도 고요하다/ 사위는 모두 제 짝을 찾아/ 입맞춤 속에 혼몽이다/ 붉은 해 설핏해질 때/ 금빛 갈대들이 잠시 반짝/ 나부꼈을 뿐인데/ 등판 가득 햇살 받고 가는 농부의 걸음이/ 낭창한 밧줄을 타는 줄광대처럼/ 아찔했을 뿐인데// 젖이 탱탱 불은 가을 오후가/ 출렁 만삭이다. 만선이다.//
빵과 침묵 / 나금숙
떠나간 아들이 못견디게 그리운 날/ 할머니는 빵을 굽습니다/ 전쟁의 연속인 세월 속에 빵 굽는/ 화덕은 식지 않습니다/ 심장 모양 혹은 염통 모양의 빵들을 줄줄이 빚어놓고/ 비가 없는 뜨락에다 내어다 널면/ 포화에 어깨죽지 다친 새들이 어두운 저녁/ 지친 부리로 파고듭니다/ 줄줄이 퇴짜를 맞은 기도마냥/ 빵들은 가슴이 파여 굳어갑니다/ 아들과 공유한 기억들을 은박지에 꽁꽁 싸놓고/ 사막의 별들에게 하나씩 찢어서 박아놓는 할머니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떠나던 뒷모습 그대로/ 돌아보던 푸른 눈 그대로/ 아들이 별 속에 박혔다고 생각합니다/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전장에서/ 그 애는 별들에게로 피신했을 것이라고,/ 나이만큼, 떠난 날 수만큼 구워놓은 빵들이/ 버벅거리고 말을 하려고 할 때쯤/ 별이 된 빵들에게로 아들에게로/ 할머니는 서둘러 길을 떠납니다/ 비난할 누구도 알지못한 채 시대의 태반 속으로/ 다시 걸어들어가는 두 모자는/ 어느 지휘자의 지휘봉 끝에서/ 어떤 별에게로 점지될까요//
* 별빛이 쌓여있는 모든 곳, 삶은 여기서 말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까마귀들이 까아까악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 나금숙
물이 말라버린 우물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뻘을 뒤집어 쓴 자갈들/ 자갈들의 상형문자/ 자갈들은 물 위에 ‘텅’ 하고 떨어지던/ 탄력을 기억한다/ 툭― 풀어지던 하강을 기억한다/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아무의 가슴에 내려서지 않는다/ 그랬었다는 이끼 같은 기억들/ 여름이면 석청이 녹아 흐르는 바위 사이로/ 들판을 건너 밀냄새 풍기는 처녀들이 왔다/ 골풀과 편암을 밟고 온 처녀들의/ 발바닥이 뜨거웠다/ 처녀들의 발등에 쏟아지던 물의 기쁨, 덩달아 튀던 청개구리/ 서늘하게 일어서던 몸서리를 기억한다/ 마른 우물 속으로 내려가 보았다/ 갈라진 우물벽 사이에/ 푸르게 차오르는 기억들이 싱싱했다/ 찰랑찰랑했다/ 우물은 둥근 하늘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덮어놓은 책 / 나금숙
메소드라고 부르지 마/ 그냥 순간이 나오는 거야/ 누가 몰입이라 그래/ 상처에 소금을 일부러 뿌리지 마/ 네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문장이 안될 때쯤,/ 공명정대한 사랑같은 건 없는 거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뚫어줄 주인도 없는데/ 나는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했어/ 그러니 메소드라고 부르지 마/ 소금물을 끓이는 메콩강 유역에서/ 평생을 노를 젓다 가더라도/ 그냥 너한테 그렇게 남을 거야/ 이게 미친 연기라구?/ 아니/ 그냥 순간을 사는 거라고 해/ 이맛전이 서늘하도록 임박한 그 무엇,/ 이별이라는 미립자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죽음 말이야/ 긴 그림자와 침묵와 협박은 그렇게 순간 정지하지/ 네가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무 빗장을 걸어 잠그지만/ 내가 잠든 새 연기처럼 스며들어와 흙바닥이건 어디건/ 겉옷을 벗어 깔고 자리를 잡는다/ 잠깐 장미를 들어올리는 손이 있다./ 한 손에 무엇을 감췄는지 모르고/ 시선이 따라갈 때/ 뜨거운 단검이 심장을 겨눈다//
레일라 / 나금숙
뽈로냐, 분홍돌고래가 뛰어오르는/ 아마존 강심을/ 그들보다 더 강렬한 몸짓으로/ 건너가던 볼리비아 처녀,/ 독일서 이주하신 할아버지를 닮아/ 저 고운 잇속과 섬세한 속눈썹이/ 백화점 지하 커피 매장에서 헤엄친다/ 알코올 중독 한인 남편을 따라 내린/ 김포공항 정월 추위가/ 시댁의 반대보다 더 무서웠다는,/ ‘삼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요’/ 서투른 우리말에 눈물이 글썽,/ 가만히 잡아주는 내 손길에/ ‘I'm strong…’ 속삭였었지/ 이구아나 기어가고 분홍돌고래가 춤추는/ 암청색 강을 그리며/ 긴 울타리 너머 저녁 식사 청하던/ 원주민들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그녀의 예쁜 두 눈이 지하 매장에서/ 원석처럼 반짝이네/ 가공하지 말고 다듬지도 말자/ 다시 찾아보는 그녀의 이름은 레일라 청정무구,/ 가난한 남미의 슬픔/ 못 다 이룬 체 게바라의 슬픔/ 오늘도 1호선을 타고 서울과 의정부를 오간다//
자이르* / 나금숙
오늘 누가 오든지 어떻게 오든지 그것은 비다. 창밖이 수선스러워서 문을 열자 비가 먼저 와서 의자에 앉는다. 빈 새장을 기웃거리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에 놓는다. 새로 산 스웨터는 비냄새를 풍긴다. 오래된 방짜유기 놋냄새를 풍긴다. 비는 극세사 담요 속으로 와서 잔다. 밟힐까봐 마음 졸인다. 비를 밟은 발바닥이 뭉클, 비는 털실뭉치처럼 뭉쳐져서 구석으로 영원히 굴러간다. 비는 택배회사가 가져오는 원통형 박스, 키가 상자보다 커서 눌러 담는다. 꼬르륵 마지막 하직 인사를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진다. 뚜껑을 열자 멧새처럼 날아오르는 비, 막사발 속으로, 위패 속으로 들어간다. 비는 흘러내리는 사각형 속에서 천천히 증발하고, 오늘을 기다리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단념하고 잠이 들면 댓잎 같은, 깃털 같은 비가 온다. 너무 친밀해서 있는지도 모르는 내 속의 숨처럼 비는 항상 온다. 있는지도 모르는 당신처럼 온다. 오지 않는다. 내일 올 것이다. 육체가 없어도 남는 영혼처럼, 사랑처럼. 마른 땅을 보려고 높이 날아간 새처럼.//
* 자이르의 아랍어적 의미는 <명백한>,<가시적인>이다.이슬람교에서 알라(하느님)의 한 속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 제목이기도 함.
메멘토 모리* / 나금숙
죄책감이나 그리움이 약점이 될 수도 있어서/ 쫓기는 마음은 동굴 안에서 쉰다/ 빛조각처럼 내가 베어낸 당신의 옷자락과*/ 내가 들고 온 당신의 물병 하나/ 유리창에 쓴 안녕/ 맹그로브 우거진 숲을 지나가며 굽어본 물 속에/ 그의 푸른 얼굴 꼭 감은 눈/ 나와 당신의 약점들을// 새벽이면 문설주에 헝겊을 꼬아 매달곤했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림자를 넓혔다/ 그 동굴에서 그 바닷가 숲에서/ 내가 보고 온 푸른 이마가/ 거짓잠을 깨운다/ 사랑도 죽음도 순간의 선택,/ 이름만 왕이라는 욕망도 미움도 거기서 잠든다/ 언제 깰지 모르는 얕은 잠을//
* 메멘모 모리(Memento Ma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 사무엘상 24장4절.
새너토리엄(sanatorium)* / 나금숙
외딴 곳에 가서 잠시 쉬고 오자/ 지난 주에도 몸을 던지려 했다고?/ 오락가락하는 기억들과 손가락의 통증과/ 복화술의 구름 너머로// 긴 복도 끝에서 우리들/ 공항을 내려다보다가/ 17층을 올려다보다가/ 더 큰 산 위로 올라와봤지/ 여기서 집이 바로 코앞이래/ 저 심연을 향해/ 비밀을 털어놓으면 바로 집에 갈 수 있대// 경계성 인격장애/ 벽지의 포도를 뜯어 먹다가/ 밤에 전구를 고치다가/ 새벽에는 그림을 그리는 너를 위해// 고양이 만져도 돼?/ 방울방울 공기에게 묻다//
* 결핵과 각종 신경병을 치료하는 요양소. 한적한 곳에서 맑은 공기, 쾌적한 햇빛 등을 이용하여 치료함.
트레지디 트래지디 / 나금숙
유토피아는 미래가 아니야/ 섬광처럼 반짝이는 기억 속에만 있지않니?/ 지난 토요일 기를 쓰고 찾아간 궁평항 유원지는/ 어디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옛 영화를 기억하는/ 키큰 해송들만 그대로였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문이 일년 여,/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일인방송 중이라/ 세상은 소음투성이/ 대면을 못하니 진짜 목소리는 듣기가 희귀하다/ 정자새는 여러 새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사랑을 부른다지/ 제 모습은 감추고 잡탕들을 물어다가/ 집을 지어놓고 다가오는 사랑을 숨어 기다린다지/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범람하는 시뮬라시옹 세상,/ 정크이미지들은 해안선을 메우는 쓰레기들처럼/ 아침마다 밀려온다/ 바닷 속을 떠다니다/ 바닷가로 밀려오는 플라스틱 쓰레기들/ 나노플라스틱을 먹은 생선을 먹고 우리도 플라스틱이 되어간다/ 플룩샴을 들어보았어?/ 비행기 한번 뜰 때의 오염도를 부끄러워하는/ 영피플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손뜨개질을 한다/ 가상현실 속에서 죽은 딸을 만나는 엄마의 눈물,/ 문명은 죽음도 시간도 되돌려놓고 싶지만/ 재빨리 변종하는 바이러스와 공생해야 하는/ 오늘과 내일이야/ 텅텅 빈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온 어린 아가들은/ 코로나가 창궐해서 울 집에 오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갔어/ 이웃집은 세 딸이 찾아와 4인이 아닌 5인이 만났다고/ 복도에서 사진찍혀 고발당했어/ 달라스에서 큰아들을 한달간 머물게 해 준 육순 어른이/ 코로나 발병 석 주 만에 돌아가셨지/ 집에 가고싶다!를 끝없이 되뇌시다가..../ 이런 현실, 이런 트레지디!/ 무거움 절박함을/ 매일 한번 공원에 가서 버리고 온다/ 나무들 미안해 바스락 가랑잎아 미안해 화살나무 남천 빨간열매야/ 미안해 너희들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
Live Jazz Club 천년동안도 / 나금숙
침묵수행이 6개월째인 바오로딸 수녀원의 아녜즈 수녀는 입구가 없는 매혹적인 건물을 보았다 라푼첼의 빛나는 머리털이 아니면 올라갈 수 없을 이,삼층 높이의 그 집은 검은 운모로 덮여 있었다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데 만지면 단단한 대리석이었다 바람이 불자 집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나선형 계단을 잠깐 보여주었다 순간 들어서지 않으면 곧 사라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다음 찰나에 아녜즈 수녀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식인초처럼 집은 아녜즈를 휘감았다 조였다 끈적한 검은 진액이 온몸을 뒤덮는 것 같았다 입구는 이미 사라졌다 캄캄하다 집은 일렁이며 또 다른 계단을 내주었다 이번에는 파란 하늘이 언뜻 보이는 옥상 위를 향해 있었다 아녜즈는 습기 찬 옷가지를 두 팔 가득 안고 올라가 펄럭펄럭 거풍을 했다 집이 일렁일 때마다 푹푹 빠지는 발을 건져 올리며 자신도 펄럭펄럭 휘날렸다 테너 색소폰이 울었다 펄럭펄럭 아녜즈는 녹슨 황금빛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무한한 음파의 탄력에 그 변주에 몸을 뉘었다 170여일 양갱처럼 굳은 침묵의 살갗이 터져나올 때 그녀 온몸의 뇌관이 울었다//
식영(息影), 모래왕국 / 나금숙
벽과 기둥만 남은 집들을/ 구석마다 모래가 점령한 그 곳에서// 최후의 싸움을 하듯/ 마르지않는 샘을 사막 귀퉁이에 숨겨놓고/ 유령마을은 골짜기로 내려갔다 오곤 한다// 여기 오면 뭘 꼭 떨어뜨리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모래 속에다 말야/ 신기루 속 반려나무의 뿌리가 드러나도록/ 메마른 바람이 불어/ 형상들 안에 스며드는 비의 모래들// 모든 경계가 흐릿하다/ 모래가 백성이 되는 곳에서/ 영토는 수시로 바뀐다/ 헝클어진 미립자를 먹고 사는 왕의 가을은 그래서 황량하고 덧없고/ 쓸쓸하다// 밤새 능욕을 당하고/ 새벽녘에 문지방에 엎드려 죽은/ 레위인의 첩/ 그 입 속엔 모래가 가득했다// 모래조각가는 들끓는 찰나에/ 키스한다/ 깔깔한 모래입술이 연한 꽃잎이 되는 것이라니!// 모래왕국에서/ 그림자가 싫어 도망치던 일생이/ 그늘에 들어서야 쉬는 걸 안다/ 그늘은 어디에나?//
도취에 대하여 / 나금숙
영혼을 앗아간다는 빵,/ 경배자를 찾는 신의 품에서 가져 온/ 안식 한 웅큼으로 반죽합니다/ 아침마다 듣는 새소리는 신탁입니다/ 많은 이에게 자유를 주려는/ 필라델피아 자유의 종은/ 첫 타종에서부터 금이 갔다지요/ 몇번 타종에서 금이 가버린 나도/ 먼길을 떠나 * * 의 종을 보러 갔지요/ 내가 가면 다른 도시로 흘러가버리는 종소리를 따라갔어요/ 죽은 분화구 앞에서/ 노을이 불꽃을 피우는 곳/ 하염없는 가능성을 따라가다가/ 성전 기둥같은 고목 아래 에서 잠을 청했어요/ 이른 아침이면/ 배고픈 짐승이나 밤의 새들이 다녀갔지요/ 먹이가 되다 만 노란 살구 열매들이 향내가 자욱해요/ 심심한 침묵 뒤에/ 빛을 뿜고 싶어 안달하는 내 안의 발광체들에게/ 쉿! 조용히 하라고 했어요/ 모든 나열과 정렬과 수렴과 조합이/ 뭉게구름처럼 겹쳐/ 누군가는 이 하지 축제에 오면/ 존재에 구멍이 뚫려요//
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을 만났는가?* / 나금숙
갈대돗자리를 짜고 있는 아낙 곁에서/ 화산석에 커피콩을 갈고있는 남정 곁에서/ 웃는 거미가 묘한 표정을 하고 나타났다 숨는다/ 해주에서 열네살에 내려와 일가를 이룬 형부가/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가신 것은/ 이 땅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하신 것/ 호양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고장에/ 성벽에 붙이는 부고장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는/ 먼 땅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다는데/ 평생 외로왔던 형부는 중환자실에서/ 치매노인으로 떠나가고/ 먼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은/ 고국하늘로/ 눈동자같은 열기구를 띄운다/ 밀랍날개가 녹아내린다/ 이름도 예쁜 부룬디공화국에서 찾아 와/ 고생끝에 빌라로 이사한 디디아빠네 집에 가봤다/ 디디와 디디엄마는 입다 만 핑크재킷과 원피스에 환호했지만/ 책장에 꽂힌 히브리 바이블은 웃지 않았다/ 불의 아들을 낳다가 타 죽는 여신처럼/ 모든 노마드에는/ 어떻게 자신을 만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디디네 문간방에는/ 몇달 전 도착하여 난산을 한/ 젊은 엄마가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다/ 체격이 큰 남편은 인사를 하고 주방쪽으로 가 배낭에서/ 몇개 안되는 음식물들을 꺼내놓았다/ 나는 지갑에 든 이만원을 꺼내지 못하고 왔다//
* 로제티(1851〜1860년), 그림 제목, 펜과 잉크
가위병원 / 나금숙
내가 들고 다니는 방은/ 한 달이면 변두리가 날깃날깃해진다./ 매번 가위질로 버티어 오는데/ 이태리 피자처럼 아주 얇게 얇게 벽을 밀어 저미고/ 꺼냈던 애옥살림살이 다시 들여놓는다/ 이제 내가 들고 다니는 방은 늘릴 길이 없다./ 성긴 섬유 같은 벽이 더 이상 가위질을 허락지 않는다./ 방도 가위도 정품 수리에 맡겨야 한다./ 이 방을 처음 들일 때, 우리는 토마토 문패를 거울처럼 닦고/ 쪽문 앞 텃밭의 매운 고추로 이름을 새겼었다./ 푸성귀 같은 아이들이 들며 나며 자랐다/ 진흙을 자주 묻혀들었다./ 희망도 자주 묻혀 들었다./ 말라서 갈라지는 진흙처럼 식구들의 희망도 쩍쩍 금이 갔다./ 쉰 내 나는 수박 냉장고 뒤에 숨어 동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생쥐를 비닐로 질식시킨 날,/ 문을 닫지 못해 별도 비도 얼굴로 쏟아지는/ 누옥을 우리는 폐기 처분해야 했다./ 해진 데를 가위질로 잘라내고 지탱하는 중이다./ 비 뒤에 맑은 하늘이 보이길래/ 찾아오는 손님들 찬거리 사러 간다/ 방을 들고 다닌지 오래다./ 그래도 처녀들이 이 방에 와서 우쿠렐레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쌈밥을 먹고 가곤 한다/ 방이 무너져 꼬리 힘찬 물고기들 다 새어나가기 전에/ 나는 가위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 날이 선 가위로 사방 낡아진 벽을 선뜻선뜻 잘라내야 한다.//
우연을 담는 컵 / 나금숙
가구 위에 씌운 흰 포장을 걷어 내/ 먼지를 털어 낼 때/ 험볼트산에서부터 따라온 구름이 창턱에 앉아 있다/ 길 아래 창문 너머로/ 의자에 싸여 있는 너를 데려오고 싶었다/ 이제는 쓰지 않는 소수 부족의 언어를 가르쳐/ 노래를 부르게 하고 싶었다/ 날렵한 면도칼로 달라붙는 마음을 베어 낸다/ 솟는 피를 깨끗한 천으로 꾹꾹 눌러 준다/ 어디에나 녹금색 나무들이 햇빛 속에 빛날 때쯤,/ 내 사랑 알아보는 것이 생의 일부가 아닌가 하다가도/ 방랑에 다시 맛을 들인다/ 아무데서나 쉬거나 잠을 잤다/ 여명 속에/ 어린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내 영혼의 무게는 몇 그램인지?/ 여자와 아이들로 소집된 군대를 본 적 있어?/ 그들이 부드러운 갑옷을 입고 춤추는 것을,/ 나는 어제 꿈속에서 보았어/ 그들의 무기가 노래와 춤이라니!/ 좀 더 연약할수록 강한 군대라니!/ 상실과 죽음과 갈증의 봉우리를 그들은 넘어왔다/ 우연은/ 석청보다 모호하고 긍정적인,/ 내가 받아들인 이런 순간에서 온다/ 한 컵의 서늘한 물처럼 탁자에 놓인다//
궁산에 누워 / 나금숙
벌레를 뱀이라고도, 뱀을 물고기라고도 하는/ 땅으로 가서/ 열두 개 쯤 되는 달을 낳았다/ 달을 씻긴다/ 가시나무 아래서 허리 허옇게 내놓고/ 시냇물에 달 조각들을 씻긴다/ 언덕 위에 하늘이 백도처럼/ 훤해 오면/ 십여년 채운 차꼬 벗어지는 소리,/ 죽은 나무 마른 땅으로/ 뿌리 내리는 소리,/ 가지 튼튼한 뽕나무로 잘 자라/ 푸른잎 이리 저리 젖혀 검은 오디 찾아 낼 때,/ 손등에 떨어지는 자벌레들,/ 이지러진 달들,//
얼룩구름에 대하여 ㅡ로르샤흐 테스트 / 나금숙
병동으로 가는 초원이 열린다. 한 쪽 문이 열리고 벽을 따라 초원이 페인트칠 되고 있다. 십여 년 전 들이마시지 못한 공기 한 뭉치가 숲 사이로 굴뚝새가 되어 날아다닌다// 허공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북은 열매처럼 떨어지면서 들판에 얼룩이 찍힌다 먼 동굴에서 죽었던 어린 별이 날개 치는 기척이 들린다// 나른한 오후에 읽다가 덮어 둔 두꺼운 책들이 거울 속에 일렬로 나타나고 열쇠 모양을 한 성은 해자 너머 멀리 등 뒤에 있다// 그가 거기 있다는 안도감을 신고 들판을 건너갈 때 나무를 깨무는 불의 혀, 부푸는 구름, 찢어지고 구겨진 공기의 프로타쥬 속으로 얼룩이 번진다// 쿵- 하고 닫히는 마음들 속으로 번진다/ 약속처럼 망설임처럼 번진다/ 물음표인 잎사귀가 모두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 속으로 번진다// 안개 속에서 허공의 얼룩을 닦으려고 둥근 달이 다가온다/ 이때 구름의 높이를 재는 것은/ 당신 소슬한 슬픔의 깊이를 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춘파 만리 ㅡ마지막 당부 / 나금숙
아버지는 줄기가 단단한 나무를 베어다가 몇년 째 작은 배를 만들고 계셨어요/ 해가 기울도록 턱을 괴고 앉아 기다리기가 지루한 언니와 나는 배고픈 염소들을 풀 많은 곳으로 옮겨 놓곤 했습니다/ 램프의 불빛을 밝혀놓고 어머니는 무리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어요 숲 속에서 길을 잃으면 불빛이나 푸른 말뚝을 찾아갔지요/ 사자를 조각하고 싶은 나는 편도나 자두씨에 바람을 새겼습니다 어느 높은 나무 아래 잠들어도 다 바람의 집이었어요/ 봄날 하루 아버지도 삼촌도 아득한 녹나무 숲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꿈속처럼 숲이 우거지고 수종이 몇 번 바뀔 때 뭉게구름은 식구처럼 다정한 얼굴이었습니다/ 만들다 만 배는 풀밭으로 달아나려는 배고픈 염소처럼 나무에 묶여 늙어 갔고 꽃사태로 수레가 멈춘 다음날,/ 떠났던 사람들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 조팝꽃으로 피었습니다/ 죽음이 두고 두고 먹이가 되는 땅에서 더 이상 내가 아닌 것들, 서로 음식이 되는 동류들이 모여 지천의 꽃으로 피었군요/ 꽃이 먹어버린 마음들은 무엇일까요 얼마나 될까요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들의 거소는 여기가 맞나요/ 희미한 당신의 마지막 말씀이 새로 피는 꽃처럼 선명한 날입니다//
떠도는 말 / 나금숙
고요가 앉아 있곤 하던 돌로 된 식탁은/ 오랫동안 너만을 위해 놓아두었다./ 사과주와 냅킨과 얼어붙은 공기./ 낮달을 건너가는 검독수리가 눈여겨보는 것들./ 시간이 고의로 방치한 트렁크 속에는/ 가장 무서운 테러, 사물의 변모가!/ 너의 슬픔을 녹여보려고/ 갓 찧은 곡물을 사다가 차를 끓였다./ 고유하고 성실한 죽음에 대한 의도들이/ 성당의 낯선 흰빛에 부딪혀/ 눈부실 때,/ 심해 상어가 가슴지느러미를 내리고/ 튼튼한 등을 구부린다./ 그때 우리는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한 방울의 무(無)를/ 시금치 씨처럼 뿌려놓고 자정을 기다린다./ 창밖 풍경이 볼 때마다 달라지는/ 그 집에서/ 걷어올려진 커튼처럼/ 우리는 반짝이는 바깥으로 달아난다.//
천국의 화폐 / 나금숙
가장자리가 다 닳은 지갑을 열어/ 천국의 화폐를 눈부시게 내미는/ 꽃나무는 교환의 수단을 안다/ 창공에 내미는 이 화폐가/ 무엇을 살 수 있는지도/ 묵은 지갑에 저축한 생명의 원천이/ 저렇게 희디 흰 유혹임도 안다./ 나도 축적된 내 사랑을 천국의 화폐쯤 되는 줄 알고/ 환원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등가等價가 아니어서/ 내가 집기도 전에 그들은 등을 돌렸다./ 이 봄에도 묵은 꽃나무는/ 부스럭거리며 귀퉁이 닳은 지갑을 꺼낸다./ 예부터 저 목련은 신용 그레이드가 아주 높았지/ 내 낡은 지갑에 새 피를 직방 수혈한다./ 내게서도 갓 찍어낸 화페의 향기가 날 것 같다./ 바라던 어떤 것을 살 수도 있겠다./ 가령, 홍수라도 엄몰 못하는 불길 같은 사랑,/ 신의 마당에서의 단 한번 사람의 사랑,/ 그 환상과 꼭 한번 결혼해 보는 것,/ 글쎄, 환한 이 봄에는 어떤 정점에 한 번은 오를 것도 같은데...//
초승달 축제(new moon) / 나금숙
캄캄한 절벽 끝에서 실반지가 떠오르고/ 언젠가 풀어질 비단 오랏줄이/ 천 개 슬픔을 꾸러미로 묶습니다/ 등불은 어처구니 없는 사랑을 한 후에/ 그녀를 죽였습니다/ 강물 위로 뜨는 죽은 달의 살을 베어 먹고/ 나는 그 덕목을 섭취했습니다/ 기억의 공중에다 길을 내는 화살표가/ 거세된 샤먼에게로 갑니다/ 그의 눈은 말라버리고 손과 발은 잘렸습니다/ 남자를 매다는 형틀은/ 날개가 많아/ 캄캄한 저녁을 끌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형틀 밑에 타버린 연기와 재에서/ 달마다 움이 트고 흰 싹이 돋는다지요/ 밤의 맹렬한 파도는 모서리가 또 깨지면서/ 사람들의 골목 끝으로 몰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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