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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배세복 시인

부흐고비 2022. 4. 26. 08:42

배세복 시인
1973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201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몬드리안의 담요』, 『목화밭 목화밭』이 있다.

문학동인Volume 회원

 



몬드리안의 담요 / 배세복
성큼성큼 들어와 붉은 사각형을 담요에 던지며 그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빛이야 그때부터 그는 우리 집 벽에 살았다 어느 해 나는 내 서재를 한 번도 열어주지 않으면서 아내의 장롱 속에 들어간 적 있다 캄캄했다 오래전 걸어두었던 희망 같은 단어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검푸른 색깔을 마구 칠했다 살짝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렵 나는 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사한 색깔의 연속은 불안을 가져온다 마치 잘못 맞춰진 목욕탕 타일의 무늬처럼, 그리하여 바람 푸르던 날 우리는 감탄사들을 날려 보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알고 보니 겨우 몇 개 밖에 안 되던 노란 한숨 같은 것, 올해에는 어떤 색을 보여줄까 형형색색의 아주 큰 보석을 보여줄게! 그는 한 해에 하나씩 그린 아홉 개의 사각형에 테두리를 치고 있었다 집을 지은 후 귀퉁이를 여러 날 마름질하듯 천천히, 잠이 덜 깬 우리들을 격자무늬로 엮어주며 서서히 벽 속으로 사라졌다//

목화밭 목화밭 / 배세복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에게 배운 노래 흥얼거리며,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게 진자 꽃일까 누이는 분홍색 진짜 꽃만 꽃이라 불렀지만 목화 다래 익어 벌어진 목화솜도 나는 목화꽃이라 우겼네// 목화밭 목화밭~, 홀로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 없이,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멀리서 볼 때만 한없이 아름다운 꽃이었네 두둥실 흘러갈 것만 같은 꽃이었네 아무리 따도 바구니는 채워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멀리서만 그러하였네// 목화를 따러갔네 목화를 따지 않았네 밭둑 사이 피어난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보았네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하늘에도 저렇게 많이 피어 있다니, 저 꽃으로 뭉텅뭉텅 바구니 채웠으면 좋겠다 그치? 없는 누이에게 말을 걸고 또 말 걸고, 잠이 들었네 몇 겹으로 꿈을 꾸면서//

는개라는 개 / 배세복
사내가 창밖을 내다보니/ 개 한 마리 벤치에 엎드려 있었다/ 젖은 몸이 어딜 쏘다니다 돌아왔는지/ 가로등 불빛에 쉽게 들통났다/ 서서히 고개 돌려보니/ 곳곳에 개들이 눈에 띄었다/ 야외 체력단련기구 위에도/ 지친 여러 마리의 개들/ 차가운 철제 의자에 젖어 있었다// 당신이 떠난 후로 습관처럼/ 밤은 또 개를 낳았다/ 그것들은 흐리고 가는 울음이다가/ 가끔은 말도 안 되게 짖기도 한다/ 어떤 밤은 안개라는 이름으로 부옇게/ 또 다른 밤은 번개로 울부짖다가/ 이 밤은 그냥 조용한 는개 된다/ 너는 개다 너는개다 너 는개다/ 이 정도면 키울 수 있겠다 싶어/ 사내가 불을 끈다 천천히 이불 당긴다//

점묘의 나날 / 배세복
당신처럼 어눌한 화가는 처음이다/ 밑그림을 한 줄도 그리지 않았기에/ 채색이 시작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세상을 건너뛴 당신/ 구멍 난 캔버스가 보이지 않냐고/ 어찌 내 앞에서 무례하게 붓을 드냐며/ 수많은 밤 당신의 팔레트를 집어던졌다/ 펄펄 뛰던 밤들이 감히 지나가버리고/ 꿈마다 찾아가서 훌쩍거리면/ 벚나무에 물어보라 당신은 시치미 뗐다/ 지는 꽃잎은 꽃자루를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듯/ 봄밤은 제멋대로 벚꽃잎을 점점이 휘날리고/ 따지고 보면 절필을 강요한 건 나였다/ 누구보다 아둔한 캔버스였다//

밤의 미장센 / 배세복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배경의 사내가/ 마른세수를 하는 척 멈춘 손과 얼굴의 병치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쪽으로 부는 바람의 행방이/ 남아 있는 꽃잎을 듬성듬성 날리는 벚나무 옆 흐린 가등이/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시치미 떼는 봄밤의 습속이/ 벤치 위 무릎으로 고개 묻게 만드는 두 다리의 위작이/ 서서히 고조되며 들썩이는 체크 셔츠의 진동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사람을 꺼내지 않으려는 흐느낌이/ 그럼에도 조금씩 들켜버리고 마는 속울음 사이사이 호명이/ 차라리 암전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암묵의 사내가, 내가//

행과 행 사이 / 배세복
이른 봄이면 당신은 매일/ 들판에 나가 시를 지었다/ 당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행을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겨우 새참 막걸리를 날랐다/ 당신의 일소나 쟁기가 될 수 없었기에/ 다랑논 첫머리에서 당신을 부른 후/ 독새풀이나 뜯고 있었다// 당신이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에도/ 나는 당신이 행갈이 마친 시편에/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신의 시풍은 늘 고루하였다// 나올 것 없는 논바닥을 뒤적이며/ 시를 쓰는 당신이 싫었다/ 차라리 가까운 어물전에서/ 새우젓이라도 뒤적이길 바랐다// 당신이 시를 마저 완성하려고/ 들판을 자주 들락거리던 어느 계절/ 나는 당신을 떠났다 도시 어디에라도/ 멋들어진 시를 남기고 싶었다// 당신은 끝까지 흙에다 시를 쓰다 갔다/ 마지막까지도 고루했던 당신의 시와/ 갓 세련된 척하는 내 시 덕분에/ 우리의 행간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당신을 송두리째 / 배세복
가게에 갔네 물건 하나 없는 진열장, 버리러 간 내게 주인은 자꾸 당신을 떠올리라 했네 어림없었네 감히 쉽게 당신을 내놓을 것 같은지, 들꽃보다는 조금 화려한 꽃 이야기를 했네 구름이 적당히 피어 있는 여름날, 해가 잠깐 사라진 하늘, 꽃잎에 햇빛이 다시 살짝 비출 때 분명 빗방울이 한 낱도 내리지 않았는데도 반짝! 하는 눈동자가 있었, 내 눈에도 반짝, 주인은 등을 다독였지만 괜찮았네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한다 했네 산길이었던 것 같네 가지 않고 주저앉을 수 없는 노릇, 무작정 걷고 있었네 가시 덩굴 헤치다보니 다리 긁히고 손등에서 떨어지는 피, 온몸이 쓰라렸지만 아무렇지 않았네 어차피 절벽에 누가 먼저 와 서 있었, 그냥 다음에 다시 오겠다 했네 그때는 당신을 두고 올 거라 했네 가게를 나서다보니 흰 가운의 주인은 간 데 없고 당신만 온통 하얗게 진열되어 있었네//

무제 / 배세복
따라오라던 말 들어오라던 말 괜찮다던 말/ 얼마나 컸나 만져보자던 말 자기 것도 만져/ 보라던 말 뜨겁지 않냐고 묻던 말 너도 나중에/ 이렇게 커진다던 말 남자끼리는 상관없다던 말/ 아무 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던 말 누구에게도/ 애기하지 말라던 말 사나이는 어디다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니라던 말 제 기분을 내게 강요하던/ 말 더 이상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말 지우고/ 싶은 말 선생의 존경심 따위 모두 날려버린 말/ 어른이 된다는 기대감 따위 모두 앗아간 말 그때/ 당신에게 하지 못한 말 내 기분은 당신의 그것/ 같았다는 말 정말이지 네 뱀 대가리와 같다는 말//

손등이 젖는다 / 배세복
나는 그를 잘 안다/ 그의 몸에 이파리로 달라붙어서/ 살랑살랑 봄바람 불 때면/ 걸음마다 나는 팔랑거린다/ 때론 축축한 꿈길 위/ 훠어이 훠어이 소리 높일 때도/ 기꺼이 그를 휘젓는다/ 그러나 그를 잘 모른다/ 꽃잎을 보여주지 않는 그는/ 나에게 늘 돌아앉은 등과 같다/ 아침에 꽃봉오리 단장할 때/ 저물녘 이마를 짚어볼 때도/ 나에게 항상 메마르다/ 그런 그가 오늘 허둥지둥/ 꽃잎을 갖다 댄다/ 얼굴 쓸며 무너지는 그 앞에/ 사진 속 낯익은 꽃잎이 웃고 있다/ 허물어지는 그를/ 낯선 이파리들이 부축한다/ 아주 천천히/ 솟구치듯 일어서던 그가/ 다시 마른 대궁처럼 몸을 꺾는다/ 나는 바닥에 조용히 낙엽 되어 놓이고/ 갑자기 그가 얼굴을 맞춘다/ 저음의 진동으로 들썩인다//

송화(松畵) 한 폭 / 배세복
봄이라며 당신은 목련꽃 봉오리를 보내주셨지만요 저는 캔버스에 솔잎을 그려넣고 있어요 며칠 뒤면 또 제법 벙근 꽃잎을 보낼 테지요 그때 쯤이면 저는 잔솔가지를 그릴 겁니다 어찌 목련꽃뿐이겠어요 산수유꽃일까요 생강나무꽃일까요 아무튼 노란 꽃잎에 살짝 현기증이 나겠지요 그러면 저는 오히려 지난 겨울 솔바람 소리 모으던 당신의 차가운 응달 떠올릴 겁니다 처마 밑 고드름 녹이던 바람도 눈 쌓인 그늘에서는 꽁꽁 얼어붙고 말았었지요 멀리서도 내 셈을 알아차린다는 듯 당신은 꽃무릇이며 꽃창포 따위를 줄곧 보내며 꽃그림을 종용하겠지요 그러면 저는 소소리바람 쓸려 송홧가루 날리는 소나무숲 그걸 그릴 수밖에요 어쩌면 당신이 빚은 계절엔 꽃나비도 묻어오겠지만 소나무에 그런 것들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허허 내 정원에는 침엽수가 없어! 언젠가 자랑스레 당신이 말했지만 제 캔버스엔 솔잎만 무성한 걸요 바늘만 솟아있는 그림을 왜 새기느냐 묻는다면 당신도 알잖아요 곁을 주지 않았기에 당신은 침엽(針葉)이니까요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당신은 환영(幻影)이니까요//

사구 너머 사구 / 배세복
저 선수 본 적 있네 연갈색 유니폼의 선수, 신두리 바다는 푸른 그라운드 펼쳐 보이고 그는 자꾸 타석에 서네 온몸으로 또 사구 받아 내네 저 타자, 오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슥슥 엉덩이 문지르네 겅중겅중 모래밭으로 달려가네 팀을 위한 출루 의지는 그의 오랜 습관 한번은 그런 적 있었네 태풍에 실려 온 엄청난 속도의 까치놀이 그의 후두부를 공략했네 악! 소리 지르며 비틀거리던 그가 투수에게 달려들었네, 달려갔으나 모두 그를 말렸고 함께 떠밀려 온 이들, 쯧쯧 오죽 아프면 저럴까! 혀를 차기 일쑤였네 이를테면 그것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한 일, 그러므로 사구 최고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오늘도 무수히 매를 맞네 파도에 쓸리고 다시 바람에 부딪혀 어딘가로 실려 가네 한참 동안 멍을 풀더니 저만치서 언덕 이루네 저녁 내내 두드려 주고 싶은 사르르 저 엉덩이//

나무 참외 / 배세복
모과는 가을이 되어서야/ 자신의 이름이/ 목과 木瓜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때부터 모과는/ 덩굴줄기로 뻗어 나가는 노란 참외처럼/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다/ 떨어져 나간 이름을 찾으려는지/ 주위를 내내 서성이면서// 햇빛도 노랗게 두리번거린다//

여름, 목련 / 배세복
꽃이 졌다 해서 목련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지만요/ 잎이 무성해서 그저 나무로만/ 보일 뿐인 걸 어떡하겠어요/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 그 긴 밤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용케 견디셨나요/ 목련은 꽃이 지자마자/ 다음 해 꽃을 준비한다는데요/ 그러다가 봄이 되어 그 꽃눈/ 팍 터뜨리는 거라는데요/ 네가 꽃 피는 걸 내가/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당신의 하얀 한숨이/ 푸른 잎과 오버랩 되는 여름,/ 저는 그저 꽃눈이길/ 영원히 바랐을 뿐이었는데요//

목련, 비에 지다 / 배세복
언젠가 꼭 한 번/ 그 사람 앞에서 운 적 있다/ 숙인 고개 밑으로/ 건네 주던 흰 손수건/ 오늘 아침 다시 다발로 피어/ 백목련 한 그루 빗속에 서 있다/ 이제 봄 왔으니 눈물 그치라고/ 자기도 젖는 줄 모른 채/ 빗물에 우는 땅바닥 향해/ 뚝뚝, 손수건 건네고 있다//

목백합 그 시인 / 배세복
오래된 책의 행간처럼 비좁은 골목길에/ 그가 서 있었는데요/ 봄 내내 한 구절의 시도 쓰지 못하던/ 아주 어눌한 글쟁이였지요/ 어느 날 그가 힘겹게 피워올린 늦봄/ 그러나 아무도 읽어내는 이 없었죠/ 노란빛 감도는 연초록 꽃잎을/ 넓은 잎맥에 숨기고 말았던 거죠/ 당황한 그는 시어들을 도려냈는데요/ 낡은 비유로 덧칠해 왔던 문장들이/ 어느새 팔랑팔랑 얇아지기 시작했죠/ 몇날 깃대에 걸어 두어도/ 바람마저 깃발을 피해가던 어느 밤/ 지우고 또 지워 거뭇해진 얼굴로/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는데요/ 뚝뚝뚝 온몸으로 만들어내는 노래/ 그제서야 사람들 발걸음 멈추어/ 그의 계절을 읽기 시작했죠 꽃잎 진 자리/ 꽃자루에 여름이 서서히 맺히고 있었는데요//

봄날의 승부 / 배세복
이른 봄의 정원에서는/ 가위바위보가 한창이었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보자기처럼 펼쳐 보였고/ 그때마다 사내가 다가와/ 말없이 가위를 내밀었다/ 나무는 번번히 패했고/ 벌칙처럼 가지가 하나씩 잘렸다/ 먼 곳의 가지마저 내준 후/ 듬성듬성 몸뚱이가 가위처럼 남아/ 드디어 사내와 비길 수 있었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내가 가위질을 멈추었다// 소나무는 그제야/ 빈 가지 사이로 바람을 끌어와/ 휘파람을 불 수 있었다//

안녕! 스티븐존슨* 씨 / 배세복
그의 등짝에 불이 지나간 걸까 침대 위에 검은 유화 펼쳐져 있다 돌아누운 목이 타다 남은 꽃대궁처럼 꺾여있다// 혹시 한 번도 그치지 않고 우는 울음 들어본 적 있니? 밤새 대면한 하얀 천장이 물어온다 모든 질문이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 아니겠지 그가 침묵과 함께 미간의 그을린 주름 뽑아 침대에 나란히 늘어놓는다// 깊이 숨어있던 울음주머니 터져 밤새 화산재처럼 온 몸 덮었던 것일까 속울음이란 저렇게 까맣다는 것 이제야 안다 아저씨! 낮게 부르는 소리에 현무암 같은 그가 얼굴 돌린다// 일생을 단 며칠 만에 울어버린 돌덩이, 휴화산이 다시 터져나오려는 것처럼 그가 쿨럭거린다 어깨부터 흑흑흑, 여진이 이어지고 맨틀처럼 밤은 또 출렁인다//
* 스티븐존슨증후군 : 급성피부점막 전신질환.

안녕 루게릭* 씨! / 배세복
삼촌의 삶에도 함성이 터진 적 있죠 전기공인 그에게도 홈런은 있었으니까요 장외로 공을 날린 후 주먹을 불끈 쥐며 꼭짓점을 천천히 돌던 그때, 등 뒤로 던졌던 방망이가 자신을 외면할 줄 생각조차 못했죠 스윙을 바꾸고 자세를 낮춰도 홈런은커녕 안타마저 사라졌지요 마침내 결장이 잦아진 끝에 침대에 버려진 채 스스로 딱딱한 방망이가 되어갔죠 자신이 영구결번이 된 사실은 모르고 미끄러지는 손금에 로진백을 움켜쥐던 손아귀,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지요 이젠 하위 타선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멈춰버린 전류에 온몸 흩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안녕하세요 루게릭 씨!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동명이인을 모아 야구단을 꾸린다는 소문,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주라는 수군거림, 이번에 입단한 신입입니다 잘 해낼 거예요 그는//
* 루게릭병: 야구선수 루게릭이 진단받은 근의축성측색경화증, 불치병.

환난(患難), 것들로부터의 / 배세복
커다란 열기구에 탄 채로/ 손을 내밀어 대바구니에 가득 찬/ 꽃게보다도 작은 최초의 생명을/ 바다에 던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부메랑처럼 생겼고//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것들은 자꾸/ 갯벌 쪽으로 떨어져서 바위에 부딪혔고/ 더 멀리 던져 보아도/ 떨어지는 곳은 늘 일정해서//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의도와 결과가 다른 것도 그렇고/ 머리가 터졌을지 모르는 그것들이 가엾기도 하여/ 기구에서 훌쩍 뛰어내려/ 괜찮은지 다독이려고 하였는데// 생각보다 그것들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몸속은 어찌 피멍 들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멀쩡한 채/ 집게다리를 들이밀며/ 한꺼번에 공격해 오고 있는 터라// 기구에 올라타려던 순간에/ 하늘에서 갑자기 먼지바람이 일더니/ 타고 온 기구가/ 두 쌍의 회전익으로 떠오르면서/ 헬리콥터 되어 나를 버리고//

우로보로스* / 배세복
지난 밤 꽃뱀이 그림을 그렸네요./ 이를테면 압착화 같은 거죠 열흘 붉은 꽃 없다는데 이 꽃은 그보다 훨씬 빨리 사라질 듯하네요.// 속력과 폭력이 앞 다투는 아스팔트 위에서 압착의 자세를 기리는 이 딱히 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꽃잎이 아니라 단풍잎일지 몰라요./ 가을은 뭍것들이 마지막 피를 토하는 계절, 억새풀 따위에 갈아온 칼날 같은 혓바닥이 어둠 속에서 번쩍! 한 번은 빛을 발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약자에게 독기란 겨우 제 살 도려내는 것일 뿐, 제 안으로 살기를 품어버리는 힘일 뿐, 머리 터진 꽃뱀은 마지막으로 제 몸을 돌아봤겠죠.// 육체는 습속처럼 꿈틀거리고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은 채 꼬리로 입을 막아 울음을 가두었겠죠.// 욱여넣듯이, 그가 다음 생을 꿈꾸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몸뚱아리가 전부인 것들이 또아리 트는 이유를 알 것 같네요.//
* 꼬리를 삼키는 자

드라이플라워 / 배세복
밤잠 잃은 나는 그 밤도 꽃밭을 헤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더듬이는 끄떡없다. 지팡이처럼 두드리다 발견한 것은 꽃밭 속 숨죽이고 있는 한 묶음 꽃다발, 누군가 여러 해 동안 날 엿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조심스레 꽃다발을 한 잎씩 넘긴다. 그때마다 갖가지 향기, 그것은 언젠가 입 언저리 한 번씩 묻혔던 꽃가루 내음, 낙화가 두려웠던 시절의 땀 냄새 같은 것, 꽃잎은 하나같이 촘촘히 짜여 있다. 풀섶에서 만나는 거미줄 날개처럼 혹은 가을볕 익어가는 끈적한 벌집처럼-누구든 제 생애를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완벽한 구조, 더듬이가 꽃향기에 중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점점 비대해지는 입술, 진찰만 무성할 뿐 누구도 제대로 치료해줄 수 없다. 습관처럼 새벽이 찾아오고 그것이 검은꽃 묶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초로를 기다려 핀다는 검버섯꽃 뭉텅이, 그가 오래 전 툭 던지고 간 꽃다발 한 묶음. 이제는 서서히//

유리 구두를 신은 소녀 / 배세복
후두둑후두둑/ 유리 구두 소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우산 없이 걷던 사람들/ 빠른 발걸음으로/ 처마 밑으로 모여든다// 급히 불러 모은 관객 앞에서/ 점점 더 무례해지는/ 소녀의 발재간// 숨어있던 햇살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면// 다급히 맨발로 귀가하는 소녀/ 길가 웅덩이마다/ 벗어놓은 유리 구두 수북하다//

밤의 저수지 / 배세복
달의 저편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당신이 말했죠 밤은 깊어가고 우린 저수지 근처에 있었죠 뒤편 저쯤에다 커다란 거울을 쏘아 올리면 돼! 하늘에는 보름 가까운 달이 떠 있었죠 나도 당신 따라 달을 올려다봤죠 언제나 같은 얼굴만 보여주는 달의 낯, 당신처럼 말이죠 다시 귀 기울이는 내게 당신은 말이 없었죠 한참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당신, 저수지를 보고 있었죠 물낯에 환하게 떠오른 달//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밤마다 당신은 내게 저수지를 만들어주니까요 함께 걷던 교각 아래 푸른 물은 넘쳐버렸고 소매를 붙잡던 그 밤의 악다구니들도 녹아내려요 또 달이 떠올라요 오늘도 앞면만 보여주네요 당신처럼 늘 웃고 있는 달, 거울을 쏘아 올리는 대신 나는 저수지로 뛰어들죠 물낯을 허우적거리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요 거기 달의 뒷면이 있어요 온갖 기억 받아먹는 저수지가 있고 당신은 울고 있고//

눈꽃 1 / 배세복
흰 눈이 가득 내려, 닿을 수 없게, 그대 있는 먼 곳까지 가득 내려/ 그대는 꽁꽁 문을 잠가놓고 내가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면/ 가끔 살짝 열어놓은 문틈 사이로 잠시 보이기도 하는 화사한 그대 얼굴// 살아갈수록 그대 보고 싶은 날 점점 늘어만 가고/ 하루는 어둠 속으로 바람처럼 헤집으며 그대 찾아봤지만/ 나는 꽃이 될 수 없었고 그대만 새하얀 눈꽃 되어 저 멀리 사라져가네// 어둡고 지친 저녁마다 부은 발목 이끌고 만나려 하는 그대 옷자락 그리고 그대 차디찬 웃음//

 

들어가는 시 ㅡ자화상 / 배세복
찬장을 열면/ 민무늬 접시/ 두 개// 한 접시엔/ 조그만 주먹/ 짤따란 하체/ 다 자라지 못한 심장/ '버리지 마시오'/ 표식과 함께 적당히/ 버무려져 ㅇㅆ고// 다른 한 접시엔/ 비대한 두뇌만으로/ 한가득 넘실넘실/ '꿈꿀 때만 쓰시오'/ 핏빛으로 뚜욱뚝/ 흘러내리고/ 불은 꺼지고//

위험한 마을 / 배세복
스스로 무너지는 마을 있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 마을 들어간다/ 흘러내린 산등성이마다/ 웅덩이들 물 없이 흩어져 있다/ 돌리네* 소리없이 무너져 내린다/ 할머니 홀로 지키는 마을/ 브라운관 조금 흔들린다/ 저 마을 본 적 있다/ 눈을 아주 감고/ 그 마을 들어선다/ 봉긋한 젖무덤이다/ 내가 독차지해 버린다/ 너무 낡아 무너져 내릴 때/ 나는 그 마을을 버렸다/ 거기 어머니가 있었다//
* 돌리네 : 지하수에 의해 침식된 웅덩이

가항반원* / 배세복
항해가 가능하단 예보는 오늘도 당신 곁을 기웃거리게 하네/ 항상풍을 빌려 탈 수 있다는 소문은 출항을 준비케 하네/ 당신은 내게 사나운 태풍, 이름만 바뀔 뿐 매한가지네/ 한때 잠잠하지 않은 당신 탓하며 스스로 전복되어/ 돛도 잃고 노도 잃고 아예 닻까지 바다에 버리려 했지만/ 당신 한쪽은 항상 위험반원, 내 사나운 항해로는/ 쉬 당신 만날 수 없기에 내가 먼저 잠잠해지겠네/ 따지고 보면 나도 태풍이었던 적 많았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옆구리를 빌려 타고 있던 거였네//
* 태풍 진행 방향에서 배의 항해가 가능한 반원

아리아 / 배세복
엄마가 보고 싶으면 아, 아빠가 보고 싶으면 오, 하는 놀이였죠 동생은 자주 울었으니까요 엄마아빠가 늦는 저녁마다 동생을 달랬는데요 밤에 울면 뱀이 나타난다는 미신 따윌 그는 곧이들었죠 그날 저녁도 어스름 없이 밤이 되었죠 울음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 그를 뒤뜰로 데려갔죠 중간중간 울먹임이 새어 나왔지만 그것마저 막을 순 없었죠 그들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죠 살구나무를 사이에 둔 뒷집 부부는 엄마아빠를 감옥에 집어넣을 작정이었으니까요 간장독을 모두 열고 쪼그려 앉은 채 동생의 소리에 맞춰 리코더를 불기 시작했죠 밤에 울고, 밤에 피리를 불고, 밤에 간장독을 열어놓으면 뱀이 나온다고 했으니까요 실눈을 뜨고 보니 구렁이 너덧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뒷집으로 넘어가는 게 보였죠 담을 타고 들려오는 비명, 우리는 서로 기대어 스르르 잠이 들었죠//

그해 여름은 장마가 길어 / 배세복
그해 여름은 장마가 길어 밭고랑마다 헛물 가득했죠 아버지는 밭 가운데서 참깻대를 바라보았죠 물꼬를 내야겠다 괭이좀 빌려와라 대문은 살짝 열려 있고 마줌마! 불러도 대답 없었죠 헛간을 찾아봐도 괭이는 안 보였고 시래기 걸어놓는 처마 밑 들여다보는데 방 안에 움직임, 문틈 사이로 보니 대낮인데도 누군가 있었죠 방바닥이 크게 들썩였죠 왜 밤이 되어서 그 집을 다시 간 건지 모르겠어요 마당에는 헛물 가득했고 물뱀 떼가 우글거렸죠 막대기로 쳐내도 어디선가 나타났고 불을 질러볼까 생각했지만 긴 장마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죠 도망쳐 나오는데 뱀이 들락날락, 수채 구멍 같았죠 어둠 속에서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지만 여름 동안 괭이를 빌리러 갔던 일도 뱀꿈 이야기도 누구에게 하지 못했죠 동네는 바람난 과부 소문이 아늬바람과 함께 떠돌았고 까맣게 탄 참깻대, 가을 초입이었죠//

노을의 습속 / 배세복
서녘 하늘 한 켠에/ 꼭꼭 숨어있다가/ 어느 저물녘 눈앞에 나타나는/ 오랜 종족 하나// 그들의 방문 즈음에 나는/ 이미 풀린 넥타이거나/ 혹은 파르르 스러져가는/ 촛불 심지 같은 것// 종일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쇳소리 내뱉던 내가/ 동그랗게 입술을 말아/ 감탄사를 장전할 때// 그때! 순식간에/ 가슴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화적火賊의 무리/ 저 무례한 행태//

파리지옥처럼 너는 / 배세복
문을 내고 싶지 않은 이 어디 있을까/ 세상의 꽃들이 바로 무수한 증거다/ 그 문으로 벌나비 넘나들게 하여/ 품 안에 가득 이야기 실어오게 한다/ 꽃은 그걸로 수많은 밤 홀로 버틴다// 문을 내고 싶으나 못 내는 이도 있다/ 발바닥이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모래땅 혹은 암벽에 매달려 있거나/ 한쪽 발이 물에 담겨져 있어서다/ 처음부터 얼어붙은 가슴은 아니었으리// 꽃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의 마음을/ 이 밤 불현듯 생각해 본다/ 무엇으로 밤새 어둠을 버틸까/ 풀어낼 이야기 하나 없는 불면의 밤/ 창문 없는 집 한 채다// 문을 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꽃 대신 경첩을 달았다/ 허나 습속이란 무서운 것/ 다시 벌나비 삼키고 이야기 삼키고/ 제 이름마저 먹어치우고 너는 또 지옥처럼//

허구한 날 우리는 운동장에 모여 / 배세복
허구한 날 우리는 운동장에 모였죠 그는 자신의 중심부를 바지 밖으로 내놓고 있었는데요 선생님! 지퍼 열렸어요 말도 꺼낼 수 없었죠 자신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귀싸대기를 날리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는 이전에도 자주 중심부를 교탁에 부비곤 했죠 그런데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설명에 집중하는 거지요 축구를 못하는 건 죄악이라 했죠 초등학생이더라도요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설명을 잘 듣는 것, 도움닫기와 디딤발과 아랫부분을 찰 것을 강조했죠 이제 그는 편을 가르자고 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등신 같은 것들은 자기랑 편을 하자고 했죠 그래야 균형이 맞다고요 나는 등신에 속했죠 게임이 시작되고 수비수인 내게 공이 날아오자 그는 저만치서, 제대로 막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소리쳤죠 부웅 날아오른 내 몸이 운동장에 내리꽂혔고 그가 다가와 등신등신! 고개 숙인 채 곁눈질로 바라보니 중심부가 축구공처럼 커져 있었죠 도움닫기와 디딤발로 아랫부분을 걷어찼죠 순간 중심부가 터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졌죠 퉤! 마른침 뱉는데 어깨가 흔들렸죠 여보! 자면서 침 뱉는 사람이 어딨어욧 아내가 기겁을 했죠//

 

흑점 편력 ㅡ쇠라展 / 배세복
모퉁이 새로 생긴 화랑 있지?/ 거기 의사가 안티에이징으로 유명하대/ 오늘도 진료대를 끌어당기고 있을 거야/ 초로의 여인들이 항상 서성이거든/ 흑점을 싫어하는 그네들은/ 모자를 얹거나 양산을 쓰고 돌아다녀/ 그럴수록 화려한 캔버스가 되지/ 검버섯과 편평사마귀 따위가/ 오묘하게 어우러진 세월들 알지?/ 천천히 구워진 흔적을 순식간에 태운대/ 저기 좀 봐 원숭이가 태어나고 있어/ 보트도 바다도 구름도 하늘도/ 푸르게 다시 솟아나잖아/ 그랑자트섬 둔치 위로 아찔하게 말야//

화랑화랑 ㅡ마티스 / 배세복
화랑에 불이 붙은 걸 목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캔버스마다 빔 혓바닥이 화랑화랑// 지난날 신라때 지귀志鬼가 살아나/ 불을 옮기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 소리질렀다/ 호들갑 떠는 그녀에게서/ 잘 마른 불쏘시개 냄새가 났다// 평생 동안 자신이 쓴 언어로 부적을 만든다면/ 내 부적은 지귀에게 효능이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 가수에 불이 나도록’/ 이 말은 내게 모어母語가 아니다/ - 얼마나 많은 분석을 통해야만 해석이 가능해질까// 세상 모든 호적수를 무찌른 붉은 벼슬 저 속에/ 독수리 눈빛이나 부리, 발톱 따윌 던져넣고 중얼거린다/ 휘발유 냄새가 몸에 확 끼쳐오른다면/ 화랑화랑!/ 지귀여 내게도 불을 지피겠는가//

우는 여자 ㅡ피카소 / 배세복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왜 여기 있을까/ 그녀는 늦게 도착한 내 형제들과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그녀가 한 번도 맘껏 우는 것을 본 적 없던 터라 영정사진 보듯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여태껏 어디에 그 표정을 꼭꼭 싸매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한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여러 줄기의 눈물이 왼쪽 볼을 등분하고 있었다 거기에 다시 사선을 긋듯 붙어있는 몇 오라기 머리카락, 그녀가 몇 번 눈물을 찍어내는 것을 본 적 있다 그때 그녀의 발개진 코는 울음을 삼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입 속으로 들어간 문이 벌어진 이빨 사이에서 울음과 함께 새어나오고 있다 이미 그녀의 얼군은 산산조각, 보이지 않는 저 쪽 뺨도 마찬가지리라 눈코입이 떨어져 나갈 듯 우는 여자의 지 괴기스러운// 얼굴, 아버지는 어머니의/ 피카소 어머니는 나의/ 피카소 나는 내 새끼의/ 피카소 우리는 우리의/ 피카소//

어떤 불면 ㅡ달리 / 배세복
그는 이 밤도 넥타이를 여기저기 늘어놓는다 검은색을 하나 집으며 얼마냐 묻자, 값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 눈을 찡긋거린다. 그가 흥정에 능한 장사치가 아니란 걸 알기에 낮은 가격으로 중얼거려 본다 딱한 표정의 그가, 그냥 가져가고 나중에 깊이! 한껏 신이 난 나는 방으로 넥타이를 끌고 온다 어둠을 목에 두른 밤처럼 그때, 자맥질하던 오후의 바닥 깊은 곳, 아 둑시니 같은 것이 목을 눌러오던 시절, 뚝 끊어 그에게 내민다. 아직 조금 부족해! 넥타이를 매만지던 어떤 여름은 어떨까 홍조를 띄우며 기울 앞에 선 어느 첫 출근길, 계절이 바뀌고 다시 거울 앞에서 그래! 이대로 넥타이를 확 조였던 사람도 있었다는 데, 묵음으로 번지던 초침, 뚝 떼어 들이민다 그런데 그가 어디 갔을까 이렇게 베갯잇 축축하게 해 놓고 적, 시, 게, 해, 놓, 고...... 투덕투덕 빗소리에 잠 깬 아침, 물방울무늬넥타이를 거리에 펼쳐놓고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군상群像 ㅡ이응노 / 배세복
화랑에 들어서자 그가 다가와 속삭였네 내 머릿속엔 늘 비가 와, 처음 만나는 이에게 귀를 내어준 듯 불쾌했네 그만큼 그는 무례했던 것, 허나 내 머리도 늘 축축한 장맛비, 이었기에 그는 소곤댔네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어디선가 지렁이 소리 들려지이잉지이잉 그것이 울음이라면 슬픔은 환형環形일 거야 그가 고 개를 떨구었네 지렁이 붉은 살갗, 햇볕에 살찍만 닿아도 들겨 버리는 여린 목덜미, 들썩였지만 말릴 수 없었네 누군가 어떻게 버티는 세상은 늘 궁금, 하였기에 주머니에서 꺼내든 지렁이 한 마리 그가 먹물통에 떨구었네 한 마리 또 한 마리, 그들을 건져내 캔버스에 차곡차곡, 환형으로 돌며 나아가는 하나 둘 셋 넷, 그들의 길이 그대로 군상이 되었네 그때였네 내 눈에 빗물이 들이치기 시작한 건, 그가 사라져간 화랑에 서서히 번지고 있는 얼룩 얼룩 얼룩//

죽은 새를 대하는 네 가지 방식 / 배세복
푸른 하늘 훤히 보이는 방음벽 아래 작은 새가 죽어 있다. 오빠 이것 좀 봐! 딸아이가 외친다 아들이 재빨리 다가가 주저 없이 새를 들어올린다 야 임마, 그건 왜 만져! 소리를 지르자 살그머니 내려놓는다 불쌍하잖아요! 돌아오는 내내 둘은 멧새처럼 조잘거린다 오빠 저 새는 어떻게 돼? 큰아이가 대답한다 썩어 없어지게 될 거야! 우리가 묻어주면 될 텐데? 안 돼, 아빠한테 혼나! 집에 도착해 작은아이가 다시 재잘댄다 우리가 무얼 본 줄 알아, 엄마? 새는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거 맞지? 저녁을 준비하다 말고 아내가 전화한다 구청이죠? 예, 거기 말이에요 방음벽 교체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뭘 그런 걸 항의를 해! 저녁에 불현듯 죽은 새가 내 귀에 지저귀었다 그러니까 너 말야, 천국도 잃고 연민도 키우지 않고 전화도 못 하는 방음벽 같은 너! 새는 나에게 와서 모두 죽었다//

피항避航 / 배세복
돛으로 몰려드는 바람이 심상치 않아요 이제 항로를 벗어날 시간이에요 일 년 전 태풍의 시절처럼 말이죠 길어야 사나흘 정도의 피항이라 생각했죠 허나 밤바다에서 바라보는 별이 한없이 새끼를 치는 것처럼 밤은 또 밤을 낳았죠 어느 밤은 앞 배가 빠져나가지 않아 어떤 밤은 뒷닻이 풀어지지 않아 또 무수한 어느 밤 동안은 천지사방이 여울목 귀신처럼 울어대서요 어찌 당신 품을 떠날 수 있겠어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붉어진 눈으로 물을 울려다보면 아무 말 말고 하루 더 쉬어 가라고 돛대를 입술에 갖다 대던 당신이었지요 아 모항母港, 모항모항 입 안에서 마구 맴돌았지요 올해는 정말로 며칠만 머물겠습니다 까치놀 사라지기 전에 어둠 깊어지기 전에 피항항避航港 당신 품으로 가겠어요 그런데 아까부터 선장은 소리 질러요 거긴 벌써 몇 해 전에 폐항돼 버렸어//

당신의 주머니 / 배세복
당신 주머니는 차가웠지/ 내 손을 한 번도 넣어주지 않았지/ 겨울이 아닌데도 내 마음은/ 터진 손등처럼 갈라져 있었지/ 당신이 출타한 어느 날/ 함부로 주머니를 뒤졌지/ 짐작대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 나중에는 당신이 차가워서 준 게 없는지/ 줄 게 없어서 차가운 건지 헷갈렸지// 당신 주더니 따뜻했던 적 있지/ 임용 통지서 받고 함께 돌아오던 날/ 시내버스엔 한 자리만 남아 있었지/ ㅡ배씨 한잔했구먼, 어디 다녀와?/ -예, 울 아들이 이제 선생이 되었슈/ 당신이 발 벌려 의자 가운데 내주던 그때/ 내 몸에 닿던 따뜻한 당신 주머니/ 손등처럼 내 마음을 또 갈라지게 한/ 늘어져버린 당신의 씨앗주머니, 두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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