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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벚꽃 아래 언니들 / 최미아

by 부흐고비 2022. 5. 12.

봄이 수런댄다. 벚꽃 아래서 노인들이 볕바라기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는 예닐곱 발짝 떨어진 원목 테이블에 앉아 봄맞이 중이다. 달걀 값이 올랐다는 이야기 끝에 시민회관이 튀어나왔다. 신혼 때 그 근처에 살아서 반가웠다. 들려오는 말을 건성으로 듣다 귀를 활짝 열었다.

시민회관 앞 빌딩이 우리 집 자리잖아. 집이 백오십 평이었으니까 엄청 넓었지. 뒷마당에 칠면조랑 닭이랑 길렀어. 날마다 닭이 낳은 겨란을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한 30년 전이네. 완벽한 표준어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슬몃 건너다보았다. 노인은 초록누비옷에 밤색바지, 회색 선 캡을 쓰고 있다. 마스크와 모자만 벗고 저대로 예식장에 가도 어울릴 고운 자태다. 나는 칠면조할머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노인들은 저택 자랑에 멀미가 나는지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감자떡 하나 잡숴 봐. 쫌 굳었어. 감자떡은 굳어도 맛나. 난 마스크 벗어야 되니까 안 먹을래. 칠면조할머니는 수틀렸는지 감자떡을 밀친다. 노인들은 더 권하지 않고 바로 거둔다. 그릇 이쁘네. 우리 메느리가 시집올 때 해왔어. 서울서 이사 올 때 살림 다 버리고 부녀회에서 그릇 모을 때 그릇 죄다 내놨어. 서울에서 밀려난 감자떡할머니가 궁금하다. 버릴 거 버리고 묵새긴 세월 덕분일까. 넉넉한 몸집에 여유 있는 표정이다. 총무 언니가 그릇 걷고 부녀회에서 밥 해먹고 그랬잖여. 행사하먼 밖에까지 쭉 차라서 먹고. 그때는 영감들도 많았제. 이제 부녀회도 없고 영감들도 몇 안 남고. 그게 언제 적 얘긴디. 지금은 노인정에서도 못 해먹게 한디. 코로나 땜에 그렇지. ‘아, 옛날이여’에 한창 젖어있는데 자그마한 노인이 밀차를 밀고 온다.

노인은 석쇠무늬 밀차 위에 그대로 앉는다. 301호는 거기서 넘어졌대매. 어떻게 앉았는디 넘어졌으까. 귀퉁이에 앉았는지 옆으로 비그르르 주저앉았어. 안 다쳐서 다행이제. 구르마 부서진 거는 괜찮은디 다칠까 봐 인자 암도 못 앉게 해. 장갑 좋네. 어디서 산 겨. 남부시장에서 울 아들이 사 왔어. 6천 원 줬대여. 구루마 밀라먼 장갑 껴야 혀. 작년에 장갑 안 끼고 댕겼더니 손만 까매. 그런 거 보먼 하나 사다 달라 혀. 돈 주께. 위에는 천이고 아래는 가죽이여. 손가락 끝에 돈 시는 거까지 있어. 돈 세는 게 아니고 핸드폰 하는 거야. 칠면조할머니의 일침이다. 나는 여직 돈 시고 벨 눌르는 건지만 알았네. 한바탕 웃음소리에 벚꽃도 살랑살랑 따라 웃는다.

802호 언니네. 병신팔자 아니니께 6개월이나 병원에 있었는디도 저렇게 짱짱하게 걷네. 허리 꼿꼿한 거 봐. 날마다 저렇게 걸어 다니잖여. 분홍꽃무늬 모자를 쓴 노인이 놀이터 쪽에서 걸어오고 있다. 오늘도 만보 걸었네. 모자할머니가 혼잣말을 하면서 화단 경계석에 앉는다. 아래층에서 아침부터 들들들 난리여. 집수리한다고 도장 찍으러 왔는디 안 찍어줬어. 그냥 수리해도 좋다고 해도 계속 남자가 서 있드라고. 밤에 아들 오먼 오라고 해도 안 가고 나중에는 문까지 꽝꽝 뚜들겨서 무섭드라고. 도장을 찍어줘야 가지. 무서워서 어떻게 문을 열어 줘. 우리 딸은 집수리 할 때 설탕 한 포씩을 죄다 돌렸대. 그랑께 다 좋아하드랴. 어디 사는디. 평촌. 평창, 멀리 사네. 거기도 아파트가 있어. 그럼 많채. 평창이 아니고 안양 옆에 평촌. 귀 어둔 노인에게 칠면조할머니가 쐐기를 박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들 대화는 계속된다. 딸만 거기 살고 아들들은 서울 살어. 서울 어디. 발산동. 우리 딸은 은마아파트 사는데 재개발이 안 된다고 난리네. 국회의원이 살고 있어도 안 된다네. 칠면조할머니가 은마아파트를 들고 나온다. 아이고 좋은 데 사네. 은마가 아니라 금마라는디. 서울 살아 본 감자떡할머니가 강남아파트 위세를 아는지 거든다. 우리 딸은 집 재개발 된다고 좋아하던디. 밀차할머니도 재개발에 할 말이 있다. 어딘데. 화곡동 빌라. 빌라는 싸디 싸. 단칼에 빌라가 엎어져버린다.

밀차할머니는 엎어진 빌라를 세우지 못하고 모자로 눈을 돌린다. 모자가 못 보던 거네. 행자가 줬어. 멋쟁이가 쓰던 거여서 역시 이쁘네. 그런데 그거 잘못 쓴 거 같은디. 거꾸로 써 봐. 그게 맞네. 거기가 껍답이여. 표가 속으로 가야재. 꽃이 밖에 와야 된 줄 알고 여태 디잡아 쓰고 댕겼네. 꽃도 이쁘긴 한디 제대로 써야재. 행자 씨는 으째 언니만 준대. 저번에 옷도 줬담서. 웃도리 두 개나 줬어. 아이고 뭐하러 남 입던 거 입을라고 혀. 저런 모자 다이소 가먼 이천 원이먼 사. 이천 원에 어떻게 저런 것을 사까. 그라고 멋쟁이가 백화점에서 사재 다이소에서 사것어. 딸이 백화점에서만 사준대. 백화점에서 딸하고 맨날 점심 먹고 댕기잖여. 딸이 노인정도 댕기지 말고 밖에도 나가지 말라고 했디야. 위험하다고. 어쩐지 요새 안 보인다 했제. 우리 딸이 마스크만 잘 쓰먼 된디야.

벌써 4시네. 들어갈라고. 집에 엿 붙여 놨어. 영감 보러 가야재. 아이고 영감 없는 사람 서러버라. 해 안 비치니께 등허리가 써늘하구만. 저짝 해 들온 데서 더 있다 가. 노인들이 소지품을 거듬거듬 걷어 안는다. 나도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핸드폰에 벚꽃을 담는다. 밀차할머니가 고개를 잦히고 벚꽃을 올려다본다. 이놈보다 동사무소 앞엣것이 더 이뻐. 거기 가서 찍어. 이놈은 커가지고. 나는 일부러 그놈들 볼라고 그리 돌아 댕겨.

아파트 그림자가 공원에 길게 눕는다. 벚꽃 아래 언니들의 봄날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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