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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조문 소회(所懷) / 박범수

부흐고비 2022. 5. 11. 07:10

종로3가역은 가까이 탑골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노인들이 많았다. 거기다 바닥과 벽타일이 낡아서 역사의 묵은 냄새까지 느껴졌다. 그 속에서 꼿꼿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고희를 넘긴 내 친구였다. 내 손을 꼭 잡아 인사를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위해 맛집을 찾아놓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택시를 타고 삼청동 공원 근처에 가자고 했다. 옛 추억이 많은 곳 아니냐며.

감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변화가 없었다. 삼십 대에 교육을 받았던 연수원의 담장도 우리가 함께 걸었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점심을 먹고 삼청 공원으로 갔다. 녹음 우거진 산책로가 너무 아름다웠다. 친구는 자신의 집 근처인 숙정문 방향으로 앞서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즉흥시를 써 단체 톡 방에 올리고 주말에는 한강 근처에 사는 손자에게 가서 한문을 가르치는 즐거움이 있다며 크게 웃었다. 성곽이 나타났다. 친구는 성벽에 기대서서 청와대 쪽 숲을 가리켰다, 박원순 시장이 생을 마감한 곳이라며. 순간 너무 놀랐다. 말을 잃고 숲을 응시했다. 친구는 얼굴이 굳어진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문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친구는 놀라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박시장의 마지막 행적을 날카롭게 말했다.

재작년 7월, 뜨거운 햇빛이 내려 쪼이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서 있었다. 조문행렬이 광장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긴 행렬 한쪽 편에서는 태극기를 든 무리들이 거칠고 거친 말을 큰 소리로 쏟아내고 있었다. 흡사 선생 앞에서 어렵사리 입을 떼는 학생처럼 오랜 친구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는 부하직원에게 한 행위를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를 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데 또 그가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인권 변호사 활동을 해온걸 바라보았고 참여 연대의 사무처장을 맡아서 이 사회에 큰 기여를 한 사실도 기억하고 있어.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에게 조문을 하는 것이 마음 편했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갔었지. 박 시장의 영정 앞에 꽃을 놓고 목례를 했어.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름이 났든 안 났든 공과 과가 있다고 생각해.

나의 말은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무거웠다. 우리는 숙정문 근처에 앉아서 세상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었다. 오랜 친구여서인지 결은 달라도 흉허물이 없었다. 친구는 정치인의 죽음에 조문을 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며 웃었다. 나는 그런 조문을 다녀온 일이 더 있다고 말했다. 나의 새로운 면을 본듯 친구는 무척 흥미로운 얼굴로 누구냐고 물었다. 노회찬 의원이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놀란 듯 듣기만 하다가 조문을 간 연유가 궁금하다며 진지하게 물었다.

3년 전 7월 어느 날, 퇴근을 하고 무심코 뉴스를 보는 데 노의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순간 너무 놀랬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이십대에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운동을 시작한 노의원의 정치활동을 보면서 신선함을 느꼈었다. 다음 날 신문을 읽다가 그의 유서를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두 차례에 걸쳐 4천만 원을 받은 내용, 후원금 처리를 하지 않은 후회와 그에 대한 스스로의 통렬한 책임이 유서로 남겨졌다. 수억도 수십억 도 아닌 몇천만 원의 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도의적 책임으로 대중의 신뢰와 촉망을 받던 인재가 홀연히 떠난 것이다. 그 돈보다 더 많은 금품, 더 큰 의혹이 있는 정치인도 얼굴을 들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일면식도 없고 지지하는 정당도 아니었지만, 며칠을 고심하다가 조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전철역 앞의 작은 빌딩에 있는 지역 당사는 초라했다. 문을 열고 조문을 왔다고 하니, 늙은 내 모습을 보고 정중하게 안내했다. 좁은 방에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영정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마스크를 꺼내쓰고 택시를 탔다. 우리는 전철역에서 손을 꼭 쥐어 악수를 했다. 이 난세에 건강한 것이 제일이라며 서로의 안녕을 빌고 헤어졌다. 주어진 삶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또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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