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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수수떡 / 이순남

by 부흐고비 2022. 5. 16.

둘째 손자 백일이 추석과 며칠을 두고 맞물려 들어있다. 추석에 내려오는 참에 백일을 우리 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며느리에게 제안을 했다. 번거롭게 서로 오고 가는 불편함도 줄이고, 할머니가 백일상을 차려준다고 하니 좋다고 한다.

손자와는 태어나서 한 번 보고는 두 번째 상봉이다. 보내온 사진으로는 자주 보았지만 직접 안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건강한 손자를 출산하고 백일 동안 키워낸 며느리에게도 고생했다는 의미를 담아 축하해주고 싶기도 하다. 내려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백일상차림 음식을 생각한다.

예로부터 백일을 맞이한 아기는 남아男兒와 여아女兒의 구분이 없이 무사히 자란 것을 대견하게 여기며 잔치를 벌여 이를 축하해주던 것이 우리의 풍습이다. 그 유래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이 기간 중에 유아의 사망률이 높아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와 상관없이 전래의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일잔치는 먼저 아침에 삼신상三神床을 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삼신상에는 미역국과 흰밥이 차려지며, 산모産母나 아기의 할머니는 삼신상 앞에 단정히 앉아 아기의 건강과 수명과 복을 빈다. 삼신은 가정 신앙의 하나로 주로 ‘삼신할매’로 불리는데. ‘삼신할매’는 아이를 점지해 주며, 태어난 아이가 크는 동안 탈 없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아기가 커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도 삼신의 배려는 절대적이다. 내가 아들을 출산했을 때도 시어머님께서는 삼칠일까지 매 칠일마다 미역국과 밥, 물 한 그릇으로 삼신상을 차려 놓고 두 손을 모아 손자가 무탈하기를 빌어주셨다.

백일상에는 삼색 나물과 제철 과일이 풍성하게 오르지만 백설기도 빠질 수 없다. 백일의 한자음이 흰 백과 같다 해서 백설기를 한다는 통설도 있지만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떡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준비해야 하는 것이 수수떡이다. 붉은색이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역할을 한다하여 꼭 백일상에 올린다.

수수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다. 어릴 적 내 고향 마을에도 수수밭이 있었다. 밭이라야 척박한 구릉이나 자투리 돌밭이었다. 논이나 밭에는 귀한 벼나 보리를 심고 두둑에는 콩이나 팥을 심었는데, 수수는 그마저도 차지하지 못하고 변방 중에 변방인 땅만 허락받았던 것이다. 그저 버려진 땅에 씨를 흩뿌리고 그 누구도 돌보기는커녕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수수는 씩씩하게 잘 컸다. 여름에는 옥수수와 키 자라기를 경쟁하고, 가을에는 벼와 이삭 패기 내기를 했다. 스스로 깨우친 학습법이라도 있었는지 수수는 그 어느 것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강인하고 영특한 수수가 아닐 수 없다.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나는 수수밭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린 나의 몸집을 품어줄 만큼 수수는 키가 컸다. 내가 뛰어들면 수수밭은 우수수우수수 바람결을 타며 술렁이다가도, 내가 숨을 죽이면 수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수수밭에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빛이 너무 맑아서 언뜻 한기를 느낄 때면 수수밭에도 단풍이 들었다.

노랗게 시루떡처럼 익어가는 벼와 마냥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와는 달리 수수의 단풍은 화려했다. 붉고 노랗고, 주황색과 자주색도 보였다. 뒷산의 단풍이 죄다 수수에 물든 것 같았다. 변방에서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자라난 수수의 화려한 변신이었다. 그리고 너도나도 가을걷이를 할 때 수수는 붉은색의 푸짐한 이삭을 남겼다. 수수의 이삭은 벼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했다.

희한하게도 수수에는 병이 없었다. 벼는 가물거나 홍수가 들면 이런저런 병에 시달렸다. 주인이 세심하게 보살펴도 병약한 아이처럼 비실거릴 때가 많았다. 옥수수도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막상 끝까지 여물지 못한 결실을 맺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수수는 그해 병충해가 많았건, 비가 많이 왔건 개의치 않았다. 디디고 선 땅에 자족하며 바람이 불면 머리를 흔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익어가면서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이고 감사했다. 자족과 감사, 아마도 수수의 철학이었을 것이다.

수수떡을 집에서 손수 만들기로 한다. 쉽게 주문해도 되지만 정성을 들이고 싶었다. 하루 저녁 불린 수수를 방앗간에 가서 빻아왔다. 연한 자주색의 가루를 손끝으로 만져보니 생기가 느껴진다. 이 가루로 수수떡을 해 먹으면 수수의 건강하고 씩씩한 기운이 생길 것 같다. 나는 함지박에 수수가루를 담고 떡을 만들 준비를 한다.

팥을 잘 씻어 물을 부어서 한번 끓인 후 삶은 물은 버리고 다시 물을 넉넉히 부어 끓인다. 손으로 문질렀을 때 부드럽게 으깨어지도록 푹 삶아 수분이 날아가는 정도로 덖어준 다음, 소금과 설탕을 넣어 준비해 놓는다. 고물로 쓸 요량이다. 흔히 수수보다는 팥이 더 중요한 곡물 취급을 받지만, 오늘만큼은 어디까지나 수수가 주연이고 팥은 조연에 불과하다.

수수가루에 약간의 소금을 넣어 익반죽을 한다. 잘 반죽된 덩어리에서 밤알만 하게 떼어서 손바닥에 놓고 동글동글하게 비손 하듯이 비빈다. 한 알 한 알 손으로 비빌 때마다 나쁜 기운을 쫓고 별 탈 없이 수수처럼 건강하게 손자가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정성을 담아 소복하게 만들어 놓는다. 빚어 놓은 수수경단을 끓는 물에 넣고 동동 떠오르면 건져서 준비해 놓은 팥고물을 묻힌다.

붉은 찰수수에다 붉은팥으로 만든 수수떡의 색이 고운 적색이다. 덕을 많이 베풀어 쌓는 것을 ‘적덕’이라 했다. 손주가 덕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수수에는 목숨 수壽자가 둘씩이나 들어간다. 자손이 번성하고 수명이 길기를 바라는 마음도 깃들어 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다 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이다.

백일상을 차린다. 흰밥에 미역국, 삼색나물, 조기 한 마리, 각종 과일을 놓고 가운데에 제일 중요한 수수떡을 올린다. 손주가 백일상 앞에서 활짝 웃을 때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사진 속에서 소복하게 쌓인 수수떡이 손주를 향한 이 할미의 마음인 양 붉디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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