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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한쪽에 일면식도 없는 두 사나이가 마주 섰다. 거리를 질주하면서 땀 흘리고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가 서린 표정이다. 지역적으로 북쪽인 강원도와 남쪽 제주를 대표한다. 마라톤이라는 매개체가 L과의 만남을 이어 줬다. 그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제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두 사람은 공직에 있으면서 앞만 보며 달렸다. 오십 고개를 넘고 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래서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시작한 운동이 마라톤이었다. 나이는 나 보다 두 살 위다. 2003년, 한참 마라톤이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는 시기였다. L은 강원도청 마라톤 동호회 ‘강마회’ 회장을 맡아 조직 활성화에 정성을 쏟고 있다. 나 또한 제주도청 마라톤 동호회 ‘도르미’를 그해 창단하여 삼 년간 회원 확보와 운영에 힘썼다.
내가 처음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 것은 2005년 춘천마라톤 국제대회였다. 창단된 지 얼마 안 된 우리는 타 동호회에 일정을 함께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동행하게 됐다. 전국에서 몰려든 마라톤 인파로 춘천 시내 숙소는 이미 예약이 끝난 뒤여서 가까운 경기도 가평에 마련했다.
무슨 일에 처음 도전할 때에는 설렘과 기대가 뒤섞여 마음이 복잡하다. 무르익은 가을, 단풍이 고운 빛으로 채색된 가평은 아름다운 풍광을 뽐낸다. 처음 출전하는 풀코스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대회 전날 밤은 뜬 눈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대회 당일, 이른 아침부터 춘천 시내로 몰려드는 차량으로 정체가 심하다. 경기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출발 총소리에 맞춰 첫 풀코스 도전 길에 힘찬 걸음이 시작됐다. 가을빛으로 물든 의암호, 삼악산을 따라 이어 나아가는 코스마다 오색빛깔 찬란한 단풍의 향연이다. 혼미한 정신과 함께 흥분된 내 마음도 붉게 물들었다.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달리미들이 복장도 각양각색이어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뤘다.
오직 완주해야 한다는 정신만이 무뎌져 가는 발걸음을 인도해 주었다. 한 무리가 앞서 지나간다. 눈앞에 길게 늘어서 언덕에 이르자, 포기할까? 걸을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내 마음은 안타까울 뿐이다. 가고자 하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제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던 첫 도전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무사히 완주했다. 이듬해에도 조용히 춘천을 다녀왔다.
세 번째 참가 때, 우리 일행보다 하루 전에 춘천에 도착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일정을 함께하면서 앞으로는 ‘형님과 아우’로 지낼 것을 약속하며 굳게 손을 잡았다. 그 후, 강원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년 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 회원들도 춘천마라톤에서 첫머리를 올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매년 참가한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의암호를 품에 안고 뛸 수 있는 그 코스는 늘 눈에 아른거린다. 다시 뛰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그쪽으로 끌어들인다.
강원도를 찾을 때마다 정성과 사랑으로 맞아주었다. 그런 마음이 모여 2008년에 양 동호회가 자매결연 맺었다. 그 후 서로의 지역을 오가며 대회에 참가하여 땀방울을 나누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토양 음식도 만남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지구 반대편에서 열리는 보스턴마라톤 대회는 마라토너라면 한 번쯤은 뛰고 싶은 무대다. 이년 전에 먼저 다녀왔던 그의 권유가 크게 마음을 움직여서 2009년에 나도 다녀왔다. 나에게는 꿈의 무대였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완주했던 기쁨은 평생에 최고의 추억이다.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골인 지점에 한참을 서 있었다. 파란 하늘에 흘러가던 하얀 구름도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그는 세계 6대 메이저대회는 물론이고, 그리스의 아테네마라톤대회 등을 포함해서 사십여 회 풀코스를 뛰었다. 길 위에 땀으로 새겨진 그만의 역사를 가슴 깊이 품고 있다. 그것이 삶에 자양분이 되어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내는 씨앗이 되고 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도 2015년 2월에 도쿄마라톤에서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퇴직 기념으로 그해 가을에 유럽을 대표하는 베를린 대회에도 다녀왔다.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며 삼 개 대륙을 대표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가능했고,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랑의 마음을 담은 지역 특산품을 주고받는다. 몇 해 전,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제주를 찾았다. 제주의 별미 ‘전복죽’을 대접했는데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온화한 그의 어머니를 보자 살아계셨으면 비슷했을 내 어머니가 그려져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여러 종목의 운동에 소질을 갖고 있다. 남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도 넓고, 모든 일에 열정이 넘친다. 아마도 그런 열정이 그를 젊게 해주는 비결인 것 같다. 바이러스는 가까운 사람에게 빨리 전파된다. 둘은 뛰는 데 있어 빠름과 느림이 문제가 아니다. 쉬엄쉬엄 가야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은근과 끈기를 갖고 쉼 없이 뛰면 된다. 숨 막히는 고통과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즐긴다면 그것으로 좋다.
두 사람은 몇 년 전에 퇴직했다. 딱딱한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서 흘린 땀방울이 서로의 우정을 돈돈히 해주는 윤활유가 되고 있다. 석양빛 고운 언덕길을 향해 그와 함께 달리는 발걸음마다 노을처럼 곱게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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