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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제일 맛있는 밥 / 김덕조

by 부흐고비 2022. 5. 16.

웬만한 부식 가게마다 있는, 콩나물은 내가 자주 찾는 찬거리 중에 하나다. 검은 보자기를 덮어 쓴 콩나물 동이가 옛 친구처럼 반갑다. 아주머니가 천을 들치면 잠자던 콩나물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가지런하게 선 모습이 수줍은 소녀 같다. 연둣빛 고개는 다소곳이 숙이고 뽀얀 목덜미에 상큼한 풋내를 머금었다. 하얀 다리가 반들반들 예쁘다. 매끈하게 잘 컸다.

마트에 가면 비닐봉지에 담긴 콩나물을 골라 살 수 있지만, 시루에서 갓 뽑아 담는 콩나물을 나는 자주 찾는다. 부식 집 아주머니의 손이 큰지, 아니면 단골이라 덤을 주어서인지 항상 넉넉할 정도로 담아준다.

콩나물의 아싹한 식감과 고소한 맛은 비빔밥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 중 하나다. 다른 나물과 구색을 갖출 때 콩나물이 제격이지만, 서민들의 밥반찬뿐 아니라 숙취 해소나 감기기가 있을 때도 뜨끈한 콩나물 국물 한 사발로 해결할 수 있다. 콩나물을 꽃에 비유하면 안개꽃과 닮았다. 뽀얀 모습이 그렇고, 혼자서도 아름답지만, 들러리로 예쁜 꽃을 더 빛나게 하는 폼이 그렇다.

콩나물을 즐겨 먹고 널리 애용했다는 기록은, 고려 고종 때 「향악구급방」에 대두황大豆黃이라 나와 있다. 그때 벌써 콩나물을 길러 먹었다고 한다. 두부와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이 제일 먼저 나물로 키워 먹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콩을 재배하기에 적합했다. 콩나물에는 비타민 C와 단백질이 많아 영양보충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콩으로 발효음식을 만들어 필요한 유익균을 섭취했다는 기록이다.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어릴 적, 우리 집 안방 윗목에 콩나물시루가 항시 있었다. 마루에서 어머니와 언니가 둥근 상을 펴고 콩나물 콩을 고른다.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에 나도 끼이려고 다가앉았지만, 지루해서 금방 일어선다. 콩나물이 안 될 조각난 콩이나, 이물질을 골라내고 눈이 또렷또렷한 것만 골라 담는다. 미지근한 물에 하룻밤 불리면 딴딴하던 파란 콩이 팽팽하게 불어나 볼록하게 움틀 눈이 보인다. 콩나물시루에 깨끗한 짚을 똬리처럼 틀어 깔고 그 위에 콩을 안친다. 넓은 사구에 삼발을 걸치고 콩나물시루에 고정한다. 검은 천으로 콩이 안 보이도록 어둡게 덮는다. 콩나물도 깜깜해야 잠을 자고, 잠자는 사이에 큰다고 했다.

사흘이 되면 꼬불꼬불 새싹이 돋아난다. 이때 물을 급하게 주면 아직 발을 못 내린 콩이 시루에서 둥둥 떠오른다. 콩 시루에서 물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루 주어야 한다. 콩나물 물 줄 때 어머니는 손으로 자근자근 누르는 것도 잊지 않지 않으셨다. 비좁지만 골고루 잘 커야지 혼자 잘난 체 드러눕지 말라는 당부였으리라. 한 이불 밑에 나란히 누운 우리 자매에게 티격태격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 같기도 했다.

예전에는 쌀이 귀해 밥 양을 늘리려고 시래기 밥도 하고 무밥도 했다는데, 우리 어머니는 콩나물밥을 더 자주 했다. 쌀가게를 한 어머니는 얼기미 밑으로 흘러내린 싸라기를 섞어 밥을 했다. 통통하고 윤기 나는 좋은 쌀은 팔고, 싸라기와 보리쌀을 섞고 콩나물을 듬뿍 넣어 밥을 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해준 콩나물은 언제나 꿀맛이었다.

안방 윗목에서 검은 보자기를 이불처럼 덮고, 우리와 같이 자고 같이 깨어나는 콩나물은 우리 식구가 먹을 양식이었다. 콩나물이 고봉밥처럼 검은 보자기를 불룩하게 밀어 올리면, 어머니가 콩나물밥 하는 날이다. 언니가 콩나물을 씻고 어머니가 양념장을 만들고, 콩나물 익는 고소한 냄새가 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린다.

넓은 양푼에 갓 지은 콩나물밥을 퍼 담는다. 뜨거운 콩나물밥에 고추장과 고소한 참기름을 똑 떨어뜨린다. 한 김을 날린 콩나물밥에 어머니는 나물 무치듯 맨손으로 골고루 버무린다. 기다리는 우리를 향해 ‘자, 다 됐다’는 어머니의 그 말에 세 자매는 뒤질세라 와 달려들었다. 달콤한 콩나물에 맵싸한 고추장과 고소한 참기름의 향에 어머니의 손맛을 더 보탰으니, 세상에서 이보다 맛있는 밥은 없었다. 숟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양푼이 바닥이 드러난다. 숟가락이 느려질 즈음에야 어머니 몫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자식들 배불리 먹이려고 당신은 일찌감치 숟가락을 놓으셨다. 콩나물을 많이 넣으면 밥이 더 많아지겠지만, 콩나물이 자라는 속도보다 우리가 먹어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배불리 먹어도 또 먹고 싶었던 그때, 더디게 자라는 콩나물은 어머니를 애태우게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새벽녘에 어머니가 콩나물에 조용조용 물을 준다. 콩나물시루에서 졸졸졸 하는 소리는 콩나물이 내는 오줌발 소리다. 그 소리에 나도 오줌이 마려웠다.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적당한 장소를 찾았는지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앉으려는데, 바로 앞에 파란 잎 사이로 작은 보라색 제비꽃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급해도 제비꽃에 소변을 볼 수는 없다.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속옷에 오줌을 지렸다. 아이참, 발을 동동하다가 잠이 깼다. 콩나물시루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오줌발 소리를 똑똑 내고 있었다. 부리나케 마루로 달려 나갔던 그 순간이 기억나 혼자 쿡쿡 웃는다.

콩나물은 물과 친하지만, 물을 가두지는 않는다. 주는 대로 다 흘러버리는 줄 알았는데, 콩나물은 키를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콩나물에 물 주던 모습이 선하다. 얼른 키워서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생각하는지 흐뭇한 표정이셨다. 노란 싹에서 콩나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기다림과 인내를 가르쳐 준 어머니.

나는 콩나물 비빔밥이 먹고 싶을 때, 콩나물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다른 재료를 더 보탠다. 표고버섯 불린 것도 썰어 넣고 싱싱한 생국도 넣는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귀한 재료를 더 넣었지만, 옛날 그 맛은 아니었다. 둥근 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부딪치며 서로 더 먹겠다고 쟁탈전을 벌이던, 미처 씹을 새도 없이 꿀떡꿀떡 넘어가던, 그 비빔밥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담뿍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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