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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경후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20.

김경후 시인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 독일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열두 겹의 자정』,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가 있다.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손 없는 날 / 김경후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억을 옮긴다,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 벽 같은 짐들 앞, 짐의 주인이 말한다, 나뭇잎 그려진 상자 못 봤어요? 기억 안 나요? 안 나요,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오늘 사내는 손이 없다, 힘이 없다, 불탄 낙엽 더미처럼, 빈방 그늘에 누웠다, 귀신은 뭐 하나, 나 같은 거 안 잡아가고,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사내는 짐이 아닌 어리광을 부릴 힘도, 없다,// 기억난다, 벽 같은 짐들, 그 짐의 주인, 기억나지 않는다, 손 없는 날, 기억난다,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툭 / 김경후
그건 젖은 나무 문이 주저앉을 때/ 그건 가슴뼈를 움츠릴 때/ 그건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소리/ 툭/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그래서 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마음의 고무줄 삭아 끊어질 때/ 나는 소리/ 툭// 툭/ 밤의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 그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는 소리/ 말이 안 되는 소리/ 서로 돌아서는 소리/ 툭/ 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되는 소리// 툭/ 내가 나를 뚫어지게 보려고/ 진흙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젖지 않은 나무 문은 내지 못할 소리/ 툭//

책 벽 / 김경후
바람 몰려드는 편에 책을 쌓는다// 바람 부는 곳은 비어 있는 곳/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여기, 북편// 욱신욱신 쓸데없이 손목이 나갔다/ 어디로?// 할머니는 가묘 자리를 보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도서관은 열지 않는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는 넓다/ 그 사이// 바람 부는 곳은 비어 있는 곳/ 북편에는 카프카, 비어 있는 곳엔 에코 다음에 에코// 손을 힘껏 뻗는다/ 성장판은 닫혔는데 닿는다// 비어 있는 곳/ 북편 책 벽// 벽에 기댄 책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지/ 아무도 읽지 않지// 거기서 한 걸음 더 거기/ 나는 등뼈를 기댄다/ 바람 부는 곳은 비어 있는 곳//

속수무책 / 김경후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 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서예 시간 / 김경후
추락을 기억하는 깃털로 우리는 추락보다 긴 노래를 부른다/ 슬픔의 획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문자 / 김경후
다음 생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제라늄 / 김경후
소식 없이/ 수식만 늘었습니다// 불 꺼진 상점가/ 네가 가리켰던 너무 많은 꽃들/ 제라늄이야// 저것도?/ 아니 저건 아니지// 씨앗을 심었지만/ 붉은 꽃잎 한 장 없이/ 죽었습니다// 바람도 없는 거리/ 가로등 켰다 껐다 켰다 껐다// 나는 방향 없이/ 달리는 속도를 높입니다// 너 지금 어디야?/ 잘 모르겠어/ 아 죄송합니다, 전화를 잘못 걸었군요// 흑두루미들 흘러가는 밤// 소식 없이/ 수신 없이// 내가 가리키는 검은 어둠/ 사라지는 것들의 방향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밤//

사각지대 / 김경후
있습니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없습니다 있었습니까// 빗자루 끝으로/ 귀퉁이 먼지 끌어낸다/ 햇빛 멈추는 순간/ 먼지들/ 빗자루 성단 별가루처럼 떠오른다// 창밖 자두나무/ 꽃피기 전/ 몇 개의 하루가 있었을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없습니까/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한밤 어둠 속/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검은 하루가 고양이처럼 지나간다/ 오늘의 냄새//

세이렌의 바다 / 김경후
시신들만 그의 것/ 상연이 끝나고/ 폭우와 파도 먹구름은 다시 빛과 고요의 것/ 내 노래는 누가 듣지/ 듣고 죽지 마/ 시간의 시신들만 그의 것// 바다는 물거품보다 훨씬 많은데/ 물거품보다 노래는 훨씬 많은데// 텅 빈 객석/ 먼지 쌓은 무대만이 노래의 것// 노래를 들으며 푸른 미역에 감기는 노래하는 입술//

잉어가죽구두 / 김경후
너덜대는 붉은 가슴지느러미/ 수억 년 동안 끝나지 않는/ 오늘이란 비늘/ 떨어뜨리는/ 노을/ 아래/ 기우뚱/ 여자는 한쪽 발을 벗은 채/ 깨진 보도블록 틈에 박힌 구두굽을 잡고 쪼그려 있다//

동물원 데이트 / 김경후

파충류관엔/ 자기 머리보다 큰 짐승을 삼키는 뱀이 있다/ 비늘같이 어깨를 붙이고 손을 맞잡은 너와 내가 있다// 유리판 너머/ 울컥 청록빛 목 비늘 속으로/ 울컥 쥐 몸뚱이가 다 드러난다/ 징그럽지?/ 뱀들의 복도를 서성이는 사람들/ 비늘의 밤 너머/ 우리는 서로의 목구멍을 타들어가는 서로를 알아본다// 자정마다 울리는 뼈의 종소리/ 머릿속으로 납물이 부어진다/ 마르지 않는 납물에 자신의 지문을 찍어두는 연인들/ 징그럽지?/ 응, 징그러워/ 우리는 서로 꼬옥 껴안는다/ 토요일 동물원엔/ 납 비늘보다 단단한 사랑이 있다//

불새처럼 / 김경후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미의 해일도 일으켜보자, 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과 소음, 그런 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건 더더욱 말고,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를 쓰고 싶다,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죽고 싶다, 아주 자주, 아주 많이, 보석들 대신 비석들을 갖고 싶다, 비석들도 죽이고 죽고 싶다, 비석들 위로, 너무 많이 죽은 시들을 밤하늘처럼, 피와 황금의 사막처럼 펼치자, 나는 많이 죽고 싶다, 잿가루보다 무수히//

붉은가슴기러기 / 김경후
새들은 한 번 날았던 하늘을 버린다/ 깃털이 떨어진다/ 나는 오늘처럼 생긴 어제를 껴입고/ 지난겨울로 만든 펜을 잡는다// 새들은 한 번 날았던 하늘을 버린다/ 나는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하늘을 바라본다// 어제 위에 어제를 덧입고/ 지난겨울을 뚝뚝 분질러가며 펜을 깎는다/ 다시 지난겨울/ 또 다시 지난겨울// 날아간 하늘을 버리지 않는 새는/ 날아본 적 없는 새일 뿐/ 바닥에 꼬꾸라진 새일 뿐// 새들은 떨어진 깃털을 줍지 않는다/ 나는 지난겨울의 새를 그린다/ 새였던 새를/ 새가 아닌 새를 그린다// 떨어진 깃털들을 주우며 나는/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 하늘을 버리며 붉은가슴기러기들 멀어져간다//

넙치 / 김경후

어둑한 보도블록, 울룩불룩, 넙치 하나, 누워 있다. 그것은 진흙색 바닥보다 넓적하게, 깊게, 바닥의 바닥이 되고 있는 중, 가끔, 이게 아냐, 울컥, 술 냄새 게운다. 뒤척인다. 하지만 다시, 눌어붙어, 바닥이 된다. 게슴츠레, 왼쪽 눈, 위로, 울컥, 흙탕빛 노을 지나가고, 비닐봉지들, 키득대는 웃음, 지나가고, 슬리퍼 끄는 소리, 지날 때마다, 울컥. 그래. 나. 바닥이라고, 소리친다. 그것은 더욱 격정적으로 바닥이 되기로 맹세한다, 끌로도 끝으로도 떼어 낼 수 없는 바닥, 더 바닥, 더, 더 바닥이 되기로, 울컥,// 지금 넙치가 나올 철인 가, 뭐, 그렇지. 이 바닥이나, 저 바닥이나, 다 그렇지, 사내들, 바닥 끝 지나 골목 끝, 횟집 문을 연다.//

토르소 / 김경후
텅 빈 카페 선반 위/ 토르소/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나절/ 기다리지 않기로 한 뒤/ 또 한나절/ 허벅지와 미소 울부짖음과 발바닥/ 있어서 안 되는 건 이미 모두/ 없다/ 더이상 잃을 것도 없다/ 그것뿐/ 벌건 할로겐 램프 아래/ 벌거벗은/ 토르소/ 잊기의/ 기억//


입술 / 김경후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검은 수의 갈아입는/ 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수국 자국 / 김경후
공원에서 다시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 공원에 갔다/ 밥하러 들어가는 사람 밥 먹으러 들어가는 아이 먹어도 다시 배고플/ 사람들/ 난 저물녘 수국 사진을 찍는다/ 왜 여기 다시 왔소, 묻지 않아도, 거기 누구요, 들리지 않아도/ 청보라 수많은 꽃잎 하나는 깊은 귀였고 하나는 구름이었고/ 기쁨이었고 그늘이었고 더 많은 눈빛이었지/ 수국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작년 수국이다/ 곧 닫을 매점 문을 물걸레질하는 여자/ 봄날을 그림자 속에 숨겨본다 다시 꺼낼 게 없다, 없을까/ 바스러진 밤을 떠돌던 고양이/ 벤치 아래로 돌아간다//

야광별 / 김경후
별이 빛나지 않는 밤/ 별이 빛나는 방을 만든다/ 아득한 천장과 어둑한 벽 구석구석/ 문방구에서 사온 아광별들을 붙인다/ 이 별은 악몽을 위해/ 저 별은 불면을 위해/ 발리 별이 빛나는 밤을 만들자// 하지만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 별 가득한 방/ 별도 방도 잠 속에서/ 어둠만 기다랗게 뻗어나갈 뿐// 야광별 설명서:/ 이 제품은 충분히 빛을 받지 않으면 빛을 내지 못 합니다/ 130억 광년 떨어진 별의 누군가도/ 빛난 적 없는 지구와/ 빛난 적 없는 지구 위 나를 벽에 붙이고/ 영원히 기다리고 있을까 밤이 빛나길/ 빙하기 별똥별은 빙산을 가르고 떨어졌다/ 그 별은 지금 어느 어둠이 되었는가// 깜깜한 야광별이 박쥐처럼 모여든/ 깜깜한 별밤/ 두 눈을 부릎뜨고 벌겋게 빛을 찾아 헤매는 밤//

해바라기 / 김경후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가 왔다, 나는 그 암캐를 알지 못하지만, 그 정오부터 알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흑점의 온도로 울부짖는 암캐, 그 울부짖음 집어삼키는, 암캐의 뱃속에, 박히는 칼, 나는 요리는 모르지만, 뱃속보다 깊은 어둠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칼끝에서 첫 핏방울이 떨어질 때부터, 시퍼렇게 목줄기가 찢어질 때부터, 그 목줄기 울음 따라 핏줄이 터질 때부터, 나는 마음에 없는 말과, 말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내 목줄기를 향해 달려오는 톱니바퀴, 돌고 도는 톱니바퀴의 울음도 울 줄 알았다, 암캐처럼, 암캐가 없어도, 땡볕에, 나는 그 암캐와 함께 끌려갈 줄 알았다, 암캐처럼, 동네 냇가에 아주 오랫동안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나는 그 암캐를 알지 못하지만, 그날부터,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가 됐다, 그날 저녁, 부엌 구석에서 나는 쩝쩝거리며 고기를 먹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뱃가죽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 수 있었다//

먹감나무 옷장 / 김경후
거대한 벼루 같은 밤/ 먼 옛날을 닫는다/ 곧 돌아올 오늘마다 열었다 닫는다/ 감나무 단 냄새를 연다/ 먹 냄새를 닫는다/ 삐거덕거리던 새벽 여섯 시들을 연다/ 늙은 좀벌레들이 하얗게 죽은 밤 열한 시들을 닫는다/ 곰팡이 핀 북쪽 벽을/ 비어 있는 나프탈렌 주머니를/ 닫는다 열고 닫는다/ 먹감나무 가지에 걸렸던 바람의 묵음들/ 구멍 난 바지들/ 닫고 닫는다/ 땔감이 되고 잿가루가 될 때까지/ 연다 닫는다 삐그덕거린다/ 집을 떠받들 뿌리 내릴 때까지 닫아버리기 위해/ 연다/ 빈 옷걸이 텅 빈 고요 속/ 거꾸로 매달려 몸을 떠는 집유령거미/ 검은 집 다락 속 먼 이야기에 닿는다//

박쥐난이 있는 방 / 김경후
텅 빈 녹음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다// 박쥐난이 침묵에 들러붙어 산다// 이것밖에 없는 방에선/ 이것만이 생존법// 침묵에/ 물 줄 시간// 눈 감는 소리와 굳어가는 혀조차/ 조심할 것// 잠자코/ 까맣게 시든 채 돋아나는 이파리// 침묵과 죽음 사이/ 그 마지막 모퉁이에 박쥐난이 붙어 있다// 텅 빈 녹음테이프가 돌고 있다//

기막힌 밤 / 김경후
하수구가 막혔다, 염천교가 막혔다, 펄펄 끓는, 열대야, 원고가, 자금줄이 막혔다, 들끓는다, 밥알 라면 찌꺼기, 여기저기, 벌레, 오물, 들끓는다, 파봤자, 끙끙대봤자다, 경적, 경고 메일, 사이렌, 그래봤자다, 다시 해봤자다, 막혔다, 시커먼 구멍 속엔, 더 깊은 구멍뿐, 뚜껑, 없지, 틈, 우회로, 그런 거, 없지, 함정에 빠진, 환장하는 한밤, 끓고, 파고, 부글대며 막히는 것, 이래도 저래도, 하수구앞, 백지 앞이고, 꽉 막힌, 아스팔트 위다, 펄펄 끓는, 대야 속 생쥐 같은, 열대야,//

등이 되는 밤 / 김경후
너의 등에서 얼어붙은 창문 냄새가 났을 때/ 나는 너의 등이 되었지/ 네가 뒤돌아보지 않는 등/ 불 꺼진 가로등/ 그칠까 눈이 그칠까?// 너의 등에서 짓밟힌 눈사람 냄새가 났을 때/ 나는 너의 등뼈가 되었지/ 붉은 네 심장을 감싸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움츠린 등뼈/ 그건 세상의 모든 음표로 엮은 너와 나의 새장/ 하지만 새가 없는 새장/ 눈이 그칠까 눈이?// 너의 등 냄새가 나의 내일보다 달콤했을 때/ 내가 너의 등뼈가 되었을 때/ 눈앞은 오직 눈만이 흩날리는 밤/ 다친 짐승의 피입김 피어오르는 동굴 같은/ 지금 너의 등엔 눈이 그쳤을까//

 

봄밤 / 김경후
홀로 배드민턴 채를 휘두르는 밤의 골목, 툭, 어둠 한 줌, 치고, 툭, 다시 친다, 전봇대를 마주 보고, 어둠보다 더 컴컴한 허공의 셔틀콕, 툭, 목이 꺾인 듯, 웅크린 가슴처럼, 떨어진다, 전봇대가 어둠을 되받아친다, 콕이 툭, 떨어져도, 다시 채를 휘두른다, 아, 연습 중입니다, 혼잣말할 때, 툭, 문득 떠오르는, 식탁의 검은 김밥 반 줄, 이런, 형광등, 켜두고 나왔네, 그래도, 아무 데서도 꺼지지 않는 어둠들, 겨울은 반 남았지, 또 올 거니, 툭, 바닥에 떨어지는 반달빛 벚꽃잎, 나는 밑바닥도 없는 것 같다,//

아홉번째 나무 / 김경후
우뚝 선 느티나무 밑동에/ 궁둥이를 비벼댔다/ 머리통과 등허리도/ 문질러댔다 첫별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살 속에 박히는 가시들/ 나무껍질에 스며드는 핏물/ 돌개바람이 불고/ 이마 한가운데 흐르던 핏줄기/ 땅바닥에 뚝, 뚝/ 떨어진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나무를/ 아니 내 뼈들을 흔들자/ 두 다리 힘껏 벌리고/ 태양을 향해 고함을 지르자/ 한 번 두 번 세 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바람조차 멈춰 버린다/ 검은 싹을 틔우고 있는 느티나무,/ 나는 혼자/ 너덜거리는 살점들만 붙들고/ 산을 내려간다//

외줄 곡예사 / 김경후
바닥은 허공/ 허공도 허공/ 외줄 위로/ 외발자전거가 달린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외발자전거가 달린다/ 끝나지 않는/ 외줄 위에/ 끝나지 않는 허공/ 달리는 제로//

항아리 / 김경후
옥상에 빨래를 넌다/ 빨래란 게 별건가 지나간 것들이지/ 지나간 여름 지나간 셔츠 얼룩진 이불/ 지나간 일들 지나간 사람 얼룩진 이름// 빨랫줄에 걸린/ 거두지 못한 빨래들/ 늦가을 밤바람에 기우뚱// 옥상 센서등 켜진다/ 느닷없이 꺼졌다 켜진다/ 항아리치마 환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 속 빨간 금붕어 두 마리라도 있나/ 바람물결 일으키며 헤엄이라도 치려나// 센서등 켜졌다 꺼진다/ 별건가 다시 빨래를 넌다/ 옥상 한구석 빈 항아리//

목각 / 김경후
칼이 베어낸 자리가 사내의 모습// 불광천 차가운 안개 몰려들었다 사라지는/ 아침부터 아침까지/ 썩은 벤치 위에 놓인 썩은 벤치 같은 사내// 그는 움직일 수 없다/ 는 척,/ 톱밥 같은 눈길 흩날렸을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는 척,/ 아무도 그를 보지 않는다/ 는 척,// 칼이 도려낸 곳이 사내가 살아가는 곳/ 칼이 지나간 길이 사내가 살아가는 길// 칼자국 같은 북두조차/ 찾아오지 않는 밤 칠흑 목각 같은 사내//

바늘 / 김경후
텅 빈 구멍을/ 구멍이 다시 뚫고 가는 게/ 바늘이다// 안녕, 허공으로 이어진 실전화기 속 나의 말이 닿기 전에,/ 안녕, 우리는 등을 돌린다,/ 안녕, 이 말이 네게 닿기를, 기도가 닿기 전에/ 강가에는 갈기갈기 찌어진 검은 숨결들, 바람들,/ 직녀의 실로 저 허공 견우좌까지 양탄자를 짜올려도/ 이제 우리는 만나지 않는다, 안녕,// 허공에 닿는 첫 번째 눈송이/ 녹아 사라지는 소리/ 바늘의 심장소리// 텅 빈 구멍을/ 구멍이 다시 뚫고 가는 게/ 바늘이다// 밤바람이 뼈바늘 구멍을 지나가고 있다//

팔월 / 김경후
뙤약볕 밑으로/ 울부짖는 개처럼 울부짖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난 저 이빨들에 물리지 않을 거야/ 모두가 굳게 가슴에 새기는 울부짖는 시간// 그래요 아무도 다치거나 피 흘리지 않을 겁니다/ 모두에게 부드럽게 들리는 울부짖음// 말라붙은 팔월의 핏자국 위로/ 쇠사슬처럼 개미떼 지나간다// 아스팔트가 부글대며 신발밑창을 핥으며 지나간다/ 아스팔트를 악다물고 달리던 트럭// 타이어가 터진다 터진 채 부서진다 그리고 그렇게/ 끓어오르며 지나간다// 지나간다 텅 빈 목줄 위로/ 지나간다 뙤약볕처럼 지글거리는 보름달// 울부짖는 개처럼 울부짖는 시간들/ 석류나무 둥치에 피를 문지르고 지나가고 있다//

침대 / 김경후
십자창/ 붉은 십자그림자 아래/ 텅 빈 침대/ 무덤속보다 고요하지/ 나와 침대는 얼마나 닮았는지/ 햇살 비추면/ 더 잘 보이는/ 얼룩과 구김들/ 뻣뻣한 시체를 넣는/ 구겨진 수의 같은 내 표정과/ 얼마나 닮았는지// 죽은 것을 잃지 않지/ 잃은 것을 잊지 않지/ 그런 거// 텅 빈 것들로 가득 차/ 이렇게/ 십자창/ 붉은 십자그림자 아래/ 우린/ 박혀 있지//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 김경후
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리고 내 말은 너의 입으로 간다// 이빨에 말 몇 점 찢겨 걸린 채/ 입은 급하게 닫힌다/ 습하고 어두운 속을 지난 말들,/ 목구멍에 기대 무성영화를 보고 있다/ 가끔 네 입이 열리면 나의 말 혹은 그 부스러기/ 스크린에 비치기도 하지만/ 식도에서 끈끈한 양상추를 건져/ 너덜대는 모습을 가릴 수 있다// 미끄러져 어딘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위장까지 내려가면 누구나 그렇게 되니까/ 머리 없이 끊, 어, 진, 단음절/ 말의 살점들 위로 다시 영사기가 돌아간다/ 무언가 보이겠지/ 소리 없이/ 네 말은 이빨 밖에 있고/ 내 말은 없다/ 하지만 네 속에 이미/ 내 말의 뼈 녹아 있다//

콩 맛 / 김경후
가장 동그랗고/ 가장 까만콩으로/ 콩!/ 아빠 엄마 잔소리에/ 세상 모든 잔소리에/ 콩!/ 마침표 찍고 싶다./ 아, 고소해.//

칼 / 김경후
여자는 하루 종일 아궁이에 숨어/ 도마에 내리꽂힌 식칼을 쳐다본다./ 가끔은 칼날을 갈다가/ 도마를 베고 잠들기도 하지만/ 발소리가 들리면 다시 검댕이 속에 몸을 파묻는다./ 불 피워본 적 없는 아궁이에 매일/ 장작을 가져오고 굴뚝청소를 하는 마을 사람들/ 옆집 할멈은 여자를 위해 하얀 옷을 뜨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도 칼을 치우지 않는다./ 모두 잠든 한밤중/ 여자는 밖으로 나와/ 처녀 별자리를 향해 힘껏 칼을 던진다./ 별자리의 배 부분에 칼이 꽂히자/ 온 마을에 쏟아지는 멍울멍울한 핏덩어리/ 피를 뒤집어쓴 채 여자는 저수지로 향한다./ 암적색이 번지고 있는 살얼음들/ 새벽엔 다 얼겠구나/ 물무늬 하나 생기지 않게 가만히/ 그녀가 몸을 담근다.//

혀 / 김경후
청기 올려, 백기 올려, 청기 올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백기 내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청기 내려, 가만히 있 어, 청기 올려, 가만히 있어, 백기 올려, 가만히 있어,// 광장에 깃발들/ 휘날린다 펄럭인다 내지른다 고함들/ 광장에 혓바닥들// 구부정하게 여자는/ 무교동 뒷골목 사무실로 돌아간다/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는 깃발을 내놓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혀를 꾸욱 말아 넣고// 거기 어디/ 문 닫힌 게임방, 고장 난 게임기에선/ 백기 들어, 백기를 들라니까//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는 깃발처럼 여자는 혀를 꾸욱 말아/ 삼킨다//

뒤 / 김경후
한밤의 택시 안, 어디쯤일까, 핸드폰을 본다, 우주정거장이 방금 내 머리 위를 지나고 있다. 이건 너무 큰 그림, 어디지, 거기가 바로 여기네, 이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의 그림자 사진, 핸드폰을 본다, 이번엔 너무 지난 그림, 그는 그늘, 여기는, 신호 없음, 연결 상태를 확인해주세요, 빨간 신호마다 과속으로 지나친 여기, 어디지,// 해 질 녘마다, 거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나는 그의 그림자를 담요처럼 끌고 갔다. 끌려 갔다, 오늘도 어제처럼, 저기를 여기처럼, 그늘을 그림처럼, 저 멀리 그네처럼,// 우주정거장은 밤의 지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 그는 그늘, 다시, 우주정거장은 돌고, 어떤 사랑이 지구에 있었는지, 보이지않고,// 한밤의 택시, 내린 후, 여기일까, 뒤돌아본다.//

겹 / 김경후
등을 마주 댄 두줄의 척추/ 우린 나눌 수 없어/ 참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태양이 단 하나의 태양을/ 덮을 때까지/ 우린 서로의 개기월식일 뿐// 올봄 겹벚꽃/ 한번도 피지 않고 진다//

금 / 김경후
금 간 것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한밤 버스 정류소/ 우리가 기댄/ 갈라진 유리 안내판처럼/ 이미 금 간 것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서로 가슴을 긋고 베어도/ 금을 버티고/ 금을 넘지 않는다/ 무너지지/ 그래/ 부서져 쓰러지지/ 그래/ 내가 갈 노선과 네가 기다린 시간/ 내가 도착할 수 없는 마음과/ 네게 되돌아오는 마음 사이/ 굵은 금과 깊은 금 사이/ 무너진다고/ 잃었다고 헤어지는 건 아냐/ 금 간 사이가 자랄 뿐/ 황금 덩어리처럼 금을 키우고 금을 지킬 뿐/ 금 간 것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때 / 김경후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가을 초승달 아래/ 가지를 말린다/ 십자로 빨랫줄에 널린 흰 풋달의 냄새/ 지금이 어느 땐데/ 나물 한 봉지 얼른 사 오면 되는데/ 적보랏빛 밤/ 이때란다/ 지금/ 혓바늘 같은 초승달에 아린 맛 도는 때//

단풍 / 김경후
눈 먼 새들/ 열린다/ 날개 묶여/ 열린다/ 핏빛으로 떨어진다 열린 채/ 얼어붙은 채/ 엄마, 떨어지면 날아가?/ 가을 하늘은 멀고 높다/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열리고/ 닫힌다/ 내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날아갈 듯 핏빛 눈빛들//

단풍잎 책갈피 / 김경후
세계명작고전 272쪽과 273쪽 사이/ 지난 계절에 쓸려 나가거나/ 몸을 불사르지 못한 미라/ 낙엽 아닌 낙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자//

첫눈 / 김경후
이미 내린 첫눈이/ 지금 처음 내린다// 내린 적 없는 눈이/ 아직 내린다// 불지도 않은 바람이/ 있지도 않은 소용돌이무늬를/ 기억하고// 이미 사라진 바람은/ 있지도 않은 나의 날개를/ 찢어/ 입 속으로/ 흩뿌린다/ 눈,/ 눈,/ 눈, 눈,/ 눈,/ 눈,/ 눈,/ 눈,/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내릴 수 없는/ 마지막 눈이 이제야 끝나지 않는다//

눈 / 김경후
너의 등에서 얼어붙은 창문 냄새가 났을 때/ 나는 너의 등이 되었지/ 네가 뒤돌아보지 않는 등 만질 수 없는 등/ 길바닥에 쓰러진 불 꺼진 가로등/ 그칠까 눈이 그칠까 솟구칠까 눈이?// 너의 등에서 짓밟힌 눈사람 냄새가 났을 때/ 나는 너의 등뼈가 되었지/ 어둠 속에선 딱딱하지만/ 가장 붉은 네 심장을 감싸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움츠린 등뼈// 그건 세상의 모든 음표로 엮은 너와 나의 새장/ 하지만 세상 어떤 새도 없는 새장/ 눈이 내릴까 눈이 그칠까 눈이?// 너의 등에서 나는 냄새가 나의 내일보다 달콤했을 때/ 내가 너의 등뼈가 되었을 때/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축축하고 진득한 눈 내리는 밤/ 다친 짐승의 피입김만 피어오르는 동굴/ 지금 너의 등엔 눈이 그쳤을까//

잘 듣는 약 / 김경후
이번 약은 잘 들을 겁니다/ 의사 말을 듣고/ 믿고 싶은 그 말을 믿고 나는 묻는다// 얼마나 잘 듣지 않았나/ 이불 속에 드러누운 나의 마음은/ 컴컴한 창밖 얼어붙은 얼굴을 들이미는 나의 고함조차/ 듣지 않았지 열어주지 않았지// 내가 있어도 나는 빈 방/ 없어도 나는 나의 빈 방// 누구를 기다리는가/ 골목 구석에 쑤서박은 내 밤들/ 털 빠진 등허리를 말고 자던 내가 버린 고양이들/ 듣지 않았지 나는// 내가 지내온 빈 밤의 소리들/ 내가 지워버린 빈 밤의 소리들// 듣지 않고 딛고 가야 할 소리만을 믿었던 나는/ 나는 텅텅 빈 소리/ 그것들을 잘 다지고 잘 부수지만 잘 듣지는 않는 병// 앞으로도 나는 듣지 않을/ 빈 방의 나의 소리들/ 이 약은 잘 듣고 있겠지//

잠드는 법을 배우다 / 김경후
길고양이를 길들이지 말 것/ 그 길이 아닙니다// 곧 길을 파헤치러 굴착기가 옵니다/ 뻗은 아스팔트보다 왜 부서진 돌들이 더/ 왜 빛납니까// 통유리창 들고 땡볕을 헤매는 길/ 그 길이 아닙니다/ 눈에 비친 나보다 크고 깊은 길을 보는 나를/ 유리창 속에서 보는 나를 낑낑/ 헤맵닌다 그 길이 아닐걸요// 죽은 새들의 노래로 만든/ 길/ 죽은 새를 물고 가는 고양이들/ 죽은 길// 그 길을 잠으로 만드는 마법사의 유리창을/ 끼우러 갑니다/ 이 길이 아닌데 부서진 길들만 빛납니다//

북 치는 여자 / 김경후
너를 볼 수 없는 밤을 새고/ 너를 볼 수 없는 밤이 온다/ 오늘은 어둠도 돌아올 수 없는 밤/ 너의 길고 푸른 속눈썹으로 만든 붓,/ 그 붓으로 나는 쓴다// 북, 치, 는, 여, 자,/ 나의 기관차, 너의 검게 탄 팔뚝 대신/ 이제 빈 병 같은 봄이 온다/ 벼락을 가르고 용의 피냄새 풍기는 북소리/ 그 대신 낮잠만 온다/ 북 치는 여자// 한밤의 옥상/ 타들어가는 담뱃불로 너는 북가죽을 뚫었다/ 우산을 쓸지 노랠 부를지 망설이는 나에게/ 해 질 때마다 북을 쳐달라는 나에게/ 북을 건넸다// 오늘은 어둠조차 돌아올 수 없는 밤/ 네가 마지막으로 두드렸을 북한강 물 위에/ 백지 같은/ 달의 유골함 같은 너의 북 위에// 나는 쓴다/ 너를 두드린다//

휴지 / 김경후
뽑는다, 공중화장실 한가운데, 여자, 휴지를 뽑는다, 또 뽑는다, 거울속, 눈이 마주쳐도, 뒤에서 숙덕거려도, 쉬지 않고, 휴지를, 뽑는다, 목구멍 박힌, 가시처럼, 툭툭, 턱턱, 뽑고, 또 뽑는다,// 그래, 새장 속 앵무새, 밤마다, 울지 않고 뽑았지, 자기 목털, 가슴털, 뽑고 또 뽑았지, 바다색 날개깃털, 자기 부리로 뽑아냈지, 차갑게 빛나는 창살, 핏방울 맺힌 벌건 알몸만 남을 때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않기를, 그렇게, 뽑았지, 텅, 빈, 새장,// 텅 비었다, 여자의 눈동자, 벽에 붙은 머리통만 한 휴지박스, 공중화장실 바닥, 구정물 젖은, 흩어진, 여자의 눈빛 같은, 휴지들, 밟힌다, 밟히고, 또 밟힌다,//

먹먹 / 김경후
그가 죽고 그을음이 남는다/ 흑자색 그의 그을음들로 먹을 만든다// 으아리 꽃, 그을음의 먹/ 그믐의 먹/ 울럭거리는 우리들 그림자의 먹// 먹먹한 먹/ 죽음보다 단단한/ 그가 죽고 그을음 먹을 만든다// 내 뼈에 그를 긋는다/ 으아리 꽃 그림자들을 새긴다/ 우리의 흑자색 뼈가 다시 먹이될 때까지// 그을음으로 밤마다 그를 긋는다/ 그것이 백지다//

그믐 / 김경후
​나를 꽝! 닫고 나가는 너의 소리에/ 잠을 깬다/ 깨어날수록 난 어두워진다/ 기우뚱댄다//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 눈을 감고 삼킨다// 오래 머물렀던 너의 이름에서/ 개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온통 버둥거린 자국들/ 부러져 박힌 비늘과 지느러미들// 나를 꽝!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내게 묻혀 있던 악몽의 알들이 깨어난다/ 깨어날수록 난 잠든다/ 컴컴 해진다//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내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엔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 뿐//

안개 공황 / 김경후
벙어리 늑대가 안개를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안개 속이거나 아니거나/ 어차피 안개라고 부른다/ 시와 피가 하나였을 때처럼/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이제/ 잃어버린 그것이 안개/ 벙어리 늑대가 안개를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붉은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어차피라는 말을 쓰는 시는 없다/ 그것이 잃어버려야 할 것/ 내 시는 읽지만 않으면 어렵지 않다/ 안개로 부르기로 한다/ 내 피를/ 안개를/ 벙어리 늑대가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어차피 이미지 속이거나 아니거나/ 그런데 이미지는 언제 나오지/ 어디서든 어떻게든 어차피보다 그것이 문제가 됐을 때/ 잃어버려야 할 때/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안개처럼 핏물이 흘러/ 꿀처럼 나른해질 때/ 벙어리 늑대가 안개를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붉은 눈을 감지 않기 위해/ 헛것을 헛디디며/ 일그러졌다 일어서며/ 목이 졸린 채 내뱉는 숨/ 찢어진 목젖이 너덜거리는 꿈/ 붉은 눈을 감기 위해 나는/ 안개를 핏속에 묻는다//

거리의 리어왕 / 김경후
새벽 두 시, 신촌역 한가운데, 리어 왕, 비틀거리고 계시다, 바지가 반쯤 내려간 리어 왕,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리어 왕, 이런 리어 왕, 저런 리어 왕, 깨진 술병들, 고기 타는 냄새, 네온사인들, 한가운데, 물론, 주저앉은 리어 왕도 계시다, 어떤 리어 왕이든, 감히, 내가 누군 줄 알아, 감히, 고함치신다, 그가 리어 왕이 아닐 리 없지, 그러나, 이때, 난세 난국엔 직언을 올리는 젊은이가 꼭 있는 법, 누구세요, 돌아가세요, 가족에게, 리어 왕께서 고함치신다, 돌아갈 곳은 저세상, 아무도 없는 리어 왕, 고함치신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정말 다행이지,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정말 안타깝게도, 모두 그가 누군지 알고 있지,// 오, 리어 왕이시여, 오늘 상연은 끝났습니다, 어제 분장을 지우시지요, 오늘은 그만 죽어도 되는, 리어 왕, 분장을 지워도, 리어 왕, 내일이 시작하면, 리어 왕, 당신은 리어 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 리어 왕이시여, 정말 다행이지,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정말 안타깝게도, 모두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지, 감히, 새벽 세 시, 리어 왕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감히, 오늘의 대사를 읊조리며, 당산대교 한가운데, 비틀거리고,// 어느 새벽, 나는 리어 왕이었다, 너도 리어 왕이었지, 한때, 용감한 직언을 올린 젊은이, 그가 리어 왕이 되는 새벽도 있었다, 배역은 바뀌는 법, 우리는 리어 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감히, 또, 새벽 두 시,//

원룸 전사 / 김경후
밤마다 막차다, 아무도 없어도, 나는 몰고 돌아가는, 밤, 막차다, 배차 간격, 없음, 인센티브, 없음, 유급휴가, 없음, 직업, 없음, 내가 탈 차, 없음, 기다릴 차, 없음, 막차에서 막차 사이는, 폐터널이지, 밤마다, 막차다,//

베개 / 김경후
여관방/ 지리고 꿉꿉한 베개/ 누웠는데 덜컹거린다/ 혼자인데 붐빈다/ 베개 속에선// 이제 나는 어쩌라고! 닭발 냄새, 족발 냄새, 여자, 소리친다. 다리 잘린 길고양이의 리듬으로, 술 냄새, 침 냄새, 엎지른 김치찌개 냄새, 주사기를 꽂고 웃는 여자, 피 흘리며 웃는 남자, 이제 어쩌라고! 밤비 냄새, 죽은 것들의 머리카락 냄새, 죽지 못한 것들의 울음 냄새,// 잠꼬대야, 취했어, 어느 먼 곳, 다른 베개 베고, 너는 말하지만, 육백 년 전, 계룡산 학봉장군 미라, 구멍 난 폐로, 생선회 떠먹은 얘기, 약으로 애기부들 꽃가루 먹은 얘기, 아직도 덜컹거린다지,// 떠나간 것들 떠도는 것들의/ 여기,/ 어느 문 안에도 난 들어가지 못한다/ 길모퉁이들은 언제나 나를 잃어버린다/ 지리고 꿉꿉한 베개를 꼬옥 끌어안고// 나는 홀로 붐빈다/ 덜컹거린다//

코르크 / 김경후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띄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똬리를 틀고 겨울잠을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코를 씰룩이며 입꼬리를 올리기/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들썩이는 성대는/ 한번도 거미줄에 걸리지 않았지/ 음파탐지기는 물론 흰수염고래의 수염에도 걸리지 않았어/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박물관에게 듣다 / 김경후
누렇게 말라붙은/ 공룡 가슴뼈조차/ 아직 심장 소릴 찾고/ 빗살무늬토기는/ 볍씨들 그을린 냄새 부싯돌 소리 울린다// 아니, 이제 자네가 죽었으면 하네// 그것조차 나의 것은 아니야/ 턱 빠진 고래 해골들/ 덜커덕덜커덕//

젓가락 행진곡 / 김경후
검은 연기보다 검은 구석방/ 뚜껑 닫힌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오지 않던 외딴집/ 불타던 소리가 들린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이라고 말하는 건 언제나 지금// 아무도 너랑 같이 치면 안 돼/ 아무도 나랑 같이 치지 않아// 아니 검은 거 말고 흰 거 이젠 틀리지 마/ 검은 거 말고 더 검은 거 이젠 틀리지 않아// 불탄 검은 뼈/ 밑으로 흔들리는 흰 발들// 검은 기다림/ 밑으로 흔들리는 흰 목소리/ 이젠 한 음도 틀릴 수 없는 행진곡/ 아무도 너랑 같이 치지 않아// 구석방/ 홀로 뚜껑 닫힌 피아노//

두 시 구 분 육 초의 상상 / 김경후
흰 벽들 두 시 구 분 육 초 시간을 가리키는 것들은 왜/ 커튼 너머엔 내가 없어 커튼 너머를 난 상상해/ 축축하고 무거운 돌, 느려터진 돌/, 부푸는 몸을 뒤척여 밤과 달을 몽땅 가리는 돌이 있어// 커튼 너머엔 내가 없어커튼 너머를 난 사랑해/ 창문에 뭉개지는 빗물 그 기분을 내가 아는 것처럼/ 난 알아 환청 이명 그 속에서도 알고 있지/ 이번에 침대 밑에 말라죽은 바퀴벌레는 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커튼 너머엔 돌이 있어 알아// 외곽순환도로 상상해봐/ 커튼 너머엔 돌의 구멍을 지나는 외곽순환도로도 있지/ 뒤엎어진 차들과 술병을 던지는 유령들/ 두 시 구 분 육 초 나는 상상해/ 공중에 날아올라 불꽃처럼 터지는 타이어들/ 그 너머엔 목발이 낀 회전문 그 너머엔 회오리바람// 회오리 바람에도 들지 않는 바람개비가 있어/ 또 그 너머엔/ 모래만 가득한 우물 그 우물을 담은 눈동자/ 다시 그 너머 너머엔 내가 돌릴 수 없는 회전문/ 두 시 구 분 육 초 난 상상해 커튼 너머로 닫히는 눈 난 알아// 흰 커튼이 쳐진 흰 벽들이 방/ 다시// 두 시 구 분 육 초/ 왜 바늘은 모든 시간을 찌르 고 가는 가//

개미의 고독사 / 김경후
땡볕의/ 적막/ 아래/ 개미/ 지나간다/ 막막하게/ 적막한/ 한 점 속엔/ 이미/ 비눗방울/ 따라가는/ 소녀/ 바이올린 교습소/ 미뉴에트/ 있고/ 라고/ SF소설 집필 중인 우주가 블랙홀에 적다/ 잠시/ 개미조차 사라진 적막/ 바라본다//

저만치 여기 있네 / 김경후
새해 첫날마다 지난해 토정비결이 맞았는지 맞춰본다/ 예언은 지연된다/ 잘못된 건 없어/ 시간은 멈추고 세월은 흐른다/ 일어나자마자 운 게 아이에요/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사랑보다 빨리 쉬는 건 사람 그러나/ 난 쉬고 싶은 사람/ 잘못된 건 없어/ 울려면 일어나야 합니다/ 러시아 혁명사 스터디 내내 재로 살 원피스만 떠오른다/ 혁명사를 읽을 때마다 봄꽃무늬 피어오르는 난 혁명적인 사람/ 잘못된 건 없지/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멈췄다/ 그럼 자신을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를/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도 잘못하지 낳았다는군/ 변한 건 없지/ 고양이를 감시하는 카메라를 감시하는 고양이가/ 저만치 나를 보고 있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시간은 멈추고 세월이 흐른다//

반지 / 김경후
망원경은 토성에 맞춰둔다/ 토요일엔 약속이 있다/ 반지를 뺀다// 헤어질 약속보다 헤어진 반지가 오래 남는다/ 항상/ 행성 고리는 행성이 위성을 먹은 흔적이라지// 뭘 먹나/ 우리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음식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풍경 쭉기 전에 꼭 헤어져야 할 것들/ 죽기 전에 잊어도/ 죽은 후에 살아남는 것들// 토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반지에서 날아올라 토성 고리를 통과하는 흑두루미를/ 꿈꾸는 밤//

카니발식 사랑 / 김경후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를 먹는 일/ 두 눈과 두 발이 아닌// 위가 하는 일/ 마시고 삼킨다/ 갯벌지렁이 같은 너를/ 개흙 같은 내가 들이켠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를 먹는 일/ 너를 씹고 너와 뒤섞이며/ 개흙 속에 썩고 녹아버리는 일/ 번개와 벼락 작살 아래 부서질 때까지/ 나의 위가 하는 일/ 밤새도록 너를 마시고 삼키고 들이켜는 일/ 위태로운 내가 위선적으로/ 나만을 위로하는 일/ 그게 너를 사랑하는 일/ 너를 먹는 일/ 먹고 마시고 뒤틀리는 일/ 또는 너로 나는 죽어버리는 일//

요하네스버그 / 김경후
수원화성 앞 표지판엔/ 요하네스버그까지 12,462킬로미터/ 어째서/ 길 건너 통닭집과 점집을 가리키며/ 방금 튀긴 죽음의 기름 냄새와 죽어갈 것들을 냄새 맡으면서/ 어째서/ 오래된 옛 성까지 오래도록 걸었는데 다시 오랫동안/ 요하네스버그까지 가야 한다고/ 갈 수 없다고 12,462킬러미터/ 조개구이 생각이나 하며 조개를 줍다/ 세계적인 해적 두목이 되라는 계시를 받은 것처럼/ 난파당해 밀려온 너덜너덜한 나를 발견한 것처럼/ 어째서/ 이곳이 아니라고 가리키며/ 12,462킬로미터/ 설거지통에서 성당까지/ 팬티스타킹 구멍에서 돌십자가까지는/ 아무 의미 없다고 멀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째서/ 저곳은 멀고 이곳은 저곳을 가리키는 곳일 뿐/ 이제 또 가라고/ 이곳에 첫 돌멩이가 굴러오기 전 풀를 스치던 소리/ 돌벽 가루 속 흩날리는 마음에/ 어디로 가라고/ 이곳은 저곳을 가리키는 곳일 뿐/ 언제나 이곳은 저곳보다 멀었다/ 어째서/ 어디에 나는 있어서/ 이곳이 되는가/ 요하네스버그//

꼬리뼈 / 김경후
꼬리를 흔든 적도 없는데/ 꼬리뼈가 부서졌다// 종이 건반을 두드렸는데/ 조율 안된 오르간 소리 들리고// 사랑한 적도 없는데/ 아침마다 실연이다// 몰래 숨어 있던 것들/ 나는 잊었는데 나를 잊지 않고 부숴버린다/ 나를 까발린다// 꼬리지느러미 하나 걸리지 않은 어망/ 어둠만이 나의 황금어장/ 부서진 꼬리뼈를 쥐고/ 나는 어기적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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