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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벚꽃의 일생 / 양문선

by 부흐고비 2022. 5. 20.

이월에 끝자락에 서면 봄소식이 기다려진다. 제주에는 유채꽃이 가장 먼저 봄을 전한다. 반도 남쪽의 매화나무는 섬진강의 삼동(三冬)칼바람을 몸으로 지켜, 가지마다 따뜻한 온기가 돈다. 물오른 가지는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 긴 어둠과 추위를 견디어온 기다림의 신비가 하나씩 그 속에서 싹트고 있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봉오리마다 새 생명이 움트는 듯, 봄의 메시지를 전한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비가 자주 온다.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라지만 봄바람은 세차게 불면 내 가슴도 미어진다. 가지마다 봄맞이를 준비하던 과실수는 계속되는 냉해로 움츠린다. 피어오르려는 꽃망울마다 얼음 덩어리를 뒤집어쓰고 겨울잠으로 되돌아간다. 봄꽃을 시샘하는 봄바람이지만 벚나무는 묵묵히 말이 없다.

가지마다 보랏빛으로 변해져 가는 남산은 겨우내 묵언정진(默言精進)을 했다.기다림에 애가 탄 봄은, 대지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온기는 거무칙칙한 나뭇가지를 벗겨 겨울을 던진다. 가지에는 여릿한 새순이 봄맞이한다. 목련은 하얀 꽃대를 휘어잡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몸짓이다. 모든 꽃망울은 작은 전구가 달고 위를 향하게 발돋움한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개나리도 노란 봉오리를 가지마다 한 줄로 줄을 세워 기다린다.

우리 아파트의 벚나무는 수령이 족히 50년은 된다. 아름드리나무마다 검은색 바지를 입혀 놓은 모습이 장대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 자태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나무속에 배어있는 향기는 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다. 벚나무에 꽃망울이 생기면 우리 아파트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관리실 직원들이 벚나무 사이로 청사초롱을 다느라 분주하다. 주민들은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집 집마다 봄맞이에 여념이 없다.

순간으로 만들어 낸 꽃봉오리는 꽃 등불을 만든다. 벚꽃 속의 청사초롱은 연인들을 손짓한다. 잘 가꿔진 아파트 숲길은 어느새 사랑의 길로 변한다. 그 속에는 벚꽃의 향연으로 점점 무르익어 갈 게다. 겨우내 참고 기다렸던 벚나무는 삼동(三冬)의 한을 한순간에 절정의 환희로 보답한다. 다른 꽃들은 꽃을 피울 때 여운을 주지만, 이 벚나무는 한순간에 꽃망울을 불그레하게 하고, 수줍음을 참지 못해 일순간에 터트리고 만다. 이렇게 아름다운 벚꽃광경을 한순간에 봐야 한다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만개한 꽃들로 둘러싸인 벚나무가 봄을 부른다. 물오른 가지마다 갓 핀 꽃에 수액을 나눠주고, 멋모르고 달려온 벌 나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꽃 속에 암술과 수술대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빛은 꽃잎을 우아함을 보여주고, 역광의 꽃잎은 신비함을 안겨 준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하얀 벚꽃 사이로 파란 하늘이 투명하게 보인다. 벚나무가 자기의 존재를 말해준다.

벚꽃이 바람에 휘날린다. 떨어지는 꽃잎이 마치 무대에서 연출한 듯 대지 위로 마구 뿌린다. 내 머리 위에 떨어지는 꽃잎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춘다. 온 천지를 꽃으로 휘저으며 하얀 눈 동산을 만든다. 함박눈처럼 뿌려진 꽃잎 위를 걸으면,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꽃잎이 너울너울 춘다. 꽃잎 송이가 한데 어울려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 따라 춤을 몰고 다닌다. 마치 고요하게 흐르는 음악에 맞춰 가벼운 스텝으로 나를 흔든다.

함께 피었던 꽃잎이 봄비에 맥없이 떨어진다. 세차게 비바람이 불면 꽃잎이 빗물과 함께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속절없이 사라지는 꽃잎은, 마치 돌아오지 못하는 임을 향해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네의 눈물 같은 측은한 마음이 든다. 일 년 내내 공들여 피워낸 꽃이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운명이라기엔 너무 가혹하다.

성질 급한 벚꽃은 필 때처럼 질 때도 순식간에 떨어지고 만다. 벚꽃도 순간적으로 피고 지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정목일 선생은 “꽃은 꽃을 버려야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피어남은 지는 순간을 안다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라고 했다.

열매는 꽃이 져야만 맺는다는 것은, 탄생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 꽃의 인생이다.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의 일생, 벚나무는 한순간에 사계절을 보내는 것 같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숨결로 피웠다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벚나무는 서글퍼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상처 위에서 초록 꽃을 다시 피우게 해, 한여름의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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