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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궁에 빠지다 / 박일천

부흐고비 2022. 5. 21. 07:38

어스름 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서산마루에 걸렸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계곡 물에 세수하였다. 청아한 기운이 가슴까지 흘러내린다. 밤안개에 묻어온 운해는 산봉우리를 가리며 하늘과 경계를 지운다. 검푸른 능선 자락이 점점 뚜렷이 다가온다. 태양이 대지를 정복하기 전에 계곡 탐사 길에 나섰다.

어제 지리산에 텐트를 펼쳐 집 한 칸 뚝딱 지었다. 해거름에 근처 골짜기로 내려가 여울물에 발을 담그니 한낮의 더위가 단숨에 녹아내렸다. 넓적 돌에 앉아 윤슬로 일렁이는 물을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산굽이를 따라 이어진 계곡 물의 끄트머리는 어디쯤일까. 시선이 미치는 골짜기 언저리는 산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지난밤 산책하러 숲길을 나섰으나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지 못한 계곡의 상류를 찾아 걸어갔다.

야영장 샛문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어른 키만 한 달맞이에 노란 꽃이 조랑조랑 달려있고, 하얀 망초 꽃이 흐드러진 평지가 나왔다. 산중에 평평한 땅이 잡초로 덮여있다니 아마도 옛날 분교 자리인가. 의아해하며 풀숲을 헤치고 걸어가는데 오솔길 가장자리에 표지판이 보였다. 문자중독자라 읽어보았다. <달궁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천 년 전쯤 삼한시대 마한의 효 왕이 진한에 쫓겨 이곳에 궁을 지어 살았는데, 높여서 달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이 그 선사 유적지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곳이라고. 달궁 전설에 걸맞게 오늘 새벽에 먹장구름을 걷어내고 달이 산마루에 걸렸나 보다.

숲길을 벗어나자 산등성이를 휘감던 운무는 아침 햇살에 사라지고 사방이 깨어난다. 야영장 끝머리에 마을이 보였다. 산속에 묻힌 동네답지 않게 달궁 마을은 제법 컸다. 길가 밭고랑엔 푸성귀와 고사리가 무성하고 식당과 펜션이 겹겹이 들어서 있다. 계곡 다리 건너에는 농작물과 토종닭을 키우고 있었다. 지리산의 천왕봉, 노고단, 피아골 등 수없이 다녔지만 달궁 계곡에 와서 머물기는 처음이다. 해발이 팔백 미터나 되는 깊은 산중에 이렇게 널찍한 마을이 숨어 있을 줄이야.

동네가 골짜기를 끼고 길게 이어져 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계곡 물은 어찌나 맑은지 둔덕 위에서도 바닥의 자갈이 훤히 보였다. 어느 곳은 암반을 깊게 팬 골을 따라 물이 흘러가다 낭떠러지를 만나 폭포수가 되어 쏟아졌다. 그 아래 생긴 소는 담청색으로 깊이를 알 수 없다. 산모퉁이를 돌아 콸콸 흐르는 골짜기 물은 굽이굽이 지나는 곳마다 맑은 물을 선사한다. 사시사철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과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애의 요새 같은 달궁 마을.

문득 조정래 소설『태백산맥』의 주인공 하대치가 떠올랐다. 그는 빨치산행동대원으로 쫓겨 다니다 동지들을 규합하여 지리산 속으로 숨어든다. 그들은 이곳 달궁에 도착하자마자 한여름 행군으로 땀범벅이 된 몸을 계곡 물에 뛰어들어 씻으며 즐거워한다. 지친 그들이 한 때나마 쉬어가기 딱 좋은 달궁 마을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산줄기와 풍부한 골짜기 물을 품고 있는 넉넉한 지리산. 마한의 왕이나 쫓기는 빨치산이나 그 누구라도 산자락에 품어 시원한 물을 고루 나누어 주었으리. 지리산은 언제라도 삶이 고단한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포근히 감싸줄 것이다.

비탈진 산길을 따라 계곡은 한없이 이어졌다. 달궁 끝머리에 마침 샛길이 보여 골짜기로 내려갔다. 바위에 앉아 널따란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 물을 바라봤다. 유리알 같은 물은 깊이에 따라 연두와 초록의 물빛, 골짜기의 우거진 나무들이 투영되어 물속은 청록의 나무숲으로 일렁거린다. 건너편에 기이한 반석은 백악기 암석인지 눈이 시리도록 하얗다. 그 너머 절벽에는 등 굽은 소나무 한그루가 하늘 향해 버티고 서 있다. 산에서 자라는 생명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묵묵히 살아간다.

한참을 앉았다가 일어서는데, 눈앞에 휘늘어진 다래 넝쿨이 앙증맞은 파란 열매를 달고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젊은 날, 무주에 살 때 다래나무 새순을 따다 삶아서 나물을 해먹었다. 알싸하고 독특한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시절 배낭을 메고 뒷산에서 고사리와 취나물을 꺾으며 하루해를 보낸 적도 있었다. 분교 뒤로 흐르는 개울에서 가재를 잡고 자연과 동화되어 깊은 산골에서 십 년 넘게 살아서일까. 나는 산마을이 내 고향처럼 정겹다. 푸른 숲에 둘러싸인 계곡 물만 보면 무장 해제된 채 멍하니 앉아있길 좋아한다.

언덕배기에 올라서자 산딸기가 새 각시처럼 수줍게 숨어있다. 가시넝쿨을 제치고 진자주색으로 농익은 산딸기를 따서 남편이 입에 넣어 준다. 언제나 나를 먼저 챙겨주는 오라비 같은 사람. 아직도 콩깍지가 씌었을까. 나를 감싸는 애틋한 정이 푸릇하다.

캠프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바람도 없는데 홀로 흔들리는 나무를 보았다. 온몸에 분가루를 칠한 듯한 하얀 은사시나무다. 나뭇잎에 달린 줄기가 다른 나무에 비하여 유달리 길쭉해서 소슬바람에도 바르르 떤다.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에 나는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바람은 금방 지나간다.’ 은사시나무에 중얼거려 본다. 세상의 작은 소리에도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스트레스에 자유로울 수 없다. 한시름 내려놓고 산속에 들면 세속의 번뇌 아득히 멀어지고 초록에 물들어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을까. 길가 산죽 가지에 물잠자리 한 마리가 미동도 없이 앉아있다.

땅거미가 그물을 드리울 때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연일 불볕더위에 녹아드는데 골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온다. 청량한 공기가 가슴 저 밑바닥까지 정화하는듯하다. 자리를 펴고 누웠다. 투명한 모기장 문을 통해 하늘이 들어오고 갈맷빛 능선도 따라온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는 무주 산골짝 밤이 연상되고, 중천에 떠 있는 이지러진 달은 구름 속을 들랑거린다. 감청색 하늘가로 하나둘 보이는 별을 헤다 나는 달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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