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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 세상에 물들다 / 정재순

부흐고비 2022. 5. 25. 08:44

무슨 일일까, 며칠째 딸아이가 시들하다.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문 채 표정까지 굳어 있다. 아이 방에 들어가 눈치를 보며 서성이는데 대뜸 혼자 있고 싶다고 한다.

큰딸은 동실한 보름달을 닮았다. 크고 까만 눈에 뽀얀 얼굴은 달처럼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면 아이는 눈웃음을 짓지만 돌아서면 콧잔등을 찡그리곤 하였다. 둥그런 달을 닮았다는 말이 최고의 찬사인 적이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갸름하고 작은 얼굴이 대세가 된 세상이다.

어릴 적엔 연년생으로 동생을 보아 그런지 깨알만한 딱지를 내밀며 호 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렸었다. 매사에 적극적인 딸은 말재간이 있어 주변에 사람이 몰린다. 한 해가 지는 마지막 날에도 가족끼리 송년회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 한 살씩 예쁘게 꼭꼭 씹어 먹자' 고 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딸아이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고야 만다. 그저 착한 딸이고 싶어 부모 눈에 거스르는 행동은 엄두도 못 냈던 나와는 상반된 마인드를 가진 것 같다. 부모와 의견이 다를지라도 제 마음이 요구하면 기어이 거머쥐고 만다. 그다지 부딪힘 없이 물밑작업을 하듯 유유자적하며 뜻을 이뤄낸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듯.

얼마 전, 남편의 그림자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딸아이한테 넌지시 그런 속내를 내비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먼저 플러스 마이너스를 짚어 보란다. 헤어지는 게 플러스가 될 것 같으면 헤어지고, 마이너스일 것 같으면 그냥 살라고 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시원스러운 그 한 마디에 속을 끓이던 권태가 거짓말처럼 달아났다.

한가한 휴일이면 딸은 제 방에서 나를 부른다. 자기 침대에 같이 누워서 콩닥콩닥 얘기하며 놀자는 것이다.

" 엄마, 내 옆으로 와."

포근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딸 옆에 나란히 눕는다. 딸은 동창들을 들먹이면서 종달새처럼 종알거린다. 남자친구가 이럴 땐 섭섭하고 저런 부분은 고맙다며, 주고받은 문자를 보여주면서 사람 됨됨이가 어때 보이냐고 묻기도 한다. 딸과의 시간은 잠시나마 겪어보지 못한 젊은 시절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러던 아이가 하루 종일 입술을 빼물고 불퉁하게 있으니 갑갑증이 난다. 꾹 참고 가만 내버려 두었더니 다 저녁에야 입을 연다. 뜬금없이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는 말을 맥없이 흘리는 바람에 놀란 가슴이 쿵덕거린다. 벌써 인생의 서글픔을 맛보았단 말인가.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이만큼 키우고서야 삶이 녹녹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한 해 먼저 입사한 직장동료가 모함을 한다는 것이다. 같이 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정겹게 굴고는 돌아서서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딸아이가 집에 있을 적에 자주 전화기를 울리던 그녀인가 보다. 둘이 통화할 때면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기에 직장생활을 탈 없이 해낸다고 짐작했다.

저 먼저 만나고 싶다며 영화 보자 밥 먹자 해놓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딸의 말투에 원망이 가득 실린다. 싫으면 정을 주는 척 꼬드기지나 말지, 내가 뭐 허수아빈 줄 아나. 웃는 얼굴을 믿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며 아이는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최근에 딸이 직장 분위기가 좀 불편하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딸은 업무에서도 대충 하지를 않았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되겠다 싶으면 일을 찾아서 하고, 천성적으로 싹싹하고 표정이 밝아 창구를 찾는 손님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그런 딸이 상사에겐 인정을 받는 직원이었으나 동료들 사이에는 뒷담의 주인공이 된 모양이었다.

딸은 한창 세상에 물드는 중이다. 꽃이나 나무처럼 사람도 각양각색인 것을. 내가 살아본 세상은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인정해 주라고 하니 자기는 겉과 속을 달리 하진 못하겠다고 한다. 아직 어린 가슴이기에 당연한 말이다. 설마 그 언니가 앞장서서 자신을 왕따 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배신당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며 어두운 표정을 거두지 않는다.

하늘의 달도 기울 때가 있는 법, 딸은 얼마간 혼돈 속에서 헤맬 것이다. 이번 일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사는 아이가 괜스레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순 없다. 누구든 본인의 입장만 생각하기 십상이다.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아 좋았던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를 심심찮게 봐왔다.

아무리 좋은 의미가 깃든 충고라 할지라도, 남이 해 주는 말은 크게 와닿지 않을 터이다. 자신이 직접 부딪히고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생각의 키가 자라지 않을까. 달처럼 환한 딸이다. 지금처럼 부대끼며 살다 보면 비워내야 할 것과 끝까지 가져가야 할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을 깊은 눈으로 들여다볼 힘도 생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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