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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임현정 시인

부흐고비 2022. 6. 3. 08:30

임현정 시인
1977년 서울 출생.

한양대 독문학과 졸업, 고려대 한국어문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 졸업.

2001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 『사과시럽눈동자』가 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ㅡVAN GOGH 1890년, 100.5×50.5 / 임현정
불길한 밤이다./ 까마귀의 목적 없는 방향/ 날아오는 것인지 날아/ 가는 것인지, 생각지 마라/ 이미 저것은 나를 지나쳐 갔다./ 언제나 몇 갈래의 길이 있었지. 나는 길의 냄새를 맡아/ 길이 아닌 곳으로 걸었다. 흔적을 찾는 개처럼./ 역암 같은 어둠이 여기저기 뭉쳐 있다./ 또 길의 중앙./ 나의 시선은 먼 데로 뻗은/ 붉은 길 위에 있지만/ 나는 황금빛 밀밭으로 걸어갈 것이다./ 악성빈혈 같은 나의 허기는 노란 그림 몇 점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다시 물감 묻은 붓을 들 것이다./ 나는 밀밭 위를 걷는다. 조금 평온하게/ 불길한 밤, 괜찮다./ 그런 길들이 나를 이끌었다. 내게는 보색/ 같은 밀밭이 펼쳐져 있다./ 휘몰아치는 밀밭을 성냥개비 같은/ 내가 걷는 것이다./ 붓질이 거친 어둠 아래//
* 2001년 《현대시》 등단작.

Vincent van Gogh (1853-1890) - Wheat Field with Crows (1890)


한뼘사과마차 / 임현정
달리는 마차에서 뭘 할 수 있어// 눈물글썽별무리를 겨냥하거나/ 까무룩 잠결에도/ 자꾸만 닳아 없어지는 발굽 소리를 듣거나/ 늑대인지 개인지/ 베어 먹기 좋은 달을 쫓아/ 우린 언제쯤 전복될까// 심장의 열기로 익히는 요리가 있대/ 막 식기 전의 심장으로 끓인 수프/ 늑대인지 개인지/ 찹찹 피 웅덩일 핥는다/ 땅으로 스며드는 끈적수프// 힘껏 던진 도끼처럼/ 멀어지는 걸 사랑해/ 멀어지는 편지 멀어지는 레일 멀어지는 탈주// 내리막엔 마지막 단추를/ 오르막엔 방금 빤 입술을/ 모퉁이엔 까마귀가 숨긴 단추/ 아주 간지러운 구멍// 한쪽 뺨이 상한 사과 속을/ 전속력으로 달려도/ 우린 달콤하게 썩을 뿐// 아무도 찾지 못한/ 눈동자였음 해/ 아득히 밤만 보며 달리는// 고삐를 쥔 채/ 미친 듯이 내달리는 달그닥 해골/ 네 목숨이었으면 해//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 임현정
인부들이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데// 숲 속 공터에// 책이 꽂힌 책상이며/ 손때 묻은 소파까지/ 여자가 살던 집처럼 해놓고// 남자는/ 너럭바위에 앉아/ 생무를 베어 먹은 것처럼/ 달지도/ 쓰지도 않게/ 웃었다고 합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는데/ 경비 아저씨의 푸른 모자가/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습니다//

다이빙하는 남자 / 임현정
중세시대 사제 복장을 한 남자가/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이복동생을 사랑한 사제가/ 몸을 던졌다는 검은 절벽/ 그녀를 태운 배가/ 백 년 전 거품으로 사라져버린 곳// 그러나 비극은 되감기 버튼처럼/ 가짜 사제가 능숙하게 절벽을 기어오르고/ 각설탕 같은 이빨을 반짝이며 시작된다//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뛰어든 비운의 사내는/ 잘게 부서지는 포말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흠뻑 젖은 사제복을 입은 그는/ 이 도시의 명물/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을/ 물방울무늬로 포장해주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근처 절벽에 있는/ ‘다이빙하는 사제’ 레스토랑에선/ 핏물 번지는 스테이크를 썰며/ 지루하게 반복되는 저렴한 비극을 감상할 수 있다// 감청색 잉크에 펜촉을 꽂듯/ 비극은 선명하고 희미한 습관이 된다//

벚 / 임현정
목이 잘린 후에도/ 아주 잠깐 볼 수 있다고 해// 광어는 봤을까/ 동강 난 몸이 명랑하게 팔딱이는 걸// 네가 떠난 후에도/ 내 사랑은 아주 잠깐 팔딱이는 걸// 벚 아래 서면/ 가장 환한 가지를 잘라/ 목에 꽂고 싶다/ 말 대신 꽃잎이 날아갔음 해// 잘린 너도 아주 잠깐 꽃을 피우겠지//

가슴을 바꾸다 / 임현정
한복 저고리를 늘리러 간 길/ 젖이 불어서 안 잠긴다는 말에/ 점원이 웃는다// 요즘 사람들 젖이란 말 안 써요// 뽀얀 젖비린내를 빠는/ 아기의 조그만 입술과/ 한 세상의 잠든/ 고요한 한낮과/ 아랫목 같은 더운 포옹이/ 그 말랑말랑한 말 속에/ 담겨 있는데// 촌스럽다며/ 줄자로 재어준 가슴이라는 말/ 브래지어 안에 꽁꽁 숨은 그 말/ 한바탕 빨리고 나서 쪽 쭈그러든 젖통을/ 주워 담은 적이 없는 그 말// 그 말로 바꿔달란다// 저고리를 늘리러 갔다/ 젖 대신 가슴을 바꿔 달다//

꺼질 듯 바람계곡 / 임현정
구멍 난 치즈처럼 보여도/ 중앙계단을 타고 오르면/ 꽤나 전망 좋은 절벽이에요/ 칠백번째 계단참에 제 방이 있어요 왼쪽은 아,/ 마침 루시 아줌마가 나오네요// 계곡 아래에서 부는/ 돌개바람에 휩쓸린 사람들/ 간혹 빨랫줄에 걸려 있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저 아래서 부는 바람을/ 꺼질 듯, 한숨이라고 부르죠/ 난간을 꼭 붙들어요/ 손수건처럼 휙/ 날아가기 전에// 견학을 온 여자애가 울고 있네요/ 지갑이 없어졌다는 건데/ 동무들은 어쩌지도 못하고/ 바람 불 때 보았죠/빙글빙글 날아가는 노란 지갑/둥글게 부푼 공단 치마 아래/ 푸른 지폐들까지// 꼭대기 방은 미완성이에요/ 손톱이 자랄 때까지만 쉬고/ 다른 사람이 안내할 거예요// 어떤 여행자들은 여길 떠나지 못해요/ 어깨를 스치는 좁은 계단과/ 숨소리가 들리는 작은 방/ 검게 빛나는 눈동자 때문이죠/ 그래서 손톱 밑은 붉고,/ 부드러운 흙이에요//

볼우물 / 임현정
젓갈을 좋아했다는 공자/ 잘만 먹다/ 아끼던 제자가 젓갈이 되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젓가락을 내던졌다는 스승/ 너무 익숙한 맛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맛나 죽을까봐// 구두가 쌓여있는 유태인 전시실처럼/ 맛으로 분류된 별실이라면/ 나는 어떤 맛으로 흩어질까// 왜 간만 빼먹니/ 가슴 치는 네 맛이라/ 먹다 보면 네가 될 것 같은 맛이라/ 피 맛 푸딩을 녹여먹던 그 애는/ 내가 됐을까// 쥐를 묻은 자리에/ 해바라기가 피었대/ 양볼 가득 네가 피었대// 꽃대를 올려다보며 웃는 그 애// 물고기는 영혼까지 비리대/ 양상추는?/ 영혼까지 아사삭// 개 한 마릴 달아놓고/ 입맛을 다시던 이웃들처럼// 사랑을 받던 심장은 더 쫄깃할까// 아마도,// 내가 먹은 너처럼//

각설탕 / 임현정
어느 위대한 과학자가/ 실험용 원숭이에게 자신의 뇌를 이식했다는데/ 연구실 간이침대 위에서 발견되었지./ 욕망의 해체에 대한 보고서 말이야.// 한때 몽키 갱스터가 유행했던 적도 있지만/ 달궈진 총구를 들이대는 무서운 협박도/ 샛노란 바나나 한 송이면 끝장나고 말았어./ 혀의 본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개척 분야였거든.// 신문지 밖으로 빠져나온 꼬리가/ 밤의 공원에서 목격되기도 했어./ 아파트 경비원은 그와 안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의 안녕을 우선으로 여겼지./ 욕망과 반비례하는 것들의 목록은/ 도표4에 나타나있어.// 위대한 과학자의 뇌는 아직까지 위대했지만/ 그는 유령처럼 후미진 곳을 떠다녔어./ 지문 없는 것들의 행동양식에 관한 공식도/ 그렇게 탄생했지.// 날렵함과 명석함이 무기였던 그가/ 지금은 놀라운 묘기를 익힌다는 소문./ 외발자전거를 타고 모형화산을 만들거나/ 무쇠나팔을 불면서 방사선 폭죽을 펑펑 터트린다는데.// 서커스 단장은 아주 작은 연금으로 그를 고용했어.// 각설탕처럼 하얀 정육면체의 악몽과/ 매달 지급되는 사료 두 봉지/ 그리고 주말에 제공되는/ 암컷 원숭이 한 마리.// 어쨌거나 그는/ 위대한 뇌를 가진 원숭이였으므로.//

3분 카레 / 임현정
마을 하나가 폭발하고/ 노란 짚더미 위/ 너의 심장이 남겨지는 것/ 아니 어쩜 그건 억울한 양의 염통/ 토끼가 씹던 당근 조각이거나// 수화기를 통해 지령을 전달받던 잠수함/ 누수 된 눈물이 전화선을 녹일 때/ 감전된 소년병이 유황빛 계곡에 처박힌다/ 간이침대엔 양배추 이파리 같은 애인의 편지// 노란 고름이 쏟아지던 옥상/ 겨자소스를 바른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소년/ 깁스는 언제 풀어?/ 곧// 늪을 건너왔지/ 일회용 숟가락 같은 악어들이 배를 뒤집은 채 죽어있는 곳/ 우리가 밟은 게 젖은 나무토막이었나, 질기고 질긴 누군가의 팔다리였나,/ 성당 종소리가 멈췄다/ 밀봉하듯 밤이 오고 있어/ 물가 오두막으로 뛰어들까/ 배꼽 같은 거기서 서로의 목이라도 조를까/ 주홍빛 어깨를 드러낸 그 애가 웃는다/ 금세 난파될 소파 위에서?// 어느 나라엔 화학조미료로 만든 소파가 있대/ 그럼, 카레 맛 소파는? 동시에 시작되는 키스 맛 소파는?/ 우리는 영원히 멈춰 있는 건지도 몰라, 검은 터널을 통과하는 은빛 총알 속에서// 벙커가 공개되고/ 마지막 3분이 쏟아졌다/ 그를 노랗게 휘젓던 향정신성 알약들과 그녀가 뜨다 만 치자색 스웨터/ 쓸데없이 고귀한 3분의 절망이/ 이윽고 접시를 물들였다//

괘종시계가 울리는 밤 / 임현정
가스검침원이 벽에 기대있는 걸 발견했다지./ 오래된 얼룩처럼 번져있었대.// 산산이 부서진 채/ 전봇대 옆에 넘어져 있는 걸 본 적 있어/ 마루에 고여 있던 묵직한 그림자/ 신문지를 덮고 눕는 것도/ 흔한 일이야/ 껌 자국으로 지저분한/ 벤치는 벌써 만원인걸.// 저기, 고장 난 괘종시계를 손수레에 실고/ 허리 굽은 괘종시계가 간다.// 갈 곳 없는 시계들이 모여/ 잿빛연기를 뿜어대는/ 공원시계탑도 언젠간 스톱이야.// 간밤엔/ 우울증 걸린 시계바늘이 꼭짓점에 매달려/ 마지막으로 댕댕 거린 날이지.// 노란 스티커를 부적처럼 이마에 붙이고/ 숨이 탁 멎은/ 스댕부랄도 있는걸 뭐.//

눈을 감았다 뜨면 / 임현정
버려진 실내체육관이었지.//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랜 대치상태// 나뭇잎들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다./ 손을 뻗으면 산산조각 나는 어린잎들/ 치맛단을 찢어 만든 붕대가 피에 절 때// 네 눈은 작고 마른 씨앗 같고// 서로 다른 끈으로 묶은 매듭처럼/ 너도 나를, 바라보던 기억// 핀셋으로 집어든 가볍고 하얀 거즈/ 한없이 투명한 구름이 흘러간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너진 담장도/ 네가 흔들어대던 병든 라임나무도/ 없다.// 무성한 나무 그늘에 누워/ 낮은 휘파람을 부는 사람// 너인가.// 나인가.//새장바닥에 떨어져있는 흰색 깃털들// 한없이 투명한 구름이 흘러간다.//

서커스 마차 / 임현정
장을 보고 온 아내가 소파에서 잠든 그를 보았다./ 발치에 신문이 떨어져 있었다./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피에로의 코를 찾을 순 없었다./ 그는 평온해보였다.// 며칠사이 살이 오른 피에로는/ 곡예사 아가씨의 스팽글의상처럼 웃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앞마당에 앉아 감자를 깎는 피에로를 보았다./ 스튜에 넣을 거랍니다./ 그가 깎은 감자알들은/ 피에로의 코처럼 반들반들하고 동글동글했다.// 부엌선반 스튜냄비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은 빨간 색을 보았을 때/ 그는 마구 가슴이 뛰었다./ 대신 웃어줄 수 없는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찌그러진 코는 아내의 손수건처럼 가볍고 슬퍼보였다.// 그는 코를 서류봉투에 넣어 소포로 부쳤다.// 사람들은 앞마당에 앉아 완두콩 꼬투리를 까는 늙은 사내를 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공중그네만큼 즐거워보였다./ 자잘한 꽃무늬 에이프런을 두른 그의 아내도 캉캉치마만큼 상냥해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아들이/ 발신자 없는 소포 하나를 받았다.//

어쩌다 곰 / 임현정
어쩐 일로 나는 곰이었는데/ 철창 밖으로 찔끔찔끔/ 쓸개즙 같은 사랑을 흘려대는/ 순하고 미련한 곰이었는데// 불붙은 링을 뛰어넘을 때마다/ 허물어져가는 갈비 아래 피 묻은 돌멩이를 괴는/ 재주넘는 곰이었는데// 흩어지는 환호성을 모을 수만 있다면/ 우린 천막 밖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 거야/ 모든 흩어지는 것들은 구름의 습성을 닮았어/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너처럼/ 착지를 배우지 못한 빗방울처럼// 죽은 체를 하는 네 곁에/ 늠름한 가죽 소파처럼 누워있어/ 다음에 만날 땐 꼭 죽은 체를 해// 길들여진 곰은 죽은 것만 먹으니까// 창백한 입술이 스프를 스읖, 핥을 때/ 나는 나머지 한 발로/ 물구나무를 선다/ 곰이라서 다행이야, 스프를 끓일 발이 네 개나 있잖아// 새들의 궤적은 버찌씨를 벗어나지 못해/ 벚나무 아래 앉은 당신을/ 내가 벗어나지 못하듯/ 어떤 좌표들은 부리에 닿기도 전에/ 내리막을 굴러 발치에 쏟아진다/ 내달리는 차에 함부로 뛰어든 휠체어 바퀴처럼/ 내가 닿기도 전에 제길,// 그러니까 나는 곰이었는데/ 참으로 알뜰하게 발라 먹힌/ 맛있는 곰이었는데// 뭉게뭉게 솜으로 속을 채운/ 예쁜 박제 곰이었는데// 죽은 무희가 가장 아끼던 짐승,/ 가장 먹고 싶어하던 먹잇감이었는데/ 그래서 더는 얌전할 일도 없이/ 철창 밖을 질주하다/ 사살 당한 나였는데// 어쩌다 나는 곰이었는데//

사과궤짝 / 임현정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어// 우리는 밀밭 빛깔 트럭을 타고 있었는데/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지// 아직 앳된 운전병이/ 가슴 밖으로 빠져나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어/ 뜨거운 액체가 바지를 적시고/ 발밑에 작은 고랑을 만들었지만/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그는/ 사과궤짝에 남은 썩은 사과처럼/ 검붉은 과즙을 흘리고 있었지// 고요한 저녁이 오고 있어// 작은 고랑은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무른 사과는 입을 조금 벌린 채로 편안해 보였지// 한밤,/ 더러운 야전침대에 누워/ 불러야하는 이름들이 있어// 영문도 모르고 죽은 어린 영혼들/ 머리맡에 앉아서/ 정답게 속삭이는 것들// 죽은 이름들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을 잊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불러줄 거지?//

바다눈물손수건 / 임현정
눈물의 농도라면/ 우린 아무데서나 자라/ 잔뜩 늘어난 팔뚝 같은 밧줄에도/ 까무룩 바위에도/ 우린 아무렇게나 자라/ 상습침수지대 우중충 빌라에서 빨래를 널던 언니는/ 언니보다 무른 게딱지에게 속을 파먹혔다/ 걱정마, 금세 다시 차오를 거야/ 우리의 바다눈물손수건// 물난리가 나면 차오르는 빗물로 세간을 닦자/ 사기 밥그릇도/ 벽에 된 비명도/ 공단 블라우스에 밴 땟국까지/ 왈칵왈칵 윤나게// 앞집은 난간 끝 옥탑/ 뒷집은 반지하 셋방/ 내 지붕 위에도 물이 줄줄 새는 눈물장관이 있어/ 슬라이딩하는 빨래비누가 있어// 이불째 끌어내도 몰래 숨어드는 달방 같은,/ 지지리 궁상 빌라에서/ 희게 피어나는 허벅지 같은 거/ 막무가내 아기 울음 같은 거/ 퉁퉁 분 젖 같은 거/ 베란다에 숨어든 달빛 고양이 같은 거// 쇠꼬챙이 같은 인부들이 달려들어도/ 집채 떼가 버려도/ 제 발로는 죽어도 못 나가는/ 별 좋은 공동묘지처럼,// 반쯤 잠긴 눈썹 같은우리들의 굴 빌라가 있어//

나무 위에 고양이 / 임현정
오렌지주스 병을 핥던 때처럼/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었지.// 이 도시의 가로등 불빛은/ 녹슨 피조차 오렌지 주스야.// 언젠가 꽃모가지를 리본으로 묶은 걸 보았어./ 그녀도 그렇게/ 툭툭 팔을 분지르며 곤두박질 쳤지./ 네가 모가지에 칭칭 감아준/ 질긴 전화선/ 난 이 도시의 색소가 좋아.// 이 흥건한 오렌지 빛 핥을 수도 없어/ 먹통처럼 발자국이 남지 않는/ 무서운 길을 네가 지나갔지.// 그녀를 탬버린처럼 흔들던/ 가쁜 숨소리가 사라진 은행나무 아래는/ 둥근 마침표처럼 부드러운 흙이야.// 뾰족한 화살은 노란 중심으로 날아가 박혀. 그러니까/ 그 눈빛은 네 거야.// 잃어버린 물건, 네 가슴팍에 놓고 갈게./ 하얀 장갑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수소풍선처럼 날아가버린/ 털을 곤두서게 하는 오렌지빛 비명도.// 축하해. 야옹//

밭을 사이로 총! / 임현정
구부러진 못처럼 앓아누운 밤이면/ 나를 향해있던 녹슨 쇠붙이들이 밤새 흔들렸다// 그건 당신의 호명// 울타리에 매달린 깡통이며 냄비뚜껑 따위가 살갑게 인사하는 그 밭,/ 노랗게 밑이 든 고구마를 달게 먹었던 것인데/ 당신이 여름내 가꾸던 그 밭에 무성한 기척을 남겼던 것인데// 내가 아는 것은/ 약통을 메고 한뎃잠을 자는 벌레들을 쓸어내던 당신/ 울울한 덫을 심고 벌거숭이 두더지들을 몰아내던 당신/ 깡패의 불온한 맹세처럼 그 구역, 그 끄나풀을 지켜내던 당신// 그래서 난/ 우리가 그 밭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줄 알았는데// 자루 빠진 낫이며 호미를 주렁주렁 매달던 그 어깨가/ 오직 내 것이었던 그 팔뚝이// 내게 총구를 겨눌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가 키운 올망졸망한 숨통들을 겨눌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나는 그 밭이 감쪽같이 우리들의 것이라/ 우리가 밭을 사이로 꼼짝없이 사랑하는 거라/ 명명백백 생각했었는데// 시든 그늘을 걷어내던 그 손으로/ 김이 피어오르는 염통을/ 꼬물대는 새끼들을 꺼내며/ 당신이 싱그럽게 웃는다// 이 지긋지긋한 돼지새끼들,//

다리주점 / 임현정
우리 동네 다리 밑에는 손수레를 개조해서 만든 간이주점이 있다/ 곧바로 뜨건 물을 부어주는 컵라면에/ 짠내 나는 마른 멸치까지/ 하나같이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그중 최고는 한 잔에 백 원 하는 잔술이시겠다// 불콰해진 노을이 별 소득도 없이 귀가를 서두르는 저녁/ 오백 원짜리 커피믹스를 건네는 상냥한 신 사냥반들이 있어/ 머리를 바짝 지진 수줍은 숙녀분들도 다리 밑 소파에 앉아/ 스리슬쩍 딴청을 피워보는 것이다// 늘 오던 손님이 영 안 보이는 날이면/ 별로 섭섭하게 생각도 않고/ 외상값 갚으라고 타박했더니 양지 주점으로 옮겨간 모양이라면서/ 잔술 한 잔 모른 척 띄워 보내는// 고작 삶은 계란 몇 알을 시켜놓고는/ 부끄러문 지갑들도 여기선 한턱 내겠다고/ 허세를 부려보는 것이다// 장마철이면 오갈 데 없는 뒤축들이 모여/ 골동품 라디오만큼이나 한물간 곡조를 흥얼대다가/ 빗방울 시스터즈의 청승맞은 앵콜 공연에/ 눈물까지 찍어댄다는데// 남는 게 없으면 어떠리/ 국방색 전대를 두른 주인 할매도 취중영업 중인걸,/ 누가 손님이고 누가 주인인지 영 헛갈리는 다리주점에선/ 모두 다 세월의 손님인기라//

저수지식당 / 임현정
흠뻑 젖은 사내가 냉장고 앞에 서 있다// 냉장고엔 무른 자두와 한쪽 뺨이 상한 사과// 그가 서성이는 건/ 물바가지를 들고 나오는 늙고 마른 손 때문// 물배라도 채우고 가렴// 먼 길을 짚어온 사내에게/ 식은 두부 한 모/ 내올 새도 없이/ 강바닥 같은 밤이 밀려든다.// 흩어지는 것들의 식사가 그러하듯/ 사내가 마지막으로 들이킨 국숫발이/ 구름의 뒤태를 완성한다.// 돌덩이 같은 음식을 삼키고/ 지상에 남고 싶은 사람// 그가 냉장고 문짝을 붙들고 버틴다.// 왈칵,// 서러운 빗물이 쏟아져 내린다.//

붉은 다라 / 임현정
통에 던져 넣은 붕어들이 바닥을 치며 울었다// 그게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향해 부풀던 부레와/ 밤으로만 흘러가던 수로들이/ 수챗구멍에 버려질 때//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 대신 잡아먹히는 게// 내가 키우던 무른 저수지가/ 당신을 놓치고 만 게// 밤 고양이들이/ 협심증을 앓는 당신의 심장 대신/ 내 심장을 물고 가는 게// 나를 빌어 하루를 연명하는 게/ 나를 버려 당신을 연명하는 게// 얼마나 다행한 불행인가//

양은이 / 임현정
반질대던 상판대기도/ 반짝 솟구친 귀때기도/ 당신을 위한 게 아니야// 불어터진 라면발이나/ 시금털털한 찌개 따위가/ 우리의 심장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을 위해/ 나는 뜨거운 객기로 넘치다가/ 자글대는 애간장으로 눌어붙다가/ 송두리째 태워먹었네// 객혈하듯 탄가루를 쏟아내고 자빠지던 그 수돗가// 컹 짖었던가. 당신// 온갖 냄새가 묻은 나를/ 온갖 손때가 묻은 나를/ 연분홍빛 혀로 핥던 당신// 흙탕물이 튀기는 개집 아래/ 비로소 애타는 밑바닥이 되었네/ 싹싹 핥아도 돌아오지 않는/ 죽은 고 년이 되었네//

가위 / 임현정
처음 가위를 만든 사람은 누굴까// 두 개의 칼날을 잇대/ 한 폭의 어둠을 가르게 한 사람// 치근대는 이승과 지분대는 저승을 잘라내고 싶던 사람// 그토록 아끼던 반달돌칼이 두 동강이 나서 돌아왔을 때/ 세상 모든 거미줄을 거둬 이어붙이고 싶던 사람/ 하지만 차마 못했던 사람// 이승에서 어림없다면/ 저승에서도 글러먹었다면/ 복수하듯 암날 숫날로 만나/ 희희덕대는 지천들 싹뚝, 잘라내자고/ 잘린 다리가 몸통을 향해 꿈틀대듯/ 죽은 꽃가지가 산가지를 향해 묵념하듯// 잠잠히 끌어안을 때마다// 잘려나가는 은빛 지느러미들/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에 놀아나던/ 간지러운 은어새끼들// 지상에서는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당신들을 위해// 그와/ 그녀가// 가위를 만들었다//

사카린 / 임현정
심심산골, 사카린 같은 눈이 반짝이는 거기/ 아궁이 앞에 나란한 도둑고양이나 될까?// 그는 푹푹 콩을 삶고/ 김이 펄펄 솟는 게으른 아궁이를 삶고/ 그가 만든 흙벽돌 같은 메주들이 들보 아래서/ 캄캄한 옹기를 꿈꿀 때 / 그럼 난, 누름돌이나 될까?// 미운 가시내 뒤통수를 후려치듯/ 호두를 까는 사내/ 허리까지 넘실대던 새카만 머리채처럼 곰살 맞은 밤이면/ 씨알 굵은 깍때기 만이 화로를 되살린다네// 눈곱을 떼는 당신의 발치에서 야옹,/ 멸치 대가리 한 줌과/ 닭벼슬 맛 사료/ 싸락눈 몇 점이면/ 천장에 매달린 곶감처럼 방글댈 수 있어요.// 당신에겐 나와 곶감과 로켓건전지를 매단 얌전한 고물라디오 뿐// 우리는 정답게 소멸 중인거죠?/ 양파망 그득한 병세들처럼// 봄이 오기는 하나?/ 이 심심산골/ 고양이네 부엌에// 당신이 도망친 쿵짝쿵짝/ 나라는 꿈속에//

로드 뷰 / 임현정
나무가 꾹 짜낸 뾰루지/ 은행알 흥건한 도로변에는/ 점프하는 그 애가/ 어째서 신호등은 우리 앞에서만 느려지지// 동시에 나타나는 갈색꼬리들도 있어/ 제방 위에도/ 간밤에 내다버린 솜이불 밑에도/ 폭주하던 갈색스틱들이 끼익,/ 꼬리의 습성은 막다른 골목이니까// 생물오징어처럼 젖은 아저씨/ 물고기들은 지느러미가 발이 되는 순간을 기억 할까요/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을?/ 우리가 녹슨 배관을 타고 흘러갈 동안/ 빨판이 모여 입술이 되고/ 다리가 모여 진흙탕이 되는 발악을/ 스티로폼이라도 깔고 주무세요/ 얼음으로 치장한 생선들처럼// 계란찜 같은 들판을 등지고 누군가 숟가락처럼 걸어오네/ 로드 킬 전의 할머니/ 방바닥이 길바닥인줄 몰랐죠/ 혓바닥부터 길바닥인줄은 몰랐다/ 그토록 살벌한 입국심사라니,// 금세 합류할 거예요// 해변에 떠밀려온 조개껍데기의 명단에/ 조약돌의 부드러운 윤곽에// 물고기였던 당신이/ 조심스레 지느러미를 내려놓는 그 해안// 아가미를 닮은 귓바퀴로/ 모든 떠밀려가는 것을 그리워할 어린 포유류에게// 먼 미래에게//

물가 집 / 임현정
콩이 전부인 맛없는 밥도 괜찮아/ 바구니 알들을 따뜻하게 부화시켜주는 엄마/ 본래 꿈은 암수 구분이 있다죠/ 재끼를 까지 못하는 수수한 꿈들은 헐값에 팔린대요/ 동그란 언덕마다 피가 묻어 있어요/ 형제들이 덜 마른 부리를 기댄 흔적// 물가로 내려가는 내리막에서/ 물결 몇 장을 책장처럼 넘기던 그 애가 말끔히 사라져요/ 엄마 품에서 피비린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이곳에선 어떤 징조도 시시해요/ 우리는 피 묻은 깃털이 잔잔히 흩어지는 물가 집에 사니까요// 울음소리만으로 엄마는 우릴 구분한대요/ 사라진 그 애는 조금 낯은 뒤척임/ 동시에 바구니에 던져진 우리는 울음소리가 닮았어요/ 그 애만/ 내 비명을 구분했었는데// 그 애가 사라진 그날처럼/ 엄마가 몇 줌의 사랑을 훠이훠이 던져줬어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내 심장이 엄마의 욕심에 꼭 맞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고마웠어요/ 이렇게 예쁘게 길들여주셔서// 근데 그거 알아요?/ 죽음은 엄마를 꼭 닮았대요/ 마음이 푹 놓이도록/ 뭘 해도 놀라지 않도록/ 아주 꼭 닮았대요//

해파리였던 적 / 임현정
게 껍질 통과해 봤어?/ 근육다발을 건너, 말랑한 눈동자로 솟구치다/ 따끔한 촉수에 속까지 파먹혀 봤어?// 잠들기 좋은 별모양 매트/ 가장 서늘한 밑바닥에 누워 잠잠히 죽어 봤어?// 난 아주 작은 유생이었는데/ 오래 묵을 바위를 찾아 꼬리를 흔드는/ 멍청한 멍게 유생이었는데,// 어쩌다 해파리가 되었는지 몰라// 당신은 여전히 돛대에 묶인 채로/ 꽃다발 같은 빨판이 되었다가/ 언젠가 나를 파먹던 예쁜 꽃게// 우리는 한때/ 물고기였던 적도, 아주 잠깐 꽃게였던 적도,/ 그 꽃게를 녹여먹던 해파리였던 적도 있지,// 이렇게 한 몸이었던 적도 있지// 나란히 갇힌 투명감옥이었던 적도 있지// 우리는 한때 애인이었던 적도 있지// 죽기 직전까지 사랑해 사랑해 악을 쓰던/ 철천지원수였던 적도 있지//

덤프트럭 / 임현정
덤프트럭이 닭집으로 돌진해 간다./ 닭 모가지를 비틀던/ 여자의 모가지가/ 노란 닭발 위로 구른다./ 벽면 가득 환하게 일그러진/ 벼슬무늬 비명들./ 트럭이 시장 안으로 달아난다./ 과속으로 달아나는 트럭은/ 잡히지 않는다.// 슈퍼를 나서던 아이가/ 비스킷처럼 바싹 으깨진다./ 응고된 시간을 실은/ 텅 빈 운전석/ 내달리는 트럭넘버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여길향해달려오고 있거든//

K의 방주 / 임현정
우리가 살아남은 건 어떤 계시가 아니라/ 우리가 요트 족들이기 때문이야// 오늘은 남쪽 바다에 닻을 내렸어// 은박봉지에 담긴 시리얼들이 해파리처럼 떠오르는 곳/ 과일통조림 같은 위안들은/ 더 깊은 곳에 처박혀 있겠지만// 식품창고에서 생수병을 목에 걸고 잠든 사내를 봤어/ 장기 투숙객이 된 사내는 너무나 평화로웠지/ 과자봉지처럼 가벼운 사내의 근심들이 사방을 떠다녔어/ 앞서가던 다이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줬어/ 영주권 나온 거/ 축하해!// 운 좋으면 침몰된 군함도 만날 수 있어/ 우리는 하얀 제복을 입은 담배꽁초들을 꺼내놓고/ 방금 죽은 미래를 쑤셔 넣는다// 영원히 침몰하는 행운, 네게 줄게// 잘 마른 돛처럼 바삭한 스낵을 먹으며 감사해/ 아직 남은 우리들의 유통기간을/ 만기된 보험증서 같은 나날들을// 가랑이에서 푹푹 피를 흘리며 소녀들은 사탕껍질처럼 웃고// 오늘은 비린 회를 먹기에 아주 좋은 날//

티라노의 앞발 / 임현정
먹잇감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뒷발과/ 맹목적으로 물어뜯는 이빨을 위해/ 기꺼이 태어났지// 늪에 잠긴 어린 것을 건져 올리기도 전에/ 앓다 죽은 애인을 부둥켜안기도 전에/ 죽은 발톱처럼 피어났지// 뭐였더라? 그 이름/ 훔쳐 먹은 알처럼 목구멍을 틀어막던 그 감정/ 슬그머니 넘어가던 노른자위보다 못한, 아무튼// 심심한 이빨에게 죽은 가족 따위/ 질긴 가죽만도 못함/ 싱싱한 지갑만도 못-하암// 썩은 고깃덩이를 베어 물며/ 크앙크앙 방귀를 뀌어대는 허풍쟁이 똥구멍에 어울리는/ 참으로 소소한 앞발// 곧 무능한 악수로 진화할/ 곧 캄캄한 저의로 발화할/ 찜찜한 앞잡이// 그래봤자,/ 겁쟁이 백기가 될 거라며/ 새파랗게 질릴 욕설이 될 거라며// 거추장스럽게 들러붙는/ 내 앙증맞은 거시기가 될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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