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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언니 의자 / 최아란

부흐고비 2022. 6. 8. 08:17

큰애 친구 중에 한참 어린 동생을 둔 아이가 있다. 둘은 필시 그런 공통점으로 친해졌을 것이다. 여섯 살, 일곱 살 손위의 맏딸로 살아가는 공감대 같은 게 분명 있을 테니까. 주말에 둘이 함께 참여하기로 한 학교 행사의 세부 일정이 나왔는데 저녁 늦게야 끝나겠더란다. 우리 딸이 걱정 삼아 너무 늦는 거 아니냐고 말을 건네니 그 친구 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난 좋아. 집에 있으면 동생 돌보기 힘든데 잘 됐지 뭐,”

아아, 장녀의 고단함이여, (참고로 우리 딸은 동생이랑 주말에 붙어 지내는 게 좋다고 말해서 엄마를 안심시켰다. 아아. 장녀의 이 후덕한 마음 씀이여.)

언니, 누나라는 말에는 엄마를 흉내 낸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편안한 의자를 닮은 글자 니은이 단어의 중심에 놓여 새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안락하다. 엄마만큼 묵직하지 않고 가볍고 발랄하여 동기간의 즐거움까지 느껴진다. 엄마, 어머니에 등장하는 미음이 좀 더 타협 없이 안전한 네모 요람인 것과 비교된달까.

의자가 되어주는 언니에게 기대어 자매가 도란도란한 모습을 떠올려보면 손아래의 어리광도 함께 떠오른다. 동그랗게 울리는 이응 받침 때문인지 동생이라는 단어에는 귀엽고 앳된 느낌이 있다. 배냇머리 보드라운 머리통이 떠오르기도 하고, 죄 없이 말간 두 눈이 생각나기도 한다. 진득하고 신중하여 귀여움 떠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눈이 큰 내 동생의 혼자 먹는 저녁밥을, 나는 아마 두고두고 안쓰러워해야 하리라.

오빠라는 단어가 아빠 버금이라는 데서 나왔을 거라는 상상은 쉽게 해 볼 수 있다. 나는 연애 때부터 결혼 초까지 남편을 오빠라 불렀는데, 그가 겨우 두 살 차이 가지고 얼마나 어른 행세를 했는지 모른다. 뭐든 오빠가 알아서 해준다며 보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친가 외가 통틀어 맏이였고, 본보기였고, 기대치였던 내가 그런 듬직한 오빠에게 홀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육 남매 막내였던 그는 이년 여간 오빠 노릇을 옹차게 하더니 지금은 쿨하게 마누라를 믿고 따르는 날이 많다. 물론 듬직한 아빠인 것은 틀림없다.

아빠, 아버지에 나오는 비읍은 커다란 바구니를 닮았다. 넘치지 않게, 새 나가지 않게 뚜껑까지 달려있는 튼튼한 모양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꾸리고 푸는 우리 남편 출장 가방 같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애 둘 아빠가 된 일본지사 직원이 40년 상환으로 제집을 지었다고 하자 남편은 그게 다 자신의 빚 같다고 했다. 자기 지략과 건강과 패기로 회사를 건실히 이끌어야 하니까, 그래서 우리 식솔에다 직원들 가족까지 합친 대식구를 먹여야 하니까. 2층짜리 주택 한 채가 또 그렇게 가방에 실린다.

대신 들어줄 수 없는 그 무거운 가방을 뒤로 하고 나는 우리 큰애의 의자가 더 마음 쓰인다. 내가 장녀라서, 나를 닮아서, 나보다 더 마음결이 고와서 그 넉넉한 니은 자 두 개에 정작 자신은 앉아 쉬지 못할까 봐. 동생에게 내주고, 친구에게 내주고, 오가다 만난 꼬리 잘린 고양이에게까지 내주는 착한 아이인데, 염치도 없이 나까지 가끔 그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걸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늘 부모의 작은 의자였다. 제 고개를 가누지 못하던 시절부터 나는 잠깐씩 그 의자에 앉아 하소연을 늘어놓곤 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라는 레퍼토리는 지치지도 않는다. 엄마가 다 너를 사랑해서, 라는 말도 단골 멘트다. 그때마다 아이는 제 의자의 크고 작음을 개의치 않고 나를 안락하게 보듬어 주었다.

나도 그런 언니 같은 엄마가 되어야 할 텐데.

빈틈없이 단단하고 반듯한 요람의 경계를 좀 느슨히 하고 들락날락 편하게 오고 가면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그런 엄마. 아이의 수다가 끝이 없는 우리 집 식탁이, 그러고 보니 미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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