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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머니의 장醬 / 변종호

부흐고비 2022. 6. 10. 08:35

감은사지 주차장에 왜소한 할머니 두 분이 앉아있다. 그을린 얼굴에 풋것을 뜯고 다듬느라 손톱 밑은 시퍼렇게 물이 들었다. 올망졸망 바구니에 담긴 것이라야 쑥 달래 머위 원추리가 있고 작은 유리병에는 누런 된장이 담겨있다.

“나물 사 가이소”라는 할머니 말씀을 귓전에 얹고 폐사지를 둘러본다. 역병으로 찾는 발길이 뜸한데도 맥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한 할머니가 서른여섯 해 전 이승의 끈을 놓으신 어머니로 겹쳐진다.

오래 길들어진 탓인지 된장을 유독 좋아한다. 그것도 어머니가 담았던 그런 된장이 입에 맞는다. 대가리와 똥을 떼어낸 다시 멸치 대여섯 마리에 어슥어슥한 썬 무, 청양고추, 대파에 된장 한 숟갈을 넣고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여낸 된장찌개는 매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게다가 상추쌈이나 풋고추도 들척지근한 쌈장보다 담백하며 짭조름한 날된장에 먹어야 제맛이다. 삶은 나물무침에도 된장과 들기름은 최상의 궁합이다.

된장을 구하러 장맛 좋다는 집을 찾아다녔고 때론 여행지에서 맛을 보고 사들였다. 얼핏 보면 어머니를 닮은 할머니께 여쭤봤다. “할머니, 장맛 좀 볼 수 있을까요.”, “하이고 먼 소린동 딘장이 딘장이제 무신 맛을 보노” 예상 밖의 대답이다. 하긴 마트도 아니고 맛볼 수 있냐고 여쭤본 게 무리였다. 실은 그냥 사들인 된장으로 두어 번 낭패를 보기도 했다.

머위와 달래가 담긴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서려니까 할머니는 자글자글한 주름 손으로 병뚜껑을 돌리지만 꿈쩍도 않는다. “우예 이카노 이 따까리 좀 열어 보이소” 받아든 된장 병의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콩알만 한 된장을 찍어 내미는데 망설여진다. ‘맛없으면 어쩌나’ 먼저 냄새를 맡아본다. 된장 특유의 냄새가 좋다. 조심스럽게 입에 넣고 맛을 보니 목울대가 뻐근해진다. 감동이다. 영락없는 어머니의 장맛이라 너무 반가웠다. 값도 묻지 않고 두 병 다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는 장모님이 된장을 주셨다. 어느 해는 맛있고 어떤 해는 향은 그럴싸한데 떫은맛이 나기도 했다. 장독에서 햇볕도 쬐고 맑은 공기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냉장고에 갇혀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장모님은 해마다 된장을 싸주신다. 아내는 내 눈치 보기 바쁘다. 아직 남았는데 다 먹었을 거라 가늠하시고 담아주니 난감하다.

워낙 깔끔하셨던 어머니의 된장 만들기는 콩 타작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도리깨질에 사방으로 도망갔던 콩을 모아 키로 까부르며 콩깍지랑 썩은 콩을 골라내고 볕 좋은 날 멍석에 펴서 바짝 말려 골방에 간수하셨다. 동짓달이면 콩을 서너 번 깨끗하게 씻어 불린 콩을 가마솥에 안쳤다.

불을 지피는 땔감부터 달랐다. 평소에는 후루룩 타버리는 강냉이대궁 들깨섶 콩깍지 솔가지 싸리나무를 때지만 메주콩을 삶을 때만큼은 헛간에 쌓아놓고 아까워 손도 못 대던 막내아들의 장작을 아궁이 속으로 가득 밀어 넣으셨다. 솥에 김이 오르고 소댕이 눈물을 흘리노라면 연기가 매워서인지 아니면 가족을 떠난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인지 어머니는 앞치마로 눈가를 자주 훔치셨다.

칙칙거리며 김을 내뿜던 솥이 푸르르 끓어 넘치면 타던 장작을 빼내 불 조절을 하며 우리네 삶이 늘 그러하듯 기다림의 변주처럼 서너 시간은 뜸을 들여야 했다. 온 집안에 콩 냄새가 푹 밸 즈음이면 콩들은 딱딱했던 시절의 기억을 온통 하늘로 날려버린 채 푹 무르도록 내려놓아야 했다.

짚으로 만든 틀로 시렁에 매달아 놓으면 쩍쩍 갈라지는 아픔도 혼자 감당해야 했고 틈 속까지 파고드는 곰팡이로 쿰쿰한 냄새를 풍겨가면서도 수도 정진하는 승려처럼 메주는 해탈을 해야 했다. 한여름 도랑가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감자도 이승의 허물인 양 훌훌 벗어던지고 수많은 헹굼으로 존득거리는 감자떡이 되지 않던가. 메주 역시 뜨거운 불 찜질과 누룩곰팡이로 발효를 거치며 밭에서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오직 맛있는 장이 되기 위한 일념으로 묵언 정진하는 스님처럼 기나긴 하안거와 동안거를 반복하는 셈이다.

정월이면 어머니는 의식을 치르듯 엄숙하게 장을 담으셨다. 왜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곡식 중에서 자식을 위해 유일하게 잘해줄 수 있는 것이 장醬뿐이라 그랬을 것 같다. 우선 잘 뜬 메주를 떼어내 수수 빗자루로 갈라진 틈까지 먼지와 곰팡이를 털어내고 도랑으로 이고 가 짚수세미로 묵은 때를 벗겨냈다. 어머니의 장 담는 풍경이 여느 집과 다른 것은 지나칠 정도로 쏟는 어머니의 정성과 염원이었다.

소금은 2~3년 묵혀 간수를 뺀 천일염이어야 했고 남이 일어나지 않은 신새벽에 대여섯 번의 물을 길어다 담아야 직성이 풀리셨다. 장맛을 좌우하는 것은 깨끗한 물, 간수를 뺀 소금에 따가운 햇볕, 맑은 공기와 서늘한 바람, 담는 시기가 한 몫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잘 띄운 메주가 성패를 가늠했다. 결벽증에 가까웠던 어머니는 청결은 기본이요, 얼마나 장에 공을 들였는지 마치 도공이 예술혼을 담아 빚은 도기를 불가마 속에서 구울 때 그러하듯 간절한 염원과 겸손함에 기다림까지 담아서였는지 된장 맛은 동네에서 단연 으뜸이라는 아주머니들의 칭송을 들었다.

천일염이 녹아든 염수에 몸을 던진 메주덩이는 종일 햇볕을 받아들이며 발효와 숙성을 가슴에 새긴 채 본연의 성정을 바꾸느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짜디짠 소금물을 속속들이 들이키며 말간 소금물이 까맣게 되도록 띄우고 삭힌 것을 전부 토해내며 아픔까지 곰삭혀야만 했다. 간장을 걸러내고 장독에 꼭꼭 눌려 담긴 건더기는 두어 평 장독대에 위리안치 된 채 하얀 소금 모자를 쓰고 또다시 고단한 수행을 견뎌내면서 잘 익어야만 비로소 어머니의 장醬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된장찌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는데 어쩌자고 아침부터 눈물은 고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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