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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이강 시인

by 부흐고비 2022. 6. 15.

김이강 시인
1982년 여수에서 출생. 한양대학 국문과 졸업 동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

2006년 《시와 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타이피스트』가 있음.

제2회 혜산 박두진 젊은 시인상 수상.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 김이강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손을 깊숙이 묻어둔 채 한동만 오래/ 그 자리에 그래도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말들 끝에 찻잔을 비우고 헤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들로 어떻게/ 대낮의 거리 한복판을 버티어낼까 망설이며/ 길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4/ 어느 거리에선가,/ 당신은 누구일지 모를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가느다랗고, 비틀리는 누군가를/ 그리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독차가 사라진 거리 / 김이강
방과 후에는 곤충채집을 나섰지만/ 잡히는 건 언제나 투명하고 힘없는 잠자리였다// 우리는 강가에 모여 잠자리 날개를 하나씩 뜯어내며/ 투명해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익사한 아이들의 몸처럼 커다란 투명/ 정환이네 아버지 몸처럼 노랗게 부풀어오르는/ 투명 직전의 투명// 우리는 몇 번씩 실종되고 몇 번씩 채집되었다가/ 강가에 모여 저능아가 되기를 꿈꾸는 날도 있었지만/ 우리의 가족력이란 깊고 오랜 것이라서/ 자정 넘어 나무들은 로켓처럼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아침이면 정확히 찾지해 있곤 했다// 몇 번의 추모식과 몇 번의 장례식/ 몇 개의 농담들이 오후를 통과해가고/ 낮잠에서 깨어나면 가구 없는 방처럼 싸늘해졌다/ 우리에게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방과 후면 우리는 소독차를 따라다니며 소문을 퍼뜨리고/ 우체부를 따라다니며 편지들을 도둑지랗고/ 강가에 쌓인 죽은 잠자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는 드디어 형식적 무죄에 도달할 것 같았고/ 우리는 끝내 자정이 되면 발에 흙을 묻힌 채 잠이 들었다// 몇 번의 사랑과 몇 번의 침몰도/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세상 끝 어딘가에서 착지하고//

봄날 / 김이강
옥상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폐타이어였다 누가 저걸 저곳까지 옮겨다놓았을까 나는 막연히도 아버지의 은밀한 행동이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가 과연 저것을 번쩍 들어 올렸을까 그가 근육들에 의지하며 계단을 올랐을까 허리를 굽힌 채로 땀을 흘렸을까// 5시 44분 이상한 시각이었다 고양이가 아직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아무런 소리도 없음을 듣는 순간 혜화는 엄마가 불러서 집으로 갔고 나는 옥상에서 홀로 타이어 위에 앉아 있다 해가 지고 있다 아무도 날 부르러 오지 않는다 아무도 날 부르러 올 필요가 없다 난 우리 집 옥상에 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도 옥상에 앉아 있는 날 상상하지 않는다 처마에 제비집이 있었지 나는 귀신이 되어버린 것만 같고// 아버지가 무언가를 번쩍 들어 올린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 타이어는 아버지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 타이어는 우리집 자동차보다도 오래되어 보인다 정체불명의 오래된 타이어에 앉아서 해가 지는 것을 본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이곳을 떠났고 깊은 밤이면 돌아오기도 한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섬뜩하고 그런 아이들의 집마다 모두 옥상이 있지만 폐타이어가 올려진 집은 우리 집밖에 없고 그렇지만 우리 집은 얼마나 평범하고 조화로운 녹색 철제대문을 가졌는가// 나는 계속 상상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시계를 보았고 시간은 시계 바깥에서 집을 짓고 그런 곳으로 아이들이 한 명씩 옮겨지고 있는 날들//

마르고 파란 / 김이강
*/ 아무튼 간에 너의 목소리가 나직나직하게 귀에 걸려 있다/ 우동 먹다 말았어//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이라니,/ 이런 묘사는 너무 외로워//
*/ 처음엔 모든 게 크고 멋진 일이지만/ 나중엔 그런 것들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거라고/ 쓸쓸히 말하던 사람도 있었지/ 그러니, 부디 잘 살아달라고 당부하던/ 마르고 파란 셔츠 입은 사람을 묘사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헤어진 애인처럼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
*/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
*/ 너를/ 당장에 찾아가려 했어/ 그렇지만 잠깐 멈춰서/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려가고 있다, 너에게//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알고 있는/ 어떤 당신들에게//

푸른 저녁 / 김이강
푸른 저녁에 대하여 생각하느라/ 숙제를 도저히 못 하겠는 것이라/ 푸른 저녁을 쓰고/ 숙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푸른 저녁/ 이렇게 네 글자를 써버려야지/ 그리고 숙제를 해야지// 숙제를 빨리 해버려야지/ 그리고 푸른 저녁에 대해/ 실컷 생각해야지/ 생각하다 푸른 저녁이 되어버려서/ 나를 생각해야지/ 나를 생각하다가/ 나로 돌아오지는 말아야지// 숙제는 묵은 문제/ 묵은 문제은 묵혀서 먹어야 제맛이니까/ 그렇지/ 푸른 저녁을 실컷 생각하다가/ 푸른 저녁이 된 다음에/ 숙제를 먹으면 되렷다//

네가 잠든 동안 / 김이강
드문드문 너를 보는 일/ 그리워하는 일/ 유행이 지난 일// 모두가 퇴근한 신문사 빌딩의 한 구석에서 너는 신문을 오려 붙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취미가 아니라 밥벌이라고 말했던 일 신기하게도/ 스탠드 빛이 너의 구역 내에만 머물던 일// 아직도 그런 일이 밥벌이가 되느냐 묻자/ 신기하게도 아직은 그렇다고 말하던 일// 너의 큰 키를 가늠해 본 적 없지만/ 너는 더 자랄 것 같았고/ 좁은 구역에 쏟아지는 조명이 뜨거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묻지 않았지/ 그 뜨겁고 차가운 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을// 너는 읽다 만 책을 펼친 채로 엎어 두고/ 그 옆에서 엎드린 채 잠이 들어// 내가 오는 줄도 가는 줄도 모르고/ 시계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 세상이 끝난 것도 모르고// 엎드린 채로 영영 자라고 있다// 너는 길게 구부러진 마디들이 되고/ 공룡의 뼈처럼 거대해지고/ 규칙적으로 호흡하며 성벽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엎드린 채로// 네가 잠든 동안/ 네가 잠든 동안//

기우 / 김이강
이해할 수 없는 여름이었다. 여행지 도로에 운동화 바닥이 녹아서 눌어붙은 일. 그것이 남긴 발자국들이 과자처럼 길을 안내해 준 일. 결국에는 지나가는 버스에 올라타서 잠이 든 일.// 부두에 앉았을 때 당신은 그 낡은 운동화 한 짝을 테트라포드 틈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그사이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았는데 그것은 저 아래로 무엇인가 다시 솟아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뒤편에는 중년 부부가 개를 데리고 벤치에 앉아 있다. 아름다운 것은 왜 아름다운가. 당신이 한번 말해 봐. 당신이 좋아하는 것. 그런 법칙 말이야.// 그러자 당신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일. 혼자만, 그럴 수는, 없어. 방파제의 어둠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을 때 희고 푸르게 드러난 당신의 등을 슬며시 밀어보고 싶었던 일. 걱정 마. 몇 시간 후엔 도심에 있는 타워로 가서 커피도 마시고 운동화도 사자.// 얼마후에 우린 예정되었던 일처럼 비행기를 놓치게 되고 공항에서 여러 시간을 체류하게 된다. 그저 몇 시간일 뿐이었는데 여름이 자신의 꼬리를 감추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서늘한 식당에서 / 김이강
서늘한 식당에서 기다렸다 우리의 다음 책은 무엇일까 나는 네가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깨어난 네가 이곳으로 더 늦게 걸어오길 네가 오지 않는 동안 우리가 가진 모국어의 그늘이 책들 사이로 스며든다 모국어를 함께 쓴다는 것 차라리 모자를 함께 쓴다고 할까// 서늘한 곳에서 나는 너를 기다리고 너의 모자를 기다리고 태양이 멀어지고 자전거가 지나가고 기다란 옷자락을 펄럭이는 일 기다란 생각 속에서 포크나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일 소리들이 느릿느릿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 이 식당은 꼭 흐린 꿈속 공간 같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데 모두가 대화하고 있어// 나는 몸을 펴고 걸어 본다 서늘한 곳이 나를 기다린다 내가 돌아오기를 조금 늦게 오기를 기다릴까 종업원들은 나에게 자꾸만 물을 더 마시라고 말한다 물이 끝없이 우리를 기다릴지도 몰라 나는 물을 마시다 말고 찢어서 뭉쳐 놓은 생각 위에 뿌려 준다 너는 언젠가 자랄 거야// 흐린 꿈속에서 헤매는 동안 너는 조금씩 선명해지고 우린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지만 오늘과 내일의 사이, 그런 것이 있다면 오늘과 내일을 모두 먹어 치워 버리고 말겠지 그러는 사이에서 너는 다시 흐려지면서 다가오는 것// 늦어지는 사이에 이미 지나가 버렸던 것들이 창밖에서 반짝이고 있다 나는 네 몫의 식사를 주문해 놓는다//

겨울은 길었고 우리는 걸었지 / 김이강
더이상 수선을 할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코트가 내겐 한 벌 있지/ 짙은 녹색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산책을 나가야지/ 오늘은 긴 잠을 잤어/ 오래 뒤척이지 않고 멈추지 않는 꿈을 꾸면서/ 등이 아프고 피곤해/ 영화를 보고 싶어/ 상암으로 가서 <몽상가들>을 보던 날을 떠올려/ S양의 울음을 보았던가/ 바람이 많이 불어왔지/ 그날도 코트를 입었어/ 낡아버린 코트// 모든 게 끝이 있지/ 응 모든 게 끝이 있지/ 스무 살처럼 푸른 나이도 푸른 관념도 푸른 희망도/ 응 모두가 희미해지지/ 붉은 고통도 선명한 사랑도/ 학교 안 커피집에는 에스프레소 새 컵이 나왔어// 조그만 에스프레소 컵을 나는 좋아하지/ 흑빛도 쓴맛도 저 눈 감은 사람도/ 캠퍼스의 밤은 아름답지/ 나는 여름을 기다려/ 환상의 섬에 갈 거야/ 해변이 아담하고 인적이 드물다는/ 마을에서는 대마를 기르고 해 지는 바다에 떠 있다는// 버스에서는 잠이 들어/ 나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기대어 잠드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고도 생각해/ 쓸데없이 우는 것이 미안하다고도 생각해/ 동물원에는 가지 못했어/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도 못 봤어/ 오늘은 긴 잠을 잤거든//

호숫가 호수 공원 / 김이강
죽은 나무 이파리들이 굴러다니는 호숫가를/ 지나면 식당이 있다고 했다// 모자를 쓴 그와 내가 만나/ 손을 잡고 걷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왜 모자를 썼어?/ 그냥./ 그냥?/ 아니, 자꾸 머리칼이 어디로 사라지잖아.// 나는 그의 손을 만져본다/ 우리는 손가락들이 겹겹이 늘어나 자라는 것 같다// 걸어도 호수는 보이지 않지만/ 여기는 호숫가 호수 공원// 여길 지나면 식당이 있는 거지?/ 응. 울타리를 둘러 가면 천천히 보인댔어.// 우린 천천히 손잡고 천천히 걷는다// 여기 어쩐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내가 어깨를 움츠리자 그도 어깰 올린다// 햇살이 털실뭉치처럼 굴러다니는/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그의 얇은 몸이 이파리처럼 걷고 있는데/ 머리카락이나 바람이나 깃털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순간이었을 때/ 그가 햇빛 사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울타리 너머에서 슬며시 호수가 어른거리고 있다/ 자라난 손가락들이 툭 툭 쏟아지고 있었다// 그저 레코오드판 바늘 튀어오르듯*/ 어느 오후에 일어난 일이다// 마지막 남은 손을 잡은 채로// 우린 드디어 식당에 도착하고/ 근사한 저녁을 시작한다// 테이블 위의 작은 촛대에/ 불이 켜진다//
* 기형도의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 오르듯이」에서.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 김이강
여려 겹의 꿈으로부터 여러 번 탈출에 성공한 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번 것은 내 꿈이야.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가 없었고. 검고 하얗고 고요한 너의 윤곽 안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늬를 접었다가 펼친다.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눈을 감는다. 나는 네가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너의 목소리 속에서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말이 없고 너는 눈을 뜨지 않고 너는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돌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네가 밀려드는 바다. 그런 바다는 새롭게 쓰여지고 괴로운 역사처럼 거듭되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눈을 감으면 밀려들어 온다./ 나는 이 꿈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우리의 숲은 끝나지 않는다 / 김이강
그해 여름에 우린 좋았어요 아무것도 오지 않았죠 비도 눈도, 매주 한 번씩 과일과 채소를 배달해 주던 사람도, 다음 주말엔 오겠다고 전활 걸어온 이모나 고모, 삼촌들도// 깊은 곳도 아니었는데 우린 꼭 그 숲에 갇힌 사람들처럼 식량을 아끼고 전기를 아끼고 수도를 아끼며 지냈어요 아버지와 동생들이 산책을 나가고 나면 이제는 쓰임이 없는 우물 앞에 서서 당신과 난 꼭 물이 차오르진 않았나 확인을 했죠 그건 우물이 아니라 깊은 덫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우린 나중에 이야기했어요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우리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동물들이 슬쓸히 죽어가고 있을지 모를// 여름이 한창인데도 당신은 겨울을 걱정했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너무 얇지 않느냐고 나는 꼭 성인처럼 당신께 말했어요 무심해야 단단해질 수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동생들과 돌아온 저녁이면 가방을 풀어 몇 가지 열매들을 꺼내 놓으며 그날 본 길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북쪽의 자작나무 숲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길이 여러 갈래로 변하는 착시가 생긴다든지, 남쪽 관목 숲으로 난 길의 흔적은 바다 방향으로 흐른다든지, 그런 것들을 몰라도 우린 언제든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하곤 했죠 아직은 모든 것이 남아 있는 여름// 그 무엇인가 올 것도 같았는데 당신은 단지 비를 기다렸나요 전설처럼 이 숲에 남아 쓸쓸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버지가 오래 다듬어 놓았던 길로 걸어 나가서 수북한 식량들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생각했어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고 모두가 단단해져 가는 동안 오로지 엷은 피부의 당신만이 이토록 수북하게 마음을 들여 이 여름을 연장하고 있다고// 어느 날 꾼 꿈속에서 우물 속으로 들어간 당신은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저 깊은 바닥에서 외쳤죠 우리의 숲은 끝나지 않는 것이란다, 끝나지 않는 동안 숲이야. 잠에서 깨었을 때 처마에서는 고여 있던 빗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어요// 젖은 땅에 선 당신의 얼굴/ 좋았다고 이야기하게 될//

침수 / 김이강
어찌보면 전공투 대원 같기도 한/ 다큐멘터리 화면처럼 앉아서 당신은 말하네/ 그저 이것저것/ 헤엄치는 법에 대해/ 크레인 내부와 바깥에 대해/ 어떤 견딜 수 없는 감정에 대해/ 멈칫하는 순간과 두통의 시간에 대해/ 숨을 참으면 사라지는 납작한 평화와/ 바이케이드 뒤에 나타나는 망망대해와/ 잠수교처럼 앉아서 당신은/ 왜 그렇게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나요/ 비 내리기 이토록 모두가 순조롭게 잠겨들어가는데/ 상상 없이 말을 한다는 건/ 어딘가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일까// 어찌보면 다른 대원 같기도 한/ 다큐멘터리는 불가능한 화면처럼 앉아서 당신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곳에 빠져 말한다/ 그저 이것저것/ 침몰과 침수와 광장과 사업은/ 어째서 다 물일까요/ 불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물의 시대가 있는 걸까요/ 기교 없이 말하네/ 메워지지 않는 하품을 하네/ 이 구간이 아니라면 다른 어딘가에서 당신은 침묵할 수 있을까// 올림픽대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 빌린 책은 다음에 줄게요/ 더 있어도 괜찮아요/ 당신은 일어섰다가/ 다시 앉는다//

허물어지는 오후 / 김이강
오후가 깊어지자 나는 먼지투성이 다락이 되었다/ 한없이 기다란 얼굴로 흩어진 양말들을 한짝 한짝/ 주머니에 담아 넣고 고요하게 공기를 불러 들였다// 헝클어진 겨울과 엇갈린 그림자들이 기울어가면/ 거위를 쫓아다니는 꼬마들의 거리에는/ 오후 해가 더욱 깊숙이 그늘을 만들었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평상을 치고 저무는 해를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정박아 소년 절름발이 떠돌이 개/ 나직한 얼굴들이 마을 어귀를 에워싸고// 손 때 묻은 아빠의 법전들 먼지 자욱한 서가에도/ 늦저녁 밥상이 한 상 올라올 듯하다/ 흩어진 페이지들은 들추어 낼 때마다 허물어지고// 나의 공기들은 조그맣게 춤추는 검은 실루엣/ 시린 노을 속 헐벗은 왈츠가 되어/ 비탈진 시간을 맨발로 걸어갔다//

혜화동, 테라스 작업 / 김이강
머리가 조금 벗겨진 에릭은 턱을 괴고 있을 때가 많다.// 에릭은 그 책을 보며 놀랐다. 왜 나에게 이런 걸 주는 거야? 그런 표정이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 그걸 잘 찾지 못했다. 그냥 선물이야.// 그것은 어느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문학 계간지였다. 에릭의 표정을 보고서야 나는 몇 개의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글이 인상적이었어. 이런 이름도 인상적이지.// 인상적이라니? 그런 표정을 누르는 표정으로 그는 유심하고 무심하게 내 손끝을 보고 있다.// 이 손을 그만 치워야 하겠지. 생각하지만 그것은 계속 간다. 느리고 지루하게. 점자책을 읽는 것처럼 한없이.// 모든 것이 서툴러져 가는 동안/ 에릭이 앉은 의자 모서리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다음은 에릭의 차례일 것이고, 다음은 내 차례가 될 것이다./ 용해되지 않는 분말로 남아서/ 우린 어떻게 될지.// 나는 드디어 책을 덮는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에릭이 방전되고 있는 것을 본다. 가을이 넓어져서 곧 우주가 될 것 같다. 밀도가 낮아진 공기가 서늘하게 우리 사이로 밀려들면 에릭의 가죽 점퍼도 눈에 띄지 않게 수축해서 색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런 것이 전부인 날들./ 맥주와 커피를 동시에 시켰다. 날은 미세하게 흐리고 딱딱하다. 이런 날씨엔 아무도 테라스에 앉지 않는다. 아직 턱을 괸 그것이 마지막까지 테라스에 남아 있다.//

그곳에 가지 못한 날 / 김이강
내가 그곳에 가지 못한 어느 날/ 아카시아 등나무 아래서/ 밤의 횡단보도에서/ 졸음을 참으며 기다리던 너를 지나친 날// 네게 줄 것을 찾지 못해/ 당분간 너를 못 본 척하기로 마음먹은 날/ 지하철 역사에서/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위해 고개를 숙여 주는 너의/ 머리 목 손 발 시계 가방을/ 마음 놓고 바라보기도 하던 날// 투명하게 앉아 있는 너를/ 끝내 찾지 못하기도 하던 날// 마침내 우리가 서로를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어느 날// 옆구리에서 파닥이는 것이 있어 고개를 돌리니/ 털이 길고 반짝이는 기러기들이/ 쏟아져 나와 날아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 아픈 뼈를 기러기에게 주고/ 싱싱한 뼈를 돌려받는 꿈을 꾼다// 싱싱한 기러기가 된다//

안개 속의 풍경 / 김이강
거대한 손이었던가?/ 아님 공을 받치고 있는 손이었나?/ K가 묻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손도 아니었고 설령 손이었다 해도 그것이 공을 받치고 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생각할수록 그것은 손이었음이 분명해지는 것 같고 그 거대한 것 위에 그보다 더욱더 거대한 공이 한 덩어지쯤 올려져 있었다 해도 어색할 까닭이 전혀 없게 여기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거대한 것이 정말 손이었다는 얘기지?/ 우린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날이 기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정거장 가는 길 / 김이강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도시를 달린다 양파를 얻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도무지 정거장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건다 엄마, 거기가 어디라고 했었죠? 예, 양파 얻어오라고 하셨잖아요? 엄마에게 답을 듣고 끊었는데도 달리는 버스에서 내릴 수가 없고 벨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다시 전활 걸어볼까? 맞은편에서 오는 버스 기사가 우리 버스 기사를 향해 손을 올린다./ 낮에는 구름을 구경했는데 밤에도 구름이 보여서 손을 흔들었다//

아마츄어리즘 ㅡ무릎 / 김이강
오늘따라 모두가 내게 길을 아무렇게나 알려 주었어요/ 그런 때에 길을 헤매며 드는 느낌은/ 경멸에 찬 시선을 은밀하게 받는 느낌과 비슷해요/ 하지만 따뜻한 맥주를 마시고 지금은 편안히 쉽니다/ 늙은 눈동자들이 어깻죽지에서 풍성하게 피어오르고 있어요/ 나는 뚜껑을 덮습니다/ 지금은 편안히 쉬고 있으니깐요//

바람 부는 날에 우리는 / 김이강
바람 부는 날에 알게 되었다/ 슬픔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에 대하여// 고요한 소용돌이에 대하여/ 줄을 풀고 떠나가는/ 때 이른 조난신호에 대하여/ 삐걱삐걱 날아가는 기러기들에 대하여/ 아마도 만날 것 같은/ 기분뿐인 기분/ 아마도 바위 같은/ 예감뿐인 예감// 어디선가 투하되고 있는 이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구부려도 펴도 나아지지 않는,//

여름 정원 / 김이강
그의 허리에 묶여 있던 리본이/ 잎사귀 그림자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벤치에 앉아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장마 같고// 우린 산더미처럼 쌓인 이야기들을 향해 걷는데/ 그런 것들은 항상 비가 온 후의 물방울들 같고// 가까운 미래들이 반음계씩 내려가면/ 다시 이 숲에 이르게 된다// 그가 돌아서서 벤치로 왔을 때/ 작고 꿈틀거리는 달팽이 같은 걸 상상하며 손 내밀었을 때// 내게 올려줄 것이/ 그저 맨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온 여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손을 맞잡은 숲의 계단은/ 기하학적으로 겹치었다가 분열하는 것이었는데// 반도네온처럼 사뿐히 늘어나고 나면/ 다른 세계의 무릎 위로 옮기어질 일만 남은 것 같고// 여름은 오고/ 잎사귀는 검고// 벤치에 앉아 이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아직 이르지 못한 이야기 같고// 옮기어진 달팽이를 오래 구경한다/ 그가 내게 손을 뻗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했지만 / 김이강
당신이 사준 책상엔 서랍이 달려 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가 느리게 닫히는군요/ 내부는 눈부신 빛깔의 자작나무예요//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 사실은/ 슬며시 비난했던 그 스피커도 아주 탁월한 안목이었어요// 부드럽게 느리게/ 누워 있으니 좋군요// 흩날리고 있어요/ 구두에 쌓이기도 하는군요 바깥은// 거대한 수거함 내부 같은 밤/ 누군가 남기고 간 짐들이 빈 거리에서 기어나오는 밤// 고급 레일을 사용한 덕분이겠죠/ 눈은 멈추지 않고 오래 내립니다// 오늘 저녁엔/ 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 것이/ 있어서 좋군요//

바흐 이덴 / 김이강
새벽에 바흐 이덴은 산책을 나섰다.// 그는 경찰들이 서 있는 성 아래를 지나 구 시가지를 향해 걸었다. 밤하늘에 덮인 먹구름 사이로 더 짙은 하늘의 빛이 쏟아지고 있다. 낮에는 관광객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수도사들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성당 문은 잠겨 있을 것이다. 머플러를 고쳐 맨 그가 성당의 문을 두드린다. 문 안에 배열된 긴 의자들, 성수가 흐르는 물길, 반짝이는 마리아상을 생각한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바깥으로 퍼져 나오고 있다. 다시 문을 두드린다. 그는 수도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계단에 앉았다. 성 아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지나 경찰들의 검문을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동이 틀 것이고 성당 문은 열릴 것인데. 그저, 카를교를 세 번쯤 지나면 되겠구나. 그는 생각한다. 천천히 걷는다. 다리를 따라 늘어선 동상들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이렇게 이어지는 시간이 성스럽다고 생각한다. 한 번 연주가 끝난 스메타나의 음악이 바흐 이덴의 생각 속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조국을 위하는 제목을 가진 덕에 원 없이 연주해도 방해받지 않은 곡. 그가 검은 옷을 입은 사제였던 날들. 바흐 이덴에게 부여된 아름다운 발음의 이름.// 바흐 이덴은 카를교를 세 번 지나지 않았다. 동은 텄다. 탄탄하게 다져진 팔과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조깅을 한다. 바흐 이덴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곁에 아이 하나가 다가선다. 그 앤 다정하게 바흐 이덴을 올려다본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 듯 바흐 이덴의 곁에 서서 유구한 물결을 바라본다. 그는 계단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유일했던 그 이름으로 그곳에 입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두드리지 않아도 지금쯤 문은 열려 있을 것이다. 닫혀 있는 동안에만 그곳에 갈 수 있음을 그는 깨닫는다. 모든 성상을 만진 손을 향해 아이가 손을 내민다. 아이의 눈에서 빛이 바깥으로 퍼진다.// 그는 카를교를 건너간다. 그가 빠져나온 형태로부터 아침이 벌어진다.//

먼 바다 / 김이강
먼 바다를 본다/ 먼 바다는 깊이가 없고/ 아이들의 삶에도 그런 것이 없고/ 언젠가는 평평한 널빤지나 마루가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마루가 될 것이다//

의자 머플러 밤 / 김이강
의자에 머플러가 걸려있다/ 걸려 있다가 길처럼 흘러와서 목을 감는다/ 머플러에 감겨 있는 밤/ 머플러 속에서 침묵하는 밤/ 침묵 속에서 당신이 꾸던 꿈을 이어받는 밤/ 모두의 머플러 끝이 연결된 건 아닐까/ 가늠되지 않는 밤에/ 의자에 걸린 머플러를 조용히 바라보는 밤/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늘 학사모를 쓰고 있는데/ 왜 그렇게 목이 길어 보이는지 알 수 없는 밤/ 수화기 저편에서 당신은 친구가 죽은 밤이고 벽제로 간다고/ 벽제 벽제 하니 친구가 정말로 죽은 것만 같다고/ 뚜뚜뚜-/ 하니 벽제로 간다는 네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밤/ 사라지지 않아, 하고 말하려는데/ 목을 꾹 누르며 가다듬는 밤/ 의자에 감겨있는 밤/ 낯선 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밤/ 잠겨 있는 당신의 밤에다 대고/ 벽제- 벽제- 발음해 보는 밤//

여름 후 / 김이강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여러 겹의 꿈으로부터 여러 번 탈출에 성공한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번 것은 내 꿈이야.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가 없었고. 검고 하얗고 고요한 너의 윤곽 안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늬들이 가득 찬다. 피부일지도 옷일지도 모를 무늬를 접었다가 펼친다.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눈을 감는다. 나는 네가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너의 목소리 속에서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발견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말이 없고 너는 눈을 뜨지 않고 너는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돌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네가 밀려드는 바다. 그런 바다는 새롭게 씌어지고 괴로운 역사처럼 거듭되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눈을 감으면 밀려들어 온다./ 나는 이 꿈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해변의 작은 식당에서 우리가 했던 일 / 김이강
누군가 죽은 여름이었다 나는 그가 만든 영화를 본 적도 있고 그가 쓴 책을 본 적도 있지만 그를 본 적은 없고 그의 딸이나 아들을 본 적도 없다 텔레비전에서도 그의 얼굴이나 그의 아들딸의 얼굴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죽었다 이토록 더운 여름에 전화나 편지도 없이 몇몇은 해변의 작은 식당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로 떡볶이를 먹으며 그의 부고를 알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째서 이 작은 식당의 텔레비전은 저토록 높은 곳에 올려져 있어야만 하는가 목을 만지작거리며 본다 이젠 더 이상 그의 영화도 책도 이 세상에서 새롭게 나올 일이 없을 것인가 그런 것은 별로 슬프지 않다 수영복에서 떨어지던 물기가 체온을 타고 말라간다 모든 것이 말라간다 태양이 이토록 뜨거우므로 우린 모래가 될 것이다 모래도 말라간다 그 끝은 어디일까 우린 우리가 상상했던 것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저 텔레비전은 너무 높지 않은지, 그런 표정으로 모두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오의 문 / 김이강
당신은 잠에서 깨어난다 다른 누군가의 잠을 잔 것처럼 당신은 어깨가 없고 통증도 없다 열어 둔 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쏟아진다 당신은 맑은 기분이 든다// 당신은 친구에게 전활 걸어 말한다 오늘은 어깨가 아프지 않아. 아주 좋아. 당신은 느리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침대를 빠져나온다 오늘은 직접 커피를 갈아 볼 수 있겠어 당신은 생각한다// 이런 순간이라면 예전엔 음악을 틀어놓곤 했었지 깊숙한 곳으로부터 오래된 수동밀이 먼지를 뚫고 나타난다 위태로운 길을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살아남은 사람이 있대. 절벽으로 미끄러지더니 바다로 풍덩 들어갔다가 다시 떠올랐다지 뭐야. 당신은 이제 젊은 날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마치 어떤 소설책에서 읽은 것처럼 멀고 흐리다// 수신자는 누구인가 단지 당신 자신이다 가까운 일들은 어제 읽은 소설이고 오래된 일들은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다// 생존자는 오로지 당신뿐이다 절벽과 바다 사이에 당신의 모든 것이 흩뿌려졌다 당신의 모든 것 죽은 몸들 얼굴들 당신의 위태로운 삶 주인공들은 모두 죽어버린 이 길고 느린 마지막 장 커피를 마신 당신의 몸이 따뜻해진다 없어진다 당신은 이제 음악을 트는 대신 텔레비전을 켠다 텔레비전이 너무 크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우리 집으로 좀 와. 삼십 년 전의 뉴스가 아직도 나오고 있어. 친구는 대답이 없다 당신은 얼굴을 파묻는다 이런 일은 너무 자주 반복되지 않았는가 당신은 내려놓은 수화기를 오래 바라본다// 당신은 오늘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걸 모른다 햇빛이 바뀌어 가는 것을 모른다 당신이 품은 생각이 오래 전부터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외출을 준비한다 오후가 열릴 것이다//

나사의 회전 / 김이강
그 뼈 속엔 무엇이 있었을까// 나는 할아버지의 머리맡에 서서 두개골을 내려다 본다/ 저 아래로 하얗기도 하고 그렇지도 않기도 한 무엇 이 보인다// 이 산에서는 벌떼를 조심해야 하지만 오늘은 비가 오니 괜찮을까/ 비가 온 것은 어제다 오늘은 맑고 바람에 마른 흙이 흩날 리는날// 할아버지는 꼼짝 않는다 꼼짝 않는 할아버지를 사람들이 통째로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미묘한 눈빛을 하고/ 분명히 어떤 속임수를 쓰고 있는데// 아무도 발설하지 않는 가운데 태양이 타고 있다/ 벌떼가 출몰할까// 파헤쳐진 무덤가를 뒤로 하고/ 나는 할아버지를 훔쳐가는 어른들을 뒤쫓아 달리 기 시작한다//

우리의 뼈였던 것 / 김이강
그 애의 이름은 남경이었다. 내 등의 뼈마디들을 자꾸만 만지던 그 애. 안경을 쓴 단발머리 그 애. 왜 자꾸 내 뼈를 만지는데? 묻지 않았다. 남경을 보며 웃으면 그도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작고 마른 여자애들에게 살아난 빛 같은 것. 왜 너는 튀어나온 뼈들이 이렇게 많은지. 복사뼈처럼 튀어나온 손목 바깥쪽을 만지면서야 남경은 말했다. 이렇게 뼈가 있구나. 하고, 사람의 뼈는 이렇게 생겼구나. 남경은 자신의 턱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 봐. 이건 내 뼈. 이 번엔 내가 손등에 힘을 주어 들어 보인다. 이건 내 뼈. 우리의 쇄골 뼈. 어깨에서 팔로 떨어지는 앙상한 뼈. 주름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팔꿈치 뼈. 덜 자란 골반 뼈. 부드러운 살갗이 지나가는 무릎 뼈. 그렇지만 끝내 등허리에 튀어나온 그 뼈. 얇은 셔츠로는 감추어지지 않는 뼈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지./ 교정엔 자갈이 깔려 있다. 너 백 미터 23초라며? 넌 11초. 그래. 난 11초. 남경의 얇고 긴 다리가 달리고 있다. 무릎 뒤편의 뼈. 그건 내가 끝내 말하지 않던 뼈. 가늘고 튼튼하게 튀어나온 뼈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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