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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현호 시인

부흐고비 2022. 6. 17. 07:55

이현호 시인
1983년 충남 전의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2007년 《현대시》 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가 있다. 

제2회 시인동네문학상 수상

 



배교 / 이현호
혼자 있는 집을, 왜 나는 빈집이라고 부릅니까// 흰 접시의 외식(外食)도 흠집 난 소반 위의 컵라면도 뱃속에 들어서는 같은 눈빛입니다// "죽기 살기로 살았더니 이만큼 살게 됐어요." 혼자 있을 때 켜는 텔레비전은 무엇을 위로합니까/ 이만큼 살아서 죽어버린 것들은// 변기 안쪽이 붉게 물듭니다, 뜨겁던 컵라면의 속내도 벌겋게 젖었습니다// 겨울은 겨울로 살기 위해 빈집으로 온기를 피해 왔지만, 커튼을 젖히자 날벌레같이 달려드는 햇빛들//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했을까, 삶을 사랑해서 살아가고 있을까// 밥을 안치려고/ 손등은 쌀뜨물 안에서 뿌옇게 흐려진다// 네가 없는 집을, 나는 왜 빈집이라고 불렀을까//

안녕하세요, 당신의 고독은 / 이현호
시인 카몽이스는 촛불이 꺼졌을 때 키우던 고양이의 눈빛으로 계속 시를 썼다 그렇게 어감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항하사의 저녁 우리가 검은 단어들로 수의를 짓고 있는 이곳은 낯익지 않을 오지의 시간 그대의 고양이는 두루마리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는지// 여기가 꽃자리라면 몇 잔의 마유주를 들이켜고 이생의 별자리를 방랑하는 동안 끼적거린 몇 쪽의 구겨진 낭만을 걸망에서 꺼낼 일 독백도 방백도 아닌 춤을 추는 마음속의 사구(砂丘)며 입안에 서걱대는 미망의 이름이며 영원의 음(音)인 고독은 다섯번째 계절에 미뤄둔 채// 우리들 모두는 여기 출신이지만 우리들 모두는 다른 별에서 왔다는 것도 잊고 검은 수의를 걸친 채 드럼통에 젖은 악보를 던져넣으며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어감으로 서로를 불러보네 어둠 속을 너울대는 한 편의 촛불 같은 너를 저 멀리서 오는 고향 별빛 아래 고양이같이 옹송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손가락이 고독으로 길어져버렸다는 데 밤을 세워 부정했지만//

있다 / 이현호
웅그리는 사람이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조금씩 제자리를 비우고 있다 허공에게 더 많은 옆을 내어주고 있다// 정오의 눈사람같이/ 강물에 모서리를 씻는 자갈처럼// 웅크리는 사람이 있다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가 다섯 손가락처럼 얇아지고 있다// 이파리를 털어내고 말라가는 겨울나무 같이/ 한바탕 비를 쏟고 작아지는 먹구름처럼// 옴츠러드는 사람이 있다 혼잣말을 하며 쉼표인 듯 마침표인 듯 점점 응등그러지는 사람이 있다// 마침내 한 방울 물기마저 사라져버리고/ 머물던 자리를 다 내어주고// 허공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그러안을 때 품 속엔 그 사람이 있는 듯하다// 여기에 또 그 자리에 당신이 있다//

아름다운 복수들 / 이현호
복수를 사랑한다. 그건 복수보다 아름다운 일. 그림자는 하나의 전구 빛을 나누기 위해 스스로 흐려지면서, 하나의 꽃술에 매달린 꽃잎들처럼 분신한다. 빵조각을 나눌수록 배고픔은 깊어가지만,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늘어난다. 퍼즐 같은 삶의 문법 안에 복수를 흩어뿌리기 할 때, 무의미가 의미를 가지치기할 때, 투명해지는 어깨들, 멜빵처럼 그 어깨에 두 팔 걸치고, 흘러내리지 않는 그림자가 될 때, 가지와 가지가 어긋매껴 만드는 그날 아래 걸을 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둘 떨어져나간 꽃잎들이 퍼즐 조각으로 완성할 아름다운 복수들. 복수가 복수를 사랑해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건 나무 더하기 나무는 숲보다 아름다운 일.//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 / 이현호
나침반처럼 언제나 너를 향하는 것이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너와 내가 있고/ 자침이 뱅뱅 도는 그곳에는/ 만질 수 없이 흐릿한 유령만이 있는 것이다// 두 갈래 물줄기가 있는 것이다/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온 수염고래의 그것 같은/ 분수처럼 흩어지며 가끔 무지개를 그리기도 했던/ 마음과 기억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심해에서 망각의 바다에서/ 해변으로 떠밀려오는 사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잃고 표류하는 튜브를/ 먼바다의 어부는 건져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그것은 죽은 별을 바라보는 일과는 다른 슬픔이다/ 어제는 게릴라성 집중호우 아래서/ 오늘 죽은 신(神)을 만나 젖은 담배를 나눠 피운 것이다// 맑게 갠 하늘 아래서는 아이들이 개미를 태우며 노는 것이다/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붙이는 볼록렌즈처럼/ 너를 거쳐간 시간들이 나의 거의 모든 순간에 모여/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은 남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보호된다/ 누구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림은/ 다른 그림보다 오래 살아남아 명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작은 무인도였을 때/ 너는 닿을 수 없이 머나먼 바다/ 그 바다에 살던 한 마리 물고기가 길을 잃고/ 우연히 나의 해안에 닿았었던 것이다//

겨울나무에서 겨울나무로 / 이현호
눈더미를 시트처럼 뒤집어쓴 겨울나무들이 장렬(葬列)을 이루고 있다. 느끄름히 이우는 하루 속을 걸어가는 사람도 겨울나무를 닮았다. 바람에 쓸려 다니며 지상에 앉지 못한 마른눈송이들은 아직 짐이 무겁지 않기 때문이야. 그때 한 겨울나무가 팔을 분지르고 온몸을 떨며 더께 같은 눈덩이를 털어냈다. 그것은 한 영혼의 낙차―한때 나는 다른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은 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악착같이 살아서 만나자고 말하고 그를 떠나왔다. 빈방에 한 마리 구름을 기르던 그가 밑줄 친 시구처럼 떠오르면, 그는 나를 대신해 슬퍼해준다―생활이 생활을 반성하지 않듯이, 무렴히 쌓이는 눈은 발자취를 첩첩 덮어주었다. 줄지어 선 겨울나무들의 끄트머리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계절과도 불화하지 않았다. 다시 겨울나무에서 겨울나무로//

오래된 취미 / 이현호
기지개를 켠다/ 창밖 길 건너 장례식장은 불이 꺼졌다/ 몸이 추처럼 무거운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울음/ 소리가/ 젖은 신문지처럼 꿈에 들러붙었기 때문/ 흙갈이를 해줘야지 생각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밤새 화분 위로 낯모르는 색이 피었다/ 전화를 걸어야지 했는데 주전자 물 끓는 소리에/ 그만 어제인 듯 잊었다/ “한 발은 무덤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춤추면서 아직 이렇게 걷고 있다네.”*/ 검은 나비들이 쏟아져나온다, 미뤄뒀던 책을 펼치자/ 창을 넘지 못하는 나비들, 그 검은/ 하품을 할 때, 느른한 음색 속에 등걸잠 같은 생이 다 들었다/ 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에서.

말은 말에게 가려고 / 이현호
오늘은 슬픔과 놀아주어야겠다. 가끔 등을 밀어주어야 하는, 그네를 타는 슬픔이 내게도 있다. 한 숟갈 추억을 떠먹은 일로 몇 달쯤 슬픔을 곯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너를 좋아진다.” 같은 흰소리를 들어주던 귀의 표정을 생각하는 오늘밤은, 아직 없는 나의 아이나 그 아이의 아이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오고 있는 별똥도 서넛쯤 있을 것이다.// 마음을 놀이터 삼아 혼자서 놀던 대견한 슬픔과 놀아야겠다. 떠올릴 적마다 조금씩 투명해지는 얼굴이 있고, 시간같이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 말은 말에게 닿으려고 말하는데. 빈집 우편함에 쌓이는 편지봉투처럼 누구도 뜯지 않는 말로 시를 적는 건 이상한 일이다, 지상과 수평을 이루는 높이까지 발을 차올렸던 슬픔이 되돌아오고 있다.// “나도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사랑해.”라는 말을 수박씨처럼 툭툭 뱉어보는 오늘밤도, 유성우에 빌었던 소원은 도착하지 않는다. 집 앞에 쓰러져 있던 절름발이 바람을 방금 전 나는 그냥 지나친 듯도 하다. 씨앗 하나를 안으려고 지구는 중력을 놓지 않는다, 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뒤돌아보는 슬픔의 얼굴이 나를 좋아진다. 저 가벼운// 등을 밀어주어야지. 채찍질로 떠나보낸 말들이 기특하게도 다시 돌아오는 오늘밤은//

뜰힘 / 이현호
새를 날게 하는 건/ 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 구름을 띄우는 게/ 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 나는 입술이 닳도록/ 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 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 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 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닳기 전에 입맞춤해줄래?// 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

양들의 침묵 / 이현호
그대가 풀어놓은 양들이 나의 여름 속에서 풀을 뜯는 동안은/ 삶을 잠시 용서할 수 있어 좋았다// 기대어 앉은 눈빛이 지평선 끝까지 말을 달리고/ 그 눈길을 거슬러오는 오렌지빛으로 물들던 자리에서는// 잠시 인생을 아껴도 괜찮았다 그대랑 있으면// 그러나 지금은 올 것이 온 시간/ 꼬리가 긴 휘파람만을 방목해야 하는 계절// 주인 잃은 고백들을 들개처럼 뒤로하고/ 다시 푸르고 억센 풀을 어떻게 마음밭에 길러야 한다// 우리는 벌써 몇 번의 여름과 가을을 지나며// 두 발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네 발 달린 마음으로 갔었지// 살기 위해 낯선 곳으로/ 양들이 풀을 다 뜯으면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다// 지금은 올 것이 오는 시간/ 양의 털이 자라고 뿔이 단단해지는 계절//

빈방에서의 낚시 / 이현호
방에 고인 어둠 속에 눈빛을 던진다. 시선은 멀어지는 눈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낚싯줄같이 질겨진다. 벌써 너무 많은 눈빛을 잃어버렸다. 어둠에 잠겨 줄 끊어진 찌처럼 부침하는 눈빛들. 그 위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짙어지는 안개. 나는 기다린다, 점차 희미해지는 것들 속에서. 낚싯대처럼 휘어진 시간에 기억을 미끼로 달고.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동안. 여러 마리의 감정이 낚시꾼을 놀리듯 갑자기 튀어 올랐다가 사라진다, 파문만을 남긴 채. 창문이 닫힌 방 안에 바람이 불고, 잠시 흐트러지는 안개 사이로 얼비치는 것이 있다. 문득 손맛을 느꼈다고 착각한 느낌. 손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익숙한 기분. 방을 휘저었던 칼바람에 자상을 입었던 안개의 살갗이 금세 아문다. 시계는 점점 오리무중이다.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성싶을 때. 흐릿한 눈빛을 물고 감은 눈 속으로 끌려오는.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솟아나 다가오는. 입질이 온다. 피 흘리는 감정의 대가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야 하는 순간이. 나는 나를 방생한다. 내 얼굴을 한 물짐승들이 아가미를 들썩이며 어둠 속을 헤엄치고 있다. 나의 파문 위로 다시 눈빛을 던지는 기다림이 있다. 안개에 파묻힌 방에 식은 눈빛들이 흘러 다닌다. 잡은 물고기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으로.//

나라는 시간 / 이현호
누군가 내 심장을 한입 베어 먹었을 때/ 한입만큼 비어버린 심장을 버렸을 때/ 산다는 것이 죽음을 참는 일일 때/ 지구가 외계인의 성경 속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악마들의 천국이 여기가 아니라고/ 이상한 질문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 영혼은 영혼, 천사는 천사, 당신은 당신/ 인제 세상에는 아무런 비유도 필요가 없을 때/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을 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새로 가르쳐줄 것이 없을 때/ 어제부터 너를 사랑하겠어 내일은 너를 사랑했어 지금 너를 사랑했었어/ 그 사랑을 사랑했어/ 오래 들여다보아도 손댈 수 없는 비문만이 남을 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우리는 서로 병이 깊다고만 생각될 때/ 기도를 그치는 영혼을 꿈꿀 때/ 영혼을 그치는 기도를 올릴 때/ 거울에 비친 눈동자가 한쪽에는 죽은 신이 다른 한쪽에서는 당신의 뒷모습이 앉아 있을 때/ 내가 신을 닮아갈 때 점점 세상에서 달아날 때/ 밤하늘에 백반증 같은 눈이 내릴 때/ 별은 밤의 사리(舍利) 같을 때/ 가벼워진 심장으로 소복이 눈이 쌓일 때/ 나도 한 마음의 인간일 때//

쉿 / 이현호
흐르는 밤에 밤이 흘러간다. 졸졸 흐르는 소리. 줄줄줄 흘러내리는 소리. 이런 밤에는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를 내며 빛나던 눈빛을 떠올리기 쉽다. 그 눈동자 속으로 스미던 달빛의 냄새를 다시 맡기 좋다. 무턱대고 아름다웠던 사람과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우리의. 흘러간 밤을 쓰다듬어보는 밤. 내 애인의 애인이 나였던 시간을 안아보는 밤. 깊이깊이 흐르는 밤 속에서는 무엇이든 꺼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밤이라는 말 속에 한 생애를 다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듯싶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달빛. 저 밤의 늑골에 손을 담갔다 빼면 더운 숨 냄새가 손끝에 물들 듯하다. 모두 잠들어야 하는 이때에. 눕지 않는 기억과 눕힐 수 없었던 불행을 기억하면. 쉿. 애인과 애인이 혈전처럼 응고되어 밤의 혈맥 속을 떠돌고 있다. 흘러가는 밤에 밤이 흐른다. 흘러내린다.//

마라톤 / 이현호
내가 조깅을 한다면/ 술이나 끊어 바보야, 너는 웃겠지// 밤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 같은/ 그 미소가 좋아/ 운동화 끈을 조인다// 산책로 외야수처럼 서 있는/ 가로수들, 금방이라도 뿌리를 들고/ 뛰쳐나갈 것처럼// 왜 야수처럼 서 있나// 부푸는 폐를 안고 나무 사이를 달린다/ 불타는 꼬리를 끌고 태양 주위를 운행하는 혜성이/ 나의 주법(走法)// 천천히 뛰어 바보야, 너는 웃겠지/ 나는 천천히 그래서 달린다//

잿빛 / 이현호
갑자기 세계가 사라져버렸어/ 평범한 수요일에/ 아나키스트가 되었지/ 해는 빨갛고 달은 노랗다는데/ 우리 해와 달의 궤도는 백지 위에 있어/ 별자리 밖의 별들이 우리의 각료/ 눈물마저 제 몸을 국적으로 삼았지// 빈 술병과 죽은 화분 사이에서 깨어났어/ 평범한 수요일의 일이야/ 술병과 화분은 무슨 관련일까/ 무의식을 쥐고 흔들었지/ 속말을 위해 첨탑을 기어오르는 심경으로/ 해몽은 해몽이 되고/ 몽조는 몽조가 되어// 날아가는// 평범한 수요일이었지/ 종종 평범하다는 게 부끄러워/ 때론 평범하다는 게 편안해/ 평범과 평범은 같아서 다른데 달라서 같은데/ 평범이 평범을 저주하고// 평범은 평범해서 평범을 이해하지 못해/ 사라진 걸까, 세계는// 먹구름 뒤에서도 별은 빛나고 있듯이/ 알 수 없어도 인정해야 할 게 많아/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심기한 들꽃은 하루아침에 시들어/ 산문적으로 지속되는 우리의 생계/ 평범한 수요일이라서/ 여전하구나, 아름답구나/ 이 시간을 명명하려던 욕망을 철회하고/ 평범해지기로 해, 그저 시리도록// 공평하게 평범한 수요일 밤/ 사는 게 어색하지 않은 적 없다고 생각하니/ 늘 어설프게 살아왔던 듯싶다/ 시절에 취한 동지들이여/ 우리의 모국어는 침묵/ 살아 있는 잿빛/ 이생을 지나고도 갈 지옥이 남았을까// 평범과의 익숙한 동거를 뭐라고 부를까/ 다른 역법의 나라에 가면//

벤치 / 이현호
내 방에는 벤치가 있다/ 안에 있는 바깥이고 겉을 둘러싼 속이다/ 외출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달라서/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난다/ 벤치는 늘 죽은 나로 비좁다// 왜 그러고 살아/ 왜 그러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니 이러는 거지/ 나였던 나와 나였었던 나의 담소는 마른 화초처럼 권태롭다/ 다행히 그들은 음악을 애호하는 취향이 같다// 남향의 집에는 귤빛 볕이 가득하고/ 벤치의 나와 나는 서로 어깨에 기대 낮잠을 잔다/ 나와 내가 장난인 듯 벤치를 집밖으로 들어 옮기려 한다/ 그렇지만 벤치는 식물성이고 뿌리가 깊다/ 우리 중 누군가 몰래 물을 주고 있다// 나로서의 기억도 잊은 오래된 나는 오늘도/ 네가 있어서, 나는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너인 줄 알았다/ 라는 문장의 뒤를 잇지 못한다/ 나는 실수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는다/ 이제 그는 거의 벤치와 하나가 되었다// 벤치의 발치에 누워 빤한 운명을 긍정한다/ 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면 벤치는 더욱 비좁겠지만/ 우리 모두는 벤치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벤치에 앉기 전 잃어버린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벤치는 열린 결말처럼//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 / 이현호
나침반처럼 언제나 너를 향하는 것이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너와 내가 있고/ 자침이 뱅뱅 도는 그곳에는/ 만질 수 없이 흐릿한 유령만이 있는 것이다// 두 갈래 물줄기가 있는 것이다/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온 수염고래의 그것 같은/ 분수처럼 흩어지며 가끔 무지개를 그리기도 했던/ 마음과 기억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심해에서 망각의 바다에서/ 해변으로 떠밀려오는 사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잃고 표류하는 튜브를/ 먼바다의 어부는 건져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그것은 죽은 별을 바라보는 일과는 다른 슬픔이다/ 어제는 게릴라성 집중호우 아래서/ 오늘 죽은 신(神)을 만나 젖은 담배를 나눠 피운 것이다// 맑게 갠 하늘 아래서는 아이들이 개미를 태우며 노는 것이다/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붙이는 볼록렌즈처럼/ 너를 거쳐간 시간들이 나의 거의 모든 순간에 모여/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은 남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보호된다/ 누구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림은/ 다른 그림보다 오래 살아남아 명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작은 무인도였을 때/ 너는 닿을 수 없이 머나먼 바다/ 그 바다에 살던 한 마리 물고기가 길을 잃고/ 우연히 나의 해안에 닿았었던 것이다//

매음녀를 기억하는 밤 ㅡ부동은 또 다른 흔들림을 위한 단잠에 불과할 뿐* / 이현호
허공에 한번 피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말하자면 우리가 어제 귀를 맞대고 들었던 어느 섬나라 재즈 가수의 노래와 그 술집을 가득 메웠던 웃음소리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던진 캐치볼 같은 고백과 가까스로 세이프 한 역전 주자처럼 뿌듯하게 부푼 마음들 이것들이 하늘로 올라가 더러는 백색왜성이 되고 더러는 붉은 울음을 긴 꼬리로 흘리며 이 땅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생각 이런 생각마저 우주 한쪽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느끼는 밤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필리핀 여자 귀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필리핀의 한 낡은 호텔에는 여자 귀신이 산다 언제부터 그녀가 끄물거리는 복도의 전구 빛을 양탄자 삼아 떠돌았는지 알 수 없다 잃어버린 온기를 찾는 것인지 외로움이 깊으면 겁이 되는 법인지, 거미줄에 걸린 양 이 행성에서 체크아웃하지 못하고 누런 이방인들의 곁을 맴돈다 “이방인이 수음으로 시간을 달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고 속삭여 주거나 “부유하는 삶 따위 집어치우고 무명 극단의 ‘나무 1’이나 하고 싶다.”라고 적는 이방인의 겨드랑이를 밤 내 데워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중에 피어난 상처들에게 별자리의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다 땅과 하늘을 오가는 바람의 따듯한 혈맥 그녀는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다// 풍문처럼 떠도는 생은 없다고 믿는다//
* 생과 생 너머를 담고도 남을 손바닥 크기의 뿔테 안경 거기 인공 호수처럼 박혀 있는 포용과 배반이 함께 서린 눈동자 복 많다는 두둑한 살집의 코를 가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굳게 밀봉한 입술 사이로 화농 같은 언어들이 터져 나온다, 세계사시인선 속 그녀의 얼굴. 이연주 시인은 등단한 해 첫 시집을 내고 이듬해 자살했다. 인용은 「신인의 말」(《작가세계》, 1991년 가을 호 별권)에서.

말들의 해변 / 이현호
불침번 홀로 깨어 있는 꿈자리의 파수꾼 오늘밤은 전우들의 베갯잇을 도닥거리다 말고 꿈의 날개를 달고 모처를 항해 중일 널 상상합니다 아무것에도 취하지 않았는데 무엇엔가 취해서는 손끝으로 별들을 이으며 별자리에 새깁니다, 네 이름을// 해변에 도착한 말들은 어디로 갑니까// 널 알기 전 고독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라는 문장을 썼습니다 다시 고독의 자리에 그리움을 앉힙니다 얼마나 긴 연습을 거쳐야 그리움 자체가 되겠습니까 몇 억 광년을 거쳐 하얀 고백을 전하는 별들의 자세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해변에 도착한 말들은 이제 어디로 갑니까// 잠은 답장처럼 쉬이 오지 않습니다 짙은 비애의 잉크로 공들여 기른 말들은 네 앞에서 길 잃어 바람마저 등 돌린 황야 설운 울음소리만을 파종하듯 뿌릴 듯합니다 그것들은 가장 키 큰 애련의 줄기를 키우겠지요 눈물의 실과를 꼬박꼬박 지치지도 않고 피우겠지요// 해변에 도달한 말들은 어디로 향합니까// 물안개 속으로/ 녹음 아래로/ 단풍나무 숲으로/ 눈보라를 거슬러/ 다시 너의 리듬으로// 해변에 도달한 말들은 이제 어디를 향합니까// 낭만, 그것은 달빛과 별빛 바람과 구름으로 짠 낡고 해진 옷가지. 낭만주의, 그것은 낭만이나 헌 책 술병 따위를 주워 모으는 일. 나는 옛 시인들이 입었다는 낭만을 줍는 한낱 낭만주의일 따름이지만 이 천업(賤業)의 재산을 송두리째 네게 바칩니다 이름 얻기만 기다리는 무명의 들풀을// 해변에 당도한 말들은 어디로 달립니까// 고독하다면 이 밤 내 너를 헤아리는 이 있어 대작(對酌) 같은 위로가 되기를 지구인 중에 나만큼 간절히 네 꿈을 위무하는 손길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 무용(無用)을 깡그리 네게 봉헌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씨앗 하나 아무렇게나 둬도 잘 크는 13월의 탄생화를// 해변에 당도한 말들은 이제 어디를 달립니까// 수정구슬 안으로/ 눈동자 속으로/ 유전(流轉)의 언덕을 넘어/ 해변으로/ 다시 너의 운율로// 처음 본 날 대뜸 내 아이를 낳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꿈속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습니다 아이의 옹알이를 달빛 조각배에 실어 띄우겠습니다 우리가 네 꿈으로 살며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내내 아름다운 안녕 속에 머무시는 동안// 해변에 도달한 말들은 어디로 내달립니까// 너는 저 멀리 수평선 아래로 침몰하는 노을로 불타는데 거기까지 가닿지 못하는 말들 붉은빛으로 물드는 어린 말갈기들 히잉히잉 떠나는 기적(汽笛)같이 하얗고 눈부신 포말로 흩어지는 울음들// 이제 어디를 내처 달려야 합니까/ 해변에 도착한 말들은//

동물 소묘 / 이현호
"요즘 어때?" 누가 물어오면, "그냥" 이라고 얼버무릴 날들/ 마음이 마음을 돌보지않은 지 여러 날이다/ 창밖 놀이터의 벚꽃은 이 저녁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힘들다는 거, 방금 몸 매달 한 가닥 줄도 없이 방바닥을 가로지르던 점 하나/ 그 거미의 옹송그린 자세 같은 거/ 불을 켜지 않는 방에는 실수로라도 찾아올 날/ 벌레도 없는데, 나는 괜히 미안함을 가져보고 싶어서/ 거미를 지켜보기도 했지 아껴 맛봐야 할 마음의 양식인 듯이/ "왜 그래?" 누가 알아주면, "아무것도." 라며 흐릴 날들/ 씻어야 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샤워기를 틀면 습기 찬 저녁은 알몸뚱이를 거미줄같이 감싸고/ 방바닥에 흘린 물기를 걸레로 닦으며/ 물 한 방울 마실 때가 없었을 너에 대해 반성했지/ 나는 어쩐지 미안함을 느끼고 싶어, 방바닥에 붙어 눈감고/ 침묵으로 거미의 울음소리를 돌보고 있으면/ 이 밤이 벚꽃을 토하는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 '괜찮니?' 혼잣말을 하면, 방 한 구석에/ 작은 물방울의 자세로 숨을 죽이는 감정 하나/ 마음의 변태로나마 붙잡고 싶은 한 목숨이/ 거미줄도 없는 허공에 매달려 아슬아슬 깊어진다//

새는 나무가 꾸는 꿈 / 이현호
오래전 손목시계를 찼던 습관 때문에/ 빈 손목을 자꾸 내려다본다// 그는 아직 오고 있다/ 세상은 기다리는 사람과 오고 있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어디야?// 팡팡 이불을 털 때 흩날리는 먼지처럼/ 사람들이 골목골목으로 흩어지고// 잠깐만, 거의 다 왔어.// 그는 오고 있다고 하는데/ 영원은 잠깐만이 끝없이 쌓이고 쌓여 되는 것//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오고 있는 사람, 가장 가깝고 먼// 기다리는 자세는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자꾸 뒤돌아본다, 저기// 혹시 시간 있으세요?/ 누군가 조금은 친근한 눈빛으로 물어올 때// 아니요, 오고 있어요.//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데/ 저 가로수들은 언제부터 저기 심어져 있었던 것일까//

나무그림자점 / 이현호
이제는 혼이 된 사람들에게는/ 대보름달이 하늘 가운데 걸리면 뜰에 나무를 세워놓고 그 그림자의 길이로 한 해의 풍흉을 점치던 풍습이 있었다// 내게도 한 창문 아래 나를 허수아비같이 묶어두고 마음의 작황을 가늠했던 이른 추수기가 있었던 것이어서// 그런 밤 창문을 어른대는 그림자는 독실한 미신이었다// '보름달처럼 환한 방에 당신은 살고' 따위의, 순박한 비유를 떠올릴 때마다 한 뼘씩 마음이 줄어들었던/ 나는 흉년인가 보다, 상상만으로 죄를 탈곡하는 것 같던 때가 참말 있었던 것이어서// 턱이 낮아진 마음밭엔 수재가 들고 병충해가 들끓은 쭉정이 마음만 한줌이었다// 길바닥에 내린 어둠에 섞여 든 그림자만 대풍이고,/ 내일은 오지마/ 혼이 나갔다는 옛사람의 말을 인제는 이해할 수 있는// 멀리 골목 끝까지 뻗은 어둠의 길이를 눈짐작해보는 늦겨울// 미신은 미신(美信)이었다//

가정교육 / 이현호
빈집에 앉아 있다. 여기를 우리 집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있다/ 내가 가져본 적 없는 우리 집에서 그 사람과 나는/ 가질 수 없었던 추억을 미래로 던지며 없는 개를 길렀다/ 지붕 아래 숱한 약속을 속눈썹처럼 떨어뜨렸다/ 그 사람이 흘리고 간 속눈썹 하나쯤은 정말 머물러 있을 것/ 이어서/ 나는 없었던 개를 나지막이 불러보며, 신전처럼 고요히 앉아/ 있다/ 유일한 내 것을 지키는 중이다/ 혹시나 미래가 유실했을지 모를 내방(來訪)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쯤은 떨어져 있어야 할 속눈썹이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가져본 적 없는 우리 집을 나는 과묵한 개처럼 지킨다/ 마음의 내방(內方)에 누구도 들인 적 없는 이에게는/ 추억이 없다, 마음 놓고 아플 수조차 없다는 거/ 그게 가장 따뜻한 추억이다 추악했음마저 그리운 그때/ 무풍지대로 흔들리며 잠자는 빈집에서/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며/ 폐허의 신전으로 나는 앉아 있다//

너는 나의 나라 ㅡ운주저수지 / 이현호
세상에 없는 나라를 상상하면 조금은 살만해서 좋았다/ 가본 적 없는/ 본 적 없는/ 없는/ 운주저수지에 밤마다 다녀가는 눈동자를 떠올리면/ 다음 생에 만나요, 라는 말을 이해하기 좋았다/ 늘 구름이 끼어 있어서 운주(雲柱)라고 불린 이름과/ 운주, 하고 발음하면 새어나가는 입바람 사이/ 없는 애인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살 것 같아 좋았다/ 바람에 온몸을 흔들리면서도 떠내려가지 않는 구름들/ 비 쏟으며 작아지다 끝내 텅 빈 속을 드러내고/ 저수지의 일원이 되는, 그 속울음이 좋았다/ 가본 적 없는 저수지는 보지 않아서 물이 맑고/ 사랑도 적(敵)도 없어서 머무를 적(籍)도 없는/ 그 나라를 꿈에도 만날 일이 없어서 좋았다/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서둘러 멀어지는 발소리가/ 밤새 귓속에 차오르는, 젖은 넋들의/ 나라에는 네가 없는 것이 참 좋았다//

검은 봉지의 마음 / 이현호
말하지 않아도 검은 봉지에 담아주는 것이다/ 배려란 이런 것이라는 듯/ 검은 봉지 속 같은 밤을 걸어 타박타박 돌아가다 보면/ 유리의 몸들이 부딪는 맑은 울음소리 난다/ 혼자는 아니라는 듯이// 혼자와 환자 사이에는 ㅏ 라는 느낌씨 하나가 있을 뿐/ 아아, 속으로 삼켰다가 바닥에 쏟기도 하는/ 말라붙은 열, 형제자매의 소리/ 거리엔 늦은 약속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있고/ 길목을 네 발로 뛰어다니며 꼬리 흔드는 마음이 있고// 떨리는 손으로 끝내 쥐고 놓지 않을 게 남았다/ 끊을 거야, 비록 이것이 우리의 입버릇이지만/ 간판이 빛난다는 건 아직 빈자리가 남았다는 뜻/ 습벽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은 족속/ 너에겐 이파리를 찢는 버릇이 있었지/ 아무리 찢어발겨도 초록은 잎을 떠나지 않는데// 검은 봉지 속 같은 방에 들어가 자기 숨에 취하는 시간/ 어린것을 핥아주는 초식동물의 눈빛으로 빈 것을 바라보는/ 인사불성의 성주城主, 형제자매의 눈동자/ 누구라도 이 세상에 이토록 짙은 냄새 풍긴 적 있겠지/ 누군가는 이 행성의 자전을 위해 갈지자로 걸어야지// 다시 또 검은 봉지같이 바스락거리는 시간을 건너가면/ 배려란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 자고 있는 염리마트와 대흥슈퍼, 되돌아오다 보면/ 뒤 귀를 꼭 묶은 검은 봉지를 들고 나오는 형제자매들/ 아아, 무사한 오늘에 대한 우리의 관습// 말하지 않아도 검은 봉지에 담아 버리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마라 / 이현호
교복을 입은 아이가, 아니/ 교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 교복을 입은 친구가, 아니// 좆같아// 입을 열면 습관처럼, 아니/ 말을 하면 숨 쉬듯이, 아니/ 아멘, 기도처럼 말끝마다// 좆같아// 좆같아, 저 말이 꼭/ 지옥 같아, 그렇게 들려서/ 추임새같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지옥에 살면 악마일까/ 악마가 사는 곳이 지옥일까// 안녕, 좆같 군!/ 지옥에서는 악마들끼리 반갑다//

국지성 호우 / 이현호
서로 너무 다른 말을 하는 내게 나는 의자를 내주네/ 창문 앞이니 창문을 바라보았지/ 비 내렸고, 그것은 내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눈동자였네/ 창문을 보다보면 창문을 보면서도 창문은 아닌 기분/ 눈맞춤 할 때는 지난 일을 읽으려 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기억이 아니라 기억으로 쌓이려는 순간을 지켜보는 게 신사적인 창문/ 이라고/ 서로 너무 다른 마음을 먹는 동안 저녁은 일곱 시나 여섯 시 사이를 어/ 쩌면 열 시나 아홉 시의 모퉁이를 돌아갔네/ 왜 하필 그 시간의 창문인가요, 내게 물었더라면 나는 아직 대답을 듣/ 지 못했지/ 비는 내리고, 비가 와 다행인데, 비는 창문에 숱한 지문만을 찍고/ 얼룩은 굉장히 무감한 자들의 악취미입니다/ 인광을 인가의 불빛으로 착각한 사람은 더 깊은 곳에서 길을 잃습니다/ 서로 너무 다른 표정을 신기해하며 얼굴에 손끝을 뻗어도/ 눈꺼풀 닫지 않는 창문, 내리는 비가 있었으니까/ 헤어지자마자 귀신을 본다고 고백한 옛 애인을 떠올렸는지/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미확인비행물체를 입 밖으로 날려보고 싶었/ 는지/ 창문을 볼 게 아니었으면 창문 앞에는 앉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품이 난다, 신비 앞에서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이해했네/ 창문을 보다보면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어야만 할 것 같고/ 창문을 보면서도 창문은 없는 느낌/ 서로 너무 다른 빗소리를 들으며 상한 비 냄새를 맡으며/ 아마 나는 창문이 되고 싶었나보다/ 열린 눈동자에서 벌어진 입속에서, 비 내리고/ 어째서 창문인가요, 내게 물었더라면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했을까/ 물에 잠겨 망해버린 나라를 상상하는 창문 밖에는 창문밖에는 안 보이고/ 서로 너무 다른 일기예보 속에서 눈감은 건 창문을 보려던 건 아닌데/ 이쪽은 젖거나 저쪽은 젖지 않네 저쪽은 젖어들거나 이쪽은/ 지상으로 흘러드는 빗방울들은 경계를 서성일 줄 알았는지//

새로 쓰는 서정시 / 이현호
구만 구천 편의 시 속에 네가 없는 것은 참혹하다. 이 밤 형광등과 달과 은하와 내생의 빛까지 가닿지 못하는 종이 위엔 네 그림자뿐. 수십 장의 파지 속엔 일순 삶을 끊어낸 수백 그루 나무, 발목 잃은 수천의 새들, 쫓기 는 삶의 눅진함을 쉬던 산짐승의 그늘이 수만 평 젖어 있다. 그들이 올려보던 별자리가 네 얼굴이다. 내 아비와 그 아비의 우주에도 다만 너뿐이어서 그리움이 낙엽 타는 냄새처럼 코끝을 울리는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세상의 낡은 비유는 내 전생前生의 전생全生에 걸쳐 네게 불태운 백단향의 기원. 내 일대기는 거리에 지문 한 번 찍고 돌아서는 눈과 비, 네게 각인되기 위해 구름으로 빚은 인장印章들의 역사다. 아득한 인간의 하루에 아로새겨지는 그 봄가을이 네 향내다. 핏빛 인주로 밀입국한 너의 세계는 꺼내면 빛에 흐리고 두면 새로 찍을 수 없는 필름같이 숨에 걸리고, 그 흑연색의 감광感光이 또한 네 몸짓이다. 이 너절한 몇 겁 생의 조각보로 널 오롯이 덮고 싶었으나 지상의 시간은 허청허청 석양 속으로, 심해어 같은 숱한 잠상潛像들이 활개치는 여기, 다시 네 이름만이 내 전생轉生의 마르지 않는 고해이다. 그대여, 새로 쓰는 모든 서정시의 서문은 너다.//

궤적사진 / 이현호
나를 치열하게 했던 착란들은 어디로 갔을까/ 창밖 가로등은 제시간에 불을 밝힌다. 여느 때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저주하는 이유를 모르고 여전히 저주한다/ 불행하게 태어나는 건 없다는 당신의 말을/ 너 따위가 알까, 추락한다는 것/ 죽을힘으로 뿌리치면 죽을힘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인간을 향한 갈망을/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맹목의 시간 속에/ 뜨내기 같은 마음의 바뒷자국을 망망연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무서운 게 없어져버린다/ 필연을 따라서/ 언제든 부고장 물고 이 천공으로 회귀할 철새들/ 너무 오래 삶의 객지에 노출되어 있었다// 죽은 별들의 궤적사진에서 참혹한 선의를 본다/ 나의 불행은 누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영원한 산책 / 이현호
조금만 더 같이 걷자/ 언젠가 네가 그렇게 말해서/ 여전히 나는 걷고 있다// 그 다정한 한마디가// 조금은 얼마만큼이지 시간일까 거리일까/ 한겨울 집을 나선 손이 온기를 잃을 동안/ 새벽 3시에서 4시까지 달이 떠간 만큼// 조금만 더는 언제까지지/ 온기를 잃은 손이 어디라도 따스한 곳을 찾을 때까지/ 새벽 4시에서 5시까지 달을 좇은 눈동자가 흘러간 만큼// 같이는 얼마큼일까 그것은 온도일까 느낌일까/ 얼마나 가까이 있으면 같이는 우리가 되고 자기가 되고/ 얼마나 떨어져 있으면 같이는 따로가 되고 너 당신 그/대가 되는지// 걷자, 걷자에 대해서라면 그저 걷자/ 걸음이 달리기가 되지 않게 천천히/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공전하는 행성의 궤적과 보폭으로/ 다정한 한마디가 정전(停電)처럼/ 멈춰 세울 때까지//

확진 / 이현호
죽은 별이 빛난다 무덤 속 같은 우주를 가로지르는 빛은 제가 떠나온 별의 죽음을 모른다 이럴 땐 환영까지가 실제다 마음이 아프다는 거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마음을 다 주었다면 모조리 다 썼다면 아플 마음이 없다 아플 마음이 남아 있다는 아픔 그럴 땐 외면까지가 환대다 내가 저쪽으로 돌아앉으려 할 때마다 등뒤에서 안아 주는 울음들아 밤하늘같이 어두운 눈동자로 꽝꽝 별빛이 쏟아진다 빛이 제가 떠나온 별의 죽음을 모르고//

공경도하 公焭渡河 / 이현호
내게는 꼭 하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키가 작고 통통하니 하얀 것이 꼭 함박눈 같다 함박눈이라고 하니 제법 식상하여 다시 생각하니 내가 사랑하는 꼭 한 사람은 꼭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를 닮았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물을 흘리는 수도처럼 꼭 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이는 꼭꼭 쌓인 속울음을 떨구며 어느 날 내 앞에 무연히 서 있는 것이다 수도꼭지라고 하니 아름답지 않은 듯싶어 또다. 시 생각하니 나의 꼭 하나 사랑하는 사람은 안개다 당신 안에서 길을 잃고 사방 천지를 가리지 못하여도 세상 따위 보이지 않는 거기에서 꼭꼭 숨어 살고 싶은 것이다 안개라고 하니 당신의 이목구비까지 흐려지는 모양이라 다시 또 떠올리니 내가 사랑하는 꼭 한 사람은 물을 빼닮았다 강가에 앉아 물낯과 밤그늘이 경계를 지우며 섞이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꼭대기도 바닥도 없는 당신 마음 같아서 꼭 안아주려고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내게는 꼭 하나뿐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에//

분명 / 이현호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귤이 사라졌기에/ 나는 그를 찾았다// 얼마 세간이 없고/ 유채색을 들이지 않은/ 독거의 집안// 전등알같이 환한 구는 어디로 갔을까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를 떠올리면 침샘이 돌고/ 아직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를 가진 적 없거나/ 방 한구석에 썩어가거나/ 분명했던, 그가 증발하기도 한다면// 한 그루 귤나무도 자랄 것 같다/ 싱그러운 귤한 마리/ 떼굴떼굴 굴러다닐 듯하다/ 나도 떠난 빈집엔// 진동하는 귤 향기/ 빈자리가 가장 짙다//

캐치볼 / 이현호
네 입술은 잘 길든 글러브 같아 잘 던지고 잘 받는다 알사탕같이/ 농담을 굴리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입은 입을 주목하고 입속에서 입속으로 같은 계절풍이 드나들고,/ 작은 유리잔에 담긴 시간을 나눠 마시는 순간// 농담을 하니까 사람 같다 웃음 속에선 세상이 녹아내리고, 우리는/ 나쁘게 좀더 헤프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농담처럼 벌어질 때까지, 저녁은 저녁의 빛으/ 로 물들고 겨울은 겨울의 체온으로 젖을 때까지// 입을 가리고 웃는다, 방금 또 스쳐갔다//

식물의 꿈 / 이현호
삶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 때/ 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
이유는 묻지 않을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슬픔이 있다/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밤새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 있는/ 식물의 기묘함 같은 것// 유독 눈을 끔벅이지 않고 우는/ 네 얼굴은 어느 슬픔의 사투리일까/ 내게는 겨울이면 동쪽 바다를 찾는/ 내 것만의 비통이 있고/ 우리에겐 서로의 짭조름한 입술을 훔치던/ 그 여름밤의 기도가 있다// 너를 슬쩍 알애챈 적도 있었다, 새 점(占)을 보듯이/ 신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는 어린애처럼 인간을 붙들고 있다고 믿은 때가 있고/ 네가 내게 짓는 말은 신이 사람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지만// 묻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우리에게는 발목을 묻고 사는 각자의 습지와/ 저마다의 귓속에서 곤잠을 자는/ 신의 옹알이가 있어/ 왜 그러느냐고 이유도 없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곁을 더듬대는 꿈을 번갈아 자주 꾸었을 뿐/ 똑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만 물을 삼키는 관엽식물의 기묘한 표정을 알아듣는다//

직유법 / 이현호
당신이 이쪽으로 걸어오자/ 저편 세상이/ 그림자처럼 어두워졌다// 당신이 여기 있어/ 텅 비어버린 세계에 대해// 비 맞는 벤치같이 나는 하릴없어서// 늘 한 사람이 모자라는 세계 속으로/ 떠나보내주었다/ 멀리 당신을 등대처럼 놓아주었다// 아주 잊지는 않은 기분으로// 내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물수제비같이 떠가는 것을 보며// 저기 당신이 있어/ 이편 세상의 어둠 속에 파이는/ 등댓불의 환한 괄호마다// 미아처럼 나는 하릴없이/ 직유를 던지며 놀았다// 당신같이 당신처럼 당신인 듯이//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 / 이현호
창밖을 나서지 못하는 음악과 동거하다 보면 문득/ 당신이 입술에 와 앉는다// 몸속을 휘젓고 떠나간 음(音)과 귓속을 맴도는 음 사이/ 고산병을 앓는 밤// 음악은 당신을 발명한다/ 어느 교인(敎人)들이 불태운 관(棺)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장례를 치르듯 어떤 심장박동을 빌리지 않고는 날려 보내지 못할 말이 있다// 이루어진 소원은 더는 소원이 아닌 것처럼/ 곁에 없는 사람만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듯이// 한 이름을 흥얼거리다 보면 다 지나가는 이 새벽/ 당신의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된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닿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는 음악을 울린다//

청진(聽診) ㅡ북아현동 / 이현호
나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되었다/ 누구보다는 오래 살았고 누구보다는 일찍 죽는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지금부터 그날까지// 내 모든 날의 별자리가 떨어져내리는 밤/ 당신의 이름을 부표로 띄우고, 마음의 수위를 더듬는 밤/ 오래 돌보지 않은 불행에게도 정이 드는 밤/ 급한 마중을 하려는 듯 긴 골목을 맨발로 뛰어나가는 바람 속에서/ 웃음소리가 높고 맑았던 소현이나 제법 점을 잘 쳤던 준호같은/ 너무 젖어서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을 건지다 보면/ 국제나 굴레방이란 이름의 여관방을 넘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오늘은 기일, 세상의 매일은 누군가의 기일/ 나의 울음을 나에게 돌려주는 날// 가난한 이의 마음은 더 가난하고, 가난보다 더 가난한 마음들/ 밤늦도록 깜박이는 술집을 비틀대며 나오는 단벌의 영혼들/ 십수 년 만에 어두운 천체를 찢고 가는 떠돌이별들/ 밤의 척력에 떠밀려 서로의 등을 마주 보이며 멀어지면/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에게선 유독 낙엽의 맛이 돈다/ 언젠가 악수한 적 있는 시간의 손가락은 그새 많이 야위었다/ 생활을 무너뜨린 자에게 생활을 재개발하는 농담이 유행하는/ 북아현동, 우리는 이곳에서 여러 잠을 잤다// 북쪽에 머리를 두고 자면 안 된다는데, 당신은 잠이 참 많아서/ 올해도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지금부터 그때까지 오늘부터 그날까지// 누구나 가슴을 허물어 내압을 확인해야 하는 날이 있고/ 이 별의 반대쪽에도/ 언 창문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청진하는 넋이 있겠다//

ㅁㅇ / 이현호
새벽에 ㅁㅇ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이렇게/ 그런 것보다는/ 자음(子音)만을 떠나보냈을 모음(母音)의 안부가/ 어쩐지 궁금했다/ 그게 마음이었다면/ ㅇ이 떠나가며 버린 자리엔 ㅏ ㅡ이 남아서 아으: [감탄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하게 아플 때 나오는 소리./ 명치끝에 얹힌 녹을 닦으려 쭈그려/ 앉아 있지는 않을까/ 마음의 미안으로/ 미안의 마음으로/ 한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랑일까 사랑이 일까/ ㅁㅇ은 네모지고 둥그런 얼굴의 윤곽 같기도 하고/ 안경이거나 눈동자 같기도 해서/ 문영 미애 미옥 미연 민우......./ 누군가 내 명치에 집을 짓고 살았었던 것만 같은데/ ㅁ과 ㅇ의 뚫린 입을 텅 빈 중심을 허방을 실족을 부재를/ 낯설어하는 내가 낯설기만 한 나는 누구일까/ ㅁ과 ㅇ의 사방 벽을 울타리를 우물을 가시면류관을/ 어떻게 왜 무엇을 어디서 언제 누가/ 거꾸로 돌려봐도 무엇 하나 설명 못하는 막연은/ 그런 것보다는/ 살기 위해 한 숟갈 미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한 마음을 입가로 흘리며 떠먹은 적 있었던가/ 새벽에 ㅁㅇ이라는 말을 보냈는데/ ㅇㅇ이라는 답장이 돌아온다/ 아으, 라는 말을 발음하려거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응응, 나도 잘 지내//

첫사랑에 대한 소고 / 이현호
새로 만든 배를 처음 물에 띄우는 진수식(進水式)에는/ 걱정하는 마음이 많다// 진수식에 온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으면 출항하지 않는다. 반드시 두 명 이상이어야 배를 띄운다. 같은 날 두 척의 배가 진수식을 올려서도 안 된다. 둘 중 하나는 재수가 없게 된다.// 처음 배에 올라서는 휘파람을 불면 안 된다. 휘파람은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배에서는 용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물속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조화를 부리는 까닭이다.// 옛 배꾼들은 폭풍우를 만나면 용왕의 노여움으로 알고 산 사람을 바다에 처넣는 공양을 했었다. 요즘은 그전에 희생물을 바치는 의미로 핏빛 포도주가 담긴 병을 뱃머리에 팽개쳐 깨뜨린다.// 이상의 것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안전과 풍어(豊漁)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이렇게 한번 떠난 배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부모 형제라 해도 되돌아와 태우지 않는다.// 한편 위의 풍어와 동음이의어인 풍어(風魚)는 폭풍과 악어라는 뜻으로, 해상에서 만나는 재해나 해적을 이른다. 폭풍의 방향을 미리 안다는 물고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참혹하거나 무섭거나 싫거나 하여 진저리가 날 정도이다."와 "정성이나 성의 따위가 몹시 대단하고 극진하다."라는 뜻을 함께 품은 '끔찍하다'라는 말처럼, 저 '풍어'도 두 마음을 한 몸에 안고 있다.// 그 사이에서 배꾼들은 불길한 미래를 미리 살아보는 것이다.// 손을 잡았을 때 힘을 빼던 당신의 손아귀나 나의 말이 당도하기도 전에 흔들리던 눈빛 같은 것을 떠올리면, 풍어를 찾아 폭풍의 향방을 짐작하려고 등대같이 불을 켠 눈동자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진수식은 붉은색과 푸른색, 흰색과 검은색 등 울긋불긋한 빛깔의 깃대로 만선을 이룬다. 돼지를 잡고 술을 받아, 무당을 데리고 연안이나 섬을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진수식의 시작과 끝은 성황당에서 제의를 지내는 것이다. 예부터 성황당에 사랑을 발원하는 돌탑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있어, 맹신이 맹신을 차곡차곡 받드는// 시작하는 마음은 모두 미신이다.//

봉쇄 수도원 / 이현호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지만 완벽을 위해 그 문장을 남기지 않는다// 술 취한 천사에겐 천사의 몫을/ 오래 굶은 귀신에겐 고수레를/ 까마귀와 까치에겐 그들의 밥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남겨 두었다 그 사랑이 아름탐지 않았다면 우린 이별하지 않았을 테지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아름다운 것은 너에게// 지난 것이 만날 것을 버릴 것이 남은 것을 생활하니까/ 미문(美文)은 미문(未文)의 사용흔이니까/ 모든 문을 여는 열쇠공도 돌아갈 집은 하나뿐이니까// 단 하나 미분(美文)의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침묵으로 돌아눕는다, 우리는 처음의 사랑을 버린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성탄목 / 이현호
그 겨울/ 살풋 맞잡은 손안엔/ 별이 살았다// 우리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세모꼴의 찻길을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 나뭇가지들 사이로 어둠살에 갇힌 차량의 불빛들 반짝이고 희미한 바람에 실려 공중을 떠들던 마른 눈송이들이 그 조감도를 맴돌 때// 언젠가 저렇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 깍지낀 손안의 별은 지구에서 가장 환한 성냥불 그 빛가로 애인의 머리가 함박눈 같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서로의 맘속에 이 별이 다녀갈 만큼 큰 굴뚝을 지어주었다 꼬마전구들을 별무리처럼 휘감은 겨울나무가 계절을 잊고 꽃순을 피워올렸다// 그것분이었던/ 그 겨울/ 너에게//

문장강화 / 이현호
내 안의 마음이...라고 썼다가 지운다/ 내 안과 마음은 같지 않은가/ 역전 앞, 아침 조반, 넓은 광장처럼// 내 마음이...라고 쓰고 지운다/ 내가 널 찾는다와 마음이 널 찾는다는 무엇이 다른가/ 마음과 나는 유전자가 똑같다// 내가...라고 쓰다가 지운다 마음이...라고 쓰다가 지운다/ 내가 슬프다, 라고도 마음이 슬프다, 라고도 말한 적이 없다/ 슬프다는 한마디, 그 속에 벌써 우리가 산다// 나는 혀를 버린다/ 다 씹은 껌처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내 안의 내 안의 내 안의 내 안의.../ 마음의 마음의 마음의 마음으로/ 침묵의 지층이 쌓인다// 화석의 자세로 꿈꾸는 말이 있었다// 역전 앞의 앞의 앞의 앞으로 나아가 너를 기다리고/ 너와 마주앉은 아침의 아침의 아침의 아침밥 냄새와/ 끝없는 산책을 나설 것이다. 넓고 넓어 넓디넓은 광장에서// 나는 눈을 깨뜨린다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놓아버리는 빗방울처럼// 얘기를 하다가 문득문득 창밖을 올려다보던 너의 눈빛을/ 말해야 하는 기분으로// 내 안의 마음이...라고 굳이 다시 쓴다//

비포장도로 / 이현호
닿을 듯 말 듯 걷고 있었지/ 악수보다는 가깝고 농담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이봐 거기 조심해, 뒤를 돌아보니/ 길을 가득 채운 거대한 짐마차가 달려오고// 한 사람은 진창에 한 사람은 덤불에 발이 빠졌지/ 어는 쪽이든 더럽고 아픈 것은 나였기를 바라며// 요즘 같은 세상에 짐마차라니/ 우리는 웃었지, 사실 나는 나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풀독 오른 발목 긁으며 흙 묻은 운동화 털다가/ 비포장도로라니, 어쩌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 다음에 짐마차가 달려오면 덥석/ 너를 내 품에 들렀다 가게 해야겠다/ 화락 몸을 날려 네 위를 다녀가야겠다/ 이봐 거기 위험해,// 뒤를 돌아봤을 땐/ 모든 것이 모든 겉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지, 저것 봐 이렇게 좋은 길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 이상하지 않니/ 요즘 세상답다// 우리는 포장도로를 농담처럼 맨발로 걷고 있었지/ 지저분한 발을 보고 누구고 악수를 건네지 않는지/ 이상하지, 악수는 발로 하는 게 아닌데// 짐마차는 무엇을 위한 인간의 기교일까/ 웃었지, 어느 쪽이든 아마 그랬을 거야//

꽃의 온도 / 이현호
어두운 막(幕)이 이마 위로 내리는 순간이 있다. 눈을 감고/ 한 문장을 되뇌듯이, 혀끝으로 간질여보는 윤곽들이 둥글게 무거워지는/ 저녁, 놀란 새떼처럼 산개하는 낱말들이 완성하는 하나의 꽃말// 검은 항아리 같은 침묵 속엔 푸른 담요와 구겨진 운동화,/ 반쯤 열린 성냥갑과 줄 끊어진 기타, 빛바랜 필름과 깨진 손거울,/ 너와 나 사이를 흐르던 강물이 쇠약해진 자리에 봉우리 부풀리는 망각들// 누군가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지만, 또 누군가는 흐트러진 별자리들의/ 궤도를 쫓아 떠났다. 한때 눈섭 위에 머무는 휘파람과 원색(原色)/ 이었던 시선들, 그 시간들의 초점이 별빛이라 생각한 적 있다// 얼굴을 지닌 것들이 참을 수 없이 측은한 밤, 유령처럼 입슬을 지운다./ 입을 열면 꺼져버릴 촛불이 코앞에 있다는듯,/ 침묵이 더 많은 내일을 갖고 있다는듯.// 재체기 같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목을 옥죄는 이물감과/ 스스로 목를 꺽는 목련의 창백한 진실// 그 강가의 유적지에 머무른 텅 빈 눈동자, 갓난아이가/ 젖을 탐하듯 곰삭은 유물들을 더듬거리던 은총은 우리의 어휘가/ 아니었지만, 민들레 씨가 제 속에 힌 깃털과 바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별빛이 깨워낸 몸의 기억들// 해진 바지로 검붉은 무릎이 들어나고, 물통 속에 한 방울의/ 젖은 영혼도 남지 않았을 무렵, 이목구비로를 핥고 가는 바람과/ 달빛의 은은한 촉수 속에서 세계의 생체기인 이름들을/ 차갑게 발음하는 강물의 혀// 너와 나의 행간이 피워낸 적자(嫡子)// 시들어 떨어진 게 아니라 다만 낙화라고 불릴 따름이다./ 손바닥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어줄 때. 이미 꽃말을 품고 있지/ 않은 꽃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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