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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잉글리쉬 아이리스라는 향기 / 유영희

by 부흐고비 2022. 6. 17.

새로 개봉한 바디샤워제의 향이 진하다. 달콤함이 농익은 향이다.

너무 진한 향이라 살짝 부담스러운데, 이 향기를 맡는 순간, 문득, 그리고 재빨리 어느 외국공항이 생각났다. 몇 번 가보지 않은 해외여행이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그 날의 정경이 떠오르는 것일까. 이 향기가 무슨 기억의 창고를 여는 열쇠 쯤 된단 말인가. 향기는 친절하게도 나를 그 자리로 냉큼 날라다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장면이 펼쳐진다.

기내에서 필요한 슬리퍼나 목 베개 등속이 든 배낭을 메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의를 받은, 행여 소매치기의 표적이 될세라 크로스백의 줄을 신경 써서 잡고, 공중화장실입구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장면이 무슨 TV켜지듯 떠오른 것이다.

국제공항답게 세상의 여러 인종이 무수히 오간다. 여독에 지친 사람들은 흐트러진 매무새를 개의치 않음인가, 자유로운 차림새로 지나다닌다.

은근히 주눅이 든 기분으로, 다들 비행기여행 쯤 일상으로 하는 듯 세련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것이다.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매장의 쇼윈도에는 소위 명품이라는 가방이며 장신구들이 도도하게 은은한 조명아래에서 여행객들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다. 무릇 가방에도 기가 질리는 것 같은데, 금 세공품이 진열 된 곳은 휘황찬란하다. 눈이 보아 전달하는데 뇌가 미처 정리를 못하여 회로가 얽히는 느낌이다. 하나하나 웅장하고 멋스러운데 갖고 싶다는 마음은 잠깐, 입국 시 세관신고가 귀찮다는 이유가, 선뜻 사지 못하는 내 주머니 사정을 위로해준다.

선물용으로 대추야자 열매 과자를 몇 봉지를 사고 한적한 의자를 찾아 길게 누워본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이곳만 떠나면 일생에 다시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 낯선 곳이 주는 해방감이 달콤하다. 내 안에 이런 모험심이 있었나. 패키지여행이지만 한껏 자유를 느낀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여서도 고향에서 살다보니, 불가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이 펼쳐져 있음을 느낄 때가 많았다. 갓 결혼하여서는, 친정 어른들을 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해서, 살림살이는 어떠냐는 등의 애정 어린 걱정에 괜히 부끄럽고 쑥스러울 때도 있었다. 학교은사님을 만날 때면 ‘자네, 요새 글 쓰는가.’ 하고 물으셨고, 만학도로 대학공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등록했다는 동창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자기는 대학원 졸업하고는 독일로 떠날 거라며, 내 등에 업힌 아이와 시장바구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너, 요즘 글 쓰니?’하고 물어오기도 했다. 그날 저녁, 내가 쓰는 한글이라곤 장 본 목록 대여섯 가지와 그 가격을 적는 몇 개의 아라비아숫자가 전부인 것을 새삼 느끼며, 아득해 지는 슬픔을 느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함, 그것이 속박으로 느껴졌을까. 고향에 살면, 몸에 익은 헌옷을 입은 듯 편하기도 하지만, 그 틈새로 내 속살이 보일까 하는 염려스러운 것도 있다. 꼭 고향이란 틀이어서도 아니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나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을 것이다. 못 견디게 괴롭게 느껴지는 현실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살펴보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경우도 있고, 그래서 위안이 되지 않던가.

여행은 나 자신을 낯선 곳에다 두어, 거기서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는 의식이 될 수도 있다. 잠시의 여행은 끝나고 현실로 돌아 온 지 오래이다. 그 때의 생각도 잊고 지냈다. 그런데 뜻밖에 이 바디샤워제의 향기가 나를 잠시나마 추억의 장소에 데려다 놓은 셈이다. 위안의 시간에 초대를 했다고나 할까. 향기가 일깨워주는 기억이 이렇게도 섬세하고 직선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래도록 향기에 젖어본다. 이 열쇠를 찾은 기쁨을 만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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