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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진부령 연가 / 최미아

by 부흐고비 2022. 6. 21.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쉽지 않았다. 서울 맛을 본 뒤여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기는 싫었다. 비빌 언덕도 없으면서 오빠 집에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평창에 영양사 서류를 내러 간다고 했다. 영양사 자리를 같이 알아보러 다니던 친구였다. 그때는 영양사를 채용하는 회사도 많지 않았고 자리가 있어도 알음알이로 들어갔다. 절실하다 보니 ‘영업사원’ 모집광고도 ‘영양사’로 읽히곤 했다.

여행 삼아 친구와 평창교육청으로 갔다. 담당자가 고성군에도 자리가 있는데 나도 자격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외국 무상급식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학교급식을 시작한 80년대 초였다. 전국 도서 벽지에 500여 개 급식학교가 있었다. 그 중 강원도에만 100여 개가 있었는데 도내에 식품영양학과가 없어 영양사가 모두 외지에서 와야 했다. 고성군,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동해안 휴전선 위아래로 걸쳐있었다. 친구도 멀리 간다는데 나라고 못 가랴. 고향으로 가는 거 보다는 낫겠지. 오라는 데 없는 서울을 버리고 친구와 강원도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친구 따라 평창 갔다가 직장을 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쉽게 ‘공무원’이 되었다.

고성군은 어림짐작으로 그려 본 것보다 훨씬 멀었다. 고속버스터미널도 아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간성 가는 버스를 탔다. 같은 강원도지만 평창과 고성은 가는 방향부터 달랐다. 시간도 평창보다 배는 더 걸렸다. 인제, 원통을 지나자 진부령이었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방호벽은 최전방으로 가고 있다고 겁을 주는 듯했다. 진부령 정상부터는 구불구불 비포장도로였다. 내가 서울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멀미로 기진맥진이 되자 서울에서 밀려나 먼 곳으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6시간 넘게 걸려 간성읍에 내렸다. 고성군은 전쟁 전에는 이북 땅이었다가 전쟁 후 남북으로 반씩 나누어진 곳이었다.

진부령을 내려와 동해바다 닿기 전에 학교가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두 계절을 채우지 못하고 가버린 영양사가 세 달째 비어있던 학교였다. 선생님들은 환영도 거부도 아닌 멀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서울에서 온 아가씨가 맹랑하기도, 처량하기도 하다는 표정이었다. 가족들이 내게 보냈던 표정과 비슷했다. 가족들도 한두 달 있다 오겠지 생각을 했으니까. 나는 여기서 사계절은 살아보리라 터무니없는 다짐을 했다.

빈 관사가 없었다. 자취하고 있는 여선생과 지내면서 방을 차차 알아보라고 했다. 여선생 자취방으로 따라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 맡아보는 쿰쿰한 냄새가 학교에서부터 방까지 따라와 마음이 더 심란했다. 건밤을 세운 아침 난데없는 군가와 나팔소리가 귀청을 흔들었다. 방에서 나와 보니까 집 바로 옆이 군부대 정문이었다. 마을 주변은 논과 밭이었다. 유난히 크게 들리던 개구리 소리도, 나팔소리도 이해가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온 동네에 퍼져있던 냄새는 개울가 항아리 속에서 삭고 있는 감자 냄새였다.

고성군은 급식학교가 여섯 곳이었다. 학생 수는 50명에서 20명이었는데 내가 간 학교는 자그마치 오백 명이 넘었다. 강원도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은 급식학교였다. 휴전선 빠짝 아래이기도 하지만 학생 수도 많아 전임들이 못 버티고 그만 두었으리라. 나는 앞뒤 재보지 않고 갔으니 오백 명이면 어떠랴 싶었다. 학생 수가 적으면 그만큼 오지였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다니는 곳도, 민통선 안도 있었다. 우리 학교는 읍에서 차로 20분 거리였고 시간마다 버스도 다녔다.

급식소는 덩그러니 가마솥 세 개만 걸려있었다. 나무로 불을 때는 아궁이였다. 하나는 밥솥, 하나는 국솥, 나머지는 팬 대용으로 사용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시 반까지는 간식, 12시까지는 밥과 반찬이 만들어져야 했다. 나는 자격증만 있었지 실무는 완전 생짜였다. 다행히 급식학교 지정 될 때부터 근무한 조리사 아주머니가 계셨다. 아주머니는 손이 빨랐다. 날마다 도와주러 오는 어머니들을 진두지휘하여 요술 부리듯 음식을 척척 해내셨다. 급식담당 아저씨도 따로 계셨는데 일머리가 빨랐다. 장작도 패고, 무거운 짐도 옮겨주고, 갑자기 필요한 식자재도 오토바이 타고 가서 사오셨다.

마을에 방도 얻었다.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었다. 할머니는 말씀도 꼭 할 말만 하고 조용조용 움직이셨다. 마당은 늘 깨끗이 쓸려있고 가끔씩 들여다보는 부엌도 깔끔했다. 읍내에 산다는 딸만 오갈 뿐 내왕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내일 아침밥은 같이 먹자고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사를 지내나 싶었다. 아침에 건너갔더니 미역국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들 생일이라고 하셨다. 큰아들은 인민군으로, 작은아들은 국군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다. 그래서 아들들 생일이면 상을 차려주신단다. 말로만 들던 전쟁 전에는 이북, 후에는 이남이 되었다는 마을이 실감났다.

수복收復된 땅이니 당연히 북한하고 가까웠다. 교무실 앞에 삐라수거함이 있었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넘쳤다. 대부분 북한에서 넘어온 것이지만 가끔씩 남한에서 보낸 것도 있었다. 군부대도 많아 민간인보다 군인이 더 많을 정도였다. 아침마다 자명종 대신 부대 기상나팔소리가 잠을 깨웠다. 줄지어 지나가는 탱크를 보면 금방 전쟁이 날 거 같아 가슴이 졸아들었다. 차츰 밤새 울리는 총소리에도 까딱없이 잠을 자게 되었다. 행군하는 군인들의 짓궂은 장난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여유도 생겼다.

학교생활도 익숙해졌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한가했다. 교무실에 있다 보니까 일이 많아졌다. 전화도 받고, 손님 오면 차심부름도 하고, 방송할 일 있으면 방송도 하고, 전전후가 되었다. 그때는 인쇄기가 없어 등사지에 철필로 글을 썼다. 일명 ‘가리방 글씨’였다. 우연히 가정통신문을 썼는데 글씨체를 본 교감선생님이 감탄하셨다. 물론 일을 시키려고 그랬겠지만 내가 글씨를 좀 잘 쓰는 편이었다. 선생님들 일을 거들다보니까 거의 모든 등사물을 맡게 되었다. 그때 박힌 펜 혹이 그 시절을 말해주듯 아직도 중지에 볼록하게 남아있다.

교장선생님은 시골할아버지처럼 푸근하셨다. 젊은 시절 금강산 다닌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거리셨다. 아침에 도시락 들고 기차 타고 갔다 종일 놀고 저녁에 왔노라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지만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통일되어 금강산 구경 가는 것이 원이라고 하셨다. 허풍 같지만 그 연배 분들은 금강산 유람을 동네 뒷산 가듯 하신 분들이었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자가용을 타고 오셨다. 자주색 중고 ‘브리사’였다. 탱크와 얼루기 군인 차들만 넘치던 마을에 새바람이었다. 브리사는 전교생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빛이 났다. 차를 운동장 단상 앞에 세워놓고 보물단지처럼 쓸고 닦고 하셨다. 보물단지가 가끔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게 흠이었다. 그럴 때면 꼬맹이 서너 명이 달라들어 밀어야 시동이 걸렸다. 한동안 사랑 받던 브리사는 교감선생님의 삐까뻔쩍한 ‘포니’의 등장에 맥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그때쯤 울퉁불퉁하던 진부령도 포장되었다. 학교에서 보면 진부령 쪽 산들이 보였다. 4월까지 산 정상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그림으로만 본 알프스가 저런 곳이려니 싶었다. 가을이면 단풍이 서서히 내려오고 봄이면 아래에서부터 푸르러갔다. 진부령에서 흐르는 물은 마을을 지나 바다로 나갔다. 내가 살던 집 뒤로도 사철 맑은 물이 흘러 머리도 감고 빨래도 했다. 산 좋고 물 좋고 바다까지 있는 진부령 아랫동네가 갈수록 좋아졌다. 길은 포장됐지만 서울까지는 멀고 멀었다. 청정지에 살다 한 번씩 서울에 가면 공해 속에 빠진 듯 어질어질했다. 서울 가는 대신 주말이면 가까운 곳을 찾아다녔다. 특히 설악산이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외설악, 내설악, 남설악, 북설악 골골샅샅 천둥벌거숭이처럼 돌아다녔다.

그때 소설가 서영은을 한참 좋아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같은 서영은 사진을 벽에 붙여 놓았다. 어느 날 내가 그녀에게 주절주절 말을 하고 있었다.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울컥울컥 덮쳐오는 외로움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영서 사람이 영동으로 넘어오면 령嶺이 높아서 못 넘어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나도 그러면 어쩌나 겁났다. 정 들면 고향이라지만 부모 형제 떨어져서 그곳에서 평생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까 바라만 봐도 가슴이 뻥 뚫리던 바다도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북쪽도 휴전선에 막혀 있었다. 대관령, 한계령, 진부령도 높고 높았다.

사람들이 좋아서였을까. 산천경개 구경에 빠져서였을까. 선생님들은 내가 한 학기나 채우고 가려나 싶었단다. 가족들도 서너 달 있다 울며불며 오겠지 했단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서 4년을 보냈다. 결혼한다고 거짓말하고 령을 넘었다.

갈 때도 엉겁결에 갔지만 올 때도 계획이 없었다. 다시 서울에서 올케 눈칫밥을 먹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따뜻한 남쪽 내 고향으로 가기가 싫었는지. 일 년 정도 놀다 천재일우로 구원자를 만났다. 진부령을 떠난 지 35년이 지났다. 남자들은 군대 꿈을 평생 꾼다고 하던가. 나도 아직 그곳 꿈을 가끔씩 꾼다. 다시 발령을 받는다든지, 식재료가 없어 급식을 못한다든지, 개학이 낼인데 가지 않고 서울에서 놀고 있다든지.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꿈이다. 깜짝 놀라 깨면 옆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아, 내가 결혼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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